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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하고 위험하지만 자유롭게

2024년 8월 17일 드림 60분 합작 & 미쿠모 기느메르 생일 기념 축하

미쿠모 기느메르는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늘 그렇듯 아무 통보나 암시도 없었다. 행성계 내부의 미개척 지점에서 그녀가 ‘회수’된 지 벌써 일 년도 더 되었다. 누군가는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둘 다 정답이었다.

“작년에도 이맘쯤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것 같은데. 올해라고 다를 건 없군.”

남자는 오늘이 그녀의 ‘생일’ - 제조일, 탄생일, 설계일,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 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로서는 마냥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미쿠모 기느메르라는 이름 그 자체. 누가 지었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떤 의미를 담아 붙여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유한 식별기호이니만큼 ‘이름’의 의미는 남다르기 마련이고, 그녀는 그 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에게 다른 이름이 있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 땐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힘을 주었다.

다른 하나는 그녀에겐 노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이 역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유전자 안에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그 목소리로 노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노래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경이로운 걸 체험하는 일이 흔하진 않았으니까.

“내게 언제부터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었지? 왈큐레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 때부터인가?”

“네게 ‘집’이라 부를 만한 게 생기는 것은 분명 축하해 마땅할 일이지. 그러나 내 개인적 의견에 영향을 미칠 만한 요소는 아니야.”

여성은 태연히 팔짱을 끼었다. 문답 내용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추론해 볼 때, 그가 순순히 그녀가 바라는 것을 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가 그녀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졌듯, 그녀 역시 어느 정도 그를 다루는 데 능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곧장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대답해주는 게 어떨까. 요즘 날 주시하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꽤 늘어난 것 같거든.”

“공짜 점심이란 없는 법이지. 네가 내 질문에 먼저든 나중에든 대답해준다면, 나도 기꺼이 네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겠어. 네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등가교환. 여전히 터무니없이 사무적인 태도에, 그녀는 히죽 입꼬리를 밀어올렸다.

“이런, 이런⋯⋯. 레이디가 순수한 마음으로 호기심 해결을 요청하고 있잖아. 그걸 구태여 비즈니스로 받으려는 거야? 여자에게 인기 없을 종류의 남자로군.”

“난 내 자신의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아, 기느메르.”

“물론이지. 그 점에 의문의 여지는 없어. 당신에게 그런 걸 고치라고 말할 필요성도 없지. 그 태도가 당신을 당신답게 만들어주는 거야.”

“내 태도?”

남자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메타인지가 원활하지 않은 모양이다. 원래 이발사가 제 머릿결 다듬지 못하는 법이다. 미쿠모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 걸음 내딛었다. 저울이 기울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조금 전에 비해 무척 흥미로워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 마음가짐 말이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수단으로 대우할 뿐, 목적으로 여기는 경우는 없지. 매우 흥미로운 모습이야, 알고 있어?”

“전혀 모르겠는데. 설명이나 해 주겠어?”

남자는 어깨만 으쓱였다. 회색 재킷에 달린 명찰이 조명빛을 받아 흐리게 빛났다. 마침 미쿠모도 남자의 이름을 슬 제대로 기억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참이었다. 진한 보랏빛을 띄는 눈동자 아래로 호기심의 빛이 스쳤다.

명찰에 적힌 두 단어는 오늘따라 무척 읽기 쉬웠다. 평소의 태도만큼이나 건조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왜 지금껏 외우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그의 이름을 궁금해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태어나서 지금이 처음이었으니까.

“기꺼이 그렇게 하지. 내 순수한 주관일 뿐이지만, 궁금하다면 전달 못할 것도 없으니.”

시치미떼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독심술 같은 게 없는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불평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당신에게 있어 ‘애착’이 갖는 의미는 다른 사람과 사뭇 다른 듯해. 일반적인 경우, 그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형성한 대상과는 순환적 교류가 일어나기 마련이지. 한 지점에서 맞은 편 지점으로, 거기서 다시 처음 지점으로⋯⋯. 관계가 깨지기 전까지 정성의 교환이 이뤄질 뿐이야.”

“그래서, 내 경우엔 어떤데?”

그녀는 잠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이번엔 그를 놀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예감한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느낀 것을 솔직히 말하는 건 그녀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노래하는 것이 그녀에게 필요한 일이듯.

“당신의 경우는 좀 다르지. 귀엽게 느껴지는 면마저 있어. 어떤 대상과 깊은 관계를 형성한 뒤에도, 당신은 계속해서 현재 관계를 점검하고 싶어 해. 한 발짝 떨어져서 말야.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또 받을 수 있는 건 무엇인지, 나아가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지 아닌지⋯⋯. 당신 주관에 맡겨선 안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입가를 밀어올렸다. 그들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매우 비슷한 높낮이를 사용하고, 비슷한 단어나 제스처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방에 누군가 무관계한 사람이 그들이 대화하는 걸 보고 있었다면, 그들을 가족이나 남매로 여겼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도 소통 방법이 흡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만큼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어난 지 삼 년도 안 됐으면서, 서른 살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 인간의 삶에 그만큼의 피로감을 느끼기라도 했어? 추천해줄 적당한 레퍼런스를 하나 갖고 있는데.”

“후후, 글쎄. 세월에 짓눌리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이련지. 가끔 궁금해지기도 해. 저 넓은 우주에서 가장 공평하고, 가장 자비없는 존재가 날 따라잡는데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난 그 때 얼마나 지금과 달라져 있을까?”

그녀는 잠깐 감상적으로 변해 있었다. 남자는 잠시 말하지 않았다. 이럴 때 그는 아무 것도 제시해줄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지식을 전달해줄 뿐, 지혜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쪽으로 적성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다만 그녀의 즐거움이 계속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딱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지. 네 본질은 노래하는 데 있다. 네가 으레 신경쓰는 것도 그게 다야. 내 개인적으로는⋯⋯ 그게 변할 것 같진 않군. 넌 그 편이 더 어울려.”

“당연하지. 나도 알아.”

미쿠모의 팔이 불쑥 위로 뻗었다. 태연히 남자의 볼을 꼬집어 옆으로 죽 늘렸다.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이유는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평소엔 결코 볼 수 없을 어리둥절한 표정을 뒤로 하고, 그녀는 제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따 봐.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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