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

상하조경환상설계

새장 by 새장

활엽수 엮여 짜인 차양이 짙다. 그늘 아래 너는 웃고 있다. 여름에 태어난 너는 8월 어느 곳에 세워도 정물처럼 어울리는 피사체다. 꼭 아지랑이 이는 아스팔트, 후덥지근한 공기, 쨍한 볕의 광선, 미지근한 물비린내와 습도 또는 녹음의 그늘 따위와 하나 같다. 조각을 낸 일부 같다. 짜맞추면 곧 녹아들 것처럼. 매미는 기꺼운 듯 찌르르 운다. 열섬의 환희, 잉태된 네게 부치는 최초이자 최후의 사랑 시.

나뭇잎의 빛이 바래고 바람이 식었다. 열대야처럼 앓던 사랑이 가을 되어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하므로 나는 장례를 준비했다. 눈 흩날릴 즈음에는 겨울 북풍과 잣눈으로 너를 덮어 묻었다. 사인은 모순이다. 함께 있음에도 고독했으므로. 묘비 위 새긴 유언 같은 ‘우리’, 두 글자도 나부끼는 눈발로 희붐하게 흐릿하다. 그로써 네게 뛰던 심장도 결빙하여 멎었으리라 믿는다. 잔여로 부상하던 사랑, 그 추억도 인멸되었으리라고. 착각했다, 석은 눈에 고엽 드러나기 전까지. 전환되는 씬. 부감하는 카메라 안으로 해묵은 고백이 얼음처럼 녹아 떠오른다. 투명한 눈물의 고형. 이 미장센은 서글픈 낭만이라 명명하겠다.

문득 밤마다 네가 보고 싶다. 기적같이, 서술처럼 그것은 돌연하고 몽환적이다. 감정에 취해, 잠결에 먼 눈으로 더듬거리면 꿈이 기다린다. 숨겨졌을 뿐 사라지지 않은 비가시적 연속을 긷는 과정. 퍼 내어 탐독하자면, 내게 기도하듯 그 겨울을 헤고 봄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있던 모양이다. 교리처럼 시간과 망각을 맹신하며. 향수는 창백하게 가라앉으리라고. 어제란 오늘보다 희붓할 내일을 믿던 날이었다.

아아, 바라던 봄에서 그리움은 흐려지지 않는다. 용매 대신 휘발하는 용질이 없고, 광선이 투사 않는 정물이 없듯, 기억 저편에 파묻은 네 몸도 그러하다. 너를 매장한 내 행위만이 융해되고 없다. 달이 삭망을 반복하는 이치와 동일하게. 언 것이 도로 녹는 것이 마땅하게. 가려진 네가 드러나 다시 여기 어른거린다. 이윽고 만조에 떠밀려온다. 수면 위에 덩그러니 남는다. 다시 쓸려갔다면 잊었으리라. 밀려들기만 하는 것은 또 어떤가. 심장을 얼렸던 조각이 눈물로 액화한다. 반추의 온도는 입맞춤과 같다. 나는 겔다처럼 네가 웃던 계절의 흔적을 쫓고 싶다. 녹는 봄을 지나 작열하는 여름으로. 천국이란 플라타너스 아지랑이가 남긴 잔영에 있다.

가로에 심은 나무가 도로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라고 했다. 나는 겔다, 동화 같은 이름을 굴리며 조금 어려진 마음으로 너만 없는 여름 풍경에 나무를 식재한다. 그날의 기억에서 잘라낸 밑둥을, 거기 함께 섰던 네 컨버스 신은 다리를 식수해 본다. 머릿속 인공의 자연광 아래 촉대처럼 정연히 세워두어 본다. 줄지어 늘어놓은 연출 끝에 차라리 네가 실재했으면 하고도 빈다. 후회, 라는 단어. 돌아가고 싶다는 원망을 이루는 명사. 단어를 쥐고 아스팔트 지표를 내달리는 상상을 한다. 소실점 너머에도 여전히 네가 반복되기를. 그러면, 거기 있는 너는 여전하다는 수사로 웃어줄까. 달은 양 뺨이 발그레한 온도로 나를 바라봐줄까. 그 늘어선 가로수만치 유일 없이 흔한 연속으로, 당연하게,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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