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라] 낮잠의 꿈

따스한 봄볕이 느지막이 드는 한가로운 오후.

낮이 길어진 만큼 더더욱 천천히 늘어지는 햇빛이 이불처럼 덮인 소파에 앉아 하로와 놀아주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짧은 꿈을 꾸었다. 정체 모를 괴물에게 쫓기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심장부터 차근차근 불안감으로 좀먹으며 퍼져 나가는 그런 꿈을.

퇴근이 가까워진 무렵, 딱 맞춰 급한 업무가 추가되는 바람에 늦게 귀가하고만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이미 캄캄한 야밤이 빈틈없이 꼼꼼하게 뒤덮은 집안에 발을 들이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거푸 하품이 새어 나왔다.

안 그래도 겹겹이 쌓인 피로로 무거운데 눅눅해지기까지 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거실로 향하다가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추게 한 건 아니나 다를까 식탁 위에 마주 앉은 두 접시였다. 이런 경우가 생길 때마다 미리 연락을 넣곤 하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늘 하던 대로 저녁을 준비한 라크스의 일상이 어김없이 고스란히 지나간 흔적이었다.

팔팔 끓기 시작한 기름을 그냥 끌까 망설였지만 진작 튀김옷을 갖춰 입은 고기를 보고 다시 손을 움직였겠지. 파열음으로 보글거리는 식용유 속에서 꺼내 올린 메인 요리와 곁들일 반찬을 접시에 차곡차곡 담은 뒤, 혹여 한두 시간 이내로 돌아오진 않을까 손꼽아 기다렸을 테고. 이후로는 거의 식어버린 저녁이었지만 갓 건져 낸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둘 수 있도록 랩으로 감쌌으리라.

그동안 함께 해 온 순간들은 모여 선이 되었고 이곳에 홀로 흘러갔을 라크스의 시간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답답하게 차오르는 애석함을 뒤로 하고 소파로 다가갔을 때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얇은 달빛을 벗 삼아 조용히 누워 잠든 라크스가 보였다.

저녁 시간까지 놓쳐 가며 기다리느라 많이 허기졌을 텐데 깨워서 같이 먹어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섣불리 그랬다간 곤히 든 잠을 방해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어깨를 두드리려던 손을 멈췄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라크스에게 닿을락 말락 한 허공에서 손가락만 쥐락펴락 망설이길 어연 십 분. 푹 자도록 놔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손을 도로 거두었다. 대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소파 한 켠에 가지런히 개켜진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려 했다.

그런데 담요를 집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헛손질했거니 싶었지만 아니었다. 담요를 쥐기 위해 보들보들한 천 위로 손을 얹으려 하자 그대로 통과해 푹신한 소파에 닿았다. 여러 번 시도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담요는 보란 듯이 유령이 되어 춤을 추듯 내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곳의 나는 여기가 꿈인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감각은 소스라칠 만큼 퍼뜩 들었다. 그렇기에 아까 전의 긴 고민 끝에 고른 선택은 저 수평선 너머로 제쳐 두고 곧장 라크스 앞으로 미끄러지듯 달렸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라크스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자 분명히 살아있다고 확신을 줄 만큼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스몄다. 하지만 안도감 대신 찾아온 건 이상함이었다. 그도 그럴 게 손끝에 닿는 감촉이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정교하고 매끄럽게 깎아 완성한 조각상의 대리석이었으니까.

고요한 밤이 찾아든 집 바닥이 수렁으로 변하여 날 아래로 끌어당기는 건 한순간이었다. 손쓸 새도 없이 나는 검은 나락으로 추락했고 길게 늘어지는 외마디 비명만큼 하염없이 라크스로부터 멀어졌다.

“키라, 밥 먹을 시간이에요.”

혼란으로 머릿속이 창백하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나를 꿈에서 현실로 꺼내준 건 라크스였다.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옆으로 누워 자던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웅크려 앉은 라크스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새 맺힌 식은땀이 이마를 따라 또르륵 굴러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미열처럼 남은 긴장감에 바짝 움츠린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가다듬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고 빈 옆자리는 라크스가 채웠다.

“나쁜 꿈을 꾼 건가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꿈속에서 겪었던 일을 하나둘씩 들려줬다. 종종 그랬듯 일이 생겨 늦은 귀가. 미리 저녁을 준비해 둔 채 기다리다 잠든 라크스. 그리고 그런 라크스를 챙겨주려 했지만 어둠으로 떨어지고 만 것까지.

차근차근 털어놓다 보니 심장을 꽉 짓누르던 두려움이 한 겹씩 벗겨져 날아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꿈이 너무나 무섭고 슬펐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라크스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어 주지 못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을 때는 조종간이라도 잡을 수 있었지만, 정작 꿈에서는 곁에 있는 데도 담요조차 덮어주지 못한다는 무력함이 나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악몽이 하라는 대로 그의 손아귀에 집어삼켜졌다.

“…나는 라크스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어.”

라크스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아무런 의미 없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는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러다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무언갈 챙겨 와 내 두 손에 쥐여줬다.

“그럼… 지금 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응……?”

“키라가 꿈에서 못 했던 것 말이에요.”

내 다리를 베게 삼아 누운 라크스는 꿈일랑 걱정 말고 괜찮으니 어서 해보라며 살며시 등을 떠밀어 주듯 눈을 감은 채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펼쳐진 상황에 오히려 나는 당황해서 뭘 하려 했는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조차 떠오르질 않아 뱅글뱅글 제자리를 도는 머릿속에서 한참 발을 동동 굴렀다.

갈피를 못 잡고 사방으로 굴러다니던 마음을 잡아 차분하게 진정시킨 뒤, 심호흡을 하고서 결심을 세웠다. 단순하고 소소한 동작이었지만 자꾸만 떨리는 손으로 담요 양 끄트머리를 꾹 잡고서 라크스에게 덮어주었다. 얼결에 눈을 꼭 감아버렸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쭉 뻗은 채 얼음처럼 굳어버린 두 팔 아래로 흐르던 정적은 슬며시 밀어 올린 시야 사이로 나를 올려다보고선 라크스가 터뜨린 맑은 웃음으로 풀렸다. 그제야 나도 완전히 꿈에서 벗어나 함께 편안하게 웃을 수 있었다.

“해냈네요, 키라.”

“라크스 덕분이야. 고마워.”

담요가 덮인 채로 라크스를 안아주자, 하로가 팔랑팔랑 뛰어다니며 고맙다는 내 말을 반복해서 전했다.

“슬슬 밥 먹으러 갈까?”

“앗, 완전히 식기 전에 얼른 먹어요.”

집안으로 은은하게 드리우는 주홍빛 노을이 서린 그림자는 하나에서 둘로 나뉘더니, 이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아직 따스함이 몽실몽실 스며 나오는 저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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