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이름이란 족쇄. 평생 뒤를 따라온 이름. 그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걸맞는 죽음을 선택했다. 그림의 본질, 자신을 댓가로 까마귀의 배를 가른다. 내장이 아닌 붉은 물감. 그것이 발치를 서늘하게 적셨고, 마치 자신의 배를 스스로 가른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 비명 하나 지를 수 없는 격통이 단전을 가로질렀다. 그림에는 어떤 생명도 없다. 그러니 빠져나갈 영혼도, 체온도 없다. 그대로 까마귀를 품에 안은 채 전시관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까만 깃털이 허공을 가르고, 낡은 종이가 나풀나풀 시야를 가린다. 그것을 바라보니 참, 이제껏 저의 본질을 담은 것이란 제 것 하나 없음을 새삼 깨달았고, 그것이 못내 아쉬워도 졌다. 한 마디 정돈 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입을 놀렸다.
"아쉽습니다."
어차피 이리 될 것을. 좀 더 많은 것을 경험해볼걸. 아버지의 유언따위 돌아가셨으니 지킬 것도 없다, 가문따위 거창하게 몰락시키지 않아도 된다, 복수나 완벽한 실패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 말해줄 사람 한 명 정돈 만들어둘걸. 완성하자마자 이리 찢어 하늘로 던질 이야기였다면, 그 플롯 내에서 자잘한 변수를 받아들여볼걸. 내가 이래서 글을 쓰는 재능은 없었던 것이었구나. 깊게 생각했다. 마지막의 순간까지 주제넘는 후회와 미련, 망설임이라니. 별 볼 일도 없는 졸작이군. 외로워 다행이다. 이런 초라한 마지막을 들키지 않고 없앨 수 있어.
"……."
차가운 바닥에서 눈을 떴다. 온 몸이 뻐근하다. 마치 인간이라도 되는 듯한 피로감과 두통이 살아있음을 지독히 느끼게 한다. 몸이 무거워 잠시간 그리도 싫어하는 바닥에 힘을 풀고 일어나지 못했다. 품 안으로 안았던 까마귀는 더이상 존재치 않는다. 작품은 틀만 남긴 채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백지 캔버스만이 들어있다. 횃대도 사라졌고, 전시관도 더이상 버틀러가 아니다. 더블린 자택. 대학 강사 시절 지냈던 그 집이다. 본가의 방 서넛 크기 되는 집. 온통 갈색과 베이지톤으로 따듯한 벽지와 몰딩. 그리고 거실 한 가운데 자리한 나무 색의 하프시코드. 진하고 연한 건반이 나를 부른다.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면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발소리.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다.
"미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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