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
10년 전 하고도 꼭 닷새 전, 레미니센 저택을 걷다 마지막 꽃잎 한 장이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색깔조차 희미했던 장미꽃이 떨어지는 감각. 그나마 품을 수 있다 생각했던 무른 주석 색 꽃잎이. 잠시간 그 자리에 우뚝 서고 싶었다. 그나마도 활발하지 않았던 심박이 먿는다. 그러나 생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걸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누군가를 위해 이 몸을 쓰리. 제게서 빠져나가는 피를 느끼며 상처를 들춰보지 않았다. 넥타이로 목을 조르고, 코트와 장갑으로 그것을 감춰버린다. 바깥으로 혹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사가 끝난 뒤 객실에는 앙상한 줄기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어떤 결실을 맺는 데에도 실패한 장미에게 어울리는 모습. 저에게 어울리는 모습의 장미였다. 그것을 한 손으로 건드리곤 그대로 둔다. 제 본질을 잊지않도록. 버틀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기념하고자, 그대로 두었다. 매일 밤,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으나 매일 아침, 이 어둠으로 돌아와야했다. 제 본질을 마주해야했다. 모든 성과와 빛은 남의 것.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앙상한 꽃대, 고작 몸뚱이 하나뿐.
이젠 꿈꿀 수 없는 직장을 그만두고, 교수의 자리도 거절했다. 건강 상의 이유. 그것이 모든 잠적의 변명이 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직장도 나갈 수 없으며, 밤에만 이뤄지는 연주회에야 고작 나갈 수 있다고. 제임스의 이름으로 이룬 모든 것은 낮에, 버틀러의 이름으로 이룬 모든 것은 밤에. 그렇기에 제임스는 신변을 정리하며 꼭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한다 생각했다. 제 이름만을 세상에서 차곡차곡 지워갔다.
새까만 까마귀는 낮의 해를 더이상 볼 자격이 없었다. 정리하고 정리해야할 인연과 책임이 많아 그리 몇 달은 평소와 같이 살았다.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평소처럼. 그리 반 년이 지나, 다리가 많이 나아지고, 약속한 결혼을 한 날에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부수고나자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그제서야 심박이 뛰는 기분이 들었다.
"메리, 나는 지금 충만히 행복해…."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나는 언젠가 이 세상에 지워질 사람이었고, 종국에는 결국 하나의 이기심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사라질테니. 그러니 세부적인 디테일 몇이 달라졌을지언정 이 삶은, 이 변곡점은 제임스란 작품에게 심히 잘 어울리는 마지막이다. 그대로 작품으로 사라진다면 아름다워지겠지. 한 때 찬란했던 '버틀러'의 완벽한 몰락. 그 누구도 마지막을 기억하지 못하는 초라한 죽음. 그것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결말. 그 결말을 향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달리리. 그즈음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작품들과 차를 나눠마시다 어느 순간 '그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10년 전 만났던 그들을 다시 초대하자고. 몇몇은 바깥의 해를 다시 보고 싶다했고, 몇몇은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보고 싶다 했다. 그 중 몇몇은 죽음을 바라기도 했고, 바깥의 해를 원하지 않는 작품도 있었으나 제임스는 미치광이의 모자를 쓰고 미소지었다. 그 앨리스들을 다시 한 번 불러보자고. 얼굴이 그립고, 잘 사는지 궁금하고, 원하던 것들은 잘 이뤘는지 궁금하다고. 제임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초대장을 썼다. 단지 당신들이 그립다는 단순한 이유로.
제임스에게 허락된 결말은 단 하나. 그것을 피할 마음도, 생각도 없다. 그렇기에 초대받은 자들에게 그들과 닮은 모습으로 다가섰다. 10년의 세월을 얼굴에 꾸준히 쌓으며 메리와 함께 밤을 살았듯 그들에게도 변함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마주한다. '그리웠습니다'. 기억하지 못했던 사람의 첫인사라기엔 너무나도 다정하지 않은가. 10년 전을 기억하고, 당신의 10년 간의 궤적을 모두 알고 있다. 그 시간동안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들을 응원해왔다. 그리고 얼굴 보았으니 되었다. 마지막 순간의 그 찰나, 궁금했던 것들을 빠짐없이 알았다. 이젠 어떤 미련도 없다. 회의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 …."
그럼에도 그 10년간, 아주 만족하며 살지는 못했다. 제게 다가온 불운. 그런 우연은 어쩜 자신에게만 오는지. 억울함에 눈물 흘린 날도 많았다. 오로지 자신만의 방에서 울었지만, 그 방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을 떠올리며 다시 죄책감에 울었다. 눈물 흘릴 자격, 슬퍼하고 누군갈 구할 자격, 도울 자격은 누가 부여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속에 가두며 홀로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제게 주어진 일을 계속 해낸다. 내 손으로 불렀으니 당신의 세상으로 책임지고 돌려드리리. 그것이 그가 부린 그리움이란 욕심의 값이었다. 그 값을 빠짐없이 치르고 제 자리로 돌아간다. 그 누구도 함께하지 않을 길로.
객실로 돌아오면 10년 전과 변함없는 앙상한 꽃대가 저를 마주한다. 누군가 듣는 이도 없는 허공에 한 마디 던졌다. 그를 관통하는 한 마디. 어떤 의도도, 의미도 없는 우연한 불운. 그것은 이미 태어난 순간 지워진 원죄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속죄하며 도움의 손을 내민다 해도, 얼굴 가죽을 벗겨내면 변함없는 버틀러.
"태생은 벗어날 수 없는 족쇄라서요."
그는 속일 수 없는 까마귀의 자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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