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반쪽짜리 삶
마누
커르다스의 날씨는 여느 때와 같이 혹독했다.
때마침 일이 있어 제멜 요새 근처를 지나던 와중에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마주쳤다는 소식을 들은 이미르는 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릎까지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지는 날씨에 외지인, 그것도 비에라가 오랜 시간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검은장막 숲에서부터 길을 잃어 이 눈밭에 흘러들어온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안감을 더했으나, 불안해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 그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껏 이슈가르드, 아니 에오르제아 일대에서 비에라를 만난 적은 손에 꼽았다. 그마저도 이야기를 나누거나 가까이서 본 것이 아닌 멀리서 아마도 비에라로 짐작되는 이를 스쳐 지났을 뿐이었고, 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쌍둥이 형을 제7재해에 잃어버린 뒤로 성인이 된 비에라를 마주한 적도 없다시피 했다. 이미르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가 혹여나 그의 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기대감마저 들었다.
커르다스가 눈밭으로 변하기 전, 두 사람은 작은 밭을 일구며 사는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부부는 둘을 특별히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하게 키우지도 않았다. 휴런이나 엘레젠과 달리 복실복실한 귀를 단 사람은 그 둘뿐이었지만 여느 아이처럼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고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로 평범하게 자라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런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 믿었던 두 사람에게 제7재해는 정말이지 청천벽력 같았다.
하늘에서 유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떨어지고 땅에서는 불기둥이 솟구쳤다. 지붕에 옮겨붙은 잉걸불을 끄겠답시고 그를 붙잡는 형을 뿌리치고 물을 길러 집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불길이 둘 사이를 갈랐다. 양동이 하나에 담긴 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르는 물을 길어 뿌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물을 뿌리다 수도관마저 터져 버렸는지 물이 나오지 않자 펌프를 두어 번 눌러 보던 이미르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주저앉았다. 그야 불타는 집을 망연자실한 채로 바라보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었는지 불은 야속하게도 금새 사그라들었다. 달라가브로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불타 재만 남은 집 안에서 손이 다 헐도록 뜨거운 잔해를 뒤져 발견한 것은 그들을 길러 준 부모와 형이 입고 있던 옷자락 일부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광경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미르는 다 타버린 집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었다. 목적지도, 의미도 없이 말이다. 그 뒤로 그는 세상을 떠돌며 혼자 살았다.
커르다스를 떠난 뒤에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던 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자꾸만 그를 흔들었다. 이제는 잊혀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가도 첫 기억에서부터 함께했던 사람이 그리 쉽게 잊혀질 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미르는 그냥 마음 한구석에 형을 묻고 살기로 했다. 거울을 볼 적마다 자라는 자신의 모습은 형이 살아있었다면 이렇게 자랐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였고, 뻥 뚫린 빈자리 때문인지 그는 장성한 뒤에도 자신이 반쪽짜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비에라’ 라는 사실조차 다른 사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이라도 되찾고 싶은 마음에 에오르제아 전역을 누비고 다니던 중, 울다하의 불멸대에서 입대 제안을 해 온 것이다. 서명을 마치고 한참을 지나서야 받아든 문서에 적힌 ‘비에라’ 라는 글씨가 어쩐지 반갑고도 생경했다. 울다하에서 몇 년을 지내다 불멸대 중위의 신분으로 다시 찾은 커르다스는 녹음이 우거졌던 과거와는 달리 일반적인 신발로는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눈이 내리는 지역이 되어 있었다. 그가 살던 마을은 이미 눈 속으로 사라졌으나 이미르는 왠지 모르게 다시금 커르다스에 눌러앉았다. 물자를 나르며 오가기도 하고 잡다한 일들을 해결하며 이슈가르드와 커르다스가 익숙해질 즈음, 아주 뜻밖의 상황에서 그와 비슷한 이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왠만한 일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으나 약간의 기대 때문이었을까, 혹은 불안 때문이었을까. 아주 느리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세차게 뛰는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은 어쩌다 이 눈밭까지 굴러들어온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두어 시간을 걸어 아도넬 점성대에 도착한 이미르가 마주한 광경은 너무도 낯설었다. 병사들도 날이 궂으면 좀처럼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탓에 방치되던 돌을 쌓아 만든 화목난로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살을 에는 바람 아래 몸을 드러낸 채로. 정말이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눈을 밟으며 낸 인기척에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미르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와 같은 귀를 가지고, 체구까지 비슷한 사람. 순간 굳어버려 입술을 답싹이기만 하던 이미르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뱉었다.
“여기서 그렇게 입었다간 얼어죽을 수도 있어요.”
그가 짧은 한 마디를 마치자 그녀가 엷은 미소를 띈 채로 대답했다. 아직 공용어에 익숙지 않은지 한 단어, 한 단어를 곱씹듯이 말이다.
“괜찮아요, 내 고향에선 모두가 이렇게 입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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