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링Coupling

[영칠] 환상통

세츠←여지휘사

※2019년도 글을 약간 손보고 재업로드했습니다.


눈을 떴을 때에는 안과 앙투와네트가 지켜보는 침대 위였다. 아아, 또 돌아왔구나. 그는 빠르게 알아차리고 체념했다. 또 이전과 같은 루프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누구도 구할 수 없고,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한 시간들이. 앙투와네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첫날의 설명을 반복한다. 지휘사는 그 설명을 들으며, 복부에서 올라오는 타는 듯한 통증을 조용히 참았다.

설명을 끝낸 앙투와네트가 물었다.

"달리 또 알고싶은 것이 있나요?"

없었다.

앙투와네트가 떠났다. 지휘사는 안이 자신을 두고 휴게실 바깥으로 나간 사이 의무실 찬장을 열고 진통제를 찾아냈다. 위치는 이전 회차에서 대강 알아두었기 때문에 헤맬 일은 없었다. 왜 이리 늦어요? 안이 다시금 안쪽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약을 상의 안쪽 주머니에 넣은 채 구겨진 신발과 씨름하는 시늉을 했다. 미안해. 신발이 잘 안들어가서.

이제는 익숙한 일들이 흘러갔다.

그는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진통제를 씹어삼키며 지난한 시간을 견뎠다.

복부의 통증은 가끔 진통제의 약효를 능가했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의 방이나 아무도 찾지 못할 골목 구석에 몸을 숨겼다. 솟아나는 식은땀, 두근거리는 심장, 인두로 지져대는 듯한 아픔은 무수한 루프 속에서 그를 유일하게 알아보고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부서진 건물 파편에 복부를 찔려죽었던 이후로 쭉.

처음에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참다 못해 기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앙청의 기술을 총동원한 정밀 의료검사를 받아도 원인은 찾아낼 수 없었다.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이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세워졌을 때, 그는 이전 회차에서 자신의 복부를 무참하게 뭉갰던 건물 파편을 떠올렸다.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

"의외의 손님이네. 여기는 누구도 모르는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세츠는 장난스레 말하며 웃었다. 지휘사는 몸을 웅크린 채 시선만 돌려 작은 은거지에 등장한 불량신관을 쳐다보았다.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고양이들이 신관의 등장에 일제히 울음소리를 높인다. 세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양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긴 제복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어디 안 좋아?"

"조금."

"진통제 줄까? 마침 가지고 있는게 있거든."

"아까 먹었어."

"그럼 좀 누울래? 무릎배게는 받는 쪽이 취향이지만, 지금같은 상황이라면 특별히 양보해줄 수도 있"

그는 세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얼결에 허벅지를 내주게 된 세츠가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벤치에 앞발을 걸친 삼색 고양이가 모로 누운 지휘사의 얼굴을 보곤 길게 울었다. 식은땀 배어나온 이마에 조심조심 세츠의 손등이 닿았다가 화들짝 떨어져나갔다.

"식은땀이 엄청나잖아. 괜찮아?"

"안 괜찮아."

"…구급차를 부르는 편이 좋으려나?"

"필요없어. 그냥 좀 쉬면 나아질거야."

지휘사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머리 위에 부드러운 뭔가가 닿은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분명 세츠가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 중의 하나겠지. 그는 이마에 닿은 것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확신했다. 어떤 현상은 과거의 데이터에 의해 측정되어 더없이 정확한 재현도를 보이기도 한다.

"너무 힘들면 좀 쉬고 그래. 혹사하다 쓰러지면 몸만 상하잖아."

지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들은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임을 되새겼을 뿐이다.

"세츠."

"응."

"미안해."

"뭘 이 정도로."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통증만이 끈질기게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

아파.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건 무서워.

살려줘. 도와줘.

아무라도 좋으니까.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를….

퍼뜩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주변에 노을빛이 가득했다. 대체 얼마나 잠들어있었던 것일까? 지휘사는 마른 눈을 깜박이고 숨을 들이쉬었다. 풀 냄새, 흙 냄새, 어딘가에서 살랑거릴 고양이의 털 냄새, 그리고 무척이나 익숙한 기척이 하나.

"이제 일어났나보네."

차근차근 상황이 정리되어가는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지휘사는 그제서야 자신이 세츠의 무릎을 배고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음을 알았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

"…응."

"다행이네. 그럼 돌아갈까? 여기는 저녁이 되면 쌀쌀해."

그 말에 따라 몸을 일으키면 어깨에서 무언가 스르륵 떨어진다. 무엇인가 싶어 돌아보면 거기에는 세츠가 매일같이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신관복이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있는 사이, 세츠가 아무렇지 않게 겉옷을 거둬들여 제 어깨에 걸쳤다. 군데군데 붙어있던 풀잎이나 들꽃의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내렸다.

"안화에게는 내가 적당히 설명해뒀어. 다음부턴 몸이 아픈데도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된다?"

그럴게. 지휘사는 짧게 대답했다.

"내가 자면서 이상한 소릴 하진 않았어?"

"아하하, 뒤척이지도 않고 푹 자던걸."

세츠가 웃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듣지 못한 눈치였다.

*

언젠가의 일이지만, 그는 세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고해성사실을 찾은 죄인이 지푸라기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모든 걸 고백하듯이, 하얀 옷의 신관에게 제 안에 고여있는 온갖 감정들을 토해냈던 것이다. 다만 감정에는 색과 질량이 없어 말은 공기 중에 흩어지기만 했고 그 말을 풀어내는 지휘사는 그 끔찍할 정도의 무無에 살짝 혼절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나, 사실은 7일의 시간마나 죽음을 겪으며 루프하고 있어. 그때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자꾸만 잃어버려. 내가 했던 일들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서 제로가 되어버려. 그런데도 이전에 입었던 상처의 통증은 아직도 지워지질 않아. 아파. 괴로워. 무서워. 이제 이런 건 싫어. 더 이상 이런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도와줘. 제발 도와줘.

마지막에는 울음과 애원에 가까워진 고백 앞에서 세프는 경박하게 굴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갑자기 안화처럼 진지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세츠는 허공을 붙잡아 보여주려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휘사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그리고 아무런 증거조차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신뢰했다. 알겠어. 내게 말해줘서 고마워. 어떻게든 도와줄게. 그 세 번의 긍정은 한계까지 몰려있던 지휘사의 심장에 지지대가 되어주기에 충분했고

하지만 세츠는 죽어버렸다.

건진 것은 (또 다시) 자기 자신의 목숨뿐이었다.

그 어떤 미물이라도 자신의 목숨값은 아까운 법이어서 (혹은 누군가의 목숨값이 아까워진 덕분에) 지휘사는 때와 장소를 가려 입을 다무는 요령을 터득했다. 이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던 요령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제 몸에 스며드는 감각도 그때 익혔다. 한 번 해보니 나머지는 그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쉬운 것이었다. 아하, 나에게 부족한 건 경험이었나. 지휘사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죽음과 재생은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마냥 끊임없이 온 정신과 몸을 훑고 지나갔다. 찬란한 듀엣 공연 앞에서 지휘사의 영혼이 감명받는다. 그 빛깔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게 되는 것도 필연이었다.

다만 아무리 가명깊은 공연이라 해도 유달리 눈을 잡아채는 어떤 순간이 있는 법이다. 모든 것이 녹아붙은 한 덩어리처럼 인식되는 가운데, 홀로 반짝반짝거리고 아름답게 일렁이며 시선을 빼앗는 순간.

하지만 찰나의 빛은 이제 저물었다. 앞으로 남은 것은 긴 뱀의 뱃 속처럼 구불거리는 시간과 또 다른 생과 죽음의 손짓 정도겠지. 자신을 데려다 준 세츠가 돌아가는 모습을 창 밖으로 지켜보며, 지휘사는 진통제를 두 알 삼켰다.

이젠 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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