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회차선

타카네 루이 x 사카마타 클로에

아리스타타 by 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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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펜이 흘리는 서걱거림만 울리던 방에 낮은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서걱거림이 멎고, 자연스레 푸른 눈동자는 문을 향했다. 발소리도 없이 온 걸 보면 클로에려나. 이번에는 뭘 사도 되냐고 물을지.

“ 들어와.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직감은 맞았다. 반만 맞았지만. 사카마타 클로에는 역시 고민 있는 얼굴은 잘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 무슨… ”

“ 루이 언니, 나 고민 좀 들어줘. ”

…푸념이 아니라 상담일 줄이야. 예상 외의 부탁에 잠깐 대답을 잊고 있었다.  하던 서류작업을 마저 이어가며 애써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 네가 고민이라니 별일이네. 무슨 고민인데? ”

“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

우득. 찌이이익. 누가 들어도 당황한 게 드러나는 소리가 지나가고, 촉이 부러진 펜과 찢어진 종이만이 그렇지 않아도 조용했던 방에 적막을 더했다.

“ …크흠. 흠. 미안. 조금 예상 외여서. ”

“ …응, 이해해. ”

“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게 누군데? ”

“ 그, 뭐냐. 쬐끄맣고…? ”

총수.

“ 뿔 달려있고? ”

라프.

“ 좀 긴 은발을 가진? 사람? 인데… ”

라플라스 다크니스.

“ 하아… 하필이면 대상이 상사란 말이지. ”

하필이면 라이벌이 상사란 말이지. 여간 골치가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짝사랑 상대의 연애상담을 해야 한다니… 생애 가장 비참한 일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일 아닌가. 착잡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런 마음을 표정에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 …고백 할 거야? ”

“ 조만간 할 거야. ”

“ 내가 뭘 해주면 되겠어? ”

“ 고백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가르쳐주면 좋겠어! 사카마타, 연애는 한번도 해본 적 없으니까… 루이 언니라면 경험이 있을 것 같아서. ”

머리가 아프다. 내가 고백에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면 지금 너랑 연애를 하고 있었겠지. 이쪽은 고백은 커녕 마음 정리도 제대로 못했는데… 일단 어떻게든 그럴싸한 답변을 해내야겠지. 간부로서 상담에 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들키지 않기 위해서.

“ …글쎄, 나였다면 결론을 먼저 꺼내들 것 같은데. ”

“ 사귀자는 말을 먼저 하라는 말이야? ”

생각 중인 듯, 붉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 맞아. 그러고 나서 왜 좋은지 같은 걸 말한다거나 할 것 같은데. ”

모르겠다. 스스로도 말을 뱉으며 이상함을 느낀다. 좋은 데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직접 겪진 않았더라도 살아온 몇 천 년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덧없지만 그 덧없음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기억을 남기고 가는 감정이 사랑일테니까. 스스로의 말과 생각의 모순을 서류 째로 덮고 클로에와 시선을 마주했다.

“ 물론 내 입장이라서 완벽한 답변은 되지 못하겠지만… 나라면 그렇게 할 것 같아. 사랑 고백에 정답이 어디 있겠어? 난 너답게 하는 게 나을 거라고 봐. ”

“ 사카마타 답게… ”

으으음…? 같은 소릴 내며 고민하는 클로에가 마냥 귀여웠지만 절대로 티를 낼 순 없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전부 감이 예리하니까 특히나 말이지…

“ 그래, 너답게. ”

“ 뭔가 더 어려워진 것 같단 말이지… ”

붉은 눈동자가 반대로 구른다.

“ 고백이 쉬운 일이었으면 진작 했을 거 아냐. ”

웃어넘기듯 말했지만, 동감이다. 고백이 쉬운 일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어.

“ 하긴 그래. 루이 언니 말 들으니까 조금은 용기가 생겼을지도! ”

“ 클로에 너도 대단하다. 사내연애 금지를 내건 장본인에게 고백이라니. ”

턱을 괴며 질린다는 듯 말했지만 상대방은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시시 웃으며 능청스레 굴었다.

“ 그러게. 사카마타도 그렇게 생각해. ”

뭐라 대답하려 입을 여는 순간, 말은 입밖을 나서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 근데 못 참겠지 뭐야. 이런 게 좋아한다는 거 아닐까? ”

그렇게 웃는 사카마타 클로에가, 여실히… 온전히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서 미처 발 딛지 못한 말을 되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표정을 아름답다고 느꼈지만 그만큼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손에 뭐가 잡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일어나 문 앞에 섰다.

“ …난 이제부터 코요리랑 이로하랑 장 보러 갈 건데, 넌 안 올거지? ”

“ 루이 언니… ”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

………

…클로에에게 말했던 대로 코요리와 이로하를 데리고 나왔다. 답지 않게 어떠한 명분도 없이 나와달라고 강요했기 때문에 셋 사이에는 미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제법 신경이 쓰였던 코요리가 주변에 있던 카페로 가자고 제안해 자리를 옮겼음에도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른 건 자신이기에 뭐라도 말을 해야겠지, 싶어 말을 꺼내려 했다.

“ …미ㅡ ”

나온 음료를 가져온 코요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꺼낸…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 아무 말 않아도 괜찮소. 루이 언니. ”

“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텐데, 대단하구려. ”

이로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녹차를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 루이 언니는 상냥하니까, 그치? 이로하. ”

“ 이타심이 깊은 것은 좋은 일이오만, 그래도 루이 언니는 조금 이기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싶소. ”

이미 다 알고 있구나. 역시 다들 감이 좋으니까 내 표정과 상황만으로 상황을 추측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순간 가슴이 끓어서… 가지고 있던 감정을 마저 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 루이 언니, 괜찮을 거야. 연애 박사인 코요도 실연을 한다구? ”

“ …크흡, 흠. 결국 거절 못했지 않소이까… ”

코요리의 발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이로하는 헛기침까지 해대며 변명했다. 그런 실없는 농담 겸 위로를 듣고 나니 허탈하게 웃음이 났다. 한결 후련했다. 마음을 접을 때가 된 거겠지. 아마 사랑은 몇 번을 해도 서툴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녀석들… 부르러 갔을때부터 약간 불안한 표정이더니, 들킬까봐 그랬던 거였나… 라플라스가 보면 악을 쓰며 뭐라고 할테지. 간부인 내가 자신들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뭐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밝힌 건지. 코요리도 만만찮다니까.

“ 둘 다 정말… 영악하다니까. ”

“ 그럼~ 코요는 HoloX의 두뇌인걸. ”

“ 영악하다는 건 그리 칭찬은 아니지 않소이까? ”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밖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 사라지고 있었다.

“ …어라, 루이 언니. 저거 쿠로땅 아냐? ”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코요리의 손가락 끝에 있는 클로에의 모습은 어딘가 묘했다. 평소랑 그렇게 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선 초조함이 일었다. 고백에 성공한 걸까. 거절당한 걸까.



찾으러 가야겠다.

“ 돌아가는 길에 장보기… 부탁해도 될까?  ”

“ 맡기시오. ”

단호한 말투… 내가 어딜 가려는지 당연히 알고 있는 거겠지. 그럼 그 말에 기대서 어리광 좀 부릴게. 이로하, 코요리.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자리를 박찼다.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간 순간부터 보이는 게 점점 줄어갔다.

내가 최근까지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필사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최소 몇십 몇백 년간 무뎠던 감각이 조금씩 날카로워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익숙하지만 낯선 그 감각이 가리키는 끝은 처음과 한 점 다를 것 없이 사카마타 클로에였다.

달려가기 무섭게 팔목을 잡아 몸을 돌렸다. 돌아본 클로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눈가가 붉었다. 눈물자국도 미처 지우지 못한 듯 싶었다. 평소같았으면 귀신같이 눈치챘을 내 발소리도 신경쓰지 못했다.

“ …루이, 언니. ”

“ 클로에. ”

이름을 부르자마자 클로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붉은 눈가에서 참을 수 없었던 마음이 흘러내린다.

“ …나, 나… ”

꾹 안았다. 거절당했겠지. 그럴 듯 싶었다. 라플라스도 자신을 좋다고 하는 이가 싫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선을 그으려고 했겠지. 안 그래, 라프? 넌… 많은 걸 알고 있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일은 서툴기 그지 없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짧지만 긴 시간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우는 얼굴이 조금 어울리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생각으로만 담아뒀다.

“ 클로에,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클로에는 한참을 울어 멍한건지 얼굴로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 아무 말 말고 들어줄래? ”

눈이 빠르게 두번 깜빡였다. 알겠다는 말이겠지.

“ 나, 너 좋아해. ”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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