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은 풀무 되어

들불 by 염화나트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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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어린 나는 작고 반짝이는 물건 모으길 좋아했는데, 어느 날 아끼던 하얀 돌을 호수 아래에 떨어뜨린 것이다. 탁한 수면 아래 가라앉아버린 물건은 물결의 일렁임 아래에서도 보이지 않아서, 아이가 손을 뻗거나 들어가기엔 깊고 깊어서, 옛 모습을 회상하는 것 외엔 그 보물을 다시 볼 방법이 없었다. 만남과 이별을 가름짓는 것이 획득과 배웅이라면, 내가 처음으로 알게 된 이별이 그 작은 돌이다.

무언가가 탁한 수면 아래의 물건 같다. 괴이가 된 어머니, 어머니에게 살해당한 아버지, 복수를 그리던 어린 나와, 다시 만나지 못할 언니들… 깊은 호수 아래 잠긴 것 같다. 몸이 붕 뜬다. 귀-귀가 있었던가?-가 먹먹한 느낌. 아주 깊은 꿈. 꿈? 누군가 있다. 골베자, 지금 죽이는 게 낫지 않겠어? 손 안의 물건을 만지작거린다. 소매 아래 데존석을 숨긴 건 아직 저 치들이 모르는 모양이다. 괜찮아, 빼앗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어. 멍청하기는! 묶인 손을 부러 얌전히 둔다. 발 소리가 들린다. 조금만 더, 몇 초만 있으면 돼. 어이, 여기를 봐라. 나는 순순히 고개를 든다. 데존까지 앞으로 10초, 9, 8, 7… 좋아, 이대로면 이 멍청한 녀석들을 따돌릴 수 있어. 그가 입을 열었다.

리비코코.

나는 너를 이해하게 될 거다.

그가 어떤 얼굴이었는지 인식하기 전에, 나는 수면 위로 부상한다.
백일몽의 끝. 나는 눈을 떴다.

고개를 치켜든다. 호흡하듯, 입을 열고 에테르를 빨아들인다. 익숙한 하늘이 머리 위에 떠다닌다. 검은색, 검은색, 만 년 동안 변함 없던… 여기는 나의 영역. 전신이 아프다. 상황을 파악한다. 육체의 재생이 있었다고 깨닫는다. 한 번 죽었군. 잠깐, 나를 먹는 녀석이 있다. 나는 앞발을 휘둘러 그 하잘 것 없는 요마를 죽인다. 그대로 에테르를 삼킨다. 좋아, 방해물은 제거했다. 그 후 먼저 떠오르는 건 자신이 죽은 원인이다. 회상되는 마지막 순간. 내리쳐지는 검은 검날, 절단되는 목의 통증, 분리되는 이인감… 아. 그 자였다. 검은 갑옷의 기사. 의식이 돌아온 후에는 감정이 돌아온다. 내가 죽었다고? 내가 패배했다고! 좀 더 앞을 회상한다.

…너는 제법 호전적이군.

내 영역에 들어온 너만 할까. 네가 그 녀석이군… 부하를 모은다는 유명한 녀석.

호오,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어. ‘영웅’ 의 이름을 칭하는 자여.

하하핫! 영웅을 네 밑으로 포섭하기 위해 오셨나?

나를 따르겠다면 너는 무엇이든 삼킬 수 있다. 내 힘은 풀무가 되어, 네가 온 대지를 잡아먹게 할테지.

무엇이든?

그렇다. 이 고여버린 세계 뿐만이 아닌, 빛이 가득한 저편의 대지까지…

멋진데. 네 목적은 그 빛나는 세계의 침공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죽이겠다! 나는 빛나는 세계의 영웅이자, 빛나는 세계의 구원자!

유감스럽군.

그러니 이 세계에 영웅은 필요 없어. 내가 너를 삼킬 것이다!

하면, 성전을 방해하는 자 처치할 수밖에…

그렇군. 그대로 우리는 싸웠고, 결국 나는 그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죽었다. 녀석은 내 에테르를 먹진 않았지만, 다른 요마가 내 에테르를 삼키도록 버려 둔 채 떠났고. 젠장. 에테르를 얼마나 먹힌 거지? 적어도 ‘나’ 는 아직 ‘나’ 인 것 같다. 나를 먹던 녀석도 다시 잡아먹었으니, 생각보다 많이 빼앗기진 않았다. 몸을 쭉 폈다… 내 것, 내 모은 것들을 확인해야 해. 나는 깨어난 후 가장 먼저 내 귀한 것들을 모은 창고로 달렸다. 쉭쉭 스치는 시커먼 풍경과 함께 기나긴 몇 초. 그리고 도착하면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젠장, 반짝이는 귀감람석 목걸이도, 황금으로 된 관도, 내가 죽은 사이 허접한 녀석들이 다 가져가 버렸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무심코 뒷발질을 한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난다. 남은 것들을 물어 옮기며 추린다. 내 것들. 나를 나로 만드는 것들. 수집품들 사이서 몸을 웅크린다. 역시 여기가 좋다. 그리고 안전이 확보되면, 다시 생각은 흘러버리는 거다. 내게 패배를 안긴 존재를 회상하는 것… 골베자라고 했었나. 그 이름은 생전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만 년이나 지나 바래버린 기억은 그다지 형체가 없다. 그는 감히 영웅인 나를, 빛나는 존재인 나를 모욕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시체-사망한 에테르-마저 하잘 것 없다는 듯 내버려 둔 채 떠났다! 이 몇천년 동안 나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감히 내 위광에 도전하려는 녀석도 없었을 뿐더러, 내 앞발에는 모두가 굴복했다. 그런데 감히 영웅의 이름을 쓰는 그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아, 흥분하고 있다. 스스로도 내뱉는 입김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요마의 본능이 이성을 깨운다.
나는 그 자를 이길 수 없다.
만 년의 세월에서 새겨진 ‘존재’ 의 본능, 빼앗고 잡아먹는 자들의 혼, 강한 요마에 대한 복종이, 내 안의 무언가를 부채질한다. 그를 인정해야 한다고, 영웅을 이긴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고, 자신보다 우월하고 강인한 존재라 받들이라고…

수 일이 지났다. 어쩌면 수백 일일지도. 시간의 흐름은 잘 모르겠다. 일만 하고 366곱의 시간을 보내면 그런 사소한 단위는 헤아리기 어렵다. ‘검은 갑옷의 기사‘ 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들려올 뿐, 그가 다시 내 영역을 찾는 일은 없었다. 내가 패배했다는 사실은 공유되지 않는다. 소문을 흘릴만한 영역 안의 녀석들은 전부 잡아먹었다. 그러는 나날을 보냈다. 덕분에 체내의 에테르는 제법 풍족하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하얀 돌, 나의 주인, 내 영웅의 호출도 있었다! 빛나는 세계로 내 일부를 보내는 것은 행복하다. 거기서의 나는 마음껏 잡아먹는다. 빛나는 세계를 본다. 지평선과 황혼, 구름과 빗물, 충만과 갈채. 아아, 그날은 해저의 유적을 봤다. 조금 들뜬 얼굴의 주인과 동료들의 웃음소리, 반짝이는 물건과 깨끗한 물, 세상 속의 생生. 허나 호출 끝에 다시 돌아오면 어둠과 어둠, 공허와 공허, 마경과 마경만이 있다… 내가 바다를 보았다는 이야기도, 주인이 웃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나 혼자 갖는다. 누구도 모른다. 돌아온 그 날은, 내면에서 무언가 타올랐다. 사실 처음 빛나는 세계에 호출받았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화염이 아니라, 단지 짚더미 속의 잔불. 탄내만을 피워내며 악취만을 주는 것. 그리고 아주 영원 가깝게 변함없는 시간동안 불길은 기억을 잡아먹고 타오른다. 나는 다시 끝없이 무언가를 태우고 잡아먹으며 어둠의 세계를 견디는 것이다. … 주인이 웃는 모습을 보는 건 기뻤다. 내가 그의 소중한 이들을 전부 먹어치운 이후, 웃는 모습을 보는 건 힘들어졌으니까.

방해하는 녀석을 먹어치웠다. 죽기 싫어! 에테르가 되기 전 녀석은 그런 말을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아니, 사실은 조금 신경을 썼다. 조금 마음이 편치 않다. 잡아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의 회상을 요즘 한다. 공허한 느낌이다.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이렇게 끝없이 영역을 넓히고 잡아먹어봐야 언니들은 돌아오지 않아-언니들이 누구였더라. 나는 영웅이 아니다. 힘의 한계가 있는 한낱 요마일 뿐이다. 빛나는 내 우상, 나의 작은 돌을 슬프게 한 죄인. 우울하다는 감각이 이것인가. 할 것 없는 긴 시간동안, 나는 다시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패배자. 검은 갑옷의 기사를 이기지 못한… 아, 또 이 생각이 들어버린다. 나는 영웅인데, 패배할 리가 없는데. 영역은 늘 그렇듯 어두컴컴하다. 하지만 내면에서 타오르는 무언가는 여전하다.
아, 그 자를 잡아먹으면, 내가 영웅이란 걸 증명하면 이 감정은 해소될 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면 다시금 증오가 고개를 치켜들고, 생의 불빛을 피운다. 골베자, 검은 갑옷의 기사, 감히 내 앞에서 영웅을 지칭하는 요마… 그를 정복하고 내 발치에 놓으면, 나는 다시 영웅으로 인정받겠지. 누구에게? 할 일은 정해졌다. 긴 고독에서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불은 어느덧 고독을 비추어내는 불빛 된다. 그 사실도 모른 채 끝없이 불을 피우고, 피우고, 증오의 힘을 풀무로 삼아 어떤 것의 부재를 버티는 것이다… 흐릿하고, 자신도 이제 그 형태를 잊어버린 어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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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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