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컾] 섬레니 썰푼 거

    

등 뒤의 궁녀들이 수군거린다. 눈앞에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고 자신을 보았다. 그에 호기심 동했던 것 같다.

    

관직에 나올 수 있는 인원들은 전부 요직을 맡고 있다는 이 가(家)중 유일하게 관에 몸을 맡기지 않은, 정승의 세 번째 손주 섬은 생각했다. 남들이 다 떠들어대는 폭군의 씨앗의 책사로 사는 것 또한 무료하기 그지없다고.

    

이 섬은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관직에 올랐을 때의 책임감 같은 것들이 귀찮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렇게 관에 오르라는 집안의 권유를 이리저리 피하다가 선택한 것이 이미 정해진 황위 계승에 다툼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이 섬은 그런 집안의 반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보다 재밌을 것 같은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직위가 없는 섬은 궁에 고작 삼사일에 한 번 갈 수 있었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관직도 없는 섬이 오가기엔 궁의 심사는 너무 까다로웠다. 섬이 돕게 된 그 또한 궁에 많고 많은 황자 중 하나였으므로, 고작 그의 말벗이라는 이유로 궁에 들어가기에 궁은 너무 엄숙했다.

    

섬은 그럴수록, 궁에 들어가는 날은 머리를 느슨하게 내려 땋아 묶고 곰방대를 든 후, 옷도 자신의 체구보다 큰 옷으로 헐렁하게 입었다. 거기에 궁녀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그 모습이 딱 한량 같아 보여서, 그는 조용한 궁 안에서 늘 홀로 튀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섬은 그냥 몇 년을 그러고 다녔다. 그렇게 섬에 대한 소문이 났고, 그건 궁 밖에도 파다하게 퍼졌다.

    

이가(家) 정승의 세 번째 손자가 머리 좋은 한량이라는 소문이 말이다.

    

섬은 머리가 좋았다. 그만큼 성격이 고약한 편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의 머리만큼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머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의 차림새와 행동에 많은 뜻을 부가하고는 했는데, 섬은 그저 폭군에는 한량이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렇게 행동을 했을 뿐 행동과 옷차림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만, 궁녀들에게 추파를 던진다는 소문만은 자신의 앞으로 쌓이는 소문을 이용할 속셈으로 궁녀들과 자주 수다를 떤다는 것이 그렇게 와전 되어, 그의 한량 같은 모습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고는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은 격이라며 오히려 좋아했지만 말이다.

    

그런 섬이 궁에서 튀면 튈수록 그와 비교하여 정직하고 성실하다 일컬어지는 이들이 있었는데, 황태자의 호위무사인 알레니스는 그중에 한 명이었다.

    

다들 겉으론 출신을 모른다고 하지만, 뒤로는 이미 현 황제의 손에 죽어버린 선황제의 태부의 손자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몰락했어도 가문이면 가문, 무예라면 무예, 얼굴도 그만하면 참하고, 성격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그의 이름은 입에서 입으로 자주 옮겨지고는 하였다.

    

그리고 섬은 확신했다. 제 앞에 선 연한 옥빛에 푸른 물을 들인 것 같은 머리색을 가진 남자가 그 소문의 주인공이라고. 섬은 불을 붙이지 않은 곰방대를 입으로 가져가 한 번 짓씹었다. 방심하면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알레니스는 그런 섬을 보고 인상을 한 번 찌푸린 뒤, 별말 없이 섬을 지나쳐갔다. 섬은 그 순간이 너무 흥미로워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알레니스의 뒷모습조차 안 보일 정도가 되자, 섬은 제 뒤로 시립해 있는 궁녀 중 하나를 불러 물었다.

    

“방금 지나쳐간 남자, 황태자의 호위 기사가 맞나?”

    

뒤에 시립해 있던 궁녀는 조용히 섬의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네, 맞습니다.”

    

궁녀의 말에 섬의 입가가 웃음으로 번졌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황태자와 섬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섬이 몇 번 황태자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섬에게는 시중을 들어줄 궁녀가 붙었고, 머물 장소가 생겼으니, 그 일들로 인해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 정도의 장난은 황태자에게도 우스운 일일 터였다. 그저, 조그만 소문을 퍼트리고 정책에 시간을 지연시키는 정도로만 그쳤으니. 그런데 결국 제 앞에 선물해둔 알레니스를 보고 섬은 평소에 찾던 곰방대를 버리고 잘 사용하지 않던 부채를 들었다.

    

더 이상 곰방대로는 웃음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 주인이, 더는 자신을 방해 말라고 너를 보낸 것 같은데, 내가 네 주군을 방해하지 아니하면, 네가 날 즐겁게 해줄 터냐?”

    

말을 끝낸 섬의 눈꼬리가 요사스럽게 휘었다. 알레니스는 그런 섬의 질문에 퍽 당황해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황태자를 향한 섬의 쪼잔한 괴롭힘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섬은 다음 날, 아침부터 알레니스를 불렀다. 알레니스는 황태자로부터 무슨 명이라도 들은 듯 섬의 부름에 바로 응답했다. 섬은 제 거처 마루에서 여유롭게 문에 기대어 앉아 부채를 펴 하관을 가리고 눈을 옆으로 흘겨 알레니스를 보았다.

    

“네 주군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으니, 내 무료하기 그지없다. 네가 재롱이라도 떨어보련?”

    

반쯤 농담으로 던져진 섬의 말에 알레니스는 검집에서 달칵, 검을 뽑아 들고 말했다.

    

“저는 주군의 검입니다. 그런 자의 재롱이라 하면 검의 실력을 뽐내는 것 말고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알레니스의 검집에 다시 날이 바짝 든 검이 들어가자 섬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답했다.

    

“그럼, 검무라도 추면 되지 않니.”

    

섬의 말에 날카로운 쇠가 긁히는 소리가 들리며, 날이 바짝 든 검이 검집을 빠져나와 섬을 향해 겨누어졌다. 일종의 경고였다. 다소 살벌한 모습에 기가 질릴 법도 하건만 섬은 아무렇지 않게 고갯짓으로 알레니스를 재촉했다.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투박하지만, 정직한 검무에 섬은 결국 웃음소리를 내며 즐겁게 웃었다. 이윽고 검무가 끝나고 알레니스의 시선이 섬을 향하자 섬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웃음소리를 뚝 그치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알레니스가 고개를 숙이며, 조금 전과 똑같이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만족하셨습니까?”

    

섬은 새삼 그의 체력에 감탄하며 음.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인 뒤 말했다.

    

“아니. 전혀, 만족스럽지 않구나. 내가 만족할 때까지 매일 와서 내 말벗이나 하렴. 전하께서 간만에 재밌는 걸 친히 보내주셨는데 잘 가지고 놀아드려야지.”

    

그러고는 알레니스의 답을 다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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