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클테라 / 안목
페닝님 커미션
테트라 지오메트릭의 책상은 늘 정신없었다.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능력자로서 신경 써야 할 것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런 그녀의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추가된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지. 책이라기엔 그것은 내용이 다 완성되지 않은 채였다. 하루 일을 마친 테트라는 그것을 펼쳐 빈 페이지에 글을 써 내려갔다. 논문이라기엔 논리정연하지 않고, 일기라기엔 그 글을 읽을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편지. 그것이 적합한 표현이었다.
교환 일기가 맞을까. 테트라가 쓰기 전 보았던 페이지 앞쪽은 글씨뿐만 아니라 붙어있는 것들이 제법 많았다. 말린 들꽃, 나뭇잎 같은 것들이었다. 예쁘다고 생각한 것을 주워 가르쳐준 대로 말리고, 책갈피처럼 끼워둔 것일까. 달필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애정이 담긴 글씨로 편지를 쓴 건 라이샌더였다.
언젠가 편지를 부치러 갔다가 거리에서 공연하던 라이샌더를 마주쳤을 때였을까. 예전에 저를 후원해주시던 분에게 쓰는 감사 편지라고. 그렇게 말했을 때 라이샌더는 직접 만나서 말로 하는 것과 다른지 물었다. 어떻게 다른지 정확하게 말해주긴 어려우니,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그런 테트라의 제안에 시작한 편지 겸 교환 일기였다.
라이샌더의 편지는 정신없고 순수했다. 그렇기에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만날 때마다 재잘거리며 말하는 것이 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오늘 공연은 어땠는지, 그 부분에서 테트라는 읽던 것을 멈추고 생각했다. 밖에서 공연을 하는 날이 꽤 있던데, 쌀쌀해지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스카프 같은 것을 선물로 주면 좋을까? 아니면 새로운 사탕이나 반짝거리고 예쁜 것으로? 답장을 다 쓴 테트라는 그렇게 거리로 나섰다. 다음 편지는 선물과 함께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시죠?”
휴일이긴 하나 할 일도 많고, 이후에 모임에도 참석해야 하니 가능한 빠르게 선물을 고르고 들어갈 생각이었건만. 테트라는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던 제 옆으로 다가온 이를 보고 물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와선 절 내려다보고 있는 이의 눈이, 테트라에겐 영 달갑지 않은 듯했다.
단정하고 우아한 옷차림, 여유가 있는 미소. 가볍게 바닥을 두드려 사람의 주의를 끄는 케인. 성공적으로 시선을 가져온 그는 그 시선의 바깥쪽에 손을 두었다. 테트라가 고르고 있던 물건들을 가볍게 훑어보며 왜 이곳에서 물건을 고르는지 파악하는 듯했다. 시선을 끌고, 동시에 감추어, 더 큰 것으로 아예 사로잡는 것. 마술사 출신이라 그런 것인지, 원래부터 그가 이런 것에 능숙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는 지금 미국의 상원의원으로서 이곳에 서 있었다.
“우연일세. 후원하는 곳이라서, 좀 살펴볼까 하고.”
후원. 테트라는 그 말에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는 혼자였다. 따로 대동한 이도 없었다. 정말로 혼자서 후원하는 가게를 둘러보러 온 걸까. 생각해보면, 라이샌더는 편지에서 ‘단장님’에 대해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 남자가 라이샌더에게 자신에 대한 것을 함구할 것을 명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라이샌더가 그를 언급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일반인. 그러나 어쩌면, 능력자들과는 다른 형태로 경계해야 하는 사람. 테트라는 고개만 가볍게 꾸벅 숙이고선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물건을 차분히 살피려 해도 화이트 클라프는 그 뒤를 따라오며 가게를 같이 둘러보았다. 대체 왜? 불편하고, 싫은데. 그러나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그저 자신도 가게를 둘러보는 것이라 말하면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겠지. 화이트 클라프는 테트라의 속내를 그렇게 짐작했다. 후원하는 것을 둘러보고, 지켜보는 게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니. 그러던 그는 테트라에게 돌연 질문을 던졌다.
“레이디, 후원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묻어난 말투였다. 그럼에도 그 질문을 받은 테트라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공적인 자리라면 모를까.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과하게 예의를 차려가며 물은 질문이 중요한 질문일 리가. 그저 무언가 전달하거나 괜히 속을 흔들어 놓으려 한 말이라면 모를까. 테트라는 그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저의 깊은 생각보단, 그것에 빗대어 본 화이트 클라프의 모습에 대해 말할 뿐이었다.
“당신에겐 그냥 선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겠죠.”
“뭐, 부정은 하지 않겠네.”
테트라는 저도 모르게 한 금발의 헌터를 떠올렸다. 그라면 인정은 하되, 교묘한 거짓말을 섞어 비아냥거릴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속 편하지. 가볍게 다투고, 질린 얼굴로 바라봐주면 끝이니까. 그러나 진심으로 인정하고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일부러 한 번 감춘다.
“그렇다면, 자네가 지금 하는 것도 그런 종류겠군.”
아, 이쪽이 본론인가. 테트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놓고 불쾌함을 드러내는 얼굴에도 화이트 클라프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기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이유를 이미 다 알고 있다. 라이샌더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는 것을 두고, 선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저를 비웃는 것이면 모를까, 꼭두각시처럼 잡아두고 있는 이를 한 번 더 짓밟는 것 같아서.
“그냥 친구끼리 선물을 주고받을 뿐이니, 다르죠.”
테트라는 상대하지 않고 돌아서려던 것을 관두었다.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라이샌더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고. 방해나 하지 말라고. 이제 확인할 것도, 시비 걸 것도 다 하셨으면 가보라고.
“글쎄, 남에게 선물을 주고, 또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쓸모가 있는지는.”
그러나 더한 대답이 나온 것에 테트라의 입에서 결국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불쌍한 사람이다. 연륜이니 경험이니 뭐니 해도, 진실된 인간관계보단 이해관계, 정치적 관계 등에 익숙해 무례하게 굴 뿐이다. 예의로 포장한 무례라니, 모순되면서도 참으로 그에게 걸맞은 표현이었다.
“좋은 후원가가 되시긴 그른 것 같네요. 그런 눈을 가지고 계셔서.”
음. 테트라의 한마디에 화이트 클라프는 한 번 침음하곤 가만히 테트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정말로 그런가요? 꼭 그렇게 묻는 눈이었다. 뻔뻔하기도 하지. 테트라는 스카프가 아닌 다른 것을 찾아 뒤적였다. 평범하게 입을 만한 옷도 좋지 않을까. 광대가 아니라, 그냥 친구와 나들이를 갈 때 입을 만한 그런 것. 그러나 옷을 고르는 손 위로 닿은 것은 불쾌한 시선과 손이었다.
“이런 눈으로 대충 골랐지만 제법 괜찮은 결과를 낳은 것도 많아.”
테트라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내었다. 그러면 화이트 클라프 역시 언짢은 얼굴을 하긴 했으나, 테트라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어색하면서도 싸늘한 공기 속, 화이트 클라프는 손목에 찬 시계를 슬쩍 보곤 다시 테트라를 보며 말했다.
“가벼운 내기를 하나 할까요, 레이디.”
그리곤 제가 온 것에 안내를 하러 온 직원을 손짓으로 불렀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직원을 눈짓하는 것에 테트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화이트 클라프는 굳이 가까이 붙어 테트라의 어깨를 짚고, 그 귓가에 대고서 작게 말했다.
“저 직원에게 골라오라고 시킬 물건이, 누구에게나 어울릴 물건일지.”
직원이 내기에 이용당했다는 걸 모르도록. 어찌 보면 저 직원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르나, 그렇다면 처음부터 사람을 가지고 내기하는 걸 관두면 되는 게 아닌가. 적어도 나에 대한 배려는 없다. 테트라는 화이트 클라프의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여 빠져나왔다. 그런 테트라의 표정에 화이트 클라프는 작게 웃을 뿐이었다.
“자네 말대로 내 안목이 형편없다면, 안 어울리겠지.”
즐겁나? 왜 즐겁다는 얼굴로 저러는지. 아무래도 다음에 전해줄 편지, 교환 일기에는 제법 쓸 내용이 많을 것 같았다. 단장이 교환 일기를 몰래 보거나 뺏는다? 그래서 거기에 써둔 흉보는 말들을 읽는다? 그러든가. 읽으라지.
그렇게 테트라가 한숨을 쉬는 사이 화이트 클라프는 직원에게 말을 끝마친 듯했다. 직원은 환한 얼굴로 가더니, 올 때는 옷 한 벌을 들고 왔다. 그리곤 화이트 클라프에게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테트라 쪽으로 와선 가져온 옷을 테트라에게 대어 주었다. 직원에게 등을 떠밀려 피팅룸으로 향하고,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화이트 클라프가 신경 쓰이긴 하나 일단은 직원이 골라온 것으로 갈아입었다. 깔끔한 베이지색의 투피스 정장이었다.
“저기, 이게 무슨…….”
갈아입고 나온 테트라는 저를 보는 직원과 화이트 클라프의 시선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냥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또 나와보니 저 머리 색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해서. 직원이 일부러 이렇게 골랐을까, 아니면 저 사람이 시켰을까.
“안 어울리는 것 같나?”
“아뇨, 정말 잘 어울리세요!”
테트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화이트 클라프는 테트라를 눈짓하며 직원에게 물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입기 좋은 깔끔한 것으로 추천해달라고. 요구에 맞춰 옷을 골라온 직원은 테트라에게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쏟았으나, 테트라의 표정은 마냥 밝지 못했다. 직원이 다른 것도 보여드릴지 묻는 것에, 화이트 클라프는 괜찮다며 그를 물렸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건…….”
“형편없다, 라고 한마디만 하면 내기는 네가 이긴 게 될 텐데.”
아, 설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제 말을 끊은 화이트 클라프의 말에 테트라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내가 고른 것이라면 설령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이기는 쪽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기에서 이기고자 이 물건이 형편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하면 직원의 안목을 헐뜯는 것이 되고 만다. 더 나아가, 그것을 꼬투리 잡아 이 가게의 후원에 대한 것을 철회한다면. 처음부터 이 가게에 대한 후원을 철회할 꼬투리가 필요했던 것인지, 그것에 절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저를 떠보고 싶었는데 적당한 핑계가 생긴 것인지. 어느 쪽이든 간에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상일세. 내기와는 별개로, 제법 즐거운 만남이었던지라.”
그렇게 말하며 그 옷을 계산한 뒤 가게를 나가는 그를 보며, 테트라는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모임에 늘 같은 것을 입고 나가는 것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 옷을 입어도 될까.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냐, 내 개인적인 기분이냐. 고민하던 테트라는 결국 그 옷을 받았다. 그 뒤 참석한 모임에서 제 옷차림을 칭찬하는 화이트 클라프를 마주하게 될 것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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