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테라 / Nobody
아포칼립스
BGM: Uncertain Voices - When I Was Little
Nobody
:: 테트라
w_김애기(@card_text__)
그새 부식된 라디오에서 나오는 지지직 소리를 멎게 하기 위해 몸체를 가벼이 통통 두드렸다. 거슬리던 소리는 손등과 닿을 때마다 멈칫거리더니, 여러 차례의 폭력 끝에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딱 거기까지. 남들에게 피해를 줄 만큼 소리를 키워놔도 웅얼웅얼 뭉개지는 가수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너를 위해 같은 언어를 말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조어造語를 생성해 내고 있어서.
“결국은 너마저도 나를 떠나는구나.”
쓸쓸한 마음으로 전원 버튼을 꾹 눌러 마지막 친구였던 라디오의 장례를 치러 줬다. 잘 가. 기계에게도 천당이 있다면 꼭 그곳에 가기를 바랄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멸망으로부터 딱 999일째 되는 날이다. 한 명의 사람이라도 남아있는 건 아닐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사방천지 발품을 팔아 돌아다닌 게 500일쯤 되려나. 증발하듯이 사라진 사람들 속에는 내가 사랑하던 가족, 친구들, 동료들과…… 사랑은 아니었을 누군가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덕분에 절망한 날이 길고도 길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나았을까. 옛적부터 나는 주변 사람에게 쉽게 물들었으니까. 누군가가 울었다면 함께 울어 털어냈을 것이고, 누군가가 웃었다면 함께 웃으면서 ‘마지막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 지금만큼 휘둘리지 않았을 것인데.
“입이 쓰네.”
역시나. 그래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고철 덩어리가 내던 소리까지 종식되니까 이제 세상에 남은 고함이라고는 덩그러니 남은 나의 숨소리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뜨거운 바람이 건물 사이를 스치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아무도 없는 세상. 콘크리트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잡초나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뜨거운 햇살과 가끔 반갑게 쏟아지는 비 따위가 벗이 되어버린 지금.
‘이것들마저 전부 사라지면. 그럼 나는 어떡하지?’
‘아무리 그래도 자연적인 현상이 사라지기야 할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현상은 진즉 일어났잖아.’
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통계자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멸망 후 999일이 지날 동안 아무런 이상 증세가 없는 지구라는 별이 딱 1,000일 째 되는 내일 갑작스럽게 터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아니. 터져버리면 차라리 나은 걸지도 몰라. 바람이, 햇살이, 비가 하나씩 사라지게 된다면? 멸망인데 이렇게나 멀쩡한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그래. 여태까지 너무 평온한 시간이 흐르긴 했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됐다. 차마 1,000일이라는 완벽한 숫자에 도달할 용기가 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한때 가장 행복했었던 때의 내가 너무나도 좋아했던 도심의 카페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우습지. 분명 아무도 없는 세상인데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숨도 고르지 못하고 달리고 달리다가, 바닥에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마자 아이처럼 크게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어……….”
그래. 행복했던 시절의 잔상이 남은 곳을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아서. 바닥에 찰싹 붙어 누워 가장 추하되 가장 본능에 가까운 울음을 터트렸다.
있잖아요, 아버지. 저 사실 능력자로서 활동하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어머니. 저 사실 전투까지 참여했었어요. 그때 너무 힘들고 힘들어서 제 자신이 이만큼씩 깎여나갔어요. 있잖아요. 있잖아요. 있잖아, ……루드빅. 저 사실, 당신이 그렇게 막 밉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아니. 밉지 않았어요. 당신이 밉기보다는, 당신처럼 빛나지 못하는 내가 미워서. 내가 나에게 친절하지 못해서 당신에게도 그랬나 봐. 조금만 친절하게 대했으면, 그랬으면, 나도 당신과 함께 사라지고 다른 누군가가 이 세상에 혼자 남았을까요?
아아. 인정하고 나니 보인다. ‘나의 세상’에 종말을 가져온 건 적어도 나의 잘못 때문이다. 못된 짓을 한 벌을 받는 게 분명하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를 죽일까 말까 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나의 스승께서 세상을 등지고, 아직 미완성 작품인 내가 살아 숨 쉴 수 있겠어.
“미안, 미안……. 미안, 해요……….”
나, 때문에. 미안해요. 머리를 한 움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도망칠 곳이 없다. 심지어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곁에 간다고 하더라도 당신의 얼굴을 볼 염치가 없다. 하늘 아래 떳떳하게 살아갈 짓만 하라던 어른들의 잔소리는 결국 가장 옳은 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감히 당신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아닌 척 외면해봐야 외로움이 만들어지는 초석은 ‘루드빅’ 당신이었으니까. 엎어진 그대로 한참을 울다가 겨우 몸을 데굴 굴려 하늘을 바라봤다. 어차피 내 추한 몰골을 볼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 그대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북북 문질렀다. 오히려 이런 추한 몰골을 보고 놀려줄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그것대로 반가울 건데.
‘당신. 자존심이라는 게 없는 겁니까?’
그래. 그렇게. 이름도 알고, 별명도 알고, 애칭도 알면서 굳이 ‘당신’이라 부르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면, 나는 너무 반가워서 그 품에 뛰어들었을 거야. 아.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리니 눈시울이 다시 한번 시큰하게 울렸다. 눈물이 맺혀서 슬금 슬금 눈꼬리를 따라 내려오려고 할 때.
“아.”
아른아른 울렁이는 시야에 들어온 오후의 볕이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샛노랗게 물들이는 그것은, 아무래도,
“루드빅…….”
그 사람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눈물이 쏟아지면 시야가 맑아져 사내의 금빛을 앗아가기에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응시했다. 지금. 지금이 좋을 것 같아. 나는 당신의 색이 자애롭게 내려앉는 늦은 오후, 엄두가 나지 않아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마지막 잠에 빠지려고 한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언제나 고이 모셔두던 약통을 꺼내들었다. 무섭지만 또 무섭지는 않네. 따스한 빛에 용기를 얻어 약통의 뚜껑을 열고, 한 달에 두 알씩 모아왔던 수면제를 털어먹었다.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일방적으로 미워한 주제에, 이제는 내 마음대로 용서를 받았다 생각하며 당신이 있는 곳을 향해 떠나려 한다. 모순적이지만 뭐 어때. 사랑이란 원래 교만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있잖아. 조금은 쌀쌀맞게 굴었을지언정 당신에게 건방진 모습은 한 적이 없으니. 그러니 저승에서 만나거든, 나를 너무 싫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서서히 긴장이 풀리며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시야를 온통 금빛으로 수놓았던 햇살이 어둠에 잡아먹히고, 은은한 잔상이 남아있는 걸 따라 걸어가려 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눈부시다고 당신이 그랬으니까. 어둠 속에 숨으면 우린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럼 그때는 꼭 당신을, 사랑했었다. 그리고 사랑한다.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루, 드빅……….”
어디에 있든 마지막 부름에 답하게 될 거라면서요. 어서 불러줘요. 머나먼 저 하늘 어딘가에서, 나를 인도하는 다정한 사신의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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