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오웬] #1, 2

포학 기반 au

like a miracle by saha
26
0
0

* 포학기반 카인오웬.

* 세세한 설정을 전부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첫만남 및 이것저것이 전부 날조입니다…

기분 나빠.

육성으로는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세계는 대체로 따스하고 다정한 곳이었다. 성심성의껏 누군가를 대하면 비슷한 정도의 마음이 돌아온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행동했고, 대체로 보답받았다. 원하는 것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더 노력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것이 몇 개나 있었다. 다정한 친구들이 곁에 있었고, 처음에는 어려웠던 기타의 코드도 연습을 통해 익숙해졌으며, 어느새 자신의 팬이라고 기꺼이 말해주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래서 카인 나이트레이는 맥락 없는 악의도 이유 없는 불행도 알지 못했다. 그의 세상은 노력하는 그에게 다정했다. 커다란 불행이나, 재난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명확했고, 그의 몫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의 삶 속에서 선량한 사람들은 보답받고, 악한 사람들은 응징받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새하얀 남자가 자신의 삶에 걸어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카인 나이트레이는 아마 영원히 그런 것들을 몰랐어도 되었을 것이다.

카인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왜…?”

칼칼한 목으로 겨우 소리를 내어 물었다. 자신이 들어도 한심한 목소리였다. 시야가 흐릿하다.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옷자락과 널브러져 있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내 손인가? 자신의 팔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그냥 몸에 대강 붙어있는 장신구인마냥 감각이 없다.

“이유가 필요해?”

그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무자비하게 쥐어팬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웠다. 나긋한 그 목소리를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분명 비단처럼 매끄럽다. 목소리만 떼어서 재생한다면 오히려 다정하다고조차 느껴질 것 같았다.

“기분 나빠.”

그 목소리를 끝으로 시야가 암전됐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매점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디저트를 1학년 학생이 집으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천천히 걸어온 은발의 3학년생이 그것을 빤히 쳐다본 것이다. 그뿐이었는데도 그 장소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1학년 학생이 놀라 쭈뼛쭈뼛 뒷걸음질을 쳤다. 3학년생은 그에 아무 감상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한 표정으로 디저트를 집으려 했다.

- 그 애가 먼저지 않아?

- …하아?

끼어든 것은 긴 적발을 하나로 묶은, 아직 소년티가 나는 앳된 얼굴의 3학년생이었다. 목소리에 시선이 모이자 그는 씩 웃었다. 적의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햇살 같은 태도. 아무도 그에게 상처라곤 입힐 수 없을 것만 같은. 은발의 3학년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보다는 인형에 더 가깝게 느껴지던 무표정이 무너졌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옅은 새하얀 얼굴. 카인, 그러지 마. 저 사람… 주변의 웅성거림에도 카인이라 불린 학생은 위기감 없이 눈을 조금 크게 떴을 뿐이지만 옆에서 말리는 목소리에선 불안과 초조함이 느껴진다. 그 목소리들을 듣고서야 은발의 3학년생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웃음이라 불러야 마땅한 표정이지만 그것을 과연 웃음이라 불러도 될지 고민하게 되는 표정이기도 했다.

- 너, 따라와.

그 말을 남기고 은발의 학생은 휙 몸을 돌려 매점을 나갔다. 카인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주변 친구들의 만류에도 괜찮아, 금방 돌아올게, 하고 웃음을 돌려주었을 따름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그게 좀.”

아하하, 하고 답지 않게 어색하게 웃는 카인을 보며 피가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인 나이트레이. 예능교의 3학년으로 뮤지션 지망생. 인플루언서로 유명하다. 친구가 많고 원만한 성격에다 건강한 아이라 보건실에서 본 적은 거의 없다. 신체검사 때 정도일까. 오늘도 겉으로 보기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쪽 발목에 하얀 붕대를 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붕대 위에는 친구들이 한 낙서가 가득해서 보기만 해도 떠들썩하다. 인대가 좀 놀랐대. 얼마간 조심하라고 하더라구.

체육 시간이라고 했다. 견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번 학기는 수영 수업이라. 교실에 혼자 있는 것도 좀 그러니까 보건실에 가 있으라고 해서. 수영, 하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듯이 눈썹을 내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다. 산책하러 가지 못하게 되어 실망한 강아지 같기도 하다.

“적당한 휴식은 중요해. 다 나으면 분명 더 튼튼해질 테니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렴.”

타이르듯 말하니 카인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구석에 있는 침대에 앉았다. 아프지도 않은데 대낮에 침대에 앉으려니 이상해. 하하, 책이라도 읽고 있으렴. 피가로는 상냥한 보건 선생님답게 다정하게 대꾸하며 침대에 둘려있는 커튼을 쳐주었다. 아, 그러고 보면 거기는… 뭐 상관없나.

드르륵.

쾅, 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문이 거칠게 열렸다. 끼익, 하고 미닫이의 반대쪽에 부딪힌 문이 비명을 지른다. 들어온 것은 검은 교복과 대비되어 창백하게까지 보이는 은발의 아이였다. 그 투명하고 흰 피부는 어쩌면 뒷면이 비칠 것 같다. 동그란 머리통에 대강 걸쳐진 검은 모자는 좀 새침하게도 애교 있게도 보인다. 본인이 들으면 질색하겠지만.

“오웬.”

피가로가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는지 아닌지, 보건실로 들어온 인물은 대답이 없었다. 피가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무 빠져서 출석시수를 못 맞추면 쌍둥이 선생님께 내가 꾸지람을 들어.”

“알 바 아니잖아.”

그래, 그렇기는 하지만. 훌쩍훌쩍. 나쁜 아이를 봐서 피가로 선생님은 슬퍼. 전혀 슬프지도 속상해 보이지도 않는 얼굴로 우는 척을 하는 피가로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오웬은 똑바로 구석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쳐져 있는 커튼을 망설임 없이 휙 걷었다.

“우와!”

“…뭐야, 이거?”

갑자기 커튼이 걷히고,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함께한 낯선 사람의 등장에 얌전히 숨죽인 채 침대에 앉아 있던 카인은 깜짝 놀랐다. 첫 번째론 그 싸늘한 표정에, 두 번째론 그 표정을 아주 최근에 본 적이 있다는 것에.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에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얼마 전에 마주친 그 사람이다. 자신이 지금 보건실에 하릴없이 앉아있게 된 이유기도 하다. 혹시나 또다시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어 응전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온도가 낮은 시선은 자신을 비껴갔다.

“피가로. 얘 치워.”

“훌쩍훌쩍. 선생님은 그런 거 안 해.”

온도가 또 낮아졌다. 우리 학교 보건실 좀 냉방이 심한 거 아니야? 카인은 어쩐지 추워진 기분에 덮고 있던 이불을 꽉 쥐었다. 오웬은 잠시 피가로를 노려보다가 다시 카인 쪽으로 다가왔다. 찌릿찌릿한 공기 속에서도 인형같이 단정한 새하얀 얼굴은 어딘가에 장식할 목적으로 만든 것마냥 그저 아름다워서, 그 얼굴이 이쪽을 향한 순간 카인은 숨을 삼켰다. 그 상아한 얼굴 아래 어떤 면이 숨어있는지 이미 봤는데도.

“비켜.”

“아니, 카인. 그냥 있어.”

“죽을래?”

그건 어느 쪽을 대상으로 한 건지 목적어가 불분명한 말이었지만, 어느 쪽에게 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에게 한 말일지도 모르지. 카인이 당황해서 몸을 움직이려고 한 순간 피가로가 말을 꺼냈다.

“오웬, 보건실에서 또 사건을 일으키면 쌍둥이 선생님께 말할 거야. 용돈을 전부 깎여도 좋아?”

“……”

그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카인조차 알 수 있었다. 그건 경고였다. 오웬은 잠시 피가로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거칠게 커튼을 다시 닫았다. 갑자기 다시 눈앞에서 커튼이 닫힌 카인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르륵, 탁. 부스럭부스럭.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순 없는 거친 시트와 삐그덕거리는 철제 침대의 소리가 났다. 아마도 옆 침대에 누운 모양이다.

“그래그래. 잘 생각했어. 선생님은 이제부터 출장이니까 사이좋게 있어.”

대답은 없었지만 피가로 역시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드르륵, 탁. 잠시 후 누군가가 보건실을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보건실의 공기는 언제나 조금 차갑고 낯설다. 다치거나 아플 때만 찾게 되는 장소. 전혀 모르는 사람과 함께 누워있게 되는 공간. 카인은 일단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전혀 아프지도 졸리지도 않았다. 책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옆자리에 누운 사람의 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옆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들어온 것을 못 보았다면 분명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굳게 가로막혀 흔들리지도 않는 두꺼운 커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카인은 저도 모르게 작게 속삭였다.

“오웬.”

동글동글한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입이 동그랗게 모였다가 천천히 옆으로 살짝 벌어진다. 공기가 둥그렇게 입안에서 빠져나가는 느낌. 본인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이름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늘 어쩐지 삐쭉삐쭉 정전기가 나 있는 듯한, 장미 가시 같은 사람이면서.

“…하아?”

반 박자쯤 늦게 황당한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카인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 나긋하고 보드라운 목소리에서는 대체로 감정을 읽기 어렵다.

“오웬이라고 하는구나.”

“뭐?”

아, 이번에는 정말로 황당해하고 있다. 카인은 괜스레 웃음이 나서 쿡쿡 웃었다.

“나, 기억해?”

“하? 기억 안 나.”

너무하네, 그렇게 맞아본 건 처음이었는데. 그날 카인은 거의 일방적으로 맞았다. 체격이나 단순한 완력으로 따지자면 아마도 카인 쪽이 우위였을 것이다. 다만, 카인에게는 오웬을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그가 보기에 오웬은 너무 가녀려 보였다. 잘못 때리면 다칠 것 같잖아. 물론 때리면 사람은 다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서 카인의 행동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되었고, 당연히 전혀 주저하지 않고 공격해 오는 오웬을 당해낼 길이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카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그렇게까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카인은 그날 처음 알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타박상이 몇 군데 남았고, 공격을 피하느라 접질린 발목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가벼운 염좌 진단을 받은 정도다.

그래서 카인에게 그날의 기억은 아픔이나 고통보다는 의아함으로 남았다. 그는 카인이 처음 만난 불가해였다. 아무렇지 않게 남을 상처입히는 사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온몸이 뻐근하게 쑤실 때마다, 다친 발목이 시큰할 때마다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기억 안 나? 나는 기억하는데. 내 친구 중 하나가 말야, 오웬이랑 붙은 사람은 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더라구. 나는 멀쩡하잖아? 그래서 내가 만난 사람은 누굴까,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피가로가 오웬, 하고 이름을 불러서…

"너, 그날 덜 맞았어?"

"역시 기억하는구나?"

"…몰라. 조잘조잘 떠들지 마. 시끄러워."

기억을 잃을 정도로는 패둘 걸 그랬어. 짜증이 섞인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은 것과는 또 다른 색을 띠고 있어서. 그 음색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콩, 콩, 하고 안쪽을 두드렸다. 그것은 먼 옛날 생전 처음 롤러코스터를 탔던 때 같기도 했고, 용돈을 모아 산 기타를 쳐서 첫 소리를 냈을 때 같기도 했다.

"나는 왜 행방불명이 안 된 거야?"

"입 다물어. 피가로만 아니었으면 너 이미 죽었어."

피가로 몰래 처리하는 방법도 없지는 않으니 확인하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 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히 만지면 보드라울 것 같았지만 그 내용은 과연 그렇게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카인은 그와 더 이야기해 보고 싶었지만 그를 화나게 하려는 건 아니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합. 입을 닫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합판으로 구성된 하얀 천장은 보건실에 자주 오지 않는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공기 중의 먼지가 커튼 틈새로 가늘게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그 나른한 공기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카인은 눈을 잘게 떴다. 찬연히 부서지는 반짝임은 올려다보았던 그 머리카락에 반사되던 빛과도 닮았다.

"눈…"

어느 순간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서, 카인은 덜컹 움직일 뻔한 것을 겨우 멈췄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내면, 그 목소리는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눈이 언젠가 본 꽃이랑 닮아서.

뽑을까 했지만 관뒀어. 둘 곳도 없고."

마트에서 장식품을 사려다 관뒀다는 식의 말투로 말하기에는 험악한 내용이었지만 그 어미는 졸음에 삼켜져 있어서. 이내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마치 작은 새의 노랫소리 같아서.

정말 이상하게도 카인은 그것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체육 시간은 일주일에 세 번. 카인은 그때마다 보건실을 찾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은빛 머리카락과 검은 교복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은 어딘가 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걸 알고 있어도, 눈이 저절로 누군가를 찾아 허공을 배회하거나, 커튼이 쳐져 있는 침대만 보아도 가슴이 들뜨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피가로한테 나중에 들었다. 그때 자신이 누운 자리는 오웬의 지정석 같은 거라고. 아픈 곳도 없으면서 툭하면 자리를 점유하고 있어서 정말 곤란해, 피가로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은 그 자리에 먼저 누워있던 학생을 문답 무용으로 패대기쳤던 모양이다. 아무리 피가로 선생님이라도 그건 화냈지, 하고 피가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가벼운 어조로는 그게 어디까지, 어느 정도로 진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카인은 얌전히 오웬의 지정석 옆 침대를 사용하기로 했다. 잘 설명할 길은 없지만 자신은 어쩐지 그를 조금 더 알고 싶었으므로.

수영을 할 수 없는, 보건실에서 꼼짝없이 침대에 앉아 있어야 하는 체육 시간 따위 길고 지루할 뿐이고, 보통 때 같으면 조금도 기대되는 시간이 아니었을 터인데, 카인은 깜짝 상자를 열어보는 것과 비슷한 설렘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깜짝 상자는 물론 그 이름대로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없어서, 그 결과가 늘 기쁜 것은 아니었다. 텅 비어있거나-혹은 그다지 바라지 않는 것이 들어있거나. 피가로만 있는 보건실은 놀랄 정도로 조용해서, 그 고요한 시공간에 카인은 가끔 아득해졌다. 피가로만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는지 그렇게 대놓고 실망하면 선생님 상처받는데, 하고 부러 과하게 눈썹을 내리는 피가로의 말을 듣고 황급히 그렇지 않다고 얼버무린 적도 있다.

‘앗’

그날은 당첨이었다. 쳐져 있는 커튼이 그렇게 기쁠 일이 있을까?

반가운 사람을 본 강아지처럼, 꼬리가 있다면 잔뜩 흔들리고 있었을 거다. 커튼이 쳐진 침대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카인을 보고 서류를 정리하던 피가로가 풋, 하고 웃었다. 카인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걸음을 늦췄다. 다행히 그 옆자리는 비어있다.

“선생님 간다~”

수업이 있어서, 하고 경쾌하게 피가로가 자리를 뜨자, 보건실은 다시금 적막에 휩싸였다. 카인과 커튼이 쳐져 있는 그 옆 자리말고는 아무도 없다. 커튼이 쳐져 있는 자리는 미동도 없이 조용했다. 카인은 꿀꺽, 침을 삼키며 끝부터 끝까지, 자신의 옆자리를 살폈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도 그랬지, 누가 있다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아무 기척이 없었어.

오웬.”

작게 부른 이름은, 오랜만에 입 밖으로 나간 그 소리는 어쩐지 지난번보다도 더 동글동글한 느낌이 들어서. 카인은 꼭 비눗방울을 후우 예쁘게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되었다 기분이 되었다. 동그란 이름이 소리가 되어 공기 중으로 퍼진다. 머릿속으로 되뇌기만 하던 단어가 형태를 가지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건 여태까지 카인이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언제나 부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은 가볍게 부르고, 하고 싶은 말을 참아본 적 따위 많지 않은데.

하지만 여전히 옆자리는 고요하다. 기다리던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머리 한구석으로 떠올리며 카인은 다시 그동안 여러 번 곱씹기만 하던 이름을 입 밖으로 냈다.

“오웬, 오웬.”

“시끄러워.”

또 너야? 이제 조금 익숙해진 목소리가 찌릿찌릿 공기를 찌른다. 짜증을 숨기지도 않는 목소리는 어쩐지 나긋나긋하지만 그 의중을 알 수 없던 그것보다 재미있게도 조금 더 살갑게 느껴진다. 카인은 웃으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있었구나, 기쁘다.

카인이 말하면 오웬이 듣는다. (사실 커튼이 쳐져 있어서 정말로 듣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인은 그가 듣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끔은 대답 비슷한 것을 한다. 가끔은 정말 짜증을 낸다. 그럼 카인은 머쓱하게 입을 다물고, 잠시 고요한 침묵이 보건실을 메우곤 했다. 그러나 그런 침묵을 견디지 못한 카인이 또 슬쩍 말을 걸면, 오웬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러면 다시 별것도 아닌 대화가 맥락 없이 이어졌다. 카인은 그것이 왠지 기뻤다.

“근데 왜 반말인데?”

문득 툭, 하고 뱉어진 말에 카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응? 오웬, 3학년이잖아. 나도 3학년.”

이쪽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남들이 보고 있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는 인기인의 몸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곧바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 내가 몇 살일 줄 알고.”

“몇 살인데?”

……

가끔 그런 식으로 대화가 끊긴다. 그런 사소하고 평범한 질문, 누군가를 화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누군가가 화를 낼 거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질문들. 거기에 대답하지 않거나, 때로는 알 수 없이 화를 내는 오웬을, 카인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 조그맣고 동그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이상하게 싫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생일은 언제야?”

“……11월.”

“난 8월. 그럼 내가 연상 아니야?”

“웃기지 마.”

“그래도 존댓말 하라곤 안 할 테니까.”

“무슨 헛소리야. 애초에 앞으로 너랑 말할 일 따위…”

“그치만 지금도 이렇게 대화하고 있잖아.”

“안 하고 있어. 기사님이 멋대로 떠들 뿐이지.”

시큰둥하게 대꾸하는 목소리는 가냘프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와 닮았다. 카인은 어느 쪽이냐 하면 기타 쪽을 더 좋아하지만, 피아노도 좋아. 어린 시절 음악에 관심을 보이던 자신을 부모님이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신 적이 있었다. 집에는 쉽게 두기 어려운 커다란 악기. 무겁게 울리던 낮은음과는 정반대로 높고 가녀리게 울리는 높은음을, 건반에 처음 손가락을 대어 울렸을 때를 기억한다. 그런 커다란 악기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린 소리는 마치 작은 새의 지저귐 같기도, 차가운 공기를 울리던 겨울의 종소리 같기도 했다. 그런 소리를 내는 안쪽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서 몰래 피아노의 위쪽 덮개를 열어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그 고운 소리를 내는 물체 안에 요정의 물레나 빛의 덩어리라도 있길 기대했던 걸까? 묵직한 검은 나무 덮개를 열자 그 안에는 물론 반짝임 같은 건 없고, 카인에게는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없는 가느다란 현들과 빼곡한 나무 장치가 가득히 들어있었다. 기타를 만났기에 피아노는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둬버렸지만, 어쩐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던, 그 기억만은 언제나 생생하다.

그리고 나중에 노래의 반주를 만들며 전자 피아노를 만지게 되다 보니, 실제 피아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새삼 깨달았더랬지. 정체를 알 수 없던 아름다운 소리. 커튼 곁에서는 그런 소리가 났다.

“음… 그래도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부스럭, 오웬이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 보건실의 싸구려 시트는 조금만 움직여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크게 난다. 카인은 이마를 긁적이며 입을 닫았다. 몇 번 겪어본 바로 저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신호다. 카인도 괜히 이불을 풀썩이며 정돈했다. 다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기사님이야?”

어느 순간부터 오웬은 자기에게 기사님이란 호칭을 섞어 썼다. 기사? 카인은 곰곰이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카인이 막연히 생각하는 기사의 이미지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검을 휘두르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일을 해본 적 없는 자신과는 연결 짓기 어렵다. 그냥 심술로 부른다기에는 애매한 호칭이고, 애초에 그렇게 나쁘게 들리지도 않았다. 오웬의 입에서 나오는 그 단어는 어쩐지 조금 그리운 듯한 안타까운 듯한, 부드러운 감촉으로 와 닿았기에.

“……”

“왜? 어째서?”

“아 진짜 시끄럽네. 기사님은 어렸을 때 책도 안 읽었어?”

“응?”

“나오잖아. 기사님 같은 게. 시끄럽게 남을 구하겠다 어쩌겠다 하고 나서는 바보가.”

카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까지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잠시 돌이켜보면 처음 이 녀석을 만난 것도 후배를 도우려다 그렇게 된 거긴 하지. 아니, 그렇지만, 그 정도는 딱히 도움도 뭣도 아니잖아. 누구나 그렇게 하잖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왜 웃어?”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그런 놀이를 했던 것 같아서. 나뭇가지를 검 대신 들고, 이렇게! 휘두르면서.”

“…바보 아냐?”

“뭔가 좋네. 그런 거.”

“하나도 안 좋아.”

결국 카인은 그냥 크게 웃어버렸다.

그렇게 카인은 오웬과 있는 시간을 깜짝 상자에서 꺼내 차곡차곡 쌓게 되었다. 그리고 제법 많은 것을 알았다. 피가로가 있을 땐 아무리 말을 걸어도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는 거. 언제나 반사적으로 심술궂은 말을 하지만 조금이라도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을 땐 그다지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는 거. 정말 짜증이 나면 입을 다물어버린다는 거.

그런 것이 그저 실없이 즐거웠다.

(계속)

#3, 4 →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