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

[성우] I Need You

CHERRY by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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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규 1집 앨범 I Need You

윰뀨님 봄나무님과 함께 한 2021년 10월 합작

캠퍼스 AU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우현은 기지개를 켰다.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던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카페에 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은 어느새 두세 테이블에만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본 노트북 화면 속 시간은 어느덧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도 이제 슬슬 가야겠다. 내일은 아침부터 알바도 가야 하고. 내일 일정을 차근차근 되새겨보며 짐을 하나씩 챙겼다. 노트북, 전공 책, 필기구 등 다 담고 나니 무언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우현이 핸드폰을 들었다. 밝게 빛나는 화면에는 아무 알람도 떠 있지 않았다. 으음. 비어있는 화면을 톡톡 건드려보았다. 상태바를 내려도 보고 올려도 봤지만, 여전히 새로운 알람은 생기지 않았다.

 

많이 바쁜 걸까.

 

마음속에 조금씩 피어나는 서운함에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가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가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고 핸드폰 화면만 노려보기 시작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와 그 옆에 붙어있는 1. 마지막으로 보낸 시간이 과제를 시작하기 전이었으니 족히 몇 시간은 지난 상태였다. 오늘 별일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별 의미 없이 허공을 휘젓던 손가락이 화면에 닿아 움직였다. 하지만 열심히 움직이던 손가락도 전송, 위에서는 내려오지 못했다.

갑자기 바빠질 수도 있는 거고, 내가 신경을 쓸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건데.

아까까지 열심히 쓰던 메시지를 남김없이 전부 지웠다. 역시 안 보내는 게 좋겠네. 괜히 이상하게 볼 수도 있는 거고. 신경 쓰이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이런 짓을. 핸드폰을 감싸 쥔 채 이마에 갖다 대었다. 서늘한 핸드폰 탓에 속도 시려오는 것 같았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10시에 마감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나갈게요.”

우현은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주춤하는 카페 직원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주며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만 남아있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다들 가버렸나.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직원을 뒤로 한 채 우현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10월은 10월인가. 날이 많이 쌀쌀해진 것도 있지만 길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항상 술에 취한 채 몰려다니는 무리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는데 확실히 시험 기간이라 자중이라도 하는 걸까.

그렇다면 김성규도 시험 기간이라고 바쁜 걸까.

또 닿아버렸다. 어느샌가 김성규를 떠올려버렸다. 스스로를 질책하며 우현은 애써 생각을 떨쳐버렸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손끝에 닿는 핸드폰에 집중되어 있었다. 혹시 그사이에 알람이 하나쯤은 새롭게 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쓸모없는, 해서는 안 되는 기대가 생겨버렸다. 그럼에도 손에는 이미 핸드폰이 들어찼다. 항상 머리보다 몸이 빨랐다. 이왕 잡은 거 시간이라도 확인하는 거라고 누구도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며 켠 화면에는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뭘 기대했어.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으면서 상처를 받는 건 우스운 거야. ……메시지 하나 남길 수 없을 만큼 바빴던 거겠지.

다독임 반 질책 반으로 생각하며 우현은 힘없이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이제 화면이 환하게 켜질 때까지,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적어도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절대 의식하지 않을 거야.

 

5분은 지났으려나. 혼자 조용한 거리에 남겨지니 쓸데없는 생각들이 깊은 곳에서부터 기어 올라왔다. 평소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던 취객들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생각을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해도. 우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그냥 눈 딱 감고 메시지 보내. 어차피 그쪽은 네가 뭐하든 신경도 안 쓴다며. 문득 주워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 썼던 말들이 꼭 이렇게 합리화가 필요할 때는 본인한테 유리해 보이는 온갖 말들이 다 떠오른다.

너무 자주 보내는 거 아니야? 아직 답장도 안 왔잖아.

뭐 어때. 보내고 싶으면 보내는 거잖아.

싫어하면 어떡해.

글쎄. 근데 그 상대가 싫은 게 아니면 안 싫어할걸?

그런가…….

이제는 전에 김성규와 짧게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이 정도면 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김성규는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 그만 고민하자.

우현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우현은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메시지 화면을 켰다. 화면 속에는 여전히 1이 남아있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날 싫어하지 않을 거야. 계속 머릿속에 맴돌던 말을 빠르게 적어가는 손가락은 거침없이 전송까지 눌렀다.

 

「뭐가 그렇게 바쁘길래 아직도 안 읽어?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많이 바빠?

안 바쁘면 연락해.」

 

우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못 읽겠으니 눈을 감은 채 핸드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하아……. 핸드폰이 손에서 떨어지자 깊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떴다.

드디어 보냈다.

어쩌다 이런 간단한 메시지조차 남기기 힘들게 되었을까. 눈치를 보게 되었을까. 하나하나 재가면서 메시지를 보내야만 하는 걸까. 한숨을 폭 쉬었다. 정작 당사자는 별생각이 없는 듯하지만, 우현은 매우 신경이 쓰였다. 이건 너무… 너무……. 됐다. 혼자 가만히 서서 시간을 너무 끈 듯했다. 밤공기는 무척이나 쌀쌀했고, 머뭇거리던 몸은 점점 굳어갔다.

아. 마지막 말은 보내지 말걸. 이거 보면 연락해, 라고 보낼걸.

하나를 만족시키면 또 다른 아쉬움이 뒤따랐다. 우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그러다가 제 하나뿐인……. 그런 그가 멀리 도망을 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얼마 만이더라. 이렇게 조용히 걷는 게. 항상 시끌벅적했는데. 아니면 적어도 옆에서 같이 가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딱히 대화를 나누던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조용하게 가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딱 한 사람이 없어졌다고 이렇게까지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조용하게 느껴질 만한 건가. 이렇게 허전하게 느껴지나. 정말 알게 모르게 많이 스며들어 있었네. 너무 의존하는 걸까. 내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면, 김성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피하는 것일 수도.

아. 우현은 황급히 하던 생각을 모두 지워버렸다. 저도 모르게 또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 들어갔다. 왜 나는 항상 끝이 이러지. 또 필요 없는 자책을 하려다 그만뒀다. 진짜, 진짜 그만해야지, 김성규 생각.

 

오늘은 답장 기다리지 않고 일찍 자야지. 일찍 자야 내일 알바 할 때 안 힘들지. 그리고…….

 

“남우현.”

그리고…….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무시하냐.”

우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너무 기다렸던 목소리라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멈춰 섰다.

 

“야.”

 

줄곧 밑을 향하고 있던 시선에 운동화가 빼꼼 나타났다. 우현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몰라? 노래 듣고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아……. 미안. 잘못 들은 줄 알았어.”
“뭐?”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는 얼굴을 보며 우현은 실감했다. 생각만 하고 있던 김성규가 진짜로 눈앞에 나타났다. 귀신이 부르는 거라고 착각이라도 한 거야? 확실히 이런 분위기면 그럴 만도 하네. 오늘따라 사람도 없고. 성규는 주위를 힐끗 둘러보다 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은 여전히 조금 멍해보였다. 아직도 겁먹은 거야? 이런 거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는데. 그건 아닌데…….

 

“그래도 이제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내가 있잖아.”

“어…….”

우현은 성규가 이상한 오해를 해 놀리기 전에 화제를 돌리려 입을 떼려고 했으나 곧 이어져 들려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또 그런 말을. 하지만 지금이 어두워서, 어두스름한 가로등 불빛으로 조금이나마 제 얼굴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애 맞지.”

성규는 웃으며 우현의 옆에 나란히 섰다.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평소처럼 둘이 되었다. 딱 한 사람 늘어났을 뿐인데 아까처럼 허전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흔한 대화 소리가 없어도 충분하게 느껴졌다.

 

 

“근데.”
“응?”
“오늘 바빴어?”
“아아.”

우현은 숨을 죽인 채 성규의 답을 기다렸다. 뭐라고 대답을 할까. 평소 성격을 보면 제대로 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조금 그랬지. 과제 때문에.”
“아…….”
“기다렸어?”

 

우현이 성규를 바라보았다. 성규는 이미 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내 연락. 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낯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차라리 아까처럼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었다면 나도 가볍게 웃으며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속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겉보기에는 그저 친구끼리의 장난 정도로 보일 수 있을 텐데.

 

“됐다. 기대도 안 했어. 여전하네.”
“…….”

숨 막힌 침묵 끝에 먼저 백기를 든 쪽은 김성규였다. 성규는 툴툴대며 정면을 바라봤다. 조금은 서운한 걸까. 우현은 성규의 옆모습에서 서운함 한 조각을 찾아보았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티끌만큼은 있는 것 같았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거 아냐. 기다렸어.”

“응?”
“내가 톡도… 더 보냈는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규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둠이 제 색을 가려준다고 해도 표정까지는 가려주지 못한다.

 

“진짜네.”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확인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낯부끄러운 건 그대로였다.

 

“별 이유 있었던 건 아니야. 그냥. 그냥.”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말이 자꾸 헛나왔다. 성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제 말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맨날 연락하던 애가 연락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입 밖으로 뱉어진 말은 너무나 볼품없었다. 부끄러워. 얼른 집에 가고 싶어. 아직까지 멈춰 서있는 성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했다.

 

“안 갈 거야?”

“남우현.”
“…….”

기대한 답과 돌아온 답이 너무 달랐다. 우현은 잠시 고민했다. 돌아볼까, 말까.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우현은 절대 저항할 수가 없었다.

 

“왜.”

무뚝뚝하게 뱉어진 말치고는 목소리가 떨렸다. 둘만 남아있는 거리는 정말 조용해서 단번에 티가 났다. 나 지금 정말 바보 같겠다. 차마 내색할 수 없어 속으로만 답답함에 방방 뛰었다.

 

“안 갈 거야? 나 추워. 왜 이름만 부르는데.”
“이거 무슨 마음으로 한 거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줄곧 다른 곳에 자꾸만 닿았던 시선이 김성규에게 가서 멈췄다.

 

“무슨 마음이라니?”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숨길 여유가 사라져버렸다. 예상치 못한 대답은 우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런 질문 같은 건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인데. 왜 그런 거냐고. 원래 안 그랬잖아.”
“그거야…….”

우현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친구니까 보냈지. 그게 뭐 이상해? 이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이미 당황한 입술은 딱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까지 당황할 일이야?”
“…….”

눈도 못 마주치고 흔들리는 시선, 떨리는 목소리. 지금 제 모습은 보나 마나 누가 봐도 당황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성규는? 이런 내 모습에 똑같이 당황한 표정일까. 아니면 또 예상치 못한 그런 표정일까. 하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상황을 피하는 것이었다. 우현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운을 뗐다.

 

“그러면 안 돼?”
“뭐?”
“너는 나한테 자주 그러잖아. 그래서 나도 한 번 그래 본 거야.”

전에 그랬잖아. 그 사람이 싫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당차게 시작했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잠깐의 침묵. 숨이 막혔다. 무슨 표정인지도 모르니 더 막혀 들어갔다. 그렇다고 그의 표정을 확인할 자신도 없었다.

 

“그랬지.”

제법 깔끔한 목소리에 우현은 저도 모르게 성규를 바라보았다. 성규는 줄곧 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당황하지도 않았고 실망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봐줬네.”
“…….”

 

다시 표정이 흐트러졌다. 김성규는 제가 제대로 봐주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굴었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기 힘들어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아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는데, 적어도 김성규에게 놀리는 거라면 그만두라고 화내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김성규는 평소의 그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이제 숨 막히게 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텐데도.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가자. 춥다며. 너무 오래 서 있었어.”

성규가 먼저 걸었고, 우현은 그 뒤를 따랐다. 그 등을 바라보자니 복잡한 감정이 치솟았다.

 

하루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하는 때가 있었다. 내 세상에서 빛이 사라져 무엇도 보이지 않을 때, 연이은 실패와 좌절이 뒤섞여있는 그 어둠 속에서 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무력하게 이 모든 상황을 살아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력함의 대가를 고스란히 책임지는 것이었다. 힘없이 휩쓸려가며 살아가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외로움이라든가 쓸쓸함이라든가 그런 감정들은 사치였다. 이 막막함 속에서도 살아가야만 했다. 모든 걸 던지고 도피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 정도로 용기가 있지 않았다. 부모도 형제도 제 옆에 없는 와중에 친구라고 남아있을 리 없었으니, 그렇게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살아졌다. 비록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과분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적어도 멈춰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게 충족되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홀로 서 있었다. 상황이 나아질수록 잊고 있었던 감정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외로움. 쓸쓸함.

사치라고 여기며 외면해왔던 그 감정들이 제게 들러붙었다. 오히려 모든 게 없었을 때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느끼지 않아도 괜찮았었던 그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먼저 다가갈 자신은 없었다. 오래전 사람들을 좋아하며 치대던 제 모습은 벌써 까마득했다. 이제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억지로 눌러 담으며 생활을 이어갔다. 난 괜찮다, 고 주문을 걸며. 그리고 항상 예기치 못할 때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내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거였다면, 두 번째는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해주었다. 어두컴컴한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그런 곳에서 온전한 어둠이 아닌 잿빛으로나마 세상을 볼 수 있게끔 비춰주었다.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무채색의 사람들은 절 무심하게 지나쳐갔지만, 단 한 명만은 날 바라봐주었고, 내게 다가와 주었다. “남우현.”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빛은.

 

 

“김성규.”
“응?”

앞서 걸어가던 성규가 돌아봤다. 여전한 표정이었다. 난 이렇게 뒤흔들어놓고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 저 모습. 울컥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분명 제게 말을 걸어준 것도, 손을 내밀어준 것도 단지 성격 때문에. 손을 내밀 때도, 대화를 건네줄 때도, 제 이름을 불러줄 때도 김성규는 한결같았다. 무덤덤한 저 표정. 그게 편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지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속을 뒤집어놨다.

 

그동안 잃을 것도 없으니 뭘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왔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는 유일한 예외였다. 자칫하다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이건 맞지 않았다. 저도 한 번쯤은 저 속을 뒤집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이 행동으로 빛을 잃게 된다고 해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만약 내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그랬다면.”
“…….”

 

그리고 사실은 김성규라면 한 번은, 한 번쯤은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날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제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니까. 그의 성정에 기대보는 것이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현은 모든 걸 쥐어짜내 목소리를 냈다.


“그랬다면 어떻게 반응할 거야? 사실은 내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그래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 거라면?”
“그야…….”

달콤한 말을 하는 것치고 우현의 눈동자 속에서 빛내고 있는 건 오기였다. 성규는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항상 생각하지만, 알기 쉬운 표정이었다.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공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듯이 굴면서도 그는 종종 외로움을 분출하곤 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때 조금만 잘해줘도 우현은 금세 보이지 않는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우현은 이런 나를 친절하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현은 외로움 속에 먼저 손을 내밀어준 나를 은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런 성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남우현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유는 단지 사심 때문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텅 빈 인형 같았다. 이따금 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진심 같지 않을뿐더러 정말 한순간에 그 웃음을 싹 지워버렸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찰나에 빠져버렸다. 왜 저런 웃음을 지을까 하면서도 그 웃음을 다시 보고 싶었고, 더 나아가 진심을 담은 웃음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버렸다.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늘 혼자 있는 그의 표정은 조금만 관심 있게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투명했다. 그래서 다가갔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먼저 웃어주었다. 왜 제게 그랬냐는 물음에 원래 성격이 그렇다고밖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말해주고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고.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실은 네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고, 환하게 웃는 낯을 마주 보며 말해주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제가 먼저 그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어 다행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우현이 지금 제게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에게 마음을 다 쏟아줄 게 분명했다. 언뜻 보이는 우현의 성정을 생각하면 뒤늦게 다가가더라도 애정을 안 주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날 봐주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지 않았다. 모든 상황은 제게 유리했지만, 제가 조금만 다가가도 우현은 피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가갈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우정 같은 게 아니었다. 친구로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감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현이 제게 느끼는 감정은 저와 같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의문에는 확신이 없었다. 우현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만하다가도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제게는 자만할 자격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우현에게 있어서 절 고마움과 뗄 수 없다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고마움으로 인한 호감이 저에 대한 감정의 전부인지, 아니면 그 속에 다른 감정도 숨어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확신 없이 그에게 다가가면 단순히 제가 다가가면 그게 그저 날 저버릴 수 없어서 받아준 걸까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서로의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는, 대신 의구심이 채우고 있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래서 김성규 역시 눌러 담은 것이 많았다.

 

 

“나도, 라고 했겠지.”

“응?”

 

우현의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담겨있었다. 성규도 알고 있다. 지금 제 대답이 이상하다는 것을. 사실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아니, 네가 무슨 마음인지 몰라도, 아마 비슷할 거라고 하고 싶었다. 연락 없는 상대를 기다리고, 성미에 맞지도 않은 메시지를 여러 번 보내고, 무슨 일이 있었나 확인도 하는 그런 행동들이 어딘가 저와 닮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차올랐다. 하지만 우현의 생각이 제 생각과 다르다면? 그 생각이 불쑥 치고 들어오자 섣불리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늘 이런 식이다. 충동적으로 질러놓고 막상 우현이 이상하게 여길까, 제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가버릴까, 겁먹고 교묘히 말을 바꾸었다. 아니면 적어도 빠져나갈 수를 만들어놓았다.

언제부터 제가 이렇게 겁이 많아졌을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우현과 처음 만났을 때도 다가갔을 때도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그 가벼운 마음이 우현과 함께 하는 추억이 담기면서 무거워졌다.

자각을 못 하는 사이 우현과의 순간순간이 소중해졌다. 소중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20여 년간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사랑, 이라는 건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곳에서나 느낄 줄 알았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남의 머릿속에서 나온 가상 인물들을 통해서. 소중하기 때문에 무엇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히려 말을 마음을 아끼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감정들은 어쩔 수 없다며 흘려보냈지만, 눌러 담을 수 있는 건 다 눌러 담았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제 마음은 이미 준비가 되었지만, 우현이 아직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다. 다소 자기합리화가 담긴 말들을 되뇌며 여즉 의아한 낯인 우현을 마주했다.

우현의 눈동자에 비친 성규는 여느 때처럼 입꼬리만 올려 웃는 낯이었다.

 

“그게 뭐야.”
“말 그대로인데?”
“또 그러지. 웃지만 말고 제대로 좀 말해봐.”

 

우현이 투덜거렸다. 아까보다 한결 편한 태도였다. 성규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고,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평소의 까칠하다면 까칠한 우현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우현은 몇 번 더 성규에게 답할 것을 종용하더니 금세 포기한 것인지 잠잠해졌다. 애초에 크게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긴 했다. 이따금 불만을 표하는 낯으로 성규를 바라보긴 했으나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안 해주겠지, 하는 생각인 듯했다. 그런 생각을 성규도 알고 있었다.

 

 

“김성규.”

갈림길이 나오자 우현이 불렀다. 우현을 바라봤지만, 정작 우현은 제가 가야 할 길을 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길, 같은 사람과 걸어왔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여느 때처럼 성규의 장난으로 시작됐다고 생각했는데 말없이 걸으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특히 김성규가 이상했다. 장난을 장난으로 끝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저 역시도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지만 정작 당사자가 저러니 더욱 심란해졌다. 종종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절 앞에 두고 깊이 생각에 빠질 때가 있긴 했다. 항상 그러려니 하고 일상처럼 넘겼는데 오늘은 유독 눈에 띄었다. 오늘처럼 놀리고 난 후에 이런 모습을 특히 자주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다고 예민하게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랬다.

솔직히 아직은 정확히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김성규를 보면서 홀로 생각해보니 그동안은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끝내는 과연 내가 김성규를 고마운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흐릿해졌다. 김성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확고했던 생각이 평소 장난과도 같은 말에 흔들렸다. 마음속 한구석에서 이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저 고마운 친구라고 하루 종일 연락하고, 연락을 기다리고, 상대의 반응에 예민해지고 그랬나. 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제가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김성규는 왜 저러는지. 지금까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생각해봤는데.”
“응.”

“역시 오늘은 들어야겠어. 무슨 뜻인지.”

그래도 이제는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알고 싶었다. 무슨 생각인지, 또 내가 무슨 생각인지도 똑바로 마주하고 싶었다.

 

눈빛이 단호했다. 성규는 말문이 막혔다. 이런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항상 적당히 질문을 건네다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왔었는데, 이렇게 단호한 모습은 보여준 적이 없었다.

 

“정말 별 뜻 아니야.”

“거짓말.”

 

우현은 답을 들을 때까지 가지 않을 생각처럼 보였다. 그런 우현을 두고 뒤돌아 가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곤란한 표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정말 오기였을 뿐일까.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먼저 시작해놓고, 정작 우현이 다른 반응을 보여주니 도망쳤다. 그래놓고 들어버린 생각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이상했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을 추궁하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우현은 항상 더 물어본 적이 없었다. 늘 성규가 말하는 정도로만 끝내왔었다. 모순적이게도 제 마음을 숨기고 싶어 하면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늘 가지고 있었다. 두 생각은 늘 충돌해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여왔다. 남들이 본다면 제 모습이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현이라서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것이지.

 

“이것 봐.”

“…….”

“나도 이런 거 적응 안 되는데, 그래도.”

“…….”

“알고 싶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겁먹은 상황에서 이제 저도 조금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여전히 우현이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제 마음 하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항상 두려워서 도망친 건 나였다. 당연한 것을 두렵다는 이유로 보지 않았다.

준비가 안 되었다며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도망가고, 외면했던 것은 되려 나였다. 정작 우현이 모든 걸 내려놓고 다가왔을 때도 지레 겁먹고 도망쳤다.

 

우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이제 결단을 내야 했다. 여전히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우현도 가까이 온 상황에서 물러날 생각은 더는 없었다.

 

 

“나도 사심 담아서 물어본 거야.”

 

우리가 달라졌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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