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굴러온 돌? 2

* (https://glph.to/up05mw) 이것과 이어집니다.

* 여러가지 날조 및 적폐 주의.

* 스포일러 주의.

그로부터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일주일 내내 키시스와 자신은 바쁘게도 돌아다녔다. 원래대로라면 갑작스레 나타난 타이탄에게 많은 정보를 줄 수 없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예현과 수뇌부들은 그가 자신들의 편에 설 것이며, 우리의 전력이 되어줄 것이라는 그의 말과 그것을 지지하는 제 판단을 믿어주었다, 고맙게도. 키시스는 코어 내에서 존재하는 많은 풍경들을 묵묵히 시야에 담았다. 어떤 기분일까. 얼핏 짐작만 할 뿐이었다. 잃어버린 세계, 새로운 환경. 자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막막한 기분일까, 아니면……. 계절에 맞는 꽃들이 활짝 핀, 사진 명소로 알려진 공원을 함께 지나다 문득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자안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 자신을 응시했다. 그도 나도 걸음을 멈춘 후였다. 절묘하게 분 바람이 그와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지나갔다. 백금색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긴 그가 비죽 웃었다.

“말해주기 싫은데?”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람이였지, 참. 불퉁한 표정을 짓자 그가 작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금 피어난 꽃들과 평화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머물렀다.

“역시 좋은 곳이네, 뭐 그런 생각.”

“…….”

진짜 말해줄 거라고 생각 못했기에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금 저와 시선을 마주한 그가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표정. 그의 중얼거림에 먼저 걸음을 휙 옮겼다. 뒤에서 그가 다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전의 산책을 마치고 나니 슬슬 약속한 시간이었다. 아까까진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 그의 검에 실컷 두들겨 맞을 생각을 하니, 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키시스와 함께 본부로 향하자 어쩐 일로 모여있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들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건지, 시선이 한 번에 이쪽으로 쏠렸다. 반가움을 표하며 손을 흔들자 그들 사이로 무언가, 눈짓이 오가는 것 같았다. 뭐지, 이 분위기…….

“힐데!”

“예, 예?”

무언가 결연한 표정. 주먹까지 꼬옥 말아쥔 아미가 눈까지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저 사람이랑 대련하기로 했다며. 우리도 보게해줘!”

“…… 예?”

제가 저 사람의 검에 두들겨 맞고 나뒹구는 꼴을 보시겠다고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그건 볼만한 게 아니라며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어깨가 묵직해지는 기분과 함께 이 순간 결코 도움이라곤 되지도 않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좋네. 이 자들에게 한 번쯤 보여줘도 괜찮겠지.”

“뭘요. 제가 키시스 경에게 줘터지는 꼴을요?”

이를 악 문채 씹어뱉자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단 그의 자안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제국민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미소였으나, 자신은 그 아래 깔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으므로 결코 아름답게만은 보일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것을 읽어낸 건지, 리카르도와 윤의 눈매가 슬 가늘어졌다.

“뭐든 보고 듣는 경험이란 건 중요한 법이야, 햇병아리.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지 않아?”

“아니…….”

“그리고 널 기다리던 네 선임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제 반박은 내뱉어지지도 못했다. 이 망할 황자는 여전히 자기 좋을대로 내뱉고선 어깨동무를 풀고 먼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가 버렸다. 황망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선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그들의 고집이 그득 들어찬 얼굴을 보자니, 이들을 설득하는 것도 물 건너 간 모양이었다. 결국 짙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걸음을 옮겨갔다.

마지막 보루(?)로 예현과 수뇌부들을 믿었으나, 그들은 굳이 제 선임들이 보는 걸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우리의 전력이 될 이의 실력을 직접 봐두는 것도 좋겠지.’ 하며 흔쾌히 수긍하기까지 했다. 넓은 공간, 그 한 가운데. 익숙한 검을 쥐어 든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키시스는 자신이 쥔 검을 몇 번 가볍게 휘두르다 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자신에게 검을 겨누며 단박에 공기가 바뀌었기 때문에 향수에 젖을 틈 같은 건 없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그가 먼저 바닥을 콱! 박찼다. 그의 신형이 빠르게 가까워지자 급히 검을 들었다. 챙! 채앵! 그 짧은 순간 빠르게 휘둘러지는 검. 간만에 마주한 그의 검술은 여전히 아름답고, 또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자신 역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의 검이 제 몸통을 노려 휘둘러지는 순간, 몸을 재빠르게 낮췄다. 머리 위를 베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몸을 낮춘 그대로 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이를 드러내며 웃은 그가 고개를 틀어 제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 찰나의 틈으로 그의 검이 파고들자 자신도 재빠르게 몸을 틀어야 했다. 검이 몇 번이나 부딪히고, 허공을 가르는 검날의 소리가 살벌하게도 울렸다. 그와 수를 주고 받을수록 주변의 소리와 배경이 모조리 지워졌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몇 번이나 공격을 주고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가 봐주지 않겠다는 듯 자신을 몰아붙였고, 자신은 그 공격들을 받아내며 그를 밀어붙였다. 그의 자안이 사납게 빛났으며 입가에 걸린 웃음은 가실 줄 몰랐다.

“흡!”

그리고 찰나, 단 한 순간. 승패가 결정나는 것은 딱 그 한순간이었다. 옆구리에 느껴지는 통증에 짧게 숨을 토해내며 얼굴을 구겼다. 모든 움직임이 멎으며 그와 제 가빠진 숨이 귓가를 쿡쿡 찔렀다.

“여전히 옆구리가 비어.”

“…… 옛날에 당신에게 찔린 옆구리가 아직도 아픈데 치사하시네요.”

그는 실없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옆구리가 젖어드는 기분을 느끼며 비틀, 몸을 세웠다. 이 통증마저도 썩 오랜만이라는 감상을 흘리던 차, 놀란 이들이 급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미의 놀란 목소리에 태연하게 대꾸했으나 제 선임들은 그런 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녹안의 선임이 짙은 한숨을 흘리며 자신이 손으로 지혈중인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네 괜찮다는 말은 콜로세움 이후로 안 믿는다니까.”

“아니, 이 정도면 정말 무난하게 끝난 겁니다.”

작게 항변했으나 그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었기에 눈치껏 입을 닫아야 했다. 제 옆구리에 숨구멍을 하나 뚫어둔 당시자는 검을 털어내며 느슨한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훈련은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지. 실력이 늘었네?”

“그야 당연하죠.”

“그래도 아직 멀었지만.”

뻔뻔한 제 대꾸를 단박에 차단한 그가 재수없게 웃었다. 반박할 말이 없군. 어느 새 예현을 포함한 수뇌부들 역시 다가왔다. 예현의 시선이 제 상처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괜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젓자 그의 눈꼬리가 조금 쳐지는 것이 보였으나 잠깐이었다. 그는 어느 새 총사령관의 얼굴을 한 채로 자신과 눈을 마주쳐왔다.

“방금 그에 키시스 씨의 전력인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건 결코 그의 전력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의 전력을 끌어올리진 못했다. 분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키시스 경이 전력을 다한다면 이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저도 그에게서 얼마나 더 버틸지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실력이 녹슬지 않으셨습니다.”

제 말에 키시스가 선임들에게 시선을 둔 채로 삐딱한 웃음을 걸쳤다. 어쩐지 즐거워보이는 그와는 대조되게 그들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굳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나 뭐 잘못말했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자니 뭐가 그렇게 웃긴지, 입가를 가린 키시스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뭔데, 뭐가 웃긴거지. 그의 웃음소리에 선임들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날이 서기 시작했다.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멀뚱히 서있자 예현이 가볍게 박수를 한 번 짝! 치며 주변을 환기시켰다.

“좋아. 많은 도움이 됐어. 힐데, 너는 의료동으로 가서 치료부터 받아.”

“아, …… 옙.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괜찮다고 거절했다간 무슨 사단이 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의료동으로 향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그 뒤로 키시스가 느긋하게 따라붙었다. 자안의 눈동자가 잠시 뒤로 향했다가 다시 저에게로 옮겨왔다.

“꽤 예쁨받는 모양이지. 좀 놀렸다고 피부가 다 따끔거려.”

“갑자기요?”

물론, 그들이 자신을 아낀다는 건, 잘 알고는 있지만……. 정말 맥락도 없이 뱉어진 말에 눈을 끔뻑였다. 난데없이 피부가 왜. 어리둥절한 제 표정에 그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면 됐어. 치료나 받고 와, 병아리.”

“아니…….”

제 말을 더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그는 제 멋대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가버렸다. 진짜 어이가 없네……. 입술을 비죽이며 소리없는 항의를 해봤자 이미 멀어진 그에겐 닿지도 않을 터였다. 혹시 키시스가 무언가 무례하게 군 건가? 아닌데,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동안은 그가 그들에게 무례하게 군 기억은 없었다. 나중에 물어봐야하나……. 그가 잘못한 게 있다면 대신 사과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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