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도 다 추억이지
#백호열 전력110분, 주제_여행, '계획대로 안되는 것이 여행이다' 후속 단편 글 모음
#백호열 전력110분, 주제_여행,
"계획대로 안되는 것이 여행이다" 의 후속 단편 글 모음이며
본 글을 읽기 전 이해를 위해 전작을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짧은 글들 모음입니다.
호열은 잠 못 이루고······.
잠이······ 안 온다.
그래, 잠이 올 리가 없잖아!
아까부터 자신의 머릿속은 강백호가 혼자 뱉어냈던 말들을 제멋대로 무한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뭐? 나랑 둘이서만 여행 오고 싶었다고? 이 모든 게 다 강백호의 계획? 처음부터? 백호가 계획을 짰다고? 그 강백호가? 이거 꿈인가?
양호열은 잠이 들기 위해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 보았다. 커다랗고 넓은 등이 보인다.
등.
산왕전때 상처를 입었던 곳. 그리고 강백호가 오랫동안 재활을 받아야 했던 이유. 자칫 잘못했으면 그의 농구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지만, 강백호는 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히 재활치료를 받았다. 타고난 회복력과 재활치료가 더해져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재활치료를 무사히 마치었고 성공적으로 농구코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양호열은 알고 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의 강백호는 굉장히 심적으로 초조함을 느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적인 통증과 어쩌면 다시는 농구를 할 수 없다는 불안감.
아무리 천하의 강백호여도 그 막막한 불안감이라는 파도에 휩쓸릴 때가 있다. 혼자 있는 병실에서 불안감과 홀로 싸우다 견디기 힘든 밤이면 그는 양호열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호열아, 혹시 오늘 아르바이트 해? 몇시쯤 끝나?
아, 별건 아니고! 저기······ 그게 말이야.
막상 전화는 걸었지만 머뭇거리는 강백호의 목소리에 양호열은 웃으며 말했다.
야! 백호야, 마침 어떻게 딱 전화했어?
나 알바하는 곳에서 먹으라고 엄청 커다란 만두들을 줬지 뭐냐! 혼자 절대 다 못 먹어서 그러는데
내가 지금 네 병실 가도 되냐?
수화기 너머의 강백호의 목소리가 밝아진다. 하, 하하하! 어쩔 수 없지! 얼른 와!
전화를 끊고 양호열은 급하게 근처 만두를 파는 가게를 찾아 달렸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이미 문을 닫은 곳도 많다. 제발 제발 제발······! 상가들을 전력 질주를 하면서 겨우겨우 문 닫으려는 만둣가게 사장님을 발견하곤 남은 만두 다 달라고 외친 날이 있었다.
그날, 좋아하지도 않는 만두를 한가득 사 들고 강백호의 병실에 들어가 함께 만두를 먹으며 이야기 하다 잠든 날.
양호열은 잠든 강백호 옆에서 부디 무사히 재활을 끝내고 다시 농구 코트로 돌아갈 수 있길, 믿지도 않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부상과 재활의 고통을 이겨낸 그의 등이 보인다. 다치기 전보다 더 크고 튼튼해진 그의 등.
양호열은 저도 모르게 강백호의 등에 손 얹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다 진짜.
"······ 내 등에 뭐 있냐?"
등을 타고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양호열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 어, 미안! 백호야. 나 때문에 깼어?"
"음······ 잠이 안 오냐?"
응, 너 때문에 잠이 안 온다 야.
차마 이렇게 대답할 수 없었던 양호열은 민망해 하며 강백호의 등에 얹은 제 손을 떼려는데 갑자기 강백호가 휙 돌더니 양호열의 손을 잡고 쭉 제 앞으로 당겼다.
"우왓! 뭐, 뭐야?"
양호열이 강백호의 등 뒤에서 백허그 하고 있는 모양이 돼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양호열의 머리가 멈춰버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백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잘됐다, 호열아 나 팔베개 좀 해주라. 이 베개는 너무 높아서 불편해."
이제 강백호는 양호열의 오른팔을 베개 삼고, 그의 왼 손목을 잡은 채 제 가슴 앞으로 끌고 와서 둘 사이가 아주 딱 붙은 채 나란히 누워있는 모양이 돼버렸다.
양호열은 강백호의 붉은 뒤통수만 보인다. 서로 얼굴은 안 보이는 게 차라리 다행인 걸까. 아마 지금 강백호가 양호열의 얼굴을 봤다면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감정을.
심장은 눈치도 없이 쿵쾅거리고, 제멋대로 반응하는 하반신을 슬며시 뒤로 뺐다. 머릿속의 양호열들이 외친다. 이런 미친! 몸 좀 붙였다고 반응해? 왜 이리 건강해? 애국가를 불러! 애국가 가사가 생각이 나지 않아! 동, 동해, 물과 ······ 지리산? 한라산? 이봐! 진정해! 이러다가 백호가 알면 다 끝장이야! 하하하! 파국이다!
강백호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린다.
"팔베개 높이가 딱- 좋네. 등 쪽도 따뜻하니 좋다야. 안 그러냐? 그, 여긴 방이 좀 추우니까 붙어 자자고."
"어어어, 그러네. 따뜻하긴 하다."
이제 양호열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틀렸다. 강백호는 아무 생각도 없는 행동인데 나 혼자 이러는 건가 봐! 미친! 누가 망치 좀 가져와!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고!
양호열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어둠에 익숙해지니 보인다. 머리카락만큼 붉게 물든 귓바퀴와 목덜미가.
평소보다 더 따끈한 몸. 미세하게 자신의 왼팔을 잡고 있는 커다란 손도 떨리고 있다.
양호열은 강백호를 좋아하기에 기대감을 버렸다. 사랑이란 감정에 혼자 부풀어 올랐다가, 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경험은 더는 사절이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해야 제 마음을 지킬 수가 있었다.
다치지 않고, 더 커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양호열은 강백호의 까슬까슬한 뒤통수에 이마를 기댔다. 커다란 등이 살짝 움찔한 게 느껴진다.
아.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잘 자, 백호야."
"어어, 너도."
그 밤, 양호열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강백호도 마찬가지였었을 것이다.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다지.
결국 한숨도 못 자고 아침이 밝았다.
강백호야 나름 현역 운동선수의 체력이라 조금 피곤함이 쌓였지만 크게 문제 없이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는데 양호열의 상태가 이상했다. 얘도 잠을 못 잔 것 같아 보이는데 뭔가 얼굴이 붉고 표정이 멍하다. 강백호는 양호열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깜짝 놀라 그의 양 볼을 잡았다. 아주 뜨끈한 것이, 갓 쪄나온 호빵 같다.
"후눗! 호열아! 너 열 나!"
"······ 어, 아, 어쩐지 머리가 좀 무겁더라."
"엄청 뜨거운데? 어제 오토바이 찬바람 맞아서 그런가?"
망했다. 아픈 애를 끌고 바다로 갈 순 없잖아! 상태가 딱 봐도 안 좋은데 양호열은 말 없이 비틀거리면서 침대에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 물소리는 나는데 시간이 흘러도 사람은 나오지 않으니, 강백호는 욕실로 들어가 봐야 하나 고민하다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려는 순간 양호열이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딱 봐도 상태 안 좋다. 눈은 다 풀리고 평소 또렷하던 까만 눈동자가 열에 흐려져 있다.
강백호는 모든 계획을 다 취소하기로 했다. 일단 애가 아픈데 뭔 바다고 뭔 고백인가.
"호열아, 근처 병원 가자, 병원에서 약 받고 집에 돌아가자. 내, 내가 운전하면 되니까."
양호열은 잠시 강백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병원은 가는데, 바다도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아쉽잖아. 약 먹으면 괜찮아.
양호열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침대 끝에 앉았다. 머리가 무겁고 눈이 부은 것 같이 뜨끈하다. 도대체가 이게 뭔 일이란 말인가. 오늘 바다에 가서 멋지게 고백하려 했는데. 나의 마음을 말하고, 너의 마음을 들으려 했는데. 도대체가 이놈의 여행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감기에 걸린 게 도대체 얼마 만인 거냐. 허구한 날 탄 게 오토바이인데 왜 하필 오늘 감기에 걸린 거냐고. 몸도 무겁고, 머리도 아프고, 목도 따끔거린다. 바다에 가자고 했지만 사실은 다 귀찮다.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어.
그래도 이번에 이렇게 둘이 여행 오게 되었는데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단 말이다.
강백호는 강백호대로 안절부절못하다가 곧 체크아웃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후다닥 짐을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오랜 외국 생활로 짐을 싸는 것은 도가 텄다. 강백호는 한손에는 캐리어와 짐가방을, 한손은 양호열의 어깨를 감싸 부축하고, 입에 카드키를 물은 체 1층으로 내려와 체크아웃을 했다.
"저희 호텔 이용하시는 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셨나요?"
살갑게 웃는 프런트의 직원의 물음에 강백호는 하하, 웃을 뿐이다. 꾸벙 인사하고 열이 올라 멍하니 있는 양호열을 조심스레 보조석에 태우고, 운전대를 잡았다.
좋아! 가까운 병원으로 간다! 병원 가서 약 처방 받고, 수액 맞으면 호열이 상태가 훨씬 좋아질 거야!
"어쩌죠? 오늘 손님이 너무 많아서 접수는 마감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벌써 두 번째 병원에서 거절을 당하자 강백호는 이제 화가 났다. 손님이 많다고 병원에서 접수를 안 받으면 아픈 사람은 어디로 가요? 물으려다 양호열이 강백호의 옷깃을 쭉 당기며 병원 밖으로 끌고 나온다. 가뜩이나 빨간 머리에 커다란 덩치로 병원 사람들이 강백호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는데 더 이목을 집중 시킬 필요는 없다.
"백호야, 잘 들어."
양호열은 강백호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눈빛은······ 열감에 돌아버린 눈빛이다.
이제 양호열은 목도 부었는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약국 가서 타이레놀, 해열제, 종합감기약, 해열패치, 마시는 수액 사와."
"누, 눗!"
강백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둥지둥 약국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한 아름 약을 들고 오자, 양호열은 기다리는 동안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을 하나 억지로 씹어먹고, 생수병을 꽈득 열었다. 타이레놀 두 알, 해열제를 위에 때려 박고 이마에 야무지게 해열패치도 붙였다. 비틀비틀 걸어가 차 조수석의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넘긴 후 안전벨트를 채우고 누우며 강백호에게 말했다.
"백호야, 주상절리까지 한시간가량 걸리니 나 그동안만 좀 잘 게."
"어? 어어."
미안하다, 조수석에서 잠을 자는 게 아닌 건 아는데······.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결국 양호열의 고개가 툭 옆으로 꺾였다. 누가 보면, 장렬히 전투 후 전사한 것 같은 모습이다. 강백호는 진짜로 바다를 보러 가야 하나, 아님 애가 잠든 틈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다.
고민해서 무엇하리. 당연히 상태가 이렇게 안 좋으니 집으로 가야겠지.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문득 바라본 시선 끝에 양호열의 자켓 안쪽 삐죽 튀어나온 수첩이 보인다.
눗? 호열이가 어제 오토바이 대여점 가기 전에 보던 수첩이잖아?
안되는걸 알지만, 강백호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수첩을 빼서 펼쳤다. 사용감이 꽤 있는 수첩에는 카센터 차량 번호와 이용 고객들 이름, 핸드폰 번호부터 시작해서 거래처 연락처들, 차 정비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중간 중간 자신과 전화할 때 적은 듯한 내용들도 있다. 뒤이어서는 휘갈기듯 쓴 글씨에는 경주에서 유명한 관광지나, 맛집이 적혀있고 양호열의 개인적인 생각도 적은 듯한 글들이 여기저기 적혀있다. 하하! 진짜 엄청 조사했네?
팔랑팔랑 넘기는데 어느새 수많은 양호열의 생각들이 수첩에서 쏟아진다.
최고의 NBA 선수 강백호
프로선수!
멋져! 정말 멋져! 최고야!
외로워 하지 마, 내가 우리가 있어!
매운 음식 종류, 떡볶이, 김치볶음밥(후라이 다섯개)
백호의 전화 좋다. 목소리 좋다.
졸려.
중요! 백호 귀국 일자!!
두달 정도 머문다. 짧다.
여행? 경주? 갑자기?
애들 연락, 맛집, 숙소
여기가 경주 맛집! 백호가 좋아할 듯!
스쿠터 렌탈 - 불국사, 석굴암, 천마총
해지고 걸어서 첨성대, 안압지(야경 이쁨!)
다음날 감포 주상절리!
아침밥은?
정말 재밌는 여행이 될 거야!
강백호는 잠시 수첩을 바라보다가 수첩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췄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한 페이지에 적은 것인지 글자가 꽉 차서 새카맣게 칠해진 듯한 그 페이지는 이제 무슨 글자가 적혀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물이 떨어진 듯 종이가 우그러들고 잉크가 번진 곳도 많고 여기저기 찢어지고 낡고 바래진 페이지. 무슨 글자를 적은 건지 알아볼 수 없지만 왜인지 강백호는 그 페이지에 시선을 뗄 수가 없다.
그는 수첩을 덮고 조심히 잠든 양호열의 자켓 안쪽 주머니에 도로 넣어주었다.
잠시 생각하던 강백호는 핸들을 꽉 잡았다.
"갈까, 바다······."
그렇게, 갑자기 별 가루가 쏟아진다.
양호열은 눈을 떴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아침보다 몸이 훨씬 가벼워짐을 느낀다. 머리도 가볍고 열도 많이 내린 것 같은데. 주차장 소나무 그늘 아래 멈춰있는걸 보니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나보다. 백호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강백호도 등받이를 눕히고 잠들어 있다. 아, 저렇게 자면 백호 등 안 좋은데.
양호열은 조심히 강백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백호야.
"······음."
"백호야, 너 그런 자세로 자면 등에 안 좋아."
강백호는 조금 부은 눈으로 양호열을 바라보았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었는데 커다란 손이 양호열의 이마를 덮는다.
"열은 내린 거 같네. 몸 좀 어때?"
손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마에서 눈까지 덮일 줄이야. 양호열은 웃으면서 강백호의 손을 잡고 내렸다.
어떠냐고? 아직도 몸에 기운이 없고, 목은 따끔거리고, 나른하고 졸리지만.
"아침보단 훨씬 좋아."
"다행이네."
강백호는 차에서 내려 으그그극! 이상한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을 했다. 허리를 돌리는데 뚜둑 뚜둑 뼈 소리가 난다. 양호열도 차에서 내리자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짠 내 나는 바닷바람. 푸른 바다, 그리고 그 파도를 견디는 기암괴석, 아쉽게도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는 아니다. 몽돌로 이루어진 작은 해변이 있고 바다 위 거대한 부채꼴 기암괴석이 파도를 맞으며 솟아있다.
사람들은 바다 위 굳어진 이 용암의 흔적을 보러 온다. 고작 오래전에 뜨겁게 넘쳤다 굳어진 흔적을 보러 말이다.
양호열은 문득 제 사랑도 흘러넘치다 굳어지면 저렇게 흔적이 남을 수 있을까 괜스레 시선이 간다.
강백호와 양호열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미국에서 배가 고픈데 돈이 없어서 한 달 동안 가장 싼 햄버거만 먹은 일이라던가, 인종차별 당해 싸우다가 영어가 안 나와서 한국말로 이 씨발 새끼야! 외치면서 자신이 아는 한국 욕을 쏟아낸 일이라던가. 미국 시합에서 첫 덩크를 성공하고 모든 관중들이 환호했던 일들까지. 양호열은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강백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타지 생활이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도 강백호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해 빛나고 있다. 이제 백호는 정말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가고 있구나.
괜스레 씁쓸해지는데 순간 산책로 틈 사이로 삐져나온 나무뿌리에 양호열의 발이 톡 걸렸다.
"엇."
평소라면 그냥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았을 텐데 감기 때문에 몸에 힘이 없으니 크게 휘청거렸다. 강백호는 순간적으로 양호열의 어깨와 손을 덥석 잡으며 부축했다.
"야야, 큰일 날 뻔 했다."
"아, 그러게. 고마워 백호야."
덕분에 살았어. 양호열이 멋쩍게 하핫 웃는데, 왜인지 강백호는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당황한 양호열은 생각했다.
'왜 손을 안 놓지?'
긴장한 강백호는 생각한다.
'지, 지금인가?'
고백 타이밍!
강백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양호열의 손을 꽉 잡았다. 아, 양호열 당황해하는 거 봐라. 잠깐만 기다리라고. 이 천재가 너에게 한 말이 있어. 지금 해야 할 것 같다고. 맞잡은 손에 땀이 나는 것 같다.
"양호열."
"응?"
"내 노래 어땠냐?"
뜬금없는 말에 양호열이 순간 벙쪄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번 여행 어땠어? 즐거웠어?"
"어, 어어 재밌었지?"
"나도!"
강백호는 씩 웃었다.
"너랑 둘이 오니까 더 좋았어."
양호열은 다시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걸 느낀다. 이거, 이거 갑자기 뭐야? 꼭 고백할 것처럼?
"조, 좋아하는 사람과 둘이서 여행을 오고 싶었어. 그러니까."
"아니, 어?"
"계속 난 너랑 둘이 오고 싶었어."
맞잡은 두 손이 뜨겁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강백호는 양호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 양호열이 50번을 보았던 그 얼굴이다. 모를 수가 없다. 언제나 그 얼굴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항상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훔쳐보았었지. 그런데 그 얼굴이 지금 제 앞에 있다. 저런 표정을 짓다가 꼭 말을 하곤 했지.
"양호열 씨, 정말 좋아합니다."
양호열의 눈앞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하늘에서 별 가루가 떨어지는 것 같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도,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꽉 잡은 손이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걸 말해주고 있다.
"내가 비록 두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고,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해야겠지만."
강백호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괜찮다면 나랑 한번 만나볼래?"
사실 아주 오랫동안 당신만 바라봤습니다.
햇살이 파도에 부서져 반짝거린다. 파도는 한때 가장 뜨거웠던 흔적에 제 몸을 부딪쳐 물보라로 퍼진다. 햇살의 반짝임이 사탕가루같이 눈앞에 가득 퍼지는 것 같다. 그리고 왜인지 그 반짝임이 점점 커져서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싶었을 때 눈을 감았다 뜨니, 강백호가 호열아 죽지 마! 울면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열이 오른다 했는데 잠깐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 왜인지 코도 얼얼한 게 코피도 났었나? 몸이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았나 보네. 그건 그럼 꿈인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다시 잠에 빠진다.
다시 눈을 뜨니 세상이 깜깜하다. 양호열은 제 이마에 올려진 수건을 만졌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다. 상체를 들고 일어나니 침대 밑에서 잠들어있는 백호가 보인다. 백호가 간병을 해줬구나.
그는 꾸물꾸물 밑으로 내려가 강백호의 옆에 누웠다. 깊게 잠들었는지 그의 잠든 얼굴이 맹하게 풀어져 있다. 양호열은 푸핫, 웃으면서 그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양호열씨, 정말 좋아합니다.
반짝이는 별 가루 속에서 제게 고백하는 강백호는 잔뜩 긴장했지만 그런데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지. 양호열은 어둠 속에서도 붉게 반짝이는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저도, 저도 정말 좋아합니다."
한번 말이 터지자 오랫동안 속에 담아 놓았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실 아주 오랫동안 당신만 바라봤습니다.
가장 예쁘고, 가장 부드럽고, 가장 좋은 것만 가득 모아
마음의 편지지 안에 가득 담아 당신께 주고 싶었어요.
나의 사랑은
뜨겁게 끓어 올라 넘치어
언젠가 차갑게 식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요?
부디 그 모습이 너무 추하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의 모습이 아름답길 바래요.
뒤 돌아 보았을 때 아름다운 우리의 추억처럼 말입니다.
양호열은 조용히 소곤소곤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전하고 싶었던 말이 끝나자 후련한 마음에 한숨을 후 내쉬는데 강백호가 어느새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흐으악!
"그럼 우리 사귀는 거야?"
"······ 언제 일어났어?"
"나도 정말 좋아합니다 말할 때?"
"처음부터잖아?!"
강백호는 싱글싱글 웃으며 양호열을 껴안았다.
"나도 정말 좋아해."
어쩐지 양호열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도 강백호를 껴안았다.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제 사랑이 이렇게 뒤늦게 피어난다.
별가루가 떨어지는 밤이다.
다시 여행 계획을 짜보자.
"야! 양호열 너, 백호한테 고백 받고 코피 흘리면서 쓰러졌다며?"
"파하하핫! 양호열 가오 다 죽었네! 진짜!"
이용팔은 깔깔거리면서 자신이 손질한 연어회를 내려놓았다. 여행이 끝난 후 며칠 뒤에 만난 제 친구들은 이미 양호열이 강백호의 고백을 받고 열 올라 코피 쏟으면서 기절한 일을 다 알고 있었다.
노구식은 한참 웃다가 양호열이 전혀 타격 없는 얼굴로 헤헤 웃으며 백호에게 연어를 먹여주는 모습에 아오 눈꼴시려 인상을 찌푸렸다. 쌍방 짝사랑만 하다가 결국 이뤄져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한 쌍의 바퀴벌레 같은 제 친구놈들의 모습을 보니 아주 배알이 꼴린다. 양호열은 강백호 입에 연어를 먹여주며 물었다.
"근데 너희들 어떻게 알았어?"
"무슨 소리야, 백호가 너희 집 전화로 우리한테 전화 싹 돌렸어. 너 쓰러졌다고."
"너희 집 가니까 네 안색은 창백하지, 백호는 안절부절못하지. 내가 짐 정리하고, 대남이가 약 사러 가고, 용팔이가 죽 끓여주고! 강백호가 너 대충 씻겨서 옷 갈아입히고 침대 눕혀줬다."
진짜 힘들었다고! 김대남, 노구식, 이용팔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양호열은 강백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백호야! 나 씻기느라 힘들었을 텐데! 허리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어!"
"······ 아니 저놈이? 우리가 도와준 건 언급도 안 하네?"
"눗! 괜찮아 호열아! 너 가벼워!"
"오냐, 백년해로해라 이 새끼들아."
"용팔아 술 없냐? 술이 필요해."
"소주 빨간 뚜껑 줘. 알콜로 내 쓰린 위를 소독해야겠어."
질린 얼굴로 소주잔에 소주를 부어 저들끼리 짠 하는 모습에 강백호는 웃으면서 말했다.
"야! 우리 여행 가자!"
"아 싫어!"
"커플 사이 껴서 우리 뭐 하라고!?"
"너네 둘이 가!"
"안돼! 이번엔 너희도 진짜 다 같이 가!"
강백호는 비장한 표정으로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쑥 꺼내 천장 높이 들어 올렸다. 빨간색 카드가 조명등에 반짝인다.
"전 일정 모든 경비, 내가 쏜다."
노구식, 김대남, 이용팔은 놀란 표정으로 있다가 우와앗! 소리 질렀다.
"어머! 이 오빠 화통한 거보소!"
"야! 우리도 호텔 잡아줘! 나도 5성 호텔!"
"제주도 가자! 제주도!"
"제주도 좋지! 뭐할지 정하자!"
다들 각자 가고 싶은 곳을 말하며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다 같이 가는 멋진 여행이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도 다 추억이지
조용한 기내, 강백호는 비행기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가방을 뒤적였다. 한참 뒤적거리다 나온 것들은 꽤 두툼하게 인화된 사진들이다. 지난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을 넘기며 보니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른다.
제주도에서 돌하르방과 찍은 단체 사진, 전부다 알록달록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맞춘 채 바다에서 찍은 사진, 이용팔이 바다에 빠지는 모습, 모래사장에 누워 잠든 노구식을 모래 속에 파묻어 버린 사진, 김대남이 거대한 모래성을 완성해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데 양호열이 발로 모래성을 부수는 모습, 이용팔이 회를 뜨는 족족 그 옆에서 주워 먹는 자신의 모습, 양호열과 자신이 웃으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사진.
제주도 여행은 정말 즐거웠다. 친구들도 즐거워했고 이제는 제 연인인 호열이와도 좋은 시간 보냈으니.
왜 즐거운 시간은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지. 두 달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참 사진을 넘기자 또 다른 사진이 나온다.
샤워가 끝난 후 물기 있는 모습으로 나와 카메라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한 호열이, 스쿠터에 타고 브이 포즈를 취하는 호열이, 자신의 트레이닝 자켓을 입고 초승달같이 눈꼬리 휘어지게 미소 짓는 호열이, 블랙커피를 마시는 호열이, 산책하는 호열의 뒷모습······.
경주 갔을 때 찍었던 자신의 사진은 양호열이 가지고 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다. 그때 그 순간이 어제같이 떠오른다. 분명 제 뜻대로 되지 않던 일이 많았고, 변수가 너무 많았던 여행이었지만 돌이켜보니 그것도 다 추억이다.
강백호는 벌써 양호열이 보고 싶었다. 제 친구들도.
마지막 사진 한장을 들어 올렸다.
강백호, 양호열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껴안고 있는 사진. 강백호는 조용히 그 사진에 입을 맞춘다.
미국에 도착하면 호열이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늘 언제나 그랬듯이 양호열은 자신의 전화를 받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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