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안되는 것이 여행이다.
#백호열 전력110분, 주제_여행
#백호열 전력110분
주제_여행
『호열아, 우리 여행 가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강백호의 목소리는 굉장히 들떠있어서, 양호열은 저도 모르게 푸흐흐 웃었다.
지금은 새벽 2시 30분.
양호열은 강백호가 미국에서 전화했을 때 혹시라도 못 받을까 봐 전화기도 침대 바로 옆 협탁에 옮겨 놓았다. 아무래도 훈련과 경기로 바쁠 테니 자주 전화는 못하겠지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강백호의 전화는 생각보다 자주 걸려 왔다. 지금이야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었지만,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매일 새벽 2시~4시 사이에 전화가 왔다.
- 호열아! 오늘은 이 천재의 NBA 데뷔 경기가 있었지! 봤냐?
- 내가 덩크 하니까 다들 환호하고 박수치더라! 역시 난 천재야!
- 그런데 너희가 없으니까 조금 외로웠어.
- 아니 사실 많이 외로워.
- 호열아 영어는 너무 어려워, 공부를 하는데도 어려워. 하고 싶은 말이 목에 걸려서 나오지 않는 기분이야.
- 매운거 먹고 싶어, 떡볶이 같은 거. 김치볶음밥도 먹고 싶어, 계란프라이 다섯개 올려서.
- 호열아, 내가 전화할 때 너희는 새벽인 거 왜 이야기 안 했어? 시차가 그렇게 나는 줄 몰랐어, 미안해.
호열아.
내 전화가 혹시 귀찮지 않아?
양호열은 강백호의 이야기에 졸린 눈을 비비며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다.
- 백호야, 나도 TV로 데뷔 경기 봤어. 정말 멋지더라.
- 하하하! 미국 선수들 사이에서도 빨간 머리는 역시 눈에 확 들어오더라! 멋진 경기였어!
- 구식이, 대남이, 용팔이 그리고 나도 여기서 열심히 응원했지! 얼마나 소리 질렀는지 다음날 목이 쉬어버렸어.
- 백호야 항상 우리가 널 응원하고 있다는걸 꼭 기억해.
- TV 인터뷰 하는 거 봤어, 백호야! 영어 정말 잘하더라! 역시 넌 천재야.
- 시즌 끝나고 한국 오면 먹고 싶은 거 우리랑 같이 먹으러 가자.
- ······.
백호야.
나는 네 전화가 전혀 귀찮지 않아. 미안해하지 마.
강백호의 전화 내용은 이렇듯 아주 사소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한국 가면 뭐가 먹고 싶다 넋두리처럼 이야기할 때 양호열은 졸려서 부은 눈을 겨우 뜨며 전화기 옆에 놔두었던 메모장과 연필로 강백호가 먹고 싶다는 메뉴들을 적곤 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난 후 다시 설핏 잠들었다가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 카센터로 출근하면 사장님과 직원들이 판다가 출근했다며 놀려댄다. 반박하기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정말 판다가 형님! 하며 인사할 정도여서······.
아침마다 빈속에 뜨거운 블랙커피를 진하게 내려 마셔서 정신을 깨우고, 입맛은 없지만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 카센터 휴게실 소파에서 잠깐 쪽잠을 자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그래야 퇴근 때까지 버틸 수가 있으니까.
호열씨, 도대체 밤에 뭘 하는 거예요? 동료 직원에 질문에 미국에 있는 친구 전화를 받느라 그렇다 말하면 늘 같은 질문이 따라온다. 애인이에요? 진짜 대단하다. 직원의 감탄에 양호열은 미소만 지을 뿐, 긍정도 부정도 안 하자 직장에서는 어느새 '미국에 간 여자친구를 독수공방하며 기다리는 사랑꾼'이 돼버렸다.
강백호는 여자도 아니고, 하물며 자신의 애인도 아니지만,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것은 맞기에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소문이 기정사실로 되니, 양호열이 피곤해서 하품 할 때마다 호열씨 손님 없으니 저기 가서 눈 좀 붙이고 오라고 직원들이 배려해준다. 거절 안 하고 꾸물꾸물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니 오히려 편해졌다.
4년 만이다.
송태섭, 서태웅, 정우성과 함께 미국 대학 농구선수로 뛰다가 NBA로 진출, 첫 시즌 오프를 앞두고 귀국 날짜가 잡힌 강백호가 신이 난 목소리로 여행 가자! 외친 것이다.
"여행 좋네. 다음 주에 입국하지? 한국에 얼마나 있어?"
『두 달 정도?』
"잘됐다, 백호야.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우리 경주갈까?』
"경주 좋지. 내가 애들한테도 휴가 맞추라고 말 해놓을게."
『······.』
수화기 너머로 강백호의 대답이 들리지 않아, 양호열은 전화가 끊겼나 싶어 여보세요? 백호야? 하니 아, 응! 전화기 수신이 좀 안 좋네! 말이 들린다.
『얼른 보고 싶다! 빨리 다음 주가 왔음 좋겠어!』
"하하, 마지막까지 다치지 말고. 마무리 잘하고."
당연하지! 난 천재니까!
전화가 끝나고 양호열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 두 시간은 더 잘 수 있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웅크리며 양호열의 머리는 다시 잠에 빠지기까지 끊임없이 생각을 했다. 내일 애들한테 미리 휴가 쓰라고 미리 말해놔야겠다. 경주 갈만한 곳도 알아보고, 식당도 알아봐야겠어. 기차보단 차를 가져가는 게 좋겠다 인원이 많을 테니.
아, 백호 보고 싶다. 얼른 귀국했음 좋겠어.
해야할일을 하나하나 나열하던 양호열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언젠가 같이 일하는 직원이 물어본 적이 있다.
애인분 기다리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안 보고 싶어요?
양호열은 대답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 사람이 떠난 것이고,
제가 제일 잘하는 게 기다리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당연히 보고 싶죠.
"다 아는 사람들이네요."
"뭐, 그렇죠뿅."
양호열의 머쓱한 말에 옆에 서 있던 이명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번쩍 오색 빛을 내며 흔들리는 머리 장신구와 요상하게 솟아오른 형광 연두색 선글라스는 반경 500m 앞에서도 단연 튀었다. 가뜩이나 이 튀는 복장을 산왕공고 대표로 함께 온 듯한 신현철도 똑같이 착용 중이다. 신현철은 경 정우성 입국 환영 축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크흠. 정우성이 꼭 마중 나오라고 해서."
"······ 그렇게 하고요?"
"아니, 이건 이명헌 아이디어."
"뿅."
이명헌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대만 선배. 애들은 언제 나올까요?"
"이제 곧 나올 것 같은데."
이한나는 초조함에 손톱을 뜯고 있었고, 정대만은 손목시계와 입국장 문만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고 있다. 북산을 대표해서 온 두 명은 각각 NO. 1 가드 송태섭 어서 와!, 슈퍼루키 서태웅 귀환! 적혀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양호열도 그들 사이에서 WELCOME 천재 농구선수 강백호 적힌 종이를 팔랑이며 어서 입국장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중이다.
"어? 열린다!"
누군가의 외침에 수많은 시선이 입국장 문으로 쏟아졌다. 드디어 입국장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캐리어를 끌고 쏟아져 나온다. 산왕, 북산 그리고 양호열 모두 플래카드를 흔들며 자신들이 기다려온 사람의 이름을 소리친다.
"정우성! 이놈 시키 어딨냐! 이 미친 꼬라지로 언제까지 널 기다려야 하는 거야!"
"뿅뿅뿅."
"송-태-섭!"
"북산의 서태웅 선수! 나왔나!"
"백호야! 강백호!"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뒤로 짧은 붉은 머리가 보인다. 그 옆에 검은 머리와 빡빡 깎은 머리도. 그보다 좀 아래 있는 갈색빛 파마머리까지. 다른 사람들도 발견했는지 목소리는 더더욱 커졌고 송태섭, 서태웅, 정우성은 자신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백호야! 여기여기! 양호열의 외침에 강백호도 양호열을 보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호열아!
"명헌이 혀엉! 현철이 혀엉! 마중 나와주셨군요! 형들 진짜진짜진짜 보고 싶었어요!"
"이 놈은 이 꼴을 보고도 아무 말 안 하네. 우리 봐서 좋냐?"
"진짜 너무 좋아요, 허헝!"
"우성, 변하지 않았네요 뿅."
정우성은 찬란하게 빛을 내는 이명헌과 신현철을 보자마자 눈물 펑펑 쏟으며 달려가 안겼고
"한나야!"
"송태섭, 어서 와!"
"한나! 한나, 한나야아아아!"
송태섭도 선글라스를 벗어 던지고 이한나에게 달려가 꽉 안았다. 보고 싶었어!
"여, NBA 선수."
"마중 나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 가자. 애들 다 기다리고 있어."
"네, 나중에 1 on 1 해요."
"······ 너는 보자마자 1on1이냐."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 정대만은 서태웅과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양호열과 강백호는.
"호열아!"
강백호가 양호열에게 뛰어온다. 와······ 애가 미국물 먹더니 뭔가 피부도 좀 까무잡잡해진 거 같고 더 벌크 업됐네? 근육 봐라, 저기에 부딪치면 최소 골절인데? 양호열은 자신에게 쿵쿵 달려오는 강백호에게 양팔을 휙 벌렸다.
사나이 자존심 걸고 버텨야 한다, 양호열.
캐리어도 내팽개친 강백호가 양호열을 덥석 안는데, 꽈드드득. 엄청난 힘에 양호열은 착즙 되는 오렌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와, 백호 힘이 더 세졌구나. 하긴 미국 애들 덩치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힘은 돼야지.
숨쉬기 힘들다고 말하려던 양호열은 얼굴에 떨어지는 물방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봤다고 펑펑 우는 강백호 때문에. 양호열은 웃으면서 말했다.
"백호야, 오랜만에 봤는데 왜 울어?"
"아니, 와. 나 안 울려고 했는데, 흡······. 진짜로 너무 보고 싶었어!"
"하하하, 나도 보고 싶었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이한나와 정대만이 강백호에게 인사를 건넨다. 강백호는 한 번 더 양호열을 꽉 껴안았다가 놓아준 후,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송태섭, 강백호, 서태웅은 이한나, 정대만과 함께 먼저 북산 사람들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간다고 했다. 양호열도 강백호가 전에 전화로 말해서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은 강백호의 귀국 환영을 위해 나온 것이었고 백호 군단과는 저녁에 모이기로 약속되어 있다.
양호열은 함께 가자는 강백호의 말에 정중히 거절하고, 그가 다른 북산 사람들과 함께 정대만이 끌고 온 승용차에 타는걸 배웅해주었다. 강백호는 아쉬운 표정으로 승용차에 탄 뒤 창문을 열고 양호열에게 손을 흔들었다. 차량이 출발하고 양호열이 멀어져 안 보일 때까지 계속 말이다.
"이따 만나 백호야!"
"응, 이따 봐! 끝나고 바로 갈게!"
"NBA 강백호 선수 입장합니다!"
"어서 와!"
"오랜만이다 백호야!"
"오느라 고생 많았어!"
팡-! 파팡! 종이 꽃가루가 날리며 요란하게 폭죽이 터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강백호는 와하하핫! 웃으면서 양호열이 내민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훅 불어 껐다.
두번째 강백호 환영파티 시작이다.
강백호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신이 났는지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그동안 미뤄왔던 이야기들을 쏟아내면서 한국에 남아있던 친구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물었다. 너희가 전화를 받아야 이야기를 하지!
이용팔은 견습 주방장이 되었다. 이용팔이 일하는 이 식당은 작지만 꽤 유명한 고급 횟집인데 이 가게 주인이자 주방장 밑에서 칼을 갈고, 도마를 세팅하면서 어깨 너머로 회 뜨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농구 하는 친구가 4년 만에 한국에 온다고 하니 특별히 일찍 장사를 마감하고 통으로 가게 쓰라고 내주었다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들에게 내주는 생선은 자신이 손질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다며 첫 손질한 참돔회를 내밀었다.
노구식은 와인바에서 일하면서 소믈리에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술에 관해 공부하는데 정작 본인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테스팅을 위한 소량의 술만 마시고 나머지는 김대남에게 먹고 어떠냐고 물어본다고 한다. 김대남이 술이 꽤 세고 와인의 평가도 정확한 편이라 자주 만나서 먹인다고. 노구식은 회랑 먹기 좋은 와인을 골라왔다며 자신의 가방에서 와인잔을 꺼냈다.
김대남은 미용을 공부해 자격증까지 딴 후 바버샵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자신도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잡일과 보조를 더 많이 하고 있지만 노구식이 일하러 가기 전 대남이 일하는 바버샵에 들러 헤어 세팅과 수염 관리를 해주면서 경험을 쌓고 있다고 했다. 가끔 용팔이 데이트를 가는 날에도 머리 세팅을 도와준다고.
강백호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하면서(특히 이용팔의 여자친구 이야기에는 먹고 있던 물을 뱉어버렸다.) 양호열을 바라보았다. 호열이 너는?
"난 다 알고 있잖아 백호야······. 음. 그래, 알겠어. 뒤늦게 자동차 정비 쪽 공부해서 지금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강백호는 눈을 빛내며 큰 팔을 허공에 휘둘렀다. 야야, 얘 지금 너무 기분이 업된 거 같은데?
"우리 진짜 어른 된 거 같아!"
"이제 20대 후반인데 어른이지, 애냐?"
"내 마음만은 청춘인데."
"진짜 아저씨 같아."
오랫만에 만난 네명은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강백호가 가고 싶다 했던 경주 여행은 사흘 뒤에 출발하기로 했다. 다들 휴가 신청을 미리 해 놓았고 숙소도 예약해 두었으며, 관광지나 맛집도 다 찾아놨으니 강백호에겐 따라오기만 하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야! 한국 구경 실컷 하다 오자고!
『미안하다 호열아. 나 여행 못 갈 것 같다.』
콰광!
창밖에서 치는 번개가 혼란스러운 양호열의 마음을 대변하듯 하늘에서 번쩍였다. 양호열은 이용팔의 침울한 목소리와 절망적인 그 내용에 입을 틀어막았다. 한국에 있는 동안 자신에 집에서 묵기로 한 강백호가, 그러니까 지금 여행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뒤에서 짐을 챙기는 강백호가 절대 들으면 안될 내용이었다.
그리고 더 절망스러운 것은 정확히 10분 전 구식이와 대남이로부터도 전화가 와서 갑자기 일이 생겨서 여행을 못 갈 것 같다는 통화를 했고 마지막 믿고 있던 용팔이까지 여행을 못 간다며 연락이 온 것이다.
구식이는 가게에 문제가 생겨서 저녁에 나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고, 대남이는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용팔이는 식당에 단체 손님이 잡혔는데 가게 주방장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 아녀서 자신도 도와줘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한참 침음하던 양호열은 일단 알겠다며 전화를 끊고 강백호를 바라보았다.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 세 명은 불참, 여행 가는 날인 지금 창밖에는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여행을 미뤄야 하나?
"저기, 백호야."
"응?"
"그, 저기 있잖냐. 오늘, 날씨가 안 좋네."
"엉, 그러네. 비가 많이 오네."
"그, 여행 떠나기 힘든 날씨 아니냐?"
"눗? 날씨가 무슨 상관이야?"
"그, 아니."
양호열은 결국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저기 지금 전화가 왔는데, 구식이랑 용팔이는 가게 일이 생겼다고 하고, 대남이는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우리 여행 못 갈 것 같다고 하는데 우리 여행 날짜 미루는 게 좋지 않을까?"
강백호는 양호열의 말에 잠시 고민하듯 음~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짐을 가득 채운 캐리어의 지퍼를 잠갔다.
"가자 호열아."
"응?"
강백호는 씩 웃었다.
"그냥 우리 둘이 가자!"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고, 폭우와 거센 바람에 차장을 밖으로 보이는 가로수들은 뽑혀 나갈 듯이 흔들린다. 이런 날 고속도로 운전이라니 미친 짓이다. 양호열은 운전대를 꽉 쥐었다. 혼자 운전한다면 상관이 없지만 자신 옆자리에 백호가 타고 있다. 안전 운전, 안전 운전 염불 외듯이 그는 천천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런 양호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백호는 팝송을 흥얼거리고 있다.
몇년 미국에서 살았다고 팝송을 부르는 강백호는 낯설지만······. 그래! 솔직히 엄청 섹시해 보였다. 미치겠다 진짜. 오랜만에 백호를 봤다고 반가운 마음이 가득 찼다면 이제 슬슬 반가움은 반가움이고 어때? 얼굴 보니 또 좋지 않아? 답 없는 사랑이란 놈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양호열은 눈치도 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운전에 집중하려는데.
"-열아 내 말 듣고 있어?"
"엇, 아? 미안! 못 들었어."
"우리 다음 휴게소에서 들리자고. 아까 이정표 봤는데 4km 남았대."
"하하 그래, 그러자."
짝사랑 기간만 10년을 찍었다. 이 이상 뭘 더 바란다면 그건 너무 욕심 아닐까. 가족이 되어달라 하진 않겠어. 이렇게 힘들 때나 기쁠 때 함께 나누는 친구로도 난 만족해.
폭우를 뚫고 자동차는 휴게소에 무사히 정차했다. 우산을 쓸까 했지만 강백호는 요 앞인데 그냥 가자! 하면서 후다닥 뛰어간다. 아아, 오늘 머리 꽤 맘에 들었는데. 양호열은 눈물을 머금고 자신도 차 문을 열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강백호는 벌써 떡볶이와 어묵, 통감자구이를 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백호가 먹고 싶다고 한 음식 중에 떡볶이가 있었지?
"백호야, 너무 많이 사지 말자. 우리 가서도 밥 먹어야 하잖아."
"괜찮아! 또 먹을 수 있어!"
강백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서 양호열은 커다란 파라솔이 설치된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엄청난 크기의 파라솔 덕분에 비가 들이치지 않아 제법 운치가 있다. 내리치는 빗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고 생각할 때 멀리서 강백호가 한 아름 음식을 안고 온다.
"우와 백호야. 나 이거 다 못 먹어."
"내가 먹으면 되지! 자, 호열아 너 커피."
"아, 고마워."
양호열은 따뜻한 김이 나는 블랙커피를 받았다. 양호열 맞은 편에 앉은 강백호는 잘 먹겠습니다! 외치며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핫도그부터 와앙- 물었다. 아, 양 볼 가득 먹는 백호 귀엽다.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괜스레 옛날 생각이 난다. 출세했다 양호열. 강백호에게 간식이랑 커피도 얻어먹는 날이 오다니. 고등학교 때 강백호 뒷바라지 해준다고 안 해본 알 바가 없었지. 운동화, 운동복 사주고 밥 굶을까 봐 식재료까지 사서 집에서 요리까지 해주고 말이야. 지극정성이었다 양호열! 다시 하라면 엄두가 안 나지만, 결국 또 허리라는걸 자신은 안다. 양호열은 강백호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호열아 넌 안 먹냐? 아-."
"움?"
강백호는 양호열에게 설탕이 뿌려진 알감자 하나를 이쑤시개로 콕 찍어 입에 쏙 넣어주었다. 백호 녀석 옛날에는 무조건 다 자기 입으로 가져갔는데 이제 다른 사람도 챙길 줄 아네. 근데 이거 조금 부끄럽다. 이런 건 연인들끼리 하는 거 아닌가?
달콤하고 포슬포슬한 알감자를 씹으면서 양호열은 말했다.
"백호야, 난 설탕보다 소금이 좋아."
"눗! 내, 내가 샀으니까 내 맘대로다 뭐!"
"하하하, 그래 알겠어."
설탕 뿌린 감자도 맛있네.
정말로 강백호는 그 많은 음식을 싹 먹었다. 그리고 간식으로 차에서 먹는다며 야무지게 호두과자까지 사서 차로 돌아왔다. 빗속을 뚫고 다시 운전은 시작되었다. 종종 강백호는 양호열 입으로 호두과자를 넣어주었고 옆에서 자신들이 얼마만큼 왔는지 지도를 보며 확인해주었다. 목이나 어깨 안 아프냐며 커다란 손으로 주물주물 안마도 해준다. 제법 보조석에 앉은 사람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 강백호다.
고속도로를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비는 그치고 하늘도 쾌청해졌다. 새파란 하늘에 해까지 뜨니 진짜로 우리 여행 시작하는 거 같다고 강백호는 더 흥분해서 양 팔을 휘둘렀다.
진짜 다행이다. 날씨가 좋아져서! 우리 여행 진짜 재밌을 거 같아!
"호열아, 오늘 영업 쉰다는데?"
<개인 사정으로 인해 금일 휴무> A4용지에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휘갈긴 문구가 바람에 휘날린다. 양호열이 강백호에게 차에서 오는 내내 여기가 진짜 경주 맛집이래! 예약도 안 받아서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백호 네가 좋아할 거야! 말하며 경주 도착하자마자 바로 식당으로 향하는데 왜 사람들이 없지? 차도 없고? 이상한데? 에이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 그럴 거야, 위안으로 삼으며 도착한 식당에는 오늘 쉰다는 무정한 안내 종이만 붙어있을 뿐이었다.
양호열은 식은땀이 났다. 사실 늦은 점심으로 이 식당에서 먹기로 계획해서 다른 차선책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 어떡하지?"
"경주 식당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뭘. 다른 거 먹자."
"다른 거?"
양호열은 눈앞에서 까만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를 바라보았다. 강백호가 다른 거 먹자고 데려온 곳은 순두부 집이었다······. 순두부, 순두부도 좋긴 한데. 여기까지 와서 순두부를?
"······ 백호야 우리 경주까지 와서 순두부는 좀 그렇지 않니?"
"왜? 이 집 순두부 맛 있을 거 같은데? 난 해물 순두부 시켰지!"
"그, 다른, 고기랄까, 아니 좀 다른걸······ 아니야. 맛있게 먹어 백호야."
강백호는 뚝배기에 나와 보글보글 끓는 빨간 순두부에 날계란을 톡 넣어서 휘휘 섞는다. 그래, 꼭 여행지에서 특별한 거 먹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양호열도 배는 채워야 하기에 하얀 순두부에 양념간장을 조금 넣고 한입 떠먹었다. 입 안에서 자극적이지 않고, 고소하며 부드러운 순두부가 퍼지는데, 맛이 아주!
"······ 맛있다!"
"눗! 진짜 맛있다!"
와 백호야 여기 진짜 맛있다! 그치? 이것도 진짜 맛있어! 양호열과 강백호는 맛있다! 맛있어! 외치면서 정신없이 식사를 했고, 식당에서 나올 때 둘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뭐 할까?"
"일단 우리 체크인 하고 짐 두고 다시 나오자."
"그래!"
숙소 예약은 구식이가 했다. 끝내주는 숙소를 잡았다고! 콧수염을 매만지면서 노구식은 우리 숙소 보고 놀라지마라? 후후후 웃었었다. 남자 5명이 자는 숙소니 그냥 시설이 너무 노후만 안 돼 있음 크게 상관없는데. 정말 그랬는데. 주소를 따라 도착한 곳은 호텔이었다. 그것도 5성급.
양호열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끝내주는 숙소라더니 진짜 끝내준다. 여러 의미로. 당황하며 들어간 로비는 어찌나 번쩍번쩍한지, 잔잔하게 피아노 연주 소리도 들린다. 호텔 프런트에서 노구식 이름으로 체크인을 하니 정말 룸 카드를 주었다. 직원은 방긋 웃으며 안내했다.
"룸 업그레이드 하여 디럭스 스위트 리버뷰 객실입니다."
"예? 스위, 스위트? 리버뷰?······ 업그레이드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양호열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강백호는 휘파람 불면서 양호열이 들고 있던 카드키를 빼앗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호열아 뭐해?
"얼렁 짐 풀러 가자."
『호텔?! 아니 그게, 흠! 내가 같이 못가니까 어! 미안하니까, 업그레이드 해준 거야!』
호텔 로비에 내려와 바로 노구식에게 전화를 한 양호열은 강백호 앞에서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했지만 지금 누구보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상태다. 양호열은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 수화기에 대고 화를 냈다.
"애초에 남자 다섯 명이 가는데 너는 무슨 호텔을 잡냐고!"
『야야야, 우리도 이제 20대 후반인데 깔끔한 곳에서 자야지! 우리가 돈이 없냐! 가오가 없냐!』
"방에 침대가 하나뿐이야!"
『······ 오랜만에 친구랑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나쁘진 않지.』
노구식의 대답에 양호열은 목소리를 낮게 낮췄다.
"너, 혹시 딴 생각으로 이러는 거 아니지?"
알고있잖아.
양호열의 말에 수화기 건너편은 침묵이다. 오래전 양호열은 백호가 미국으로 떠난 후 노구식, 이용팔, 김대남에게 백호를 좋아한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정말 평소처럼 다 같이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툭 말한 것이다.
"그래, 그게 사랑이 아니면 더 문제였어. 이제 이해가 간다."
김대남은 고개를 끄덕였고
"게이면 혹시 나도 좋아하냐?"
이용팔의 용감한 말에 양호열은 주먹을 휘둘렀다. 나도 보는 눈 있어 새끼야!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한테 말해줘서 고맙다."
노구식은 양호열의 어깨를 툭 쳤다.
그렇게 백호만 모르는 네 명만의 작은 비밀이 생겼다. 자신의 사랑을 타인에게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오랜 짝사랑에 짓눌려있던 양호열은 숨통이 조금 트였었다. 그래서 지금 이 미친 상황이 혹시나 그 세 명이 자신을 생각해 꾸민 계획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확인을 해야 했다.
"구식아. 혹시 이번 여행에 너네 셋이 갑자기 못 오게 된 거, 일부로 안 온 거야?"
『아니야, 정말 일이 생겼어.』
"진짜지?"
진짜야. 단호한 구식의 말에 양호열은 한숨을 쉬었다.
『야 호열아.』
수화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재밌게 놀다 와.』
방에 들어온 양호열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호수 전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살면서 이렇게 좋은 호텔에 온 게 처음이고, 함께 온 사람이 강백호라는 게 더욱 믿기지가 않아서 마치, 꼭, 둘이, 데이트 하는 기분이······.
"오, 호열이 왔냐?"
"응 왔어······ 백호야 감기 걸리니까 얼른 옷 입자."
욕실에서 나온 강백호는 씻었는지 따끈한 김을 뿜으며 상의를 벗은 채 머리를 탈탈 털었다. 다행히 바지는 입고 있군. 양호열의 눈이 빠르게 강백호의 이곳저곳을 흝어본다. 역시 공항에서 봤을 때 느꼈지만 근육도 엄청 늘었고 어깨도 넓어지고 전체적으로 덩치가 더 커졌다. 지난번 인터뷰 때 보니까 주변에서 응원하는 팬들도 많던데. 인기도 많겠지? 고백, 도 받아봤을까나.
"이 천재의 몸이 그리 좋냐?"
"허어?"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강백호가 수줍게 양 팔로 가슴을 가리자, 양호열은 고장 난 듯 흔들렸다.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안절부절못하다가 나도 씻고 나올께! 외치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밖으로 강백호의 웃는 소리가 난다. 미국 가더니 뭔가 애가 능글맞아진 것 같아! 외국 사람들 행동을 배워온 건가? 씻고 나오니 이미 강백호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 중이다. 손에는 작은 필름 카메라가 들려있다.
"카메라?"
"여행인데 찍어야지."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양호열이 화들짝 놀란다.
"백호야! 나 지금 씻고 나왔잖아!"
"뭐 어때! 자연스럽고 좋잖아?"
양호열은 얼른 옷을 갈아입고 간소하게 짐을 챙겼다. 다음 갈 곳은 어디인가요 가이드님? 강백호의 물음에 양호열은 웃으면서 수첩을 꺼냈다. 관광지는 양호열이 조사했었다. 펼친 수첩에는 경주에 가면 꼭! 가야 할 관광지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다.
"근처에 스쿠터 대여점이 있어, 해가 지기 전에 스쿠터 빌려서 불국사랑 석굴암 천마총까지 보고 해지면 첨성대랑 안압지 가려고! 아!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감포 주상절리 가려고 해. 바다 보러가자!"
"좋아, 출발!"
양호열은 수첩을 품에 넣고 다짐했다.
이번엔 꼭 계획대로 될 것이다.
호기롭게 스쿠터 렌탈샵에 가서 스쿠터를 빌린 거까진 계획대로였다.
아니, 조금 변경 사항이 있었지만. 당연히 1인 1대를 빌리려는 양호열에게 강백호는 오토바이 운전 무섭다며 굳이 굳이 한대만 빌려서 함께 타자고 했고 양호열도 수긍해서 1대만 빌렸다. 50cc를 빌리기엔 성인 남자 두 명의 무게를(강백호가 벌크업으로 더 무거워져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125cc 스쿠터를 빌렸다. 첫 관광지는 석굴암으로 정하고 스쿠터를 타는데 출발할 때까진 분위기 좋았다.
오랜만에 스쿠터 같이 타니 고등학교 생각나고 좋다 야!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양호열은 제 뒤에서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강백호에게 꽉 잡아 백호야! 외치며 속도를 조금 올렸다. 그런데 길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스쳐 지나가는 이정표에서 석굴암 24km 적힌 글을 보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오토바이로 24km면 꽤 거리가 있는데? 게다가 시내를 빠져나와 석굴암으로 가는 길이 산길 오르막이다.
"뭔가 이상한데?"
"야야야야, 호열아! 길이 여기 맞아?"
"맞긴 한데, 여기 오토바이로 갈 수 있는 걸까?"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일단 끝까지 가보자."
2차선 굽잇길에 성인 남자 두 명을 태운 오토바이가 힘겹게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에서 양호열은 식은땀이 났다. 뒤에서는 석굴암으로 향하는 차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 한참 뒤따라오던 차들은 조용히 추월해서 그들을 앞질러 갔다. 이렇게 앞질러 간 차들은 양반이고 가끔 크락션을 울리며 창문을 내리고 뭐라뭐라 소리치는 아저씨도 있었다. 그래, 오토바이가 빨리 가면 얼마나 빨리 간다고. 느리게 올라가서 화나는 건 아닌데 아저씨 지금 그 화 가득한 마음으로 부처님 보러 가실 겁니까?
"Shut the Fuck up!"
내 뒤에도 부처님의 자비하심과 먼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군.
양호열은 경악했다.
"백호야! 너 그런 나쁜 말 어디서 배웠어!"
"저 아저씨가 먼저 욕하잖아!"
"그런 나쁜 말 하면 안돼!"
그런 유치원 선생님이 할법만 말을 전직 양아치가 한단 말이야?! 강백호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토바이는 열심히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30분쯤 지났을까 겨우 길의 끝이 보이고 석굴암의 주차장이 보인다. 양호열은 지쳤다. 멋 부린다고 옷을 얇게 입었는데 잘못된 생각이었다. 산길은 그늘지고 바람을 직격으로 맞다 보니 몸의 체온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 호텔에서 씻고 나와 다시 세팅했던 머리도 헬멧에 눌리고, 바람을 잔뜩 맞아 제멋대로 망가졌다. 엉망이네 진짜. 따뜻한 커피가 먹고 싶어서 어디 자판기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제 어깨에 따끈한 옷이 휙 걸쳐진다. 강백호의 트레이닝 자켓이었다.
"입어 호열아. 난 네 뒤에 있어서 바람 그렇게 안 맞았어."
거짓말, 네 덩치가 더 큰데 무슨 말이야 백호야.
거절하기에도 애매하고 정말 추웠기에 양호열은 고맙다고 말하며 자켓을 입었다. 방금까지 강백호가 입고 있어서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와, 이거 정말 따뜻······.
찰칵-.
고개를 돌리자 필름 카메라로 양호열을 찍는 강백호가 서 있다. 입술이 멋대로 삐죽 나온다. 멋진 모습을 찍어주지, 왜 자꾸 볼썽사나운 모습만 찍는 거니 백호야.
"가자 호열아! 얼른 보고 다른 곳도 가야지!"
석굴암을 둘러보고 다시 스쿠터를 타고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에서 외국인 친구들에게 준다며 기념품을 챙기는 백호의 모습을 양호열은 필름 카메라에 담았다. 찰칵-.
한참 구경하고 또 다시 내려와 천마총으로 달리고, 중간에 커피숍에 들려서 간식과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빵을 입에 한가득 넣는 강백호의 모습도 사진에 찍고, 찰칵-.
커피를 마시는 양호열을 강백호는 찍었다. 찰칵-.
또 다시 스쿠터를 몰아 도착한 천마총에서 산책하는 양호열의 모습을 강백호는 사진에 담았다. 찰칵-.
두 사람은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되돌아 오지 않을 이 순간이 아쉬워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남겨두기 위하여 정말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호열아 자냐?"
강백호는 슬쩍 제 옆에 누운 양호열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진 그래도 웅얼거리면서 대답이라도 해주더니 이젠 완전히 깊게 잠들었는지 맹한 얼굴로 잠들어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자신은 미국에 있었다는 게 또 다시 꿈같다. 그 농구코트에서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경기했던 나날들이 벌써 먼 과거 같다. 두 달 뒤면 다시 미국으로 가야 한다. 두 달이 얼마나 또 빠르게 흘러갈지······. 강백호는 조용히 양호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바보같은 양호열.
너의 여행 계획은 아마 시작부터 조금씩 틀어졌을 것이다. 왜 그랬을 것 같냐?
당연히 내가 그 계획을 비틀었으니까.
애초에 내가 여행 가고 싶은 사람은 너였는데, 너는 당연히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이야.
"그날 호열이랑 둘이 여행 가고 싶다고?"
왜?
여행 떠나기 전 강백호는 양호열 몰래 노구식, 이용팔, 김대남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걸었다. 꼭꼭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그의 말에 일단 노구식이 일하는 와인바에서 다 같이 만났는데, 강백호가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호열이 꼬셔보려고."
"······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냐?"
"누가 누구를?"
"호열이를? 네가?"
왜?
강백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호열이를 좋아하니까!
노구식, 이용팔, 김대남은 혼란스러웠다. 이 것들이 지금 쌍방으로 뭐 하자는 거지? 한놈은 자신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니 영원히 비밀이라고 하질 않나, 한놈은 갑자기 와서 그놈을 꼬셔보련다 외치질 않나.
"야! 잘됐다! 양호열도 너를커허헉!"
이용팔의 두툼한 뱃살에 주먹을 내리꽂은 김대남은 활짝 웃으며 강백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호열이를 좋아한다고? 언제부터?"
상황이 재밌어졌다. 이 것들의 쌍방삽질을 실시간으로 구경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호열아! 네가 하늘이 무너져도 네 사랑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지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나보다! 강백호가 널 좋아한대! 널 꼬신다잖냐!
강백호는 얼음잔에 담긴 물을 그대로 꿀꺽 삼키고 말했다.
"미국 가서 내가 거의 매일 호열이랑 통화한 건 알고 있냐?"
"호열이가 말해줘서 알고 있었어."
"이것들이 알고도 너희는 전화를 안 받았냐."
"새벽에 오는 전화를 어떻게 매번 받냐?"
"호열이는 받아."
정말 단 한번을 빼먹지 않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정말 외롭고 힘들었는데 호열이랑 통화할 때마다 힘을 얻었어. 그게 4년이야. 4년 동안 호열이는 내 전화를 받아줬어. 외국 친구들이 그 정도면 사랑이래. 처음에는 웃어넘겼지. 호열이는 내 친구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했는데, 아니더라. 그건 당연한 게 아니었어."
"그래, 어떤 사람이 4년 동안 매일 새벽에 걸려 오는 전화를 받겠니."
"진짜 사귀는 사이라도 힘들지."
"그래서 이 천재가 고민했지. 내 인생에 호열이가 없으면 나는 괜찮을까?"
노구식이 물었다.
"답은?"
"아니다, 였어. 그래서 또 생각했지. 그럼 나는 양호열과 어쩌고 싶은가?"
이번에는 김대남이 물었다.
"그래서 답은?"
"양호열이면 사귀어도 괜찮겠다. 그래서 또 고민했지. 혹시 우정과 사랑이 헷갈려서 이러는 건가 싶어서."
마지막으로 이용팔이 물었다.
"결국 답은?"
"이 천재는 헷갈리지 않는다 이 말이다."
이건 사랑이야.
결국 세 명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호열에게 거짓말을 했다. 속인 건 미안하지만 셋은 정말 양호열의 오래된 그 낡은 사랑이 이뤄지길 바랬다.
사실은 호텔도 강백호가 예약했는데, 노구식은 정말 남자 4명이 가는 것이니 저렴한 민박집으로 숙소를 잡았었다. 그런데 이 똑똑한 강백호가 5성급 호텔 스위트 룸의 예약자를 자기 이름으로 잡은 것이다. 티 안 나게 하려고! 노구식도 갑자기 양호열에게 전화가 와서 왜 호텔로 잡았냐고 화를 낼 때 사실 머리 위로 물음표가 ??? 떴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바로 친구들에게 전화했지. 야! 얘들 호텔 잡았대! 미쳤다! 뭔일 나는 거 아니냐 진짜!
강백호는 여행의 시작과 함께 양호열 꼬시기에 들어갔다.
옆에서 괜히 팝송을 부른 것도, 사실 이거 엄청 연습했었다. 외국 친구들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부르면 멋진 노래 추천 받고 정말 계속 연습한 거였다.
휴게소에서 양호열에게 알감자를 입에 넣어줄 때도, 장거리 운전으로 피곤해하는 양호열의 목과 어깨를 주물러 줄 때 마지막 자신의 기억보다 더 작은 양호열의 목덜미를 잡은 순간 조금, 아주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괜스레 뱃속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양호열이 알아본 식당이 휴무인 것을 알고 자신이 알아본 식당으로 데려가 밥을 먹이는데 입도 짧은 애가 너무 잘 먹으니 강백호는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거였군.
호열이도 고등학교 때 항상 자신의 밥을 챙겨주고, 운동화가 헤지면 새 운동화를 선물로 주고, 트레이닝복까지 주었지. 생각해보면 그때 호열이는 아르바이트를 굉장히 많이 했다. 아마 자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아서 그때는 몰랐었다. 아마 양호열은 굉장히 힘이 들었겠지. 지금 NBA의 강백호 선수는 양호열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호열이 단단한 땅이 되어 주었고, 자신은 그 땅을 딛고 높이 점프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양호열 혹시 고자인가?
방에 들어올 때 맞춰서 운동과 식이조절로 빗어낸 이 천재의 완벽한 몸매를 봐도 애가 반응이 없던데.
아니 있었나? 그래도 은근히 쳐다보는 눈빛은 있었는데 말이야. 얼굴이 붉어지는 거 보면 또 그런 건 아니란 말이지.
함께 오토바이를 탔을 때는 정말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불국사 주차장에 도착해 가뜩이나 추위 잘 타는 애가 멋 부린다고 얇게 입고 와서 떠니 이럴 때 멋지게 상의를 벗어서 주는 거지! 어차피 이 천재는 추위 잘 안 타니까 말이다!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양호열이 또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찍었다.
강백호는 양호열과 함께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미국에 돌아가서 그 사진을 보며 이때를 추억할 수 있게.
양호열이 강백호를 찍어줄 때 그는 생각했다. 혹시 호열이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찍는 걸까?
천재도 타인의 생각까진 모르니, 그저 같은 마음이길 바랄 수밖에.
바보같은 양호열.
이 천재의 계획이 어땠냐? 아마 넌 몰랐을걸?
오늘 진짜 재밌었다.
넌 계획대로 여행이 안되었다며 말했지만 나에겐 계획대로 흘러간 완벽한 여행이었어.
잘자. 내일 보자.
양호열은 눈을 떴다.
양호열은 다 듣고 있었다. 소근거리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귀가 아플 정도다. 부디 자신의 요란한 심장 소리 때문에 잠든 강백호가 깨지 않길 바라며 내일 바다에 가면, 그래서 그가 자신과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면 양호열은 자신의 오래된 사랑을 그에게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번 여행에서 자신은 결코 백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계획은 없었다.
역시 계획대로 되지 않는것이 여행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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