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를 찾아라!
#백호열 전력110분, 주제_분실
#백호열_전력110분
주제_분실
잠에서 깨어났다 인지를 했을 때, 양호열은 곧바로 몰려오는 어지럼증에 구토감이 몰려왔다.
분명 침대에 누워있는데 뇌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기분. 술은 역시 섞어 먹으면 안된다. 뒤끝이 너무 안 좋아. 내가······ 내가 다시 술 먹으면 개새끼다 진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온 몸이 높은 파도로 출렁이는 바다 위에 있는 느낌이라 결국 뒤집힌 속에, 구토감이 몰려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웩, 켁-.
한참 후 목 아래로 꽉 막힌 느낌이 비워지자 양호열은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참으로 숙취에 절여진 직장인의 모습이다. 오늘은 금요일. 씨이이바···. 왜 주말이 아닌 거냐. 왜긴, 금요일 밤에는 회식 하는 거 아니라고 반발해서 목요일로 회식을 잡은 팀원들 탓이지. 욕지거리를 뱉으며 겨우겨우 샤워부스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온 몸을 씻었다. 직장인은 술병 나도 출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어른이기에.
아, 어제 정말 많이 먹었지. 몇 달을 고생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과장님이 쏜다는 회식. 그동안 야근과 철야에 절여져 있던 팀원들이 모처럼 긴장을 풀고 먹고 마시자! 하면서 시작된 건 좋았는데······.
양호열은 분명 적당히 먹고 빠질 생각이었다.
과장님이 그동안 고생했다며 주는 소주 한 잔, 팀장님이 주는 맥주 한 잔, 같이 작업한 팀원들이 건배하자며 돌린 폭탄주. 술에 취할수록 기분이 업 되어, 딱 한 잔만 먹고 그만 마셔야지, 이 잔만 마시고 그만 마셔야지 하면서 술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고, 결국 기억이 끊길 정도로 마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집에 온 거지? 뭐, 회식에서 살아남은 팀원들이 챙겨줬겠지! 여하튼 무사히 집에 왔으니 된 것 아니겠는가.
습관적으로 왼손 약지를 만지작 거리던 양호열은 묘한 허전함에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짧게 자른 손톱, 남자치고 곧게 뻗은 흰 손가락.
아무리 봐도 없다.
내 반지.
백호랑 맞춘 커플링!
"반지요? 아뇨, 못 봤는데······."
회식에 함께했던 사람들 중 마지막 팀원도 고개를 저었다.
어제 회식을 했던 가게의 사장님도 뒷정리 하면서 습득한 분실물은 없다고 하고 과장님도, 팀장님도 아니! 어제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하니 양호열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어찌, 다들 집에는 잘 찾아갔나 봐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백호와 3주년이 되던 날, 깜짝 선물로 받은 반지.
주얼리를 모르는 양호열은 그저 단순 은반지 인 줄 알았는데(사실 그날 백호가 잔뜩 긴장해 떨면서 자신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모습에 감격해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자신이 낀 반지를 보고 주변 팀원들이 알려줬다. 이거 은이 아니라 백금에 엄청 비싼 브랜드 반지라고.
"호열씨, 혹시 그 반지 잃어버리신 거에요?"
"······."
"그, 애인분께서 주신, 그, 비싼 반지를?"
팀원도 양호열도 침묵했다.
양호열의 애인이 농구선수로 유명한 그, 강백호인 것은 회사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양호열이었는데, 퇴근할 때 갑자기 찾아와 로비 중앙에 서서 "호열아!" 외치던 강백호를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친구입니다." 회사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강백호가 '친구'라는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사인해달라, 사진 한장만 찍어 달라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자기야! 내가 창피해? 나 사랑한다며!" 외치며 양호열을 껴안았다는 것이지.
강백호의 사자후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고, 회사 직원들은 "왐마야" 외치며 일제히 양호열을 쳐다보고, 결국 양호열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애, 애인입니다."
기획부의 양호열 사원이 동성 연인이 있는데, 그 연인이 농구선수 강백호더라. 회사의 소문은 들불처럼 빠르게 퍼져나갔고 양호열은 그날로 회사를 그만둬야겠다 생각하며 사직서를 썼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백호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사직서를 제출한 날 과장이 그를 불러 "그, 호열씨. 개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으니 사직서는 내 선에서 기각하지. 일 보게." 하며 퇴직서를 찢어버려서 실패했지만.
받아줄때까지 사직서 제출하고 상부에 보고 해야겠다 싶을 때 강백호도 터트린 것이다. 프로 농구 시즌이 끝나고 MVP로 뽑힌 강백호가 라이브 인터뷰를 할 때 폭탄 발언을 해버린 것.
"감사합니다! 어, 이 영광을 제 오랜 친구이자 애인에게 돌리고 싶네요. 항상 응원하고 지켜봐 주어서 고맙다!"
"어머! 강백호 선수! 여자 친구가 있으셨군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강백호는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남자 친구입니다."
푸흡-! 집에서 맥주 마시며 강백호의 인터뷰를 보던 양호열은 그대로 맥주를 다 뿜어 버렸고, 그날 밤에 자신의 집에 온 강백호에게 왜 그랬냐고 물으니 강백호는 그저 웃으면서 말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내가 뭔 짓을 해도 싫어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역시 내가 뭔 짓을 해도 좋아하더라고. 모든 사람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호열아."
"하지만 백호야!"
"중요한 것은 너랑 나야. 우리 서로 사랑하잖아? 그럼 된 거지! 안 그러냐?"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양호열은 강백호의 말에 설득이 되었다. 회사 생활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서.
아무리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 쌓아 놓은 실적들이 많아도 뒤에서 호박씨 까는 새끼들이 있다. 팀장이 편애하네, 뒷배가 있는 거 아니냐······. 처음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 좁은 회사생활에 적 만들기 싫어서 그 사람들에게도 호의를 보이며 친해지려 했지만, 오히려 여우짓 한다고 더 뒤에서 떠들더라.
그래서 무시했다. 무시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은 개 썅 마이웨이로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한동안 꽤 여기저기서 시끄럽긴 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쉽게 끓어 올랐다가 쉽게 식는다. 금세 새로 터진 이슈에 관심이 돌아가니 강백호 선수와 그 동성 연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금세 식어버렸다. 이제는 그냥, 아 그 친구 남자친구 있었지? 정도로 회자 되는 듯 하니 말이다.
아무튼 강백호의 폭탄 발언 다음날 얼굴에 철판 깔고 출근했을 때 팀원들의 축하와 호기심 어린 타 부서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일을 해야 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그리고 반지를 끼고 출근한 날에 팀원들은 반지 예쁘다고 탄성을 질렀었지. 은근히 어깨가 우쭐해졌었다.
그랬었는데······.
그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미치겠네."
양호열은 답답한 마음에 회사 옥상에 올라가 줄담배를 태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선물 받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뺀 적이 없는 반지다. 도둑맞았다고 하기에는 집에서 눈 떴을 때 소지품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가방도 침대 옆에, 양복도 가지런히 개켜있었고 자신은 속옷만 입고 침대에 누워있었지.
그럼 술자리에서 잃어버린 것인데 전화로 문의했었지만 혹시나 해 점심시간에 어제 회식했던 식당으로 달려가 다시 식당 사장과 홀 직원들에게 물어보아도 분실물은 없었다는 대답 뿐이었다.
"혹시 어제 저희 누가 챙겨주셨는지 보셨나요?"
"어,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마지막에 오셨던 키 크신 남자분이 한분 한분 택시 태워 보내시는 건 봤어요."
키 큰 손님? 마지막에 온 사람이 있었나?
"누군지 얼굴 혹시 기억나세요?"
"아휴, 저희가 그때 바빠서 그거까진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식당에서도 큰 소득은 없었다.
백호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지?
양호열은 식은땀이 났다. 강백호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짝사랑으로 질 줄 알았던 제 사랑이 이렇게 찬란하게 피어났는데, 강백호에게만은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한참 고민하던 양호열은 마지막 담배를 태우며 다짐했다. 그래! 그냥 똑같은 거로 사자!
"와- 호열씨, 그 반지 엄청 비싼데요?"
양호열은 평소 주얼리에 관심이 많던(처음 반지를 끼고 왔을 때 눈에 광채를 내며 반지를 보던) 팀원에게 반지 정보에 관해 도움을 구했다. 팀원은 금세 반지 외형을 기억해 검색하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양호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 반지길래? 반지 비싸 봐야 백이나 넘나?
"이거 맞죠? 까르X에. 웨딩 링이었네요, 금액이 사백이 넘네."
휘유- 애인분 통이 크시네요. 화면 가득 보이는 똑같은 외형의 반지 이미지. 그리고 그 옆의 살벌한 숫자들.
아! 백호야! 커플링을 왜 이리 비싼걸 샀니! 와중에 웨딩 링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여튼 잘되었다. 생각보다 지출이 크지만! 이제 얼른 그 반지를 주문하고 백호 만나기 전에 낀다면 완벽하다.
"근데 이거 품절인데요?"
"엑?"
반지 설명란 밑에는 '구매 가능 시 알림 받기'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애초에 물건 자체가 없는 상품이었다.
양호열은 절망했다.
목요일에 회식을 하고 술에 취해 커플링을 잃어버렸다. 금요일 출근하여 반지를 수소문 하다 결국 백호 몰래 똑같은 반지를 사려고 했지만 구할 수도 없다. 그리고 더 미치겠는 것은 지금 강백호가 자신의 집에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시즌오프로 금요일을 연인과 함께 보내고 싶다는 그에게 어떻게 안된다고 이야기 하겠나. 이제 방법은 없다.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비는 수밖에.
아.
백호가, 나한테 실망하면 어떡하지?
자신에게 실망한 강백호의 얼굴. 상상만 해도 양호열은 정말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소파에 앉아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긴장감에 다리를 떨고 있는데 현관 쪽에서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호열아!"
강백호가 왔다. 예전이라면 활짝 웃으며 백호야 어서 와! 외치며 폭 안기겠지만, 지금 양호열은 잔뜩 굳어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애인은 오늘따라 와인색 정장 슈트를 입고 꽃다발까지 들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과 와인색 정장 슈트라니. 까딱 잘못하면 '과하다!' 싶은 패션인데 타고난 피지컬로 멋들어지게 소화해버렸다. 자신에게 너무나 과분한 남자. 늘 햇빛 같은 나의 사랑. 양호열은 무의식적으로 왼손 약지 부분을 만졌다.
"저기, 백호야."
"호열아 이거. 꽃 이쁘지 않냐!"
"어? 아, 응. 고마워."
보라색 튤립 꽃다발이 양호열의 품에 안겨졌다. 강백호가 씨익 웃는데 양호열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머리 속에 실망한 강백호가 자신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상상만 가득해서, 속이 울렁거리고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양호열이 별 다른 반응이 없자 강백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왜인지 제 애인은 그저 뻣뻣하게 굳어있다.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있는지를 느껴 조용히 어깨를 감싸고 소파에 함께 앉았다.
양호열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강백호는 양호열이 먼저 이야기하길 기다렸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었다. 과거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고 혈기만 넘치던 10대도 아니고 20대 후반의 나이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내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강백호다.
"정말 미안해 백호야."
드디어 양호열이 입을 열었다.
"나······ 네가 준 반지를 잃어버렸어."
"눗? 우리 커플링?"
"으응."
양호열은 눈을 감았다.
드디어 말했다. 실망했을 것이다. 엄청 고가의 반지인데. 저도 모르게 "내가 월급 받으면 더 예쁜 거로 사서 새로 맞추는 건 어떨까? 정말 미안해 백호야" 변명하듯이 황급히 덧붙였다. 한참 지나도 백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불안감에 슬그머니 눈을 뜨니, 눈앞에 하얗게 반짝이는 반지가 강백호 손 위에 놓여 있다.
반지.
내 반지!
"반지?!"
강백호야말로 의문스러운 얼굴로 양호열을 바라보았다.
"뭐야, 호열아 너 어제 기억 안 나?"
"어? 어제? 어제 우리 만났어?"
양호열은 조심스레 반지를 가져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반지. 네 번째 손가락에 쏙 넣으니 꼭 맞는다. 이젠 버릇이 되어버린 왼손 약지 부분을 만지작 거리니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 느낌에, 비로소 안정감이 느껴져 양호열은 강백호의 무릎에 얼굴을 폭 기댔다.
"하-, 백호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어제 말이야 어제."
강백호는 양호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시즌이 끝나고 모처럼 강백호는 오후 러닝을 뛰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호열이는 오늘 회식이라고 했으니 내일 일 끝나고 데이트하자고 해야지! 메밀소바를 먹을까, 돈가스를 먹자고 할까? 라멘도 좋은데! 내일의 데이트 메뉴를 생각하면서 흥얼거리던 강백호는 울리는 전화기로 반사적으로 뛰어가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아! 받았, 하! 안녕! 배코야아아!"
전화기에서 유리잔이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한데 뒤섞이고 그 속에서 술에 잔뜩 취한 양호열의 목소리가 들린다. 소리만 들었는데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뭣, 호열이? 너 술을 얼마나 먹은 거야!"
"하하, 아니이 내가 마리야! 쪼끔, 쪼오오끔 마셨찌!"
응, 보통 이렇게 조금 마셨다고 할 때가 이미 만취한 상태더라.
"야, 야야 어딘데? 지금 어디야? 호열아! 정신 차리고! 자자 똑바로 말해보자!"
"어-. 여기여기. 회사, 근처어. 고깃집이지!"
고기가 맛있어! 해맑은 목소리에 강백호는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사귀기 전 고등학교 때 답잖게 굉장히 어른스럽다 생각했던 양호열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억누른 모습이었다. 자신을 배제하고, 감정을 억누르고 그저 사람 좋은 웃음으로. 제 감정을 누르고 누르다 결국 터져버려 뒤에서 눈물만 흘리던 바보 같던 사람이다. 강백호를 좋아한다는 제 연심이 그의 찬란한 미래에 방해가 된다면, 차마 이 마음을 버릴 수 없으니 스스로 마음을 품고 강백호의 인생에서 사라지려고 했던 이가 양호열이다.
양호열의 마음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먼저 고백한 강백호가 아녔다면 아마 양호열은 죽을 때까지 강백호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완벽하게 숨겼던가.
사귄 후에도 거의 매일 아침 자기 뺨을 꼬집고, 말을 뱉으면 그 무게가 가벼워질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이야기 못하고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을 삼키기만 했던 양호열은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결국 강백호가 양호열이 말 하지 못하는 만큼 사랑한다고, 좋아한다 이야기 하고 그의 이마에, 뺨에, 입술에 입을 맞추었지. 화들짝 놀라 얼어있다가 불 붙은 듯 혀를 밀어 넣고 숨을 헐떡이며 자신에게 매달린 양호열.
아, 생각하니 하고 싶네······ 가 아니라!
"호열아, 데리러 갈까?"
"그래! 대리러 와아! 배코야!"
"와 호열씨 애인님 오신다아아!"
술에 잔뜩 취한 양호열의 웃음소리와 주변 동료 직원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아주 다 취했구먼.
정확한 상호도 이야기 안 해주고, 회사 근처 고깃집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술에 취한 애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강백호는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제 빨간 머리칼을 가릴 모자와 마스크도 챙겼다. 동성 연인과 사귄다는 뉴스가 나간 후 가끔 파파라치들이 사생활을 찍으려 붙을 때가 있어서 귀찮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딱히 자신은 상관없지만 호열이가 오늘은 만취했으니, 최대한 조용히 다녀와야지.
양호열의 회사와 제집까지 뛰어서 30분 정도, 오늘은 서둘러서 20분으로 돌파해보자. 깨끗한 밤공기와 소란하고 뜨거운 낮과 다른 조용함을 가진 밤 러닝은 기분이 좋다. 생각보다 금세 도착한 양호열의 회사를 지나 근처 고깃집이란 고깃집은 다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양호열과 회사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는데 밖에서부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술에 절여진 소리 말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다들 술에 쩔었어. 그 속에 양호열도 있고.
"와! 강 선수! 안녕하세요오!"
"허어어억! 사인, 사인 좀······."
"강백호 선수! 와!"
술취한 사람들 속에서 혼자 제정신을 유지하려니 힘들다. 다들 인사불성으로 제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니 강백호는 잠시 멍하니 그 혼돈의 현장을 바라보다가 인원수에 맞춰서 택시들을 불렀다. 여성분들은 가게 직원분들께 택시까지 부축을 부탁드리고, 남자들은 미련 없이 둘러업고 택시에 구겨 넣었다. 택시 기사님들께 선금을 주고 꼭 집까지 안전하게 부탁드린다고 신신당부 한 다음에서야 택시들은 출발했다. 요란한 배웅을 하고 가게로 돌아오니 양호열은 어느새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제 애인을 챙기고 나가려 하는데 가게 사장이 붙잡으며 "계산하고 가세요!" 외치길래 얼떨결에 자신의 카드로 결제해버렸다. 나중에 호열이한테 말해야지.
강백호는 제 애인을 조심스레 등에 엎고 달려왔던 길을 조용히 타박타박 걸어갔다. 목덜미 쪽에서 숨결이 느껴져서 간지럽다. 호열이가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애가 아닌데, 요즘 회사에서 힘들었나?
"이봐요 양호열 씨~ 웬일로 이렇게 술을 마셨대요?"
"······ 음."
"아니 그렇잖아요? 호열씨 쭉쭉 빵빵 운동선수 애인이 속상하게 했어요?"
"아, 아니오."
오, 일어났나?
양호열은 속이 안 좋은지 끙끙거리며 강백호의 등에 얼굴을 비볐다.
"배, 배코가······ 얼마나 잘하는데."
"진짜?"
"천재······ 니까."
"하하하핫!"
꼬박꼬박 말대답 하는 게 너무 귀엽잖아! 강백호는 흔치 않은 제 애인의 주정에 괜스레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호열 씨는 강백호를 사랑하나?"
"사랑해!!"
"후, 후눗! 깜짝이야."
양호열이 고개를 갑자기 휙 들어서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양호열은 다 풀린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사랑한다고오! 아! 진짜 사랑해! 아이고 평소에 이렇게 이야기하지. 술에 취하니 억누르는 거 없이 이야기 하는구먼. 한참 사랑한다 소리 지르던 양호열은 다시 강백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에요."
"양호열씨도 못지않게 좋은 사람인데?"
"음······ 감사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일정해졌다. 양호열의 집에 다 와서 스페어키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올 때까지도 양호열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강백호는 양호열을 씻겨야 하기에 깨울까 잠시 고민하다가 씻기는 것은 포기하고 침대에 눕힌 후 옷을 벗겼다. 재킷과 와이셔츠, 바지를 벗겨 잘 개켜두고 가방도 침대 옆에 잘 두었다. 양말도 살살 벗겨서 빨래통에 넣어두었고. 속옷까지 벗길까 하다가 그건 아닌 것 같아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옆에 나란히 누워 술에 취한 자신의 애인의 머리칼을 쓸어주는데 양호열이 인상을 찌푸린다.
"으, 배······ 백호야."
"응? 물 줄까?"
슬쩍 떠진 흐린 눈동자가 강백호를 바라본다. 한참 바라보던 강백호는 씨익 웃으며 양호열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할 거야?"
"하긴 뭘 해?"
술 취한 사람 안는 취미는 없어요 양호열 씨. 강백호는 양호열의 볼을 쿡 눌렀다.
양호열은 푸흐흐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꽃이 좋아."
"눗? 갑자기?"
"프러포즈, 할 때는······ 백호 넌 와인색 정장을 입고."
"아니, 그러니까 갑자기?"
"꽃다발을, 주는 거야."
"아니······. 그래그래, 어디 말해봐."
"그리고, 프러포즈 반지를, 주면서······."
"오 본격적인데?"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행복하게 살고 싶어, 백호랑.
양호열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술에 취한 사람의 감정은 따라가기 힘들다. 차라리 깔깔 웃는 게 낫지. 속 시원히 울거나. 슬픔을 억누르다가 터져 나온 듯 무표정한 얼굴에 눈물만 또르륵 흐르니 양호열 이놈은 또 혼자 얼마나 참았고 그 때문에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탄 것인가 싶다. 강백호는 말없이 그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달래주었고 한참 눈물만 흘리던 양호열은 다시 잠들었다.
세상에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다 알려도, 자신이 왼손에 끼워준 반지로도 양호열은 아직도 불안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너를 갉아먹는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까.
강백호는 양호열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살살 빼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반지를 손에 쥐고 제 애인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춘 다음 조용히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침에 양호열은 엄청난 숙취를 앓으며 감쪽같이 사라진 반지를 찾아 헤매게 된 것이다.
강백호의 이야기가 끝나자 양호열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보니 지금 강백호 옷차림이며 꽃다발, 전부 자기가 어제 술에 취해 말했다던 그 말들을 그대로 한 것이구나!
"잠깐, 잠깐만. 백호야. 그럼 반지는 왜 가져갔어?"
"왜기는."
강백호는 말없이 양호열의 반지를 손가락에서 다시 살짝 빼냈다.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쏙 끼워주었다. 그리곤 곧바로 재킷 주머니 안쪽에서 작고 검은 상자를 꺼내어 열었다.
달칵-
열린 상자에는 독특한 모양의 반지 두 개가 반짝이고 있다. 4개의 각기 다른 모양의 반지가 하나로 뭉쳐져 있는 모양이다. 강백호는 새 반지를 양호열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었다.
첫 번째 반지를 끼워줄 때랑은 다른 여유 있는 모습이다.
"양호열 씨. 꽃다발도 있고, 이렇게 멋진 애인이 슈트까지 차려입었는데 말입니다."
강백호는 씨익 웃었다.
"어떻게, 나랑 결혼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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