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 외부

성 발렌티노의 축일

아쉐피니

어떤 한 오피스텔. 2월 14일의 아침이었다.

서력기원과 율리우스력이라는 시간 개념으로 구분하는 2024년에 오게 된 지 그래도 꽤 지난 참이었다.

피니온은 이른 아침인데도 평소와 다름없이 습관적으로 일찍 기상했다. 그것도 해가 뜨기 전이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혼자 있는데도 자기 방의 의자에 앉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턱에 손가락까지 얹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은 그렇게 길진 않았다. 한 1시간 정도…?

망설임이 끝난 후에는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고개를 홱홱 돌려 상황을 살펴봤지만 방에서 나와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아직 자나 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가 된 피니온은, 방에서 나올 때 같이 들고나온 초콜릿을 보조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소리가 안 나도록 아주 조심히 올려두었다.

서랍을 열어 작은 냄비와 큰 냄비를 꺼내고 살살 문을 닫고. 일련의 행동들이 아주 조용한 오피스텔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살 물을 틀어 쫄쫄쫄 큰 냄비에 물을 담았다. 그 냄비는 바로 인덕션 위에 올려두고 그 위에 작은 냄비, 그 위에 초콜릿이 얹어졌다.

처음 도전해보는 중탕 초콜릿이었다.

피니온은 술술 잘 풀려 맛있게 먹어주는 아쉐를 생각하며 인덕션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삐로롱——

큰 알림음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오는 곳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모든 소리를 노출시키고 말았다.

잠시 아쉐의 방문을 길게 쳐다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휴우.’

겨울인데도 식은땀을 훔치며 안심했다. 몰래 무언가를 한다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언제나 진솔한 피니온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속이지도 못해 언급도 못하고, 아쉐가 자고 있는 지금 초콜릿을 만들어보고 있는 거지만.

다행이 열이 올라 초콜릿이 녹기 시작했다. 피니온이 알아본 수제 초콜릿 만드는 방법에는 초콜릿을 중탕해서 녹이고, 모형틀에 넣은 다음 굳히는 게 끝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아쉐가 깨어나기 전까지 이루어져야한다는 게 피니온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휘적휘적—

초콜릿이라는 게 생각보다 느리게 녹았다. 피니온은 나무숫가락을 사용해 어서 휘휘 저었지만 끈덕끈덕한 초콜릿이 느리게 움직일 뿐이었다.

‘이거 맞아!?’

게다가 처음 마주하는 액체형 초콜릿은 얼마 정도가 되어야 다 녹은 건지 추측을 해야했다. 이것까지는 피니온의 계산에 없었다.

일단 잘 흐르기는 하는 것 같으니 이대로 괜찮다고 결정했다.

다시 조심히 인덕션의 불을 끄고 —조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또 알림음이 크게 울렸다— 모형틀을 꺼냈다. 하트, 별, 리본과 같은 아기자기한 모양의 틀이었다.

틀 안에 초콜릿을 가득 부었다. 뒷면으로 보이는 모양이 가득, 예쁘게 채워질 때까지. 애매하게 남았지만, 그래도 일단 다 부어두었다. 이상한 모양이면 자신이 먹어 해치우면 되는 일이니까.

냄비는 싱크대에 두고, 초콜릿이 담긴 틀을 냉동실로 옮겼다.

그 이후는 정리다. 초콜릿을 만드는데 사용된 도구들을 차곡차곡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정리했다.

남은 시간은 기다림.

부엌 테이블앞 의자에 앉아 다리를 조금 흔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한 피니온이 냉동실 문을 열었다. 손으로 살짝 눌러보니 딱딱했다. 틀에 맞게 꽉꽉 채워둔지라, 꽝꽝 얼은 초콜릿은 살짝 부풀어있었다.

냉동실에서 접시로 완성된 초콜릿을 옮겼다. 뒤가 부풀어있어 균형이 살짝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앞면은 괜찮았다.(이상해보이는 초콜릿은 다 뱃속으로 없앴다.)

이걸로 끝! 뿌듯했다. 시간 내에 완수했다.

어느덧 해는 이미 떠오르고, 창문으로부터 빛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릇을 들고, 아쉐의 방문을 똑똑— 노크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재차 노크했다.

똑똑. 똑똑똑— 똑똑똑똑—?

역시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피니온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문고리를 돌리자 침대에 누워있는 아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쉐가 눈을 살짝 떴다.

“아침?”

문 앞에서 쭈뼛대고 있는 피니온의 모습을 보자 아쉐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두 팔은 몸 뒤로 돌려놓고 있는 게, 뭔가가 있었다.

“아침은 아니고, 이거. 성 발렌티노의 축일이라고 하는 밸런타인데이라고 해서…….”

피니온은 말 끝을 흐리며 초콜릿을 자신의 등 뒤에 숨긴 채로 아쉐에게 다가갔다. 등 뒤에 숨겨두었던 초콜릿을 앞으로 내밀었다. 흔들려서 놓은 모양보다는 흐트러졌지만 그래도 누가 봐도 수제 초콜릿이었다.

아쉐는 바로 다가가 초콜릿을 하나 베어물었다. 다행히 피니온은 진한 카카오를 녹인 게 아니라, 파는 달콤한 초콜릿을 녹여 만들었다.

맛은 색깔대로 달콤했다. 달달한 맛을 본 아쉐의 입은 호선을 그었다.

“방금, 그랬나?”

피니온은 살짝 끄덕였다. 타이밍이 방금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타종교의 기념일을 기린다라…. 이단 아닌가?”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물론 하늘교의 사제이자 —현재는 사제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지만— 독실한 신자이기까지 한 피니온은 약간 충격이었다.

“믿는 건 아니고 그저 그런 풍습이 있다고 해서…….”

왠지 피니온의 바보털이 축 내려앉은 것 같아 보였다. 아쉐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그런 기념일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아서 한 농담이야. 맛있어, 초콜릿.”

다른 초콜릿을 집어 베어물자, 바보털이 살아났다.

아쉐로서는 발렌티노인가 발렌타인인지 뭐시기가 어찌됐든 아무 생각 없었다.

“나도 보여줄 게 있었어.”

당연히 밸런타인데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휴일과 다름없이 자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준비할 시간 없었는데!

“뭘……?”

“당장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고, 나가자.”

“응?”

준비한 게 있어서 꾸며입고 가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들은 피니온은 빨간 원피스를 입었다. 그걸 보고 아쉐도 비슷하게 맞춰입었다.

아쉐가 피니온을 데리고 나간 곳은 빌린 어느 공간이었다.

천천히 아쉐의 손을 잡고 들어가보니, 그 안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다.

딸기가 쏙쏙히 박혀있는 커다란 초코 케이크에, 금빛 하트 풍선과 붉은 리본으로 주위가 장식되어있었다.

“이거 다… 언제 준비했어?”

“전부 다 내가 준비한 건 아니고, 많은 도움을 받았지.”

금전으로 인한 도움이다.

“그래? 그래도, 준비해줘서 고마워.”

커다란 선물을 받은 피니온은 들떠 테이블로 다가가 포크를 들었다. 어서 오라며 뒤를 바라보며 아쉐에게 미소를 짓자, 아쉐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검지로 케이크의 크림을 살짝 떴다. 그리고 피니온의 코에 살짝 묻혔다.

“먹을 걸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지!”

아쉐가 달아났다. 두 팔을 들고 뒤를 쫓아가는 피니온이 있었다.

“포크로 찌를 거야?”

“찌를 건 아니지만……!”

피니온은 다시 테이블 위에 포크를 조심히 올려놓고 아쉐를 쫓았다. 이곳에서 누구도 함박웃음을 짓지 않은 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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