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8

가지 않은 길

하루 일과를 마친 후, 그는 방금 다 쓴 일기장을 서랍 속에 넣었다. 그리고 자물쇠로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른 서랍은 쉽게 열리지만 마지막 서랍은 그만 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사실 비밀이라고 해도 끝자락에 있는 서랍엔 달랑 일기장 하나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저녁에 미리 갖다놓은 의뢰서를 꼼꼼히 눈으로 훑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내일 수행할 의뢰는 물론 본인에게 맞는 일거리가 있으면 빠르게 낚아야 한다. 운이 나쁘면 다른 모험가가 먼저 일을 채가기 때문이었다. 노련한 모험가가 된 지 오래 되었지만, 이따금 그런 일이 생기곤 한다. 그래서 미리 대비하는 습관이 그의 몸에 밴 지 오래 전이었다.

‘ 내일은 중부삼림에 가고… 그 다음 날엔 남부삼림에 가면 되겠군. 가까운 순서로 가면 편하겠어. ’

그는 이번 주 일정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하곤 양피지를 돌돌 말아 책상에 올려놨다. 고개를 돌리자 먼저 침대에 앉아있는 그의 연인이 보였다. 그의 검은 머리와 대비되는 하얀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었다. 보통 침대에서 작은 시집을 읽곤 하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불 위에 시집이 놓여있었지만 다 읽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반려자의 옆에 앉아 차분하게 말을 걸었다.

“ 시는 다 읽었어? ”

“ 네, 오늘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조금만 읽었어요. ”

“ 그래? …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

“ 그게… 다른 무기를 써보고 싶어서요. 원래 창술을 배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

반려자의 눈길이 왼팔로 향했다. 만져도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차가운 의수였다. 하지만 비교적 성능이 괜찮은 의수라 반려자의 생각에 따라 자연스럽게 관절이 움직였다. 까딱거리는 제 손을 바라보던 반려자는 마저 입을 열었다.

“ 근거리 말고 원거리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건블레이드와 유사한 무기로요. ”

“ 원거리에 네가 쓰는 무기와 비슷한 거라면… 혹시 총을 쓰고싶은 거야? ”

“ 네, 둘 다 탄환이 들어가는 무기라서 다른 것들보다 적응하기 쉬울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제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 할 수 있을 거야. 가지 않은 길이라고 무작정 도망칠 순 없잖아?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

“ 하르도 같이 가줄 수 있어요? ”

“ 그럼. 사실 나도 총을 제대로 다뤄본 적이 없어서, 이슈가르드에 같이 가서 배우면 좋을 것 같아. 기공방 책임자가 아유나르트가의 장남이었지? 그 사람이라면 아마 믿을만 할 거야. ”

스테파니비앙 드 아유나르트. 이슈가르드 사대 명가 아유나르트가의 적자였다. 보수층이 많은 성도에서 상당히 개방적인 사상을 가진 이였다. 갈론드 아이웍스 사와 기술 제휴를 맺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평민을 존중할 줄 아는 인품을 가졌기에 그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반려자의 자존감이었다. 언제부터 자존감이 급격히 떨어졌는지,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연인의 왼손을 꼭 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 너라면 분명 실력있는 기공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가보지 않은 길이라 망설여진다면, 날 떠올려줘. 나도 조직에서 벗어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했지만, 네 덕분에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으니까. 네가 옆에 없었다면 그럴 용기가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의기소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 하르……. 고마워요. 앞으로 열심히 해볼게요. ”

반려자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연인의 저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가지 않은 길이라도 소중한 이가 있다면 두렵지 않았다. 그는 위로하듯 자신의 연인을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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