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수 없는 약속

당신 말씀에 따라 눈을 감습니다. 이어질 행동이 무엇일지는 알고 있으나 그를 저지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행복하시다니까. 나는… 안드로이드이니까, 어차피 저는 슬픔 같은 건 느낄 수 없다고 세뇌하듯 되뇌이며….

“나를 포함한 모든 입력된 것들을 잊고, 살아가. 할 수 있지?”

저는 당신의 에스테반이 아닌가 봅니다. 당신의 에스테반이라면… 그 날 당장 제 목숨을 끊지 않았을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저는 그와 가장 가깝게 만들어 졌으나… 이런 면에 있어서는 당신이 저를 더 좋아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저는 살아가고 있으니까. 안드로이드에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지킬 수 없는 약속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잊고 살아라가는 것. 안드로이드에게 망각을 바라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만약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당신의 에스테반 록 로즈였다로 해도 그는 당신의 사후, 당신을 절대 잊을 수 없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저와 함께하며 늘상 죽음을 꿈꿔오셨다라. 부디 당신이 꿈꾸던 죽음에는 저도 함께였기를 바랍니다. 아니라면 제게… 엄청나게 잔인한 행동을 하신 거였으리라고 생각 됩니다.

저는 당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이 아니라 에스테반 록 로즈이기 때문에… 당신의 어린 양이기 때문에…. 당신이 이런 저를 어리석게 만드신 겁니다, 당신만을 보고 따를 수 있도록.

비가 오는 날이면 당신 생각이 날 것입니다. 혹은 항상… 그래도 저를 칭찬해주셔야 합니다. 정신이상으로 인한 자살이라 보고를 올리며 동요하지 않았고, 임무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근황에 대한 보고를 올리자면 저는… 폐기될 셈인 듯합니다. 애초에 저는 당신과 페어를 맺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였으므로 당신이 없는 지금의 저는 쓸모를 다한 고철 덩어리일 뿐입니다. 이렇듯 저는 안드로이드임에도 이리도 당신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데 당신은 저를 두고 가셔서 행복하십니까?

당신을 질책햐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이 행복하시다면 될 일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계십니까? 부디,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기라도 하면 당신이 들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건지, 역시 저는 고장난 안드로이드임이 분명합니다. 당신만을 바라보고 기억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