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앤드래곤

스피넬 코발트블루 과거 로그

공기마저 딱딱하게 얼어붙은 듯한, 데쿠스 제국 남쪽에 있는 타국의 평원. 남쪽이라 해도 겨울이라 해가 져 음울하게 어두웠으며, 저 멀리 높은 산맥이 보였다.

위저드로서 데쿠스 제국군의 하급 포격수로 배치된 사피루스 에그레기움은 전장의 후방에 있었다. 그는 군용 지팡이를 불필요할 정도로 꽉 쥐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쪽에서 직속 상관이 소리쳤다.

“자, 나팔 소리가 들리면 그 즉시 치는 거다. 소마법(캔트립)이나 간신히 제대로 쓸 줄 아는 수준의 너희들에게 상부에서는 많은 기대를 걸 리 없다. 그저 적군을 제대로 보고, ‘한 방 쏘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질 거다.”

사피루스는 많은 말을 삼켰다.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과 시련이 있었던가.

엘프가 지배 종족인 데쿠스 제국에서는 그 외 종족을 ‘열등종족’이라 불렀고, 사피루스는 ‘열등종족’이면서 ‘이등시민’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50년 전, 얼음 정령의 피가 섞인 인간인 사피루스의 일족이 엘프 군단에 자발적으로 복속당하기를 택했기 때문이었다. 사피루스의 일족이 줄 수 있는 것은 마법에 필요한 보석 등의 자원, 제국의 엘프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제국의 시민권이었다.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사피루스의 일족은 제국의 식민지에 속한 노예 계급이 아닌, ‘당당한’ 제국의 ‘이등’시민으로서나마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니까. 사피루스의 일족은 이를 기뻐하며 ‘영광’이라는 뜻의 에그레기움으로 성을 바꾸었다.

그 후 에그레기움 가는 친황제적 행보를 이어오며, 가문의 아이들을 제국의 부품으로 만들어왔다. 사피루스가 태어났을 때 주어진 ‘기능’은 제국의 칼날, 즉 군인이었다. 사피루스는 자신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어릴 적부터 군사 훈련을 조금씩 받아왔다. 적을 사람이 아닌 쓰러뜨러야 할 괴물로 생각하게 만드는 훈련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지는 모든 지원은 그를 군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사피루스는 음악과 보석을 좋아했지만, 그에게 다른 길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피루스라는 부품의 기능이 아니니까. 사피루스가 마법에 관심을 보였을 때 일족의 사람들은 기뻐했다. 숙련된 위자드는 군대의 원거리 포격수로서 적들을 쓸어버리기에 최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훈련의 결과로 사피루스는 지금 ‘매직 미사일’ 주문 하나와 세 종류의 소마법 주문을 되씹고 다시 되씹으며, 아군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전진했다. 이윽고 제국군의 나팔 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찢었다. 동시에 상관이 내지르는 “포격, 실시!” 라는 고함도.

전선에서는 근거리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베고, 찌르고, 비틀고, 쏟아지는 피. 날아가는 팔과 다리와 목. 사피루스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제가 열심히 배워온 마법이 누군가의 생명을 불태우고 얼어붙게 하여 억지로 빼앗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피루스가 토기를 참는 동안에도 동료들은 마법을 날리고 있었다. 역시 그들도 기꺼운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피루스처럼 아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훈련의 결과물이었다. 뒤에서 상관이 소리쳤다.

“에그레기움, 뭐 하고 있나! 허수아비냐? 매직 미사일도 못 날리겠으면 소마법(캔트립)이라도 쏘라고! 명령이다!”

사피루스는 파리한 입술로 상관에게 고했다.

“죄송합니다. 사람에게 마법을 쏘고 싶지는 않습니다.”

상관은 격분하며 오른팔을 휘 내저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너는 군인이라고! 적군을 공격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관은 위압적으로 사피루스에게 다가왔다. 사피루스의 시선이 군홧발에 머물렀다.

“전장에서 사과는 쓸모없이 시간만 잡아먹을 뿐이다. 자. 내가 말했지? ‘한 방 쏘면’ 그 다음부터 쉬워질 거라고?”

상관은 사피루스의 팔을 움직여 억지로 적군 쪽으로 조준했다.

“자, 말해! ‘매직 미사일!’ 그리고 적에게 맞았는지 제대로 확인해! 확인 못 하면 너는 명령을 거부한 죄로 군사재판 감이야!”

군사재판에 선다는 실직적인 공포가 사람을 죽인다는 추상적인 공포를 이겼다. 사피루스는 벌벌 떨면서 주문을 외웠다.

“매, 매직 미사일!”

세 개의, 흰 빛을 내는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는 정확하게 적을 향했다. 적이 방패로 막아내려 했지만, 매직 미사일은 방패를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고는 적에게 쏟아졌다. 한 발, 두 발, 세 발… 적은 땅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않나?

그것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적의 몸 위로 짙은 그림자가 뒤덮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피루스가 공격한 적의 몸 위 뿐만 아니라, 적군과 아군 전체로.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적군과 아군 모두 그저 어리둥절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몸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하늘 위에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있었다. 마법과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멈춰, 사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사피루스는 한기를 느꼈다. 레드 드래곤이 입을 벌렸다.

그리고 지옥이 펼쳐졌다. 레드 드래곤의 화염 브레스가 아군과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쏟아졌다. 레드 드래곤은 이들의 전쟁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역사에서 잊힐 정도로 오랜 수면이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분노로 날뛸 뿐. 사피루스에게 적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던 상관은 브레스에 맞아 동료들과 함께 고열에 녹아버렸다. 사피루스의 눈에 그 처참한 광경이 새겨졌다.

잠시간 얼어붙어있던 사피루스는 달렸다. 어디론가 달렸다.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는 몰랐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것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달려야 했다. 달려야만 했다. 그래야,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앞이 보이지 않아. ‘그 광경’만 보여. 눈꺼풀에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아. 지워지지 않아…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고 다시 달렸다. 다시 먹지도 자지도 눕지도 못하고. 체력의 한계를 초월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사피루스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 뒤로는 의식이 까맣게 차단되었다.

다시 눈을 뜬 곳은 본 적이 없는 곳의 천장이었다. 사피루스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땅에 두 발을 딛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고꾸라졌다. 우당탕탕하는 소리에 놀라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인간이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아이고, 깨어났으면 얌전히 좀 누워있지! 자네 열흘 간이나 의식이 없었다고!”

“여긴… 어디죠?”

“‘나는 누구?’ 하고 묻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걸세. 일단 여기는 대륙 중부의 여관이라네. 나는 상인이고, 마을 밖을 돌아다니다가, 탈진해서 반쯤 송장인 상태에, 몸에 가진 건 하나도 없는 자네를 발견했어. 아무리 중부라고 해도 겨울인데, 몸이 너무 차디차서 죽을 뻔했다고!”

사피루스는 그 사람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여기는 대륙 중부. 죽어가던 상태의 나.

그러고 보니, 매직 미사일에 맞은 그 사람은 죽었을까?

중년의 인간은 사피루스의 얼굴을 이상하게 보더니 말을 이었다.

“거 참. 표정이 그런 걸 보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보구만.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않겠나? 두 발로는 힘들겠지만, 지팡이를 짚고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그는 사피루스에게 억지로 나무 지팡이를 쥐어주었다.

“척 봐도 마법사같이 생긴 옷을 입고 있길래. 너무 더러워져서 뭔 무늬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서 갈아입히고 그건 버렸지만 말이야.”

다행한 일이었다. 군대의 표식이 눈에 띄었더라면, 꽤 곤란해졌을테니까.

내가 살아남은 게 다행한 일일까?

중년의 인간은 사피루스의 앞에서 박수를 짝, 쳤다.

“어이, 정신 좀 차리고! 지팡이를 짚고는 설 수 있겠나?”

사피루스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짚고 서보았다. 조금 불안하지만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니 서있을 수는 있었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 상태로 한 바퀴 돌고 오게. 이 마을은 치안이 좋으니 환자인 자네한테도 별 일은 없을 걸세. 그러고 보니 자네 이름도 모르는군. 이름이 뭐지?”

사피루스는 잠시 침묵했다. 군대에서 도망친 나는 ‘영광’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아니, 그 ‘영광’이라는 게 대체 무어인가. 사람을 죽고 죽여서, 국가의 이상을 피에 젖은 깃발로 내거는 것이? 사피루스는 그것이 진절머리나게 싫었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일. 이상에는 사람을 죽여야 할만큼의 가치 따위는 없다. 따라서 전쟁에 ‘영광’이란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이 이름을 버려야 한다.

그는 갑자기 보석에 대해 혼자 공부했던 것이 생각났다. 스피넬. 사파이어와 루비를 포함하는 커런덤과 비슷한, 단단하고 아름다운 보석. 그리고 희귀한 코발트블루 색의 스피넬이 존재한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스피넬, 스피넬 코발트블루에요. 그리고…”

내가 살아남은 의미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나는 살 수 있으니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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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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