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가진 것 없는 자

1차BL, 워렌 도르코, 에단 시라

부족한 말을 더하며 나는 마지막 장에 기꺼이 이렇게 적어넣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이전보다는 덜 외로웠다고.

이제는 달리 몇 년인지도 모를 4월 2일 (날짜는 내가 정했다. 새벽녘 겨울이라기엔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던게 그 기초였다.), 워렌 도르코라는 특이한 이름의 남자를 만났다.

이 도시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나도 워렌도 잘 알지 못 한다. 도로의 표지판은 하얗게 먼지가 덮여 보이지 않았으며, 신문은 전부 찢어지고 젖어서 어느 날짜에 투고된 신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도시의 표지판 끄트머리에 t라는 알파벳이 겨우겨우 보였다. 그것을 일부러 닦아 도시의 이름을 확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

이 곳은 지나간 사람들에게 '임시 거처' 쯤으로 불렸던 모양이었다. 임시 거처에선 너무 오래 지내지마, 사람이 미쳐버린다, 말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라디오의 지지직거리는 전자음. 확실히 도심지로 들어갈 수록 비이성 생명체들이 없다시피해 자는 것은 무리가 없었지만, 사방이 황무지에 다 똑같은 폐허의 건물들, 사람의 흔적 하나 없는 도시의 싸늘함이 온갖 상념을 불어넣어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흔적을 찾기를 며칠, 이런 곳에서 오래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미쳐버렸거나 이미 미친 놈일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분명 인간이 있겠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게 인간들인걸. 놀라울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도심지를 배회하다 처음으로 워렌과 마주했던 날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회색 머리카락에 연한 자색 눈, 어디엔가 쓸린 듯 주름 없이 매끈한 무릎과 팔꿈치, 보기 싫을 정도로 비쩍 마른 몸, 날카롭게 찢어진 눈, 신경질스러운 눈빛.

초조하고 불안해 보이던 표정.

그 날은 임시 거처에 온지 이틀째 되는 아침이었다. 날짜는 봄인데도 여름처럼 햇볕이 따갑다. 아직 남아있던 식량을 배낭에 매고 다음 휴식지를 찾아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던 나는, 거의 다 무너져내리는 벽 한 곳에 팔짱을 낀 채 서있던 워렌 도르코와 그렇게 마주쳤다. 그때까지는 '워렌'이라는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던 워렌은, 기다란 사냥용 총을 벽에 댄 채로 멀리서부터 언덕을 올라오는 나를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역광이 비쳐 그는 거의 죽음의 사자처럼 보였다. 워렌이 내게 손짓했다. 멈추라는 의미임에 틀림 없었다.

순순히 멈춰서자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온 워렌이 내 정강이를 발로 차서 무릎을 꿇렸다. 거친 모래 위로 피부가 따갑게 쓸린다. 등에 맨 배낭을 거칠게 빼앗아 간 워렌은 그 전리품에는 조금의 흥미도 보이지 않은 채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정수리에서부터 아래를 향하여 꾹 눌려진 총구가 차갑고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총대의 무게감을 느끼며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워렌이 흠칫하며 나를 노려본다. 총을 대고 있는데도 움직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는 표정이다. 나는 워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도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 잠시 뒤에, 워렌의 시선은 한참 어딘가에 고정된다. 검지와 약지가 텅 비어있는 왼손. 모래바닥에 뒹굴어진 손은 더럽고 초췌하다. 워렌은 총을 들지 않은 반대편 손을 들어 초조한 기세로 너덜해질 때까지 제 검지를 물어 뜯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가 움직이며 건물의 그림자가 옮겨 오고, 워렌과 내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워렌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입 속에서 거의 씹어먹듯 하고 있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죽지 않았다.

워렌은 내게 겨눴던 총구를 천천히 거두고, 턱짓으로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그가 다시 던져준 내 배낭을 받아들고, 영문을 모른 채로 그를 따라 걷는다. 던져지며 터진 플라스틱 물병을 제외한다면 주울 것이라곤 없었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있었으나 총을 든 사람을 상대로 뛰어봤자 그를 자극하는 행동 밖에야 되지 않는 다는 것이 분명해서, 나는 괜한 생각을 하는 대신 푹푹 빠지는 모래 위에서 애써 균형을 잡으며 그를 따라가는데 집중한다.

“아……”

휘적거리며 앞서 걷던 워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짜증스레 헝클어뜨리며 멈춰섰다. 어쩐지 불안해보이는 표정이다. 그래, 나는 몇번이고 워렌에 대해 묘사할 때 이렇게 쓸 수 있다. 처음부터 항상 불안해보이는 사람이었다. 이건 안 되지. 이건 안 돼. 아, 아, 이건 안 돼. 성가셔. 알게뭐람, 그냥 죽여버려야지. 이건 안 되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모래 바닥 위로 누구에게 하는건지 모를 욕설을 내뱉는다. 씨발, 씨발, 씨발, ... 그 목소리는 그의 작은 체구만큼이나 앳된 티가 남아있어서, 나는 입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나보다 어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아, 내가 왜 이 곳으로 온거지?

이번에도 네 차례라고 말하는 비겁한 목소리, 손가락 하나가 잘리길 기다리는 사람들. 피학으로 내려앉는 지배. 지킬 힘 하나 없는 사람들과 유흥을 얻고 싶은 사람들.

그야, 지겨웠으니까.

뜨거운 햇빛에 머리가 데워진다. 현실 감각이 사라져 머릿속이 생각할 수조차 없이 녹아내린다. 나는 녹아내리는 머릿속으로 에단, 에단, 에단, 에단, 하며 내 이름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열댓 걸음 앞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중얼거리던 남자의 모습이 질려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 사이에, 무너져가는 벽 위로 총탄이 박혔다. 탕, 의미 없이 귀 아픈 총성이 울려퍼진다.

어쨌든 한 발은 박혔어.

그러더니 그는 내게로 총을 겨눈다. 총구가 흔들렸다. 워렌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다시 마음을 바꾼 듯, 신경질스럽게 총구를 다른데로 돌려 모래 바닥 위로 몇 발 더 총알을 낭비한다. 아, 저 아까운 총알. 저것 두 발이면 괴물 하나는 내가 해치울 수 있을텐데.

탕, 탕, 탕-

여러 번 박혔어.

이러면 평소와 비슷한 하루가 되는거지. 워렌은 중얼거리며 한결 나아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뒤에서 따라 걸었다. 나는 저 총부리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삶에 달관한 내 성질과 별개로, 저 앞에서 나는 조금은 전율한다.

왜 날 죽이지 않았지?

나는 그에게 물어볼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았기에 묻지 않는다. 그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는 어쩌면 나와 이 황량한 도시에서 마주친 이유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가진 것 없이 영혼과 육신만 들고 이 곳에 왔다. 뚫어져라 내 눈을 마주보았던 그 때 자신과 내가 닮아있다는 걸 보아서, 나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진게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래서 죽지 않을 수 있었던게 아닐까, 워렌은 그걸 느꼈던 게 아닐까, 하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떠올린다. 

5월 17일.

워렌은 나보다 적은 나이였지만 나를 꼬마라고 부른다. 나는 이제껏 워렌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워렌도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내 이름은 워렌에게 있어서 관심 밖의 일인 듯 했다. 아니면 남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살가운 성격이 아닐런지도 모르고. 어느날엔가 내 이름이 궁금하지 않은지 물어보니, 워렌은 그런 질문을 하는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어차피 금방 죽을거 알아두어 뭐하냐'고 내게 일갈했다. 그래서 나는 워렌에게 야, 또는 꼬마라고 불린다. 정말이지 이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워렌은 워렌이라고 불리지만, 달리 그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충분히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름이란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하지만 그가 내게 이름을 알려준게 언제였지? 내가 그의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었더라…

그는 십대 후반 밖에 안 되는 나이인데도 전쟁이 휩쓸고 간 도시 속에서 홀로 살아남는데 도가 트였다.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 온 나와 달리 워렌은 자신이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고 말한다. 3년 전에는 마을 하나를 일궈낼만한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고, 불과 반년전까지만 해도 교실 한 칸을 채울만한 사람들이 이곳에 살아있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어.

내 말은, 이상한 것들이 돌아다니기 전에도 말이야… 그냥 뭐, 그거지. 사람에서 괴물로 바뀐거야. 그게 전부야. 어쩌면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몰라. 적어도 ‘이것들’은 내 마음대로 죽여버릴 수 있고, …아니냐?

달리 말하면 이 도시의 번영과 쇠락을 눈으로 보고 자랐다는 말이었다. 보금자리는 아늑하기 짝이 없지만 살기 위해 기꺼이 뭐든지 했다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거의 그에게 의지하다 못 해 기생해서 살아가고있는 셈이다. 아무렴. 그에겐 이리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 빚이 있는 셈이니, 나는 그런 표현을 신경쓰지 않았다. 유년시절에는 워렌에게도 가족이 있었다고 한다. 워렌은 가끔 네귀퉁이가 모두 너덜해진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다른 것은 전부 신경쓰지 않으려는 듯이 굴면서도 내가 그것에 우연히라도 시선을 두려하며는 귀신같이 알아채고 예민한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반응하곤 했다. 나는 워렌이 종일 그 사진을 끼고 살다가, 언제나처럼 약에 손을 대고 쓰러져 잠들었을 때여야 -이 곳에 분명히 마약이 있었다. 음식이나 쌓아놓지, 병신같은 것들. 워렌은 그것에 대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루도 빠짐 없이 지하 창고를 채운 약들에 손을 댄다- 그 사진을 들고 유심히 살펴보곤 하였다. 먼지가 계속 덮이다 찐득해진 표면, 색이 바랜 그 사진 속에는 어린 워렌과 그보다 조금 더 커보이는 십대의 남자, 그리고 엄격해보이는 인상의 한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둘은 마치 기숙사 생도같은 절제된 회색 제복을 입고 있다. 그 사진 속에서 워렌 도르코는 지금보다 훨씬 생기 있고, 어딘지 모르게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 사진 한 장이 워렌이 홀로 버텨온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워렌은 분명 부정하겠지만…

[…형…]

짙은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워렌은 계속 계속 뒤척이며 신음하는가싶더니, 침대에서 비척이며 내려와 신문지 바닥에 누워있는 내게 몸을 기울여 이 곳에 없는 형을 부르며 나를 계속 해서 끌어안았다. 그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나 나는 그가 말하는 ‘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처음엔 그러려니 지나치다가, 그래, 워렌, 하는 단 한마디 말만으로 잔뜩 떨리는 그 몸을 느끼곤 그를 더 다정하게 껴안아든다. 그는 일어나면 이런 일들을 기억하지 못 했다. 혹은 기억하지 못 한 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는 내 생각보다 더 나약한 사람이다.

나는 사사건건 욕설을 섞어 말하는 워렌과 달리 말투가 예의바르고 행동이 얌전한 편이었다. 워렌은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워렌은 세상물정 모르는 듯이 보이는 내가 분명 유복한 환경의 도련님이었을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 얘길 꺼내며 식사 자리에서 몇 번이고 빈정거리며 말을 해오곤 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선 비열하고 거칠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에서 고된 일이라곤 해본 적도 없어보이는 내 모습을 마음 속으로 몰래 질투하고 있다. 나는 그가 식습관, 언행, 옷차림 등으로 내 과거를 추리할때마다 속으로 웃음을 삼킨다. 나는 날때부터 고아원을 전전했고 고아원을 벗어난 뒤에도 일반적인 가정 안에서 자라나지 않았다. 때문에 워렌이 가진 사진같은 것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허나 구태여 그걸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그런 대상 없는 질투심에 아랑곳 하지 않은 것은, 어정쩡한 인간인것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보이는게 살아가기에 더 유리한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홀로 왔듯이 앞으로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빼앗을 것 없고, 죽인답시고 힘을 뺄 가치도 없는 그런 인간인 것이 나는 좋았다.

5월 20일.

아, 말이 나온 김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게 뭐던지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일 것이다. 워렌은 날 사랑하지않는다. 아니, 사실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 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러번 함께 밤을 보냈다. 한번도 다정했던 날이 없다. 워렌은 날 내치지 않는다. 날 신경쓰지 않는다면, 이상한 리스크를 짊어지고 가는것이다.

처음은 경미한 스킨십이었다. 워렌이 평소처럼 약에 취해 풀린 눈으로 내 입술을 보다가, 불쑥 네 입으로 밥을 먹여달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침이 섞일텐데? 그리고 우리 둘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지극히 상식적으로 대꾸하자, 워렌은 무엇이 불만스러운지 나를 빤히 노려본다. 식탁 테두리를 붙잡은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꾹 눌리었다. 나는 잠시동안 생각하다가, 스푼에 멀건 스튜를 조금 떠서 입에 머금고, 일어서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입에 흘려넣는다.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이 기이한 행동에 성적인 무언가가 더해졌다. 그것이 몇날며칠 이어졌을 때에도 나는 어째서 그럴까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았다. 욕구를 풀만한 장난감이 있는 쪽이 없는 쪽보다 낫다는거겠지, 하고 단순하게 결론지었을 뿐이다.

워렌은 이곳에서 혼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았고, 나는 그렇지 못 했지만, 나는 워렌의 생각보다 훨씬 더 냉소적이었고 어린애답지 못 했다. 그의 앞에서 두려운 척 했지만 워렌과의 관계가 내게 있어서 처음은 아니었다.

현대까지와서 이렇게 말하기 우스워도, 나는 내가 살던 도시에서 나로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소유되었던 사람,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무거운 몸으론 도망칠 수가 없어 나는 많은 것들을 두고 이 사막을 건넜다. 그야말로 수많은 것들, 인간인지 애정인지 소중함인지 우정인지 신뢰인지 지긋지긋하고 지긋지긋한 ? ^#€¥

……… … … …

그치들에 비하면 워렌은 차라리 더 나은 쪽이었는데, 워렌은 순진한 흉내를 내는 것을 퍽 좋아하는 듯이 보였다. 긴 밤을 보낸 뒤 아주 약간 풀어진 얼굴 뒤에서 정복욕이 번뜩였다.

워렌은 티비 보는걸 좋아했다. 아, 전파는 들어오지 않는다. 비어있는 화면의 텔레비전을 보는 걸 좋아했다.

[이제사 생각해보니 그날 널 죽이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아.]

텔레비전의 빈 화면을 보다가, 워렌은 금방 생각났다는 듯이 툭 뱉는다.

[너, 내 형이랑 닮았어.]

닮았다고? 어디가?

곧바로 대꾸하고 싶었지만 싸움을 일으키고싶지않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워렌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달싹인다.

[야.]

[응?]

[키스해줘.]

나는 순순히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양 팔을 가로 포개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워렌이 원하는 키스를 정확히 그 입술에 담아내 보인다. 그 입술은 내 생각보다 더 따뜻했기 때문에, 입을 맞출 때는 워렌이 조금 더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숨이 섞이다 떨어질 때마다 그는 아쉬워하지 않으려 표정을 숨기기 급급했다. 튿어진 제 입술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던 워렌이 입을 열었다.

[그걸 하자. 애인이라도 된다는 듯이 사랑한다고 말하는거야.]

재밌는 놀이라도 된다고 생각해 말한다는 양 하지만, 그처럼 알기 쉬운 사람도 또 없는 것이다. 워렌은 내가 대답이 없자 붉어지다못해 퍼래진 낯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노려보는 낯으로도, 그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게 주먹질 한 적이 없다. 나는 마지못해, 하지만 싫지는 않다는 듯, 그를 다시 품에 안는다. 사랑해. 사랑해. 워렌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야하는 이 놀이를 좋아한다면서도, 정작 자신은 내게 절대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워렌에게 놀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짐작하며 웃는다. 하지만 대체 왜? 워렌은 나를 사랑할 이유가 없는데.

그 사실을 떠올리자 나는 모든 것이 지겹게 여겨진다. 그림자처럼 늘어붙는 사랑, 제가 하는 것이 사랑에 유사한 감정인줄도 모르고 점점 스러져가는 어리숙한 남자. 그리고 목울대 안에 걸려 이물질이 사라지지 않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더 늦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라며 나를 종용했다. 그리고 나도 누구인지 모를, 내게 속삭이는 말들에 깊이 동의했다.

7월.

의미없는 공동 생활이 점점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을 무렵, 나는 문득 이 곳을 정말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심하고나자 실행은 생각보다 쉬웠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적 가져온 배낭 안에 약간의 물과 식량을 챙긴 뒤, 약에 취해 죽은 듯이 엎어져 누워있는 워렌을 두고 집을 나왔다. 검고 시퍼렇던 하늘에 여명이 밝는다. 아마도 그는 두 시진 뒤에야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아침나절에도 후덥지근하던 공기가 한낮이 되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타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 챙겨온 물도 서서히 떨어져가기 시작했다.

워렌을 무얼 하고 있을까. 나는 어느 정도는 워렌에게 질려 있었고, 이 도시를 조금 더 많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될 수 있으면 전부 보고 싶었다. 워렌의 말대로 정말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도심지로 들어갈 수록 버석거리는 시멘트가루가 발끝에 질질 끌렸다. 한쪽이 깨어지고 더러워진 마트의 유리 진열장 앞에서 나는 오랜만에 내 얼굴을 봤다. 햇볕에 그을린 짙은 피부, 청옥색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아직도 사람다운 눈빛을 하고 있는 것에 짐짓 놀라 한참동안 나를 마주보고 서있는다. 살고 싶어하는 사람, 살아가고 있다는 걸 받아들인 눈빛. 아주 오랜만에 오래도록 바라본 내 얼굴에서 그런 것을 발견한 것이 뜻밖의 일이라,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찰나에, 유리창에 번뜩이며 비친 것- 열기에 일그러진 공기 중에서 문득 하얀 손이 내 손목을 잡아채는 듯한 모습을 본 것도 같아 나는 가쁜 숨을 뱉으며 진저리친다. 그러나 눈을 감고 두어번 숨을 내쉰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손목에는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다시 밤이 내렸을 때에도, 나는 어떠한 괴물들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도 전부 워렌의 덕분이었다. 그늘로 들어가지 말고, 항상 바람을 타고, 적막한 곳에서는 일부러라도 발소리를 내라. 내가 따라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가야할 곳이 마땅히 정해졌던 것은 아니어서, 나는 계속 헤매다가 다시 예의 그 마트로 되돌아온다. 개중에 깨지지 않아 모래바람을 막을 벽 아래에 쓰러진 매대를 세우고, 잠이 들지, 들지 않을지 확신은 없으면서도 웅크려 누워 눈을 감았다. 혼자 자려고 하는 것이 몇 개월 만이다.

뒤척이다 어느새 잠든 그 꿈속에서, 나는 바다 한가운데 서있는 워렌의 모습을 본다. 바닷물에 젖은 온몸이 축축하게 내려앉아 무거워보인다. 그럼에도 가라앉지 않은 채로, 그는 바닥 없을 바다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바다라. 목이라도 말랐던걸까… 하고, 나는 잠을 자는 동안 말라붙어버린 입안을 혀로 훑어 적시며 중얼거린다. 그날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워렌을 다시 만난건, 내가 그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해 그가 나를 포기했다고 여기게 되었던지 불과 몇시간이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좆같은… 새끼, 내가 우스웠겠지?]

사흘도 채 되지않아서, 워렌은 도시의 중심부에도 다다르지 못 한 나를 찾아냈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어쩌면. 실제로 워렌은 그걸 고민하는 듯 내 목을 손아귀에 쥐고 거친 숨을 내쉬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더 힘을 주지 않고 나를 끌어내어 걷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하지만 더 인내하는 것이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익숙한 표식들, 예컨대 임시 거처가 근처에 있음을 알려주는 여러 표식들을 지나치면서, 나는 나도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만다. 내가 이정도 밖에 움직이지 못 했었나? 돌아가는 길에 부서진 마트 한켠의 유리창을 지나쳤다. 힐끗 옮겨 본 시선 속에서 유리창에 비친 나와 워렌이 보인다. 워렌의 하얀 손은 그전날 내가 봤던 환영보다 더 절박하게 내 손목을 붙들고 있다.

[내가 너한테, 언제 말해 줬는지 기억나?]

[무엇을?]

애매한 질문에 애매한 대답, 내가 되물었으나 워렌은 대답하지 않는다. 며칠 밤낮을 걸어온 거리였는데 워렌은 그 나름대로의 노하우라도 있었던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낭비했던 것인지 해가 지기 전에 나를 데리고 임시 거처에 다시 돌아오는 것에 성공했다. 우리를 노리는 괴물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워렌은 그 작은 체구로 나를 끌고 가면서도 한마리 당, 한 발 씩,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가는데 성공했다. 나는 그가 일부러 괴물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어가며 거점지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도 워렌에게 배워 어떠한 괴물하고도 마주치지 않은 이 시점에, 나보다 숙련되었던 그가 계속해서 괴물들과 마주친다는 것은 상식적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가다시피하여 마루바닥 위에 쳐박혔다. 챙그랑 소리를 내며 찬장 위의 식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듯 들려왔다. 워렌의 짓이다. 저거 없으면, 밥은 바닥에 부어 놓고 먹으려나. 그런 우습지도 않은 생각이 문득 머리속에 맴돈다. 아니면 나한테 또 먹여달라고 하려나. 이쪽은 우습다고 말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짧은 시간동안 둘러본 임시 거처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워렌이 가지고 있던 그 사진, 내게 절대로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그 가족 사진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것을 보았다. 워렌이 사치를 부리던 '마약'도 보았다. 널부러진 주사기와 종이 쪼가리들이 지나간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이 그 약들에 매달렸는지 알게 해주었다.

[먹어.]

워렌이 내게 약에 취한 낯을 들이밀었던 적은 많았으나 그가 약을 내 앞에 들이밀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입을 열지 않자 워렌은 가루약을 한입에 털어넣고 제 입술로 내 입을 열었다. 억지로 약을 함께 했다. 억지로 수없이 관계하고, 처음으로 살려달라고 소리지르며 매달렸다.

[너, 죽으려고 했지.]

정적이 내려 앉은 임시 거처 안을 워렌과 나의 숨소리만이 가득 채웠다. 내 목에. 맥이 뛰는 피부 위에 손가락을 힘주어 눌러놓으며, 워렌은 내가 죽기 위해 저를 떠났다고 생각했다는 걸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그가 무서웠던 건 아니었고, 말하려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지만, 내 머리속에 맴도는 한가지 생각- 어째서 워렌이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 나는 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지? 단지 그것 때문에, 그가 말하는 걸 더 듣고 싶어서 나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자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총을 쥐어, 내 가슴팍에 눌러 을러댄다. 대답해, 대답말이야. 

[아니.]

내가 내놓은 대답에, 그는 우습다는 듯이 방 안이 떠나가라 웃어대었다. 뭐? 그럼, 그 꼴로 나가서 살려고 했다고? 아니…이제 생각해보면 그게 맞아. 너는 애초에 죽을 생각으로 여기 왔던거거든.

[내가 왜 당신을 살렸는지 알아?]

야, 라는 말 대신에 워렌은 처음으로 당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지금은 알 수 있지. 그때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지내면서 점점 알 수 있었어…네가 네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는 분별력이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분노는 거기에서 기인된 일이었다. 꼬마라고 부르는것에서 알 수 있듯이, 워렌은 나를 아무것도 못 하는 반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처음에 그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나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가, 나를 발견한 다음에는 안도 이전에 한 번 버려졌다는 분노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그는 차라리 FED-N번대의 비이성 생명체들에게 죽어 바짝 말라버린 나를 발견하는게 더 기분이 좋았을 거라며 조소했다. 그럼 버려졌다는 걸 실감하지 못 했을테고, 네가 일부러 나를 떠나지 않았다고, 내게 돌아오려다 죽어버린거라 합리화라도 할 수 있었을거라며. 그렇다. 그는 분명하게 버려졌다는 표현을 써가며 말했다.

워렌의 말에 그렇게나 동요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워렌에게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워렌이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고 가슴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우리가 몸을 섞은 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와 내가 지나치게 가깝다고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처음인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벗어나고 싶어졌으나, 누워있는 몸은 무겁고 고단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다.

[왜 혼자 떠났어?]

[더 멀리 가고 싶어서.]

평소였다면 그냥 웃고 말았을 것이다. 약 기운이었는지, 나는 멍한 머리로 워렌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여기 있으면 계속 여기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더 멀리 가야 해서. 멀리 가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그래? 더 멀리 가고 싶었어? 나도 그랬는데.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아.]

[너랑 갈 수 없어]

[나랑은 왜 갈 수 없어?]

[너랑 같이 가면 얼마 못 가 발목이 잡힐 것 같았어]

뜬구름 잡는 말이 이어진다.

내 대답을 듣고있던 워렌이 하, 하며 코웃음을 치며 제 이마를 짚었다. 씨발, 그 때 죽여버릴걸.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혼자는 외롭지 않았는데. 혼자여야 외롭지 않았을텐데. 그러면 자잘하게 남은 마음 같은 건 언제든 사라져버렸을텐데. 워렌은 단어 하나하나를 짓이겨내듯이 그렇게 말했다.

나랑 있어서 외로웠니? 나는 외로웠어. 나는 외로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어. 왜 이름을 말하지 않아? ‘내 이름’은 가짜가 아니야. 왜 싫다고 말하질 않아요? 나는 너를 살렸는데...

[다시 떠날 때는 나랑 함께 떠나자.]

종내에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말한다.

워렌이 내가 받아들인 뜻과 같은 뜻으로 말한게 맞는가 싶었다.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그것은 비약이다.

[알겠지. 나와 함께 떠나는거야.]

사실이라면 그는 지나치게 다정한 말로 내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워렌의 두 눈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붉게 핏발이 서있다. 나는 선선히 알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는 워렌이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는 나와는 달리 어떻게든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도시의 모든 것이 그렇듯 그는 쉽게 나를 지워낼 것이다.

그러나 그 바다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빛과, 단지 그 바다 속에서, …

이런 황량한 도시에서 저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에 그는 조금 들떠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꿈속에서…

그는 내게 금방 질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워렌에 대해 조금 마음이 동했다. 정확히는 그 사진이, 그 사진이 처참히도 바닥에 버려져 있었던 것에 마음이 동한다. 워렌은 그정도로 나를 마음에 담아두고만 것이다.

[에단 시라.]

워렌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나를 다시 끌어안는다. 나는 그래, 워렌, 그래, 하며 그의 등을 녹이듯 다독여준다. 어쩌면 내가 떠나야 할 시기를 너무 빨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정도로 괜찮다.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여전히 가진게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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