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マン、浪漫!

All Hollows Even

31th, Oct

10월의 마지막 주를 맞이한 칼데아는 유례없는 활기로 가득 찼다.

칼데아는 개성 넘치는 영령들이 한곳에 모인 탓에, 늘 바람 잘 날 없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의 칼데아는 소란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날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화재 사건 이후 상주하는 스태프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러한 활기는 반가운 일이다. 그야, 잔뜩 신난 영령들 없이 인간만 있다면, 칼데아의 식당이 가득 차기는 커녕, 분명 살아남은 인간들조차 우울에 좀먹혀 방 안에 틀어박혔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 우울한 분위기는 핼러윈을 앞둔 이때, 더욱 저점을 찍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날, 핼러윈. 이날이 다른 수식어를 갖게 되지 않는 이상,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은 평생 죽은 자의 공백을 느끼고 살아갈 것이다. 핼러윈은 단지 그 공백을 부추기는 요소일 뿐이지만, 여간 신경줄이 두꺼운 사람이 아닌 한, 인간은 그러한 요소에도 쉬이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스태프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떠들고 있는 자들이, 같이 이 시대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잔영이라 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미 그들에게 영령이니 서번트이니 혹은 인간이니 하는 마술 세계의 구분법은 모호해진 지 오래였다. 제아무리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한들 그들과 웃고 떠들고 또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과거의 영령은 인간에게 친숙한 존재로 다가오곤 했다.

All Hollows Even

로마니 아키만 & 소야 츠무기

이러한 열기는 다들 목을 빼고 기다려온 10월 31일까지 계속 달아오르기만 했다.

사람들은 유령이나 박쥐, 호박의 장식물을 기다렸다는 듯 복도에 놓았다. 서번트들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천을 잔뜩 구해 마술적 효과 하나 없는 코스튬을 만들어 몸에 걸쳤다. 누군가가 ‘원래도 현대의 복장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라고 딴지를 걸기도 어려울 정도로 신난 모습이었다. 

물론 인간 스태프들이라 하더라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서번트들과 비슷하게 코스튬을 걸치고 서로를 보며 웃었다. 화재 사건 뒤로는, 아니, 그전에도 잘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타공인 칼데아의 과로 랭킹 1위인 로마니 아키만과 2위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마저 제대로 힘을 주고 코스튬을 입은 것을 보았을 때는 가히 그 열기가 최고조로 달아올랐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로마니 아키만을 처음 본 스태프 A는 이게 자신이 아는 사람이 맞나, 라는 생각에 입을 헤 벌렸다. 에이, 아니겠지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떠도 제 앞에 선 사람이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는 늘 머리를 정돈할 시간조차 귀찮다는 듯 포니테일로 질끈 묶곤 했다. 그것이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였음은 모두가 인정할 테다. 그러나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것으로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물론 단순히 헤어스타일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다. 칼데아의 임시 소장 자리를 떠맡았음에도 본분은 의사라는 것을 드러내듯, 긴 백의를 모티프로 한 옷을 입고 있던 그 사내는 지금 어디 사는 뱀파이어 백작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하하, 역시 안 어울리나? 나름 노력해봤는데, 역시 이런 건 젊은 애들이나 입는──”

“자네도 충분히 어려, 로마니. 현대 기준 서른은 아직 애송이라고.”

그러니까, 과로 랭킹 1위와 2위가 아주 제대로 된 코스튬을 입고 나온 게 이유라면 이유였던 셈이다. 심지어 로마니 아키만은 스스로 준비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기까지 했다.

몇몇 서번트들은 ‘핼러윈은 우리의 날인데!’ 라며 순식간에 관심을 앗아간 로마니 아키만에 대한 불평을 입에 담긴 했다. 그러나 로마니 아키만은 반박하는 것 없이 그 옷차림 그대로 관제실에 들어갔다.

“아하하, 아직 할 일이 많아서…….”

변명과도 같은 말은 관제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무리가 일제히 한숨을 내뱉었다. 직접 제대로 된 코스튬을 준비할 정도인데, 이런 날에도 일이나 한다니. 상사가 쉬지 않으면 부하 직원들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법이라는 사실은 로마니 아키만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 빈치가 트릭 오어 트릿을 해올 서번트들을 위한 간식을 챙기자는 말에 분위기가 많이 풀어지기는 했으나, 다들 다음 한 켠에 아쉬움이 자리한 듯, 다 빈치에게 이끌려 부엌으로 가면서도 힐끔힐끔 굳게 닫힌 관제실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들은 이런 좋은 날에 일거리를 만든 것은 당연히 지금 부엌과 식당을 점거하고 호박 파이를 만들자며 한바탕 들뜬 사람들-과 서번트들-이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오직 이 하루만을 위해 소모된 비품과 식량이 얼마나 되던가.

로마니 아키만은 칼데아의 (임시) 총책임자로서 그 모든 일을 떠맡아야 했지만,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이러한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쏴아 끼얹는 것은 그의 성격상 할 수도 없는 짓이었고, 구태여 이 분위기를 깨뜨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러한 사고는 당연하게도 로마니 아키만의 잔업과 철야를 불러왔으나, 마리스빌리 전 소장의 문을 두드린 때부터 이런 각오는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것 아닐까.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당장 올려 묶지 않는 것은 나름 의상과 오늘이 가지는 TPO를 맞추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가 이벤트를 즐기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아, 이렇게 신날 거라곤 예상도 못 했는걸.”

이렇게 말하긴 하지만, 그는 이 소란이 제법 기꺼웠다.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날이라면 서번트들을 위한 날이다, 라는 말을 누가 먼저 꺼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말함으로써 특이점이니 인리수복이니 하는 어두운 현실에서 잠시 동안은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물론 그는 이벤트를 성심성의껏 즐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업무를 처리해야 했지만 목소리에서는 불평불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단은, 일을 해야겠지만 말이지.”

로마니는 아직 원두의 이름도 외우지 못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태블릿과 모니터, 홀로그램을 번갈아 확인하며 시시각각 바뀌는 데이터를 살펴보다 보면 식당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핼러윈 파티는 금세 머릿속에서 씻겨 내려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에 대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러나 이러한 일상 아닌 일상은 늘 예상치 못한 이의 존재로 깨지기 마련이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작은 돌 하나가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로마니 아키만에게 있어서 이런 존재는 늘 소야 츠무기였다.

마침 오랫동안 화면을 바라본 탓에 집중력이 끊어진 탓에 약간의 휴식을 취하려고 했던 참이었다. 경직된 목 근육을 손으로 주무르며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뉘었을 때였다. 치이익, 하는 개폐음이 그의 귓가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구태여 몸을 돌려 바라보는 대신, 눈을 감은 채 근육을 풀어주는 데에 전념하고 있었다.

로마니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야 눈을 뜨고 의자를 빙글 돌렸다.

“레오나르도, 이쪽 시설 말인데. 지금 사람이 없으니 전기, 를──,”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제 코앞까지 다가온 사람과 눈을 마주친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이런 때에 관제실에 올 법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로마니의 패인이었다. 꼴사납게 에엑!? 라는 소리가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킨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츠, 츠무기……?”

“네, 로망.”

분명 로마니가 생략한 문장은 ‘네가 왜 여기 있어?’ 라는 말로 끝맺을 터인데, 츠무기는 마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없는 것처럼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 코스튬은? …아니지, 입힐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아무래도요.”

츠무기가 이벤트 회장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스터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서번트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슈마저 츠무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면 약간의 아쉬움을 표할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츠무기가 평소와는 달리 제대로 된 코스튬까지 입었다면 더욱.

그렇게 되면 이곳에 보낼 수 있는, 혹은 보낼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행위자가 특정되면 목적은 더욱 확실해졌다. 로마니 아키만은 곤란한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나를 불러오라는 거지?”

그리고 로마니의 추리는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로망도 단 거 좋아하잖아요. 같이 가요.”

그러나 츠무기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내뱉었다. 로마니는 곤란한 낯을 가까스로 감추었다. 물론 한두 시간 정도 내는 것은……. 그래,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분명 내일이 되면 다른 스태프들에게 ‘자, 어제는 잘 쉬었지? 이제 일하자’ 라는 악마 같은 말을 내뱉을 것이고, 자신 또한 다른 이들에게 배분할 수 있는 업무는 넘겨줄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자신의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이 야근과 철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멋쩍은 웃음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다 빈치 씨가 시킨 건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코스튬까지 차려입었는데, 관제실에서 일만 하는 건 제법 아쉬울 것 같아서.”

그리고 부끄럼도 없이 자신을 스스로 ‘불세출의 천재’라 칭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분명 로마니 아키만이 소야 츠무기에게 약하다는 것을 노리고 서두를 띄웠을 것이다. 츠무기가 가진 약간의 아쉬움을 약간만 자극하면 칼데아의 누구도 빠지지 않고 즐거운 파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겠지. 츠무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로마니는 그의 말 뒤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지금 마슈는 에미야 씨에게 호박 파이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로망도 먹어봤으면 하던데.”

“끄응…… 알았어, 알았어. 갈게. 조금만 기다려. 지금 보던 것만 마무리할 테니까.”

마슈까지 나왔다면 로마니의 필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는 백기를 들어 올리듯 양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천리안도 없지만, 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식당에서 웃고 있을 것이 뻔했다.

"가자, 츠무기.“

츠무기는 만족스러운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로마니는 그 완만한 곡선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컴퓨터를 절전 모드로 바꾼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이지만, 오늘은 츠무기가 반걸음 가량 앞서 있었다. 로마니 아키만이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탓이었다. 몇 걸음 가다가 새로운 장식이 나오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고, 또 조금 더 가다가 특이한 게 보이면 멈춰서서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츠무기가 발걸음을 늦추고 기다린다 한들, 로마니는 자연스레 뒤처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야, 레오나르도도 대단하네. 며칠 동안 많이 바쁘다 싶었는데, 이런 예장에 더해서 장식들까지 손을 대고 말이야.”

“많이 기다리긴 했나 봐요. 오늘은 공방에 틀어박히지도 않고 식당에 있는걸요.”

“안 그래도 오늘은 휴일을 줄 생각이었어. 평소에는 나보다 더 온갖 일을 끌어안고 있고,”

“핼러윈이라서?”

허리를 굽힌 채 장식을 둘러보던 로마니는 이내 허리를 펴고 츠무기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날이라는 말도 있잖아? 물론 서번트들은 핼러윈이 아니라도 이곳에 있기는 하지만, 이런 걸 레오나르도가 놓칠 리 없으니까.”

로마니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 빈치만 신난 것은 아니었다. 서양권 서번트들은 물론이고 온갖 문화권의 서번트들마저 신이 나서 한데 어우러지는 것은 칼데아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로마니는 고개를 돌려 츠무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핼러윈이 왜 핼러윈인 줄 알아?”

“……아뇨, 그렇게까지 큰 관심은 없었거든요. 저한테 있어서 오늘은 그저 시부야가 조금 많이 떠들썩한 날이었으니까.”

“그럼 간단하게 설명을 해볼까. 가톨릭에는 성인들마다 축일이 있는 것은 알지?”

로마니는 가벼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성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축일이 있는 건 아니야. 조금 더 유명한 사람들만 그들의 기일이 축일이 되곤 하지. 그렇지만 기록되지 않은, 축일이 정해지지 않은 성인들을 기리는 날이 바로 내일인 11월 1일, 다른 말로는 만성절이라고 해. 또 다른 이름은 ‘이름 없는 성인의 날’. 핼러윈이라는 명칭은 All Hallows Eve, 즉 만성절 전야제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어. 축제의 모습은 단순히 가톨릭의 축제가 아니라, 켈트 신화나 각 지역의 민간 신앙이 덧붙여지고 또 섞인 모양새이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모든 나라에서 핼러윈을 기념하는 건 아니야. 영국은 아마 핼러윈보다는 그 뒤에 있는 가이 포크스 데이를 더 중요하게 여길걸? 이제 그냥 하나의 글로벌한 축제일 뿐이지.” 로마니는 설명을 마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런, 너무 수업하는 것 같아졌네. 일본은 어때? 아까 시부야 이야기하던데.”

“일본도 비슷해요. 10월이 되면 바로 핼러윈을 준비하고요. 호박으로 만들어진 디저트가 온갖 가게의 매대를 장식하죠. 그리고 시부야는,” 츠무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온갖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들어요. 그날은 제법…… 시끄럽죠.”

만성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름 길었던 것인지, 조금 전까지는 멀리서 들려오던 요란한 소리는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다. 츠무기는 아무렇지 않게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식당의 소란을 가려주던 자동문이 열렸다.

“마치 이렇게요.”

분명 호박 파이를 만들어 먹자는 게 취지였을 텐데 식당은 왜 전쟁터를 떠올리게 하는 걸까. 츠무기와 잔잔하게 대화를 이어오던 로마니 아키만은 입을 헤 벌리고 그 안을 바라보았다.

난방 온도는 동일할 텐데 왜 식당에서는 훨씬 더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찬 것일까. 물론 지금 이 시점의 칼데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라 그렇다면 이해는 할 수 있었다-비록 절반가량이 인간이 아니라 마력으로 구성된 영령이라 하더라도-. 그렇지만 밀가루 폭탄을 맞기라도 한 듯 새하얗게 물든 의자나 식탁보 등을 보면 그저 유쾌하네, 하고 웃음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츠무기도 이렇게까지 엉망일 줄은 몰랐던 것인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이 난장판은 츠무기가 자리를 비운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렷다. 로마니와 츠무기, 둘 중 누구도 별다른 말을 내뱉지 못하고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 부엌 쪽에서 에미야와 나란히 서 있던 마슈가 고개를 들었다.

“선배! 닥터!”

로마니와 츠무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번씩 아는 척하는 서번트들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해주고-두 사람 옷 잘 어울리는데? 다 빈치 여사가 맞춰준 건가? 하하, 아마 그럴 거야…….-,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아 깔깔 웃고 있는 다 빈치를 지나치고 나면 에미야를 옆에서 돕던 마슈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둘 다 정말 잘 어울려요. 저도 비슷한 분위기로 맞추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년에는 다 빈치 씨에게 부탁해보자, 마슈.”

“네, 그렇게 할게요!”

“그것도 좋겠네. ……그나저나 마슈, 식당은 왜 이런 모습이 된 거니?”

“그게, 원탁 분들이…….”

“응, 알았어. 거기까지 해도 돼.”

마슈는 멋쩍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원탁 분들이, 라는 단어만으로 상황을 어느 정도 유추해낸 로마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파이 하나로 큰 소란이 나려면 그 정도의 인선이 필요하긴 하겠지.

츠무기는 식당의 상황을 한 번 빙 둘러보더니, 중재하는 것보다 찬장에서 티포트를 꺼내는 것을 택했다. 마슈는 멋쩍게 웃으며 에미야의 보조로 돌아갔고, 자연스레 혼자 남은 로마니 아키만은 다 빈치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어, 로마니. 제법 잘 어울리잖아.”

“눈물이나 닦고 말해, 레오나르도. 나랑 츠무기가 들어오자마자 웃음을 터뜨렸을 거면서.”

“이런, 천리안이라도 가진 건가? 나를 너무 잘 아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낄낄대며 말을 이었다. 내가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잖아? 다 빈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었다. 로마니는 할 말을 삼키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나름의 항복 선언이었다.

로마니 아키만도 다 빈치도 잔뜩 쌓여 있는 일을 내팽개치고 온 것치고는 제법 여유롭게 굴었다. 그래서, 식당은 어쩌다 이런 꼴이 됐어? 아아, 그거 말이지. 츠무기가 나간 뒤에 누가 자신의 재료를 더 가져갔네 뭐네 하면서 모드레드랑─. 응, 거기까지면 됐어. 하아, 정말 조용할 날이 없구나. 하하, 그래서 좋지 않아?

어느새 의자에 앉은 다 빈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비스듬한 자세로 로마니를 바라보았다. 로마니 아키만은 식당의 모습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는 미간을 좁혔다가, 이윽고 부엌에서 차를 내오고 있는 츠무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문득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궁금해졌다. 과연 로마니 아키만 그 자신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츠무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결론은 딱히 직접 물어볼 것도 없었다. 아마 로마니 아키만은 모를 것이고, 그 시선의 대상인 츠무기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다 빈치는 그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즐길 거면서 오늘도 온종일 일이나 할 생각이었다니.

“직접 의상을 준비해본 주제에 이런 파티에서는 빠질 생각이었어?”

“그야, 핼러윈을 제법 기대하긴 했지만, 나는 딱 이 정도로도 충분했는걸. 의상이란 제법 중요하잖아. 그저 몸에 걸친 것만으로도 색다른 기분을 만들어주고.”

“그래서, 관제실에서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더 두근거리기라도 했나?”

“윽, 그건 아니지만…….”

“의상에는 저마다 어울리는 장소가 있는 법. 그렇게 차려입었으면 오늘 하루는 즐겨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잖아.”

로마니의 말에 다 빈치는 킬킬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윽고 츠무기가 차를 내어 오고, 차가 식기 전에 마슈와 에미야가 호박 파이를 내어 왔다. 두 사람이 구운 파이는 달콤했고, 츠무기가 우려 온 홍차는 그에 잘 어우러졌다.

물론 로마니와 다 빈치가 한 조각씩 다 먹은 뒤에, 네 명이 같이 먹던 호박파이를 노리는 서번트들로 인해 식당이 다시금 한 바탕 소란스러워졌다는 것은, 구태여 비밀로 할 것조차 없는 일이었다.

할로윈의 밤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슈와 츠무기가 구운 파이를 노리는 사람들로 인해 소란이 벌어지고, 그 뒤에는 다 빈치가 어디에선가 공수해 온 술을 꺼내 분위기가 다시금 후끈 달아올랐다-미소특이점에서 발견한 술을 가져와 달라고 츠무기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어린이 모습을 한 서번트들이나, 영령들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츠무기와 마슈마저 조용히 자리를 떴을 무렵에는 이미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로마니는 식당의 구석에 앉아 알코올 대신 물을 홀짝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 이상 시간을 보냈다가는 내일의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이 뻔했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어 영령들이 자신의 무용담을 하나둘 꺼내놓을 무렵, 로마니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는 한결 서늘했고, 식당에서의 대화 소리는 두꺼운 벽에 막혀 복도까지 새어나가지도 못했다. 핼러윈의 여운에 취한 스태프들은 알코올로 인해 잔뜩 풀어진 붉은 얼굴로 로마니 아키만에게 고개를 까딱였고, 그는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츠무기와 함께 걸을 때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던 관제실까지의 거리가 제법 길게 느껴졌다.

츠무기는 이미 마이 룸으로 향한 지 오래였다. 원래 많은 사람과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오늘의 파티는 조금 더 체력적으로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마슈가 있어서 둘 다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거겠지. 로마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마슈도 츠무기도,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퍽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다 보면 걸음이 차츰 느려졌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그 둘을 적절히 조정해주는 것도 좋은 일이야. 분위기를 그리 가볍지 않게, 그리고 무겁지 않게 만들어주니까. 늦은 밤 홀로 복도를 걷는 것은 오랜만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파티의 분위기에 아직 들뜬 것인지. 로마니 아키만 그 자신도 어느 쪽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의 방에 들러 코스튬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곧장 관제실로 향하는 것을 택했다. 그럼 내가 조금 더 힘내야지! 라는 생각이 든 순간, 그의 목적지가 관제실로 고정되어 버린 탓이다. 치익, 문이 열리고 푸른 빛을 내뿜는 근미래 관측 렌즈 시바가 환히 보이는 자리에 앉으면 츠무기에게 불려 나가기 전까지 보던 창이 그를 반겼다.

로마니가 소매를 걷어붙일 즈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일할 거라고 생각했지. 이런 날에는 좀 쉴 생각이 없는 거야?”

“레오나르도. 그러는 너야말로 일하러 온 거 아닌가?”

“그럴 리가. 나는 워커 홀릭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러 온 거야.”

다 빈치는 로마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영령은 취하지 않는다고 자랑이라도 하듯 멀쩡한 모양새였다. 로마니는 책상 위에 놓인 머리 끈으로 머리카락을 대강 질끈 동여매고는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오늘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잖아, 레오나르도. 물론, 다들 많이 신난 것 같긴 하지만.”

“이제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네가 잘 알 거라 생각하는데?”

다 빈치의 말에 화면을 살펴보던 로마니의 눈동자가 멈췄다.

이미 자정은 지나 있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핼러윈의 어원에 관해 설명하며 츠무기에게 만성절을 언급한 것은 로마니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이라면, 오늘은 너의 날이기도 하다고.

“따지자면 네 생일이라 볼 수도 있지. 가톨릭에서의 축일은 성인들이 죽은 날이 기준이니까. 이유가 뭐더라…….”

“신의 곁에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보기 때문이지.”

다 빈치가 능청을 부리면 로마니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맞아, 그거야. 그의 능청에 로마니는 결국 마우스를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의자를 살짝 돌려 보면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고 있는 다 빈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생일이라고 말하고 즐겁게 노는 건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아. 그렇지만 하루 정도는 푹 쉴 줄 알았지. 이렇게 신이 나서 의상을 만들 정도면 말이야. 옷을 만든 것만으로 대신할 것 같길래 츠무기에게 데려오자고 했는데, 끝나자마자 돌아와서 또 일이라니.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래서, 이제 들어가서 푹 잘 시간이라고 할 거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말에 쓴웃음을 내걸었다. 로마니 아키만은 다 빈치가 그리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렇게 수많은 업무를 끌어안는 것이 로마니의 온전한 선택이라면 츠무기와 마슈에게는 미안하게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것을 강제로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다 빈치는, 로마니의 말에 능청스레 반박하는 대신 그는 들어오며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호박파이 한 조각이 올려져 있는 접시를 로마니에게 밀어주었다.

“네가 오기 전에 츠무기가 만들었던 거야. 만든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제법 좋은 생일 선물이지?”

“너는 안 먹고?”

“뭐, 나는 영령이라 음식을 안 먹어도 되니까. 머리를 회전시키기 위해 당분이 필요한 로마니나 많이 먹도록.”

다 빈치는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공방으로 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식당으로 돌아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걸음걸이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너무 늦게까지 무리하지는 말라고. 넌 서번트가 아니니까 말이야.”

아, 그리고.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생일 축하해, 로마니. 다음에는 다 같이 축하하자.

다 빈치는 이 말을 남기고 관제실에서 나갔다. 로마니는 잠시 동안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앞에는 츠무기가 만들었다는 호박파이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이니, 조금은 괜찮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땡땡이쳤던 시간을 생각하면, 몇 분 더 노는 것 정도는 문제없을 거야. 수많은 변명을 뒤로 하고 그는 포크를 들었다.

호박파이는 맛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한 조각을 다 해치운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늘어졌다.

근미래 관측 렌즈 시바는 여전히 영명한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마니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런 날이 오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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