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줄의 행방
카드 샤크 초반부 주인공 시점 조각글
완만하게 기울어진 포도주 병의 주둥이에서 달큰한 액체가 쏟아져 둥그스름한 잔의 내부를 채우기 시작한다. 손님들의 흥을 깨지 않도록 비어버린 잔을 빠르게 채워넣기만 하면 됐던 동작이 이토록 신중해진 건, 이제 나에게 포도주가 그저 손님들을 화를 잘 내는 빨간 바보로 만드는 물약이 아니라, 모래시계 안에 든 모래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양이 그리 넉넉치 않은.
포도주가 잔을 가득 채우는 그 짧은 순간. 그게 내가 카드를 훔쳐 보기 위해 주어진 시간의 전부였다. P 여사의 밑에서 일하면서 손님들의 술잔은 채우는 일은 내게 걷거나 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맙소사, 포도주를 따르면서 카드를 훔쳐보는 건, 마치 걸어다니는 동시에 저글링을 해내야 하는 기분이었다. 그야 내 눈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두 개였지만 그것들을 따로따로 움직이는 법은 몰랐기에, 카드에 시선을 고정하는 동안 포도주가 잔에 얼마나 찼는 지 알 길이 없었으니까. 처음 몇 번은 가관이었다.
일단은 포도주의 양. 금방 카드를 읽어낸 게 뿌듯해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더니 잔에는 거의 한 모금이면 끝날 만큼의 포도주가 찰랑이고 있었다. 황당해하는 백작의 얼굴에 귀가 화끈해졌더랬지. 적당히 가장 높은 카드의 문양만 맞추면 됐을 때가 좋았는데, 가장 유리한 세트의 문양 갯수까지 세게 된 이후부터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아졌다. 아하, 다이아몬드가 하나, 둘, 셋.. 세다 보면, 어어, 정신 차리게! 백작의 주의가 옆에서 들려오고, 고개를 돌려보면 넘쳐 흘러버린 포도주가 테이블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백작이 연습에 쓰인 그 많은 포도주를 나보고 변상하라고 하지 않아서 어찌나 다행인지!
두 번째는 잔을 채우는 속도. 말했다시피 내게 포도주 병은 모래시계와 같다. 병을 기울이는 순간부터 뒤집어진 시계 안에 모래가 쏟아지고, 나는 그 제한된 시간 동안 모든 걸 끝내야 한다, 이 말이다. P 여사의 불호령 아래 재빠르게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비어있는 잔이 없도록 포도주를 부어댔던 버릇을 고치는 건, 마치 걸음마를 다시 한 번 배우는 것 같았다. 이미 요령을 알고 있으니 시선을 잔에 두지 않아도 병의 주둥이가 정확히 잔을 향하도록 하는 건 쉬웠지만 포도주를 따를 때 무엇보다 속도를 우선시 하는 건 이미 무의식에 가까운 버릇이라, 무심코 잔을 빠르게 채워버리고 나면 이미 카드를 훔쳐볼 기회는 그대로 홀랑 날아가 버린 뒤다. P 여사가 키우던 덩치만 커다랗지 순했던 개가 무언가 잘못했을 때 짓던 표정을 따라하며 잘못 된 스택을 백작에게 건넨 뒤 그가 비워 준 잔에 이번에는 아주 살짝 병을 기울이면 핀잔이 들려온다. 그렇게 한 방울씩 잔에 떨어뜨려 넣는 건 자네가 생각해도 너무 수상하지 않나? 지금 당신의 카드를 읽고 있으니 좀 기다려주시오, 라고 온 몸으로 말하는 꼴이야.
그러니까 딱, 의심을 사지 않되, 카드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포도주가 떨어지는 병의 기울기, 그 각도를 만들기 위해 딱 알맞게 긴장되는 손목의 근육, 병이 점차 가벼워질수록 어떻게 힘을 풀어낼 지 따위를 몸에 기억시킨 뒤, 눈으로는 빠르게 카드를 훑어내는 연습을 반복했다. 그동안 쉼없이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어 잔을 비워준 백작에게 건배.
자, 이 다음이 중요하다. 공들여 알게 된 카드의 문양을 나만 알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백작은 내게 카드의 정보를 어떻게 그에게 전달할 지 방법을 가르쳐줬다. 한 평생 벙어리로 살아왔던 나는, 도박장의 테이블 위에서 적어도 52장의 카드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쉬운 방법으로, 나보다 높으신 바보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백작을 따라 게임이 펼쳐지는 장소에 온, 아직은 소년이란 호칭을 벗어나지 못한 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저번엔 카드 게임에 내게도 한 자리 내어줬으면서, 마차가 거위를 치는 사고를 목격하는 바람에 속이 좋지 않다더라는 백작의 말에 가엾다며 매 게임마다 자리를 비우는 걸 허락해주는 게 아닌가! 백작과 짜고 속임수를 쓰기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는 걸까? 난 나름 다 컸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또 하나, 백작은 세간에 결벽증이 심하다고 알려져있었다. 그러니 내가 각자의 잔을 도로 채워준 후, 술 한 방울 흐르지 않은 테이블을 혹시 모른다는 태도로 박박 닦아대도 설마 그게 카드의 정보를 백작에게 알려주는 수신호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도 참, 너무 깔끔한 주인을 만나서 고생이 많군요. 그런 순진한 농담을 놀리는 투로 던지는 이들도 가끔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명쾌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팽 코웃음을 치고 싶은 충동을 겪곤 한다. 아니면 뺨 안쪽에 혀를 찔러 넣어 볼록이게 만든 뒤 하늘이나 쳐다보거나. 물론 그러는 대신 빙그레 웃어보인 뒤 테이블을 닦던 헝겊을 치우고 얌전히 뒤로 물러나곤 한다. 과연 백작이 내 주인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나중으로 미루고는 말이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는 정신 바짝 차려야하니까.
사설 잠그기이
댓글 1
달님 창작자
ㅎㅏ..... 캐 이해를 제대로 못한 채 글을 쓰면.. 엔딩 본 후 글을 봤을 때 캐릭터 감정선이 전혀 달랐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느껴져서 내 머리를 치고 싶은 그 심정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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