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리코 생존 IF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쿠로이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쿠로이가 나간 지금 방 안에는 리코 혼자 남게 되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방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그녀의 눈은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원래 이 시각이 되면 잠이 쏟아져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데 오늘은 하품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또렷했다. 슬슬 자두지 않으면 학교에 지각할 것이 뻔하기에 리코는 억지로라도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완전히 차단된 시야 너머로 한 인영이 떠올랐다. 아뿔싸. 황급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날이 더운 탓인지 이마에는 땀방울도 맺혔다. 시곗바늘은 거의 제자리에 서있었다. 오늘은 자기 글렀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최근 리코에겐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생겼다. 원래 곤란한 일이 있으면 뭐든지 쿠로이에게 상담했었다. 쿠로이는 리코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유능한 그녀는 항상 리코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고, 비밀 엄수도 잘 지켜주었다. 리코는 문 쪽을 처다보았다. 지금 찾아가면 쿠로이도 아직 깨어있을 것이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한결 편해지려나…?
하지만 그녀는 침대에서 나갈 수 없었다. 발이 묶이는 저주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리코는 일어난 자리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젠장. 그녀는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암살자에게 습격당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자신의 생명이 위험한 순간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였던가? 질문을 던져도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리코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녀의 고민은 간단했다. 누군가를 사랑해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가족애나 형제애 같은 종류가 아니다. 쿠로이에게 말한 좋아해. 와도 조금 달랐다. 그러니까, 상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발그레해지는 거 말이다. 혼자 끙끙 앓다가 결국 고백을 하고, 연인이 되어 옆에 있고 싶어지는, 그런 청춘 드라마에 나올 법 한 걸 리코가 지금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백발의 선글라스를 쓴 누군가가 알면 실컷 웃을 테지만 리코 자신에겐 중대한 사항이었다. 이건 아마 쿠로이도 해결할 수 없겠지. 리코는 결국 상담을 포기하고 다시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리코 나이 대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한 둘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장 그녀의 같은 반 아이들도 어떤 남자가 이상형이니, 어느 반의 누구누구가 고백했다느니, 자주 연애 얘기를 떠들고 다녔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사랑이라는 것을 꿈꿔보는 시기였다.
하지만 리코는 '누구나'와는 조금 달랐다. 텐겐 님의 성장체. 그녀가 받은 역할이었다. 성장체라는 자각을 가진 리코는 14살이 될 때까지도 그런 것에 일체 눈길도 주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자신은 연애 따위 필요 없다면서. 그러다 한 달 전, 리코의 세계가 뒤집혔고 그녀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되었다.
텐겐 님과 동화한다는 길만 따라갔던 리코에게 한 남자가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에 이상한 앞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리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으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녀는 그 손을 잡기로 선택했고, 지금은 이상한 것이 좀 보일 뿐 남들과 똑같은 비술사이다. 지금 침대에 누우면서 끙끙거리는 것도 그와 주술사들 덕분이었다.
평범한 여자아이가 되었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자각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연모의 감정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미래를 지켜준다고 말했을 때, 잡은 손은 살짝 거칠었지만 따듯했다. 리코는 그때만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되었다.
리코 쨩. 그가 손을 내밀 때 자신에게 웃어주던 얼굴을 떠올렸다. 리코는 그 얼굴이 좋았다. 한번 감정을 자각하니 꽁깍지가 건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심장이 뛰었다. 처음엔 특이하다고 매도했던 앞머리도 지금은 괜찮아… 보이진 않나.-아무리 콩깍지가 씌어도 거기까진 아니다.- 리코는 두 번째 한숨을 쉬었다.
텐겐의 성장체는 어찌저찌 구해졌다. 그 후로도 그는 리코에게 잘해주었다. 안전을 확인한다고 몇 번 찾아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에게 자신은 그저 호위 대상에 불과하다. 그걸 벗어나도 시끄러운 꼬맹이라는 이미지겠지. 아마 자신의 감정은 앞으로 향하지 못한 채 그대로 묻힐 것이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다면 하루빨리 포기하는 게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건, 미련이겠지.
"…스그루."
리코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지 자각한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요비스테도 안한 남정네의 이름을 막 부르다니! 다행히 방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창피하잖아! 리코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이불을 뻥뻥 찼다. 아마 지금 얼굴도 토마토처럼 빨개져 있을 것이다. 리코는 당장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이미 이불 속에 숨어 있지만 말이다.- 앞으로 그 녀석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녀는 결국 밤을 새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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