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향하는 524m
고죠 사토루 × 후시구로 메구미
시작은 유일한 가족인 츠미키가 저주에 걸려서 의식불명이 되었을 때였다.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라서 어린아이처럼 무작정 휘두르기만 하던 때였다. 유일한 가족인 그녀는 후시구로 메구미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으므로 메구미는 곧잘 그녀의 사랑을 향하여 '위선'이라며 모난 말을 던지고는 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거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말 걸, 마음에도 없는 모나고 아픈 말은 들려주지 말 걸….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좀 더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는 진심이 있었을 터였다. 츠미키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서 건조한 눈가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이렇게나 어린아이인 주제에, 너무나 울고 싶은데, 차라리 울고 싶은데 마음이 바싹 말라비틀어져서, 하나뿐인 누나가 저주에 걸렸다는데도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구나. 제 몸뚱아리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과 한심함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다.
"메구미."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메구미를 불렀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메구미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라면 건방지다며 불만 가득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잔소리를 했을 테지만 오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커다란 발이 움직이며 닿은 가죽 부츠의 굽이 대리석 바닥을 아주 조심스럽게 울렸다. 당장이라도 이 공간이 부서져서 깨지고 사라질 것만 같이. 커다란 인영이 메구미의 등을 감싸고 츠미키의 몸을 감싼 새하얀 이불에까지 닿았다. 메구미는 누이가 덮은 하얀 이불 위에 새겨진 남자의 그림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고죠 사토루는 항상 바쁜 남자다. 와 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어른이다. 이런 유명한 병원의 고급스러운 개인 병실을 준비해 준 사람 또한 그나마 옆에 있었던 메구미가 아니라,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그다. 불만을 말할 여지는 없는데도 메구미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발끝만 들이밀고 밖에 서 있거나, 가끔은 휙 하고 넘어왔다가도 깨닫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마냥 금세 밖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메구미는 그에게 어디까지 의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토루가 이런 사소한 일로 자신에게 의지한다며 냉정한 표정을 할지, 아니면 부드럽게 타이를지. 어느쪽도 두려웠다. 그런데도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메구미의 어깨에 닿았다. 메구미는 그제야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토루의 손이 닿자 떨림이 멎었기 때문이다.
메구미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서 간신히 그를 돌아보았다. 하얀 붕대로 가려진 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묵묵하게 닫힌 입술은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8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한 사이임에도 꼭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조금 무서웠다. 메구미의 입술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몇 번인가 달싹거렸다.
말을 고르고 골라서 마침내 입을 연 순간, 사토루의 팔이 메구미를 감싸 안았다. 서늘했던 공기가 남자의 체온에 밀려 일순 따뜻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행동은 메구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메구미는 놀라는 일 없이 태연하게 그 품에 가두어졌다. 지나치게 말이 많던 남자는 지나치게 말이 없었다. 차라리 너 때문이야. 하고 힐난해주면 좋겠는데 입을 꾹 닫아버렸다. 평소처럼 메구미는 정말 약해빠졌네. 하고 웃으면서 놀려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메구미를 끌어안은 팔은 거두어지는 일 없이 소년을 꽉 붙잡고 있었다. 병실 안은 커튼이 쳐져 있어서 어둡고 조용했다. 병원 집기가 미세한 잡음과 츠미키의 숨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메구미는 자신이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왜 자신이 고죠 사토루에게 안겨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끌어안고 있어서, 메구미가 그가 모르게 작은 숨을 내뱉었다.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남자를 마주 안았다. 넓은 등에 하얀 손이 스스럽게 닿고 작은 얼굴을 남자의 가슴에 기대어 묻었다. 그것은 아마 8년 동안의 길고 짧은 시간 중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낸 조그마한 어리광이었다.
사토루의 두 손이 움직여 손바닥으로 메구미의 귓가를 덮었다. 차가울 것 같았던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고개를 들어 올려져서, 그의 얼굴과 마주했다. 여전히 하얀색 붕대에 가려진 푸른빛 눈동자가 어떤 시선을 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사토루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메구미의 귀를 막듯이 하고 있던 손을 조금 더 앞으로 움직여서 아직 아이의 여린 느낌을 가진 뺨을 쓰다듬었다. 메구미에 비하면 너무나 남자다운 굵고 긴 엄지손가락이 메구미의 입술까지 뻗어져서, 상냥하게 아랫입술을 따라 그린다.
메구미가 사토루를 부르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사토루의 얼굴이 시야에서 흐려질 정도로 가깝게 다가왔다. 모든 게 갑작스러웠다. 어째서? 의문이 들기도 전에 입술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리고 사고가 제대로 돌기도 전에 멀어졌다. 닿기만 할 뿐인 짧은 입맞춤. 아주 짧은 찰나의 침묵. 메구미의 뺨에 닿았던 사토루의 손이 어느새 메구미의 등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이 입맞춤을 나눌 정도로 그런 분위기가 있었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8년이란 세월을 가족과 같은, 혹은 그렇지 않은 애매하고 오묘한 거리로 지내왔다. 이런 연인이 할 법한 행위 같은 건 두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사토루가 입맞춤을 한 이유따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떨어져 있지만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다시 닿을 것 같은 가까운 입술과 입술의 사이가 왠지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눈물이 났다. 눈알과 얇은 피부의 사이를 뜨거운 액체가 비집고 나와서, 타인의 앞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뺨을 타고 떨어져 내린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메구미는 이번에는 자신이 사토루의 뺨에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분홍빛 뺨에 닿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뒤꿈치를 높게 들어 까치발을 섰다. 겨우 다시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좀 전까지 능숙한 위로의 입맞춤을 했던 사토루가 조금 머뭇거린다. 그를 부추기듯이 메구미는 작은 혀를 내밀고 사토루의 입술을 할짝거리며 졸랐다.
자신의 뺨에 닿은 메구미의 떨리는 손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다른 한 손으로 작은 등을 받쳐 잡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부서져 없어질 것만 같았다. 혹은 너무 뜨거운 자신의 품에서 녹아내려 형태를 유지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모양이 좋은 입술을 열고 작은 혀를 자신의 입안으로 삼켰다. 이제는 도저히 실수라거나 장난이라는 말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작은 혀를 가볍게 깨물고 얽어서 소리조차 낼 수 없도록 메구미의 안을 헤집었다.
터져버린 눈물은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메구미의 뺨을 적신다. 때때로 닿는 사토루의 뺨도 소년의 눈물로 물들었다. 서로의 작고 큰 몸을 부둥켜안고, 서로의 숨을 빼앗고 불어넣는 행위를 몇 번이고 거듭했다.
가족을 잃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소년의 눈물이 흐르는 소리를 감출 수 있도록. 혼자가 된 아이가 기나긴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츠미키는 결국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보호자와 피보호자, 스승과 제자, 혹은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암묵적으로 정해진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하고도 다음 날에는 아무렇지 않게 츠미키가 없는 집에 둘이 되어서 돌아왔다.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행위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토루가 만든 식빵에 달걀을 입힌 토스트에 설탕을 잔뜩 뿌린 달아빠진 토스트를 함께 먹고, 평소보다 조금 더 높은 강도의 훈련을 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필요하지 않은 말은 누구도 어느 것 하나 입에 담지 않았다. 일방적인 지도와 대답이 왕래하지 못한 채 서로를 스쳐 지나가 벽에 닿고 부서졌다. 평소보다 더 악바리가 되어 사토루에게 달려들고, 그런 메구미를 패대기쳐서 바닥에 혹은 벽에 던져버리고. 어느 쪽도 엉망진창이 되어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훈련은 계속되었다.
메구미의 얼굴이며 다리에 상처가 생기고 부어오를 즈음이 되자 사토루의 “돌아가자.”라는 한마디를 기점으로 두 사람은 다시 츠미키와 메구미의 집에 돌아왔다. 메구미가 욕실에서 욕조에 물을 받고 나온 뒤 사토루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메구미를 바라보고 욕실로 들어갔다. 어제부터 풀지 않은 붕대는 아직도 사토루의 눈을 가리고 있어서 메구미는 그 짧은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 메구미.”
“아….”
놀라서 눈을 뜨자 오랜만에 부는 푸른 하늘을 담은 유리색 눈동자가 제법 가까운 곳에 보였다. 사토루가 목욕을 하는 동안, 그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메구미가 극심한 피로 때문에 잠든 모양이었다. 사토루는 스스럽게 메구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씻고 자야지. 얼굴도 어떻게든 해야 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이대로 자고 싶은 마음에 메구미가 사토루를 올려다보고 눈을 두어 번 꿈뻑거리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사토루는 결국 메구미를 안아서 욕실로 들어간다. 비몽사몽, 조는 메구미를 정성스럽게 씻기고, 욕실을 나와서는 품에 안은 채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려주고,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메구미는 가끔 눈을 떠 사토루를 확인했지만 잠에서 헤어나오지는 못했다. 사토루는 커다란 이불을 펼치고 메구미를 눕혔다. 자신도 그 옆에 누워서 어린 소년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메구미가 몸을 웅크리고 사토루에게 꼭 붙었다. 사토루는 메구미의 얼굴을 가리듯이 자신의 품 안에 가두어 끌어안고 잠들었다.
누군가가 저주에 걸리더라도, 그것이 후시구로 츠미키라고 해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메구미는 여전히 학교에 나가야 했고, 사토루는 임무를 처리해야 했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도 태연하고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사토루는 바쁜 격무를 처리하면서도 언제나 거르는 일 없이 메구미의 곁으로 돌아왔다. 소년을 혼자 두지 않았다. 서툰 솜씨로 아침을 만들어 먹이고, 학교를 보내고, 품에 안고 잠들었다. 아침에 옷의 가슴 부분이 조금 젖어있더라도 모른 척을 했다.
당연하게도, 그날 이후로 입맞춤을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죠 사토루와 후시구로 메구미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입맞춤이나 서로의 몸을 더듬는 것으로 서로를 위로할만한 사이가 아니니까. 그 입맞춤을 ‘일어나지 않은 일’인 채 행동하는 것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당연한 둘의 약속이었다.
하나뿐인 가족마저 저주에 걸리고 나서, 메구미의 비행은 딱 멈추었다. 굳은 목표가 생겼고, 사토루는 그것을 모두 꿰뚫어 본 것처럼 웃는 얼굴로 그런 그의 머리를 툭툭하고 서툴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언제나 셋이었던 여름, 가을을 둘이서 보냈다. 그리고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왔다. 메구미는 어느새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특별히 친한 친구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하루에 한 번씩 츠미키의 병실을 찾아가서 그녀를 확인하고 자가훈련을 하는 정도의 외출뿐이었다. 사토루는 여전한 격무였다. 여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12월에 들어서서 더욱 바빠진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생일에까지 임무를 꽉 채울 필요는 없잖아. 메구미는 그간의 용돈을 모아서 산 선물과 케이크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없었으니까 돌아오긴 하겠지만….
항상 12월 7일이면 휴가를 내고 아침 일찍부터 메구미와 츠미키에게 달려왔던 남자다. 원래라면 츠미키가 항상 시끄럽게 생일에는 잠깐이라도 꼭 와 주세요. 사토루 군에게 감사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니까. 라며 연락을 해댔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 버린 것이 문제였지만. 아아, 괜히 답지 않을 짓을 했나. 조금의 후회가 씁쓸하게 밀려왔다.
사토루가 돌아온 것은 밤 11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퍽 피곤해 보여서 눈가가 조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 밑이 어두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메구미가 자고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피로를 숨기지 않는 기색이다. 눈꺼풀로 가린 안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른다. 그러다가 거실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어라, 메구미 안 자고 있네? 아무리 방학이라도 너무 늦게 자면 안 돼.”
“다녀오셨어요. 늦으셨네요.”
“전화했던데 무슨 일 있었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싶어서…. 이른 오후쯤 전화했던 것을 돌아오는 길에 겨우 확인한 모양이었다. 사토루가 다시 걸지 않은 이유는 메구미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사토루가 거실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메구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케이크 상자가 눈에 띄었다. 아주 잠시 메구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앞으로 당기고 상자를 열어 케이크를 꺼낸다.
“웬 케이크야? 오늘 누구 생일이야?”
“당신의 생일이잖아.”
“헤?”
사토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구미를 바라본다.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메구미가 미리 챙겨두었던 일회용 포크를 건넸다. 사토루의 푸른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을 반사시켰다. 들뜬 손이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포크를 받아들었다. 최근 본 사토루의 얼굴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이럴 때는 꼭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다. 메구미의 후회가 금세 안도로 바뀌었다. 케이크용 나이프를 꺼내다가 홀 케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포크로 먹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서 내려놓았다.
“잘라드려요? 그냥 드실 거죠?”
“응, 그런데 생일축하 노래는 불러주지 않는 거야?”
“하?”
“매번 츠미키와 불러줬잖아.”
“그건 누나가…!”
“메구미의 축하 노래 듣고 싶어.”
천연덕스러운 웃는 얼굴이 곧장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이 된다. 알맹이는 어린아이인 채로 껍데기만 커버린 게 아닐까 싶은 남자는 때때로 이런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곤 했다. 그리고 메구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얼굴에 약했다. 이런 얼굴로 진지하게 부탁해오면 거절할 수 없었다. 단 한번도 끝끝내 거절해본 적이 없었다. 종국에는 꼭 메구미가 져버리고 만다. 그런 메구미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하는 표정과 행동인 걸 메구미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메구미는 사토루의 의도대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움이 섞인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츠미키 없이 홀로 노래를 불렀다. 메구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사토루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그런 메구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더 창피했다.
“고마워, 메구미. 응, 이걸로 케이크가 더 맛있어지겠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된다니. 애정은 중요한 스파이스라고.”
사랑은 왜곡된 저주라고 했으면서.
메구미는 자신이 1학년쯤의 일을 회상했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구미가 다른 반의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츠미키에게 들었던 사토루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던 때다. 어떻게든 놀리고 싶었던 건지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메구미~, 고백받았다며?」
「네, 거절했지만.」
「에, 재미없게~! 청춘을 즐기면 좋았을 텐데.」
「관심 없어요.」
「흐응~ 뭐, 사랑이란 건 왜곡된 저주 같은 거니까.」
겨우 중학생의 연애에 사랑이라는 무거운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부모에게 받는 사랑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메구미에게는 사랑이란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츠미키도 사토루도 그들 나름의 애정을 메구미에게 주었으나 사랑이라는 말로는 상응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 말을 했을 때, 사토루의 이상하게 부드러운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메구미는 안 먹어?”
“아, 네. 단 건 좀…, 고죠 씨의 입맛에 맞춰서 산 거라서요.”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아앙~해줄까?”
“필요 없어요.”
메구미는 사토루가 얼굴 앞에 들이민 케이크가 올려져 있는 포크를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사토루가 작게 칫하고 토라진 소리를 냈다. 한껏 떠서 포크 위에 가득 올려진 케이크는 그대로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메구미는 사토루가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계속해서 관찰했다. 저렇게 단 걸 좋아하는데 건강은 괜찮을까? 190cm를 넘는 키는 사실 전부 설탕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그때 선생님에게서 단 맛이 난….
멋대로 혼자서 그날의 일을 떠올린 메구미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찰나, 방해하는 것처럼 사토루의 목소리가 생각을 흐트린다.
“이건 뭘까?”
“아, 아마 필요 없겠지만, 일단, 그…, 선물인데요.”
“메구미가 나에게?!”
“매년 해드렸잖아요.”
“아니, 이건 좀 감회가 새로워서.”
사토루가 테이블 위의 또 다른 상자에 뒤늦게, 아니 아마 메구미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의문을 가졌다. 메구미는 고급스러운 네이비색 포장지에 하늘색 리본으로 장식을 한 상자를 들어서 스스럽게 사토루에게 내밀었다. 사토루는 호들갑스럽게 콧노래를 부르며 상자의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의 내용물은 명품 브랜드의 넥타이.
“와, 구○잖아. 비쌌을 텐데!”
“겨우 넥타이 정도만 살 수 있어서…. 넥타이 선물에는 존경의 의미도 있다고 하고….”
어차피 사토루에게 있어서는 길거리에서 별 생각 없이 쓸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었지만, 아직 중학생인 메구미에게는 꽤나 큰 결심을 해야했던 금액이다.
“내가 넥타이 같은 거 하는 거 봤어?”
“…아뇨. 역시 다른 것으로 바꿔올….”
“농담이야! 정말 기뻐 메구미. 소중하게 사용할게.”
메구미가 상자를 돌려달라는 것처럼 손을 뻗자 사토루는 그것을 제 등 뒤로 감춰버린다. 정말,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 모습을 보고 메구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이건 내거야. 빼앗을 생각하지 마~ 사토루가 상자를 아주 소중한 것처럼 들고 한쪽 뺨에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런데 메구미, 넥타이 선물에 사실은 다른 의미가 있는 거 알고 있어?”
“예? 아뇨.”
“아~ 난 또, 메구미가 그런 의미로 준 줄 알고….”
좀 기뻤으려나? 사토루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사토루가 그런 웃음일 때는 항상 짓궂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서,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물으면 묻는대로 열심히 놀릴 게 뻔했으니까. 그 덕분에 메구미가 그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꽤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12월 22일, 메구미의 생일날, 남자는 그 커다란 몸으로도 다 들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선물과 케이크를 들고 왔다.
201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고죠 사토루의 유일한 친우, 주저사 게토 스구루와 그 동료에 의해 백귀야행이 행해졌다. 만년 인력부족인 주술계에는 고전의 1학년마저도 참전할 정도의 사태.
사토루는 메구미에게도 백귀야행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지 매우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이미 준 2급 정도의 실력을 가진 메구미다. 알게 되면 분명 자신도 가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토게나 판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아픈 손가락은 어떻게든 숨기고 편애한다. 무엇보다 메구미에게 비밀이 늘어만 가고 있다. 자신의 이기심에 헛웃음만 나왔다. 최강이라는 남자는 한 소년에 대해서라면 이렇게도 나약해진다.
12월 25일, 모든 것을 마친 사토루가 메구미의 곁으로 돌아왔다. 유일한 친우의 마지막을 자신의 손으로 끝낸 남자는 모든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몸에 닿는 공기마저 어색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메구미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의 상태가 평상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만은 알았다. 붕대에 가려진 눈과 굳게 닫힌 입술이 하나하나 전부 자신이 아는 고죠 사토루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츠미키가 저주를 받은 날보다도 더욱더.
사토루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직감할 수 있었다. 메구미는 어린아이다. 무엇이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표정으로 돌아왔는지 무엇이든. 하지만 묻지 않았다. 메구미가 바스라질 것 같았던 그때, 사토루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 어떤 질문도,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현관에 겨우 서 있는 사토루의 두 손을 당겨 잡았다. 까치발을 들고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겹쳤다 떨어졌다.
그날과 같은 닿을 뿐인 입맞춤. 작게 숨을 후 내쉬니까 사토루가 그것을 집어삼키듯 다시 입술을 겹쳤다. 단 한 번 해본 어른의 키스를 메구미는 거절하지 않고 남자의 입술, 손길, 호흡까지 전부 받아들였다. 사토루의 팔이 어느새 메구미의 몸을 끌어안고 있다. 자신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은 흉곽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는 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확인하려는 것처럼.
제대로 여미지 않은 건지 사토루의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가 흘러내렸다. 그 사이로 그의 감은 눈이 보였다. 그 갈라진 눈꺼풀 틈으로 은백색의 속눈썹을 적시면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메구미는 사토루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가만히 보고 있었다. 메구미가 숨을 쉬려고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입술 사이로 도톰한 혀가 밀려들어 와서, 목구멍 안쪽까지 모두 핥을 것처럼 깊은 곳까지 메구미를 헤집어 놓는다.
메구미는 눈을 감았다. 사토루의 키스는 마치 금방이라도 깨지는 유리를 대하는 것같이 조심스럽다. 그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고 싶어서 손을 뻗어 사토루의 뺨을 더듬었다. 축축한 뺨을 손으로 훔치고도 모르는 척을 했다. 보지 못한 척을 했다. 어느새 입술이 떨어졌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메구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괜찮다는 말도, 울지 말라는 말도 그 어떤 한마디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떴다. 눈앞의 남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날의 자신보다 더, 세상에 스러져서 흙이 될 것만 같았다.
이제 겨우 상냥함에 닿은 것 같아서 고독이 무서워졌는데, 더 이상 고독을 버티지 못하는 후시구로 메구미로 만들어 놓고서 홀연히 자신을 두고 가버릴 것만 같았다.
메구미는 흘러내린 사토투의 붕대를 천천히 풀어서 자신의 손에 들었다. 사토루는 메구미의 행동을 저지하는 일 없이, 완전하게 드러난 그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블루오팔 같은 눈동자를 메구미는 다시 가렸다. 남자에게서 벗겨낸 백색의 붕대로, 스스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웃었다. 오랜 정적을 깨뜨리고 소년의 톤이 높고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반사되어 울렸다.
“오늘 밤은 유난히 어둡네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떨리는 커다란 손이 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사토루의 손이 자신의 옷을 벗기고 더듬었지만 소년은 저항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저항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다. 남자에게 모든 걸 던져줄 생각이었다.
처음 입맞춤을 나눈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 흐릿하게 그어져 있던 선이 남자와 소년의 발에 의해 짓밟히고 쓸려서 더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몸의 이곳저곳이 무겁고 아팠다. 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해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메구미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겨우 떴다. 눈앞에 상황을 일순 이해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구미가 부스럭거려서인지 사토루가 소년을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항상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있던 사토루였는데 이상한 기분이다.
꽉 끌어 안겨지면, 메구미의 귀가 사토루의 가슴 부근에 닿았다. 귓가에 희미하게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두근. 두근. 두근. 평온한 심박수. 왠지 그 소리가 좋아서 줄곧 듣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벅찬 기분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순차적으로 자신을 쓸고 지나갔다. 고죠 사토루도 심장이 뛴다는 당연한 사실이 후시구로 메구미를 기쁘게 만들었다. 안도하게 만들고, 벅차오르게 만든다.
아, 당신도 심장이 뛰는 보통 사람이었네요. 언제나 강하고 태연한 당신이라도 왼쪽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면 심장이 뛰고, 나를 감싼 팔이 따뜻하고, 허리에 닿은 손이 떨리는 그런 사람이었어.
괜히 웃음이 나왔다. 작은 소리로 후후하고 웃었다. 그렇게 재미있어? 머리 위에서 조금 까슬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일어나셨네요.“
”응, 메구미가 갑자기 웃으니까.“
”죄송해요.“
메구미가 사과했지만, 사토루는 별 대답은 하지 않고 평소처럼 그의 머리를 툭툭하고 쓰다듬는다. 메구미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조금 빨라진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두근두근보다는 쿵, 쿵으로 바뀐 소리는 기분 좋게 메구미의 온몸에 울린다.
”메구미, 전에 넥타이 선물의 의미 기억해?“
”아, 다른 의미가 있다던 거요?“
”응.“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메구미가 눈동자를 도륵 굴린다. 그 뒤로 찾아보려고 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걸 놀리듯이 사토루가 웃음을 참는 시늉을 했다. 메구미는 반달 모양이 된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런데도 사토루는 큭큭거리면서 끝끝내 웃음이 터졌다.
“그거라면 나는 벌써 메구미의 것이니까.”
“네?”
“넥타이를 선물하는 건 당신을 가지고 싶어요. 라는 의미.”
“아….”
“정성스럽게 넥타이핀까지 함께 주고말이야.”
“그, 런 의미는….”
“정말?”
“….”
사토루가 메구미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깨질 것 같은 그런 조심스러운 것이 아닌, 어딘가 확신이 있는 입맞춤이었다.
“메구미, 좋아해.”
“…저주라고 했으면서.”
“응, 함께 저주에 걸려줄 거지?”
“저주는 이제 지겨워요.”
사토루가 메구미, 너무해~! 하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다가 금세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메구미의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의외로 간지러움에 약한 메구미는 금세 항복해버린다. 흉곽을 위로 아래로 움직여가면서 숨을 고른 메구미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을 꺼냈다.
“아하, 하아…. 좋아해요. 고죠 씨.”
“에~, 뭔가 무드 없어.”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과 나 사이인데.”
메구미가 부드럽게 웃으며 사토루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사토루는 뭐 됐나? 하고 웃으며 메구미의 이마며 뺨, 눈가…,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메구미는 이런 게 저주라면 퍽 행복한 저주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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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물범
오우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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