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안심 귀가 서비스
고죠 사토루 × 이타도리 유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오는 전화를 함부로 받는 게 아니었다. 익숙하면서도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에 지인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시끄러운 주변 소리, 어딘가 낯설지 않은 쩔쩔매는 말투, 익숙한 분위기.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래. 이 시간에 전화 올 곳은 한 군데 밖에 없었지.
"형 죄송한데, 유지가 취해서 혹시 데리러 와주실 수 있나요?"
"혹시 유지한테 얘기 못 들었어?"
"네? 어떤……."
아무래도 얘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술만 취하면 제게 전화하는 친구에게 이별했단 소식조차 전하지 않았다니.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는 느낌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타도리가 취하면 저에게 전화하라며 번호를 줬던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아마 저장명이 안심 귀가 서비스랬지.
"아니야. 거기 어딘데?"
우리가 이별을 말한 지 고작 일주일이었다. 툭 하면 술에 절어오던 과거를 생각하면 유우지 치고 많이 버텼다. 이타도리는 술에 약한 편이었지만 술자리와 술을 유독 좋아했다. 밝은 에너지가 술자리와 잘 맞았던 건지 뭔지, 제 두 발로 멀쩡히 귀가하는 날이 드물었다. 툭 하면 남의 등에 업혀오기 일쑤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제 번호를 쥐여줬지. 그게 발단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고죠는 대충 아무 겉옷이나 집어 들고 이타도리가 취해있다는 술집으로 향했다. 여기서 시간 끌어봤자 제 취침 시간만 늦어질 뿐이었다.
"나 왔어. 유지는?"
"방금 막 화장실 갔어요."
고죠가 이마를 긁적였다. 이타도리에게는 술버릇이 여럿 있었는데, 개중에는 화장실에서 토를 하다 잠드는 버릇도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화장실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화장실에서 잠든 것 같았다. 여전한 술버릇이네. 고죠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으며 이타도리의 친구를 지나쳐 화장실로 향했다. 굳게 닫혀있지도, 활짝 열려있지도 않는 문. 고죠는 망설임 없이 칸막이를 열어 재꼈다. 그렇게 아니길 바랐건만. 변기 위에 엎어져 세상 모르게 잠을 청하고 있는 이타도리가 보인다. 고죠가 이마를 탁 짚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지는 얼마 전의 일들이 생각 나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유지, 정신 차려."
"으움……."
이타도리를 일으키기 위해 한쪽 팔을 잡아들자 몸이 힘없이 추욱 늘어진다. 도대체 왜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할 때까지 마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이면 자신이 챙겼겠지만 지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고죠는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이다 결국 이타도리를 들쳐 업고 가게를 벗어났다. 술값 계산은 덤이었다.
‘고생 했으니까.’
아무리 헤어졌다고한들 잊지 않고 제게 연락한 게 참으로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없이 많이 걸었던 길임에도 오늘따라 집으로 가는 길목이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어두운 길목을 지나고 가로등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밝은 불빛에 눈이 부신지 이타도리가 고죠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다 고개를 들었다.
"일어났어?"
"으응…, 형?"
"정신 차렸으면 두 발로 걷는 걸 추천할게."
이타도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목에 걸쳐있던 팔을 회수했다. 잔뜩 술이 오른 채로 아무런 부축도 없이 두 발로 서 있으려니 중심이 잡기가 쉽지 않았다. 술에 절은 몸이 정처없이 이리저리 비틀대다 기어코 벽에 등을 부딪친다. 당장은 아픈지도 몰랐지만 내일이면 등에 퍼런 멍이 들어있을 것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이타도리는 정신을 차리고자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런다고 술이 깰 리는 만무했지만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고자 노력했다. 결국 한 발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죠가 이타도리에게 등을 보이며 앉았다.
"그냥 업혀."
이타도리는 멍하니 제 앞에 놓인 넓은 등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몸을 내던지듯 그의 등에 업혔다. 그 반동으로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고죠가 버럭 소리를 냈다. 위험하잖아! 내가 아주 전용 말로 보이지? 히히, 뭐 어때요. 상당히 해맑은 웃음과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고죠가 허탈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화가 난 적도 없었지만, 이 어린 소년은 제가 본인에게 화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 헤어졌다고 얘기 안 했어."
"집 나가게 되면 얘기하려고 했지."
자칫 무거운 분위기가 될 수 있는 주제에도 둘은 헤어진 연인답지 않게 다정하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자연스럽게 목에 둘러진 팔이나, 신난 듯 동동 구르고 있는 다리나, 그 모든 것들을 받아주며 은은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이 둘을 지나치게 다정한 연인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집에 도착한 고죠가 현관에 들어서며 허리를 굽혔다. 내리라는 신호였다. 그런데 이타도리는 등에서 내리기는커녕 발을 힘차게 흔들었고, 순식간에 신발 두개가 툭, 툭 현관 바닥에 나뒹굴었다.
"너 뭐 해?"
"방으로 고!"
"이게 진짜 내가 전용 말인 줄 아네."
말은 따지듯이 툭툭 내뱉으면서도 고죠는 어느새 신발을 벗고 이타도리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곧이어 이타도리의 방 앞에 도착한 고죠가 열린 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이타도리를 냅다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간만에 업었더니 허리가 다 쑤셨다.
"너 진짜 적당히 좀 마시고 다녀."
"형 내가 귀찮아!?"
귀찮다. 그것도 매우. 기실 취한 전 애인을 기꺼운 마음으로 데리러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당사자가 아닌 친구의 연락으로. 고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취한 애한테 이런 얘기 해봤자 통할 턱이 없었다.
"그런 말 전 애인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그래도 형 나랑 같이 살아야 돼."
동거의 안 좋은 점이 바로 이거였다. 우리의 관계는 끝나도 계약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이별한 그 순간부터 반강제적 룸메이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연인으로 지낸 기간이 길어서인지 같이 붙어있는 동안은 서로 꽤 연인같이 굴었다. 그렇게 굴지 않으려 해도 서로 연인이 아니게 구는 법도 잊은지 오래였다.
"그동안 나보고 네 귀가 서비스 노릇하라고?"
"이젠 귀여운 동생이잖아요. 해줄 수도 있지."
강아지가 애교 부리는 것마냥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헤실헤실 대는데, 하마터면 헤어진 사이라는 걸 잊고 저 위에 몸을 부빌 뻔했다. 머릿속에 뭉게뭉게 그려지는 빨간 딱지가 붙은 상상들에 고죠가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연인처럼 대하는 것과 진짜 연인인 것마냥 착각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고죠는 다급하게 제 방으로 들어와 아직까지도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내쉬었다. 이타도리는 무방비해도 너무나 무방비했고, 저는 절제력이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연애할 때야 이런 조합이 시너지를 일으키지, 현 상황에선 이러다 일 나는 건 시간 문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
"고죠가 취해서 좀 데리러 올래?"
"어딘데요?"
이번엔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녘에 침대 맡에 두었던 이타도리의 핸드폰이 아주 대차게 울렸다. 비몽사몽 잠결에 전화를 받은 이타도리가 고죠가 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눈을 비비며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위치를 전해듣고 전화를 끊은 이타도리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여전히 잠은 깨지 않은 상태였고 걷다가 졸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고죠를 데리러 가는 길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연애할 때도 쉬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기에.
"스구루 형, 저 왔어요."
자신이 항상 즐기던 시끌벅적한 술집과는 다른, 분위기 있어보이는 바(bar) 였다. 어둑한 조명과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듯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게토가 손을 들어 인사했고 그 앞에 고죠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었다. 목적을 잊은 듯 고죠를 본 채 만 채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이타도리가 먹던 잔을 들어 한 입 마셨다.
"오, 맛있다."
"맛있어? 얘가 즐겨먹는 칵테일인데."
"네. 맛있는데요?"
이것도 먹어봐. 게토가 자기 앞에 있던 잔을 이타도리에게 스윽 밀어줬다. 투명한 게 색깔이 없는 칵테일이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레몬향이 나는 게 상큼하다. 냉큼 입에 부어넣으니 상큼하게 퍼지는 게 딱 입맛에 맞아들었다. 맛있어? 고개를 괴며 묻는 게토의 물음에 이타도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마시고, 쟤 잘 챙겨가. 계산 미리 해뒀으니까."
"네. 근데 형 제 번호 있었어요?"
"당연하지."
게토가 핸드폰을 들어 저장된 화면을 띄우자 '안심 귀가 서비스'라는 글자가 또렷히 적혀있었다. 그것을 본 이타도리가 의문을 품었다. 술을 마시기만 하면 인사불성이 되는 저와는 달리 고죠가 취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어서 오늘처럼 이타도리가 고죠를 데리러 오는 날은 손에 꼽았기 때문이었으므로.
"왜 이렇게 저장했어요?"
"이렇게 말고 연락할 일이 없어서?"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 고죠가 취하는 날 외엔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딱히 연락할 만한 일도 없고. 이타도리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슬슬 갈까?"
이타도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죠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무거울 만도 한데 고죠보다 한 뺨은 더 작은 몸으로 혼자 거뜬히 부축했다. 가게를 나선 후 게토가 먼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왜 이렇게 마신 건지 궁금증이 일렀지만 취한 사람을 붙잡고 캐기엔 양심이 따끔했다. 기분대로 술주정이 나오는 고죠가 마시고 뻗은 거 보면 그닥 좋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형, 괜찮아?"
현관에 다와서 뒤엉키는 다리에 넘어질 뻔한 고죠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예 정신이 날아가 수면 상태에 빠진 거구의 남자를 다루기란 쉽지 않았다. 이타도리가 먼저 신발을 벗고 다시금 고죠를 업어들었다. 자기보다 키가 큰 상대를 업고 있자니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 허리가 나갈 것 같았다. 발 빠르게 달려가 침대에 고죠를 던지고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신발만 벗기고 방을 나서려고 하니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뭘 저렇게 차려입었는지. 목끝까지 단정하게 채워진 단추가 답답해 보였다. 끄응. 머리를 왼쪽 오른쪽 기울이며 고민하던 이타도리는 결국 손수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내렸다. 이대로 두고 가면 신경 쓰여서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으으, 더워……."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탓에 단추를 풀어내던 이타도리가 고죠의 위로 포옥 포개졌다. 가까스로 침대 맡에 팔을 뻗으며 완전히 엎어지는 것은 막았지만, 뉴턴의 법칙에 따라 얼굴 바로 아래 있는 고죠의 얼굴에 가까이 밀착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 잔잔한 숨결. 반들거리며 존재감을 뿜내는 얄쌍한 입술. 이타도리가 와이셔츠를 푸르다 말고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게 뭐야 진짜. 더이상 넘으면 안 될 선이 생긴 기분이었다.
***
이별의 유예기간이라고 할 수 있던 계약 기간이 끝났다. 연인인 듯 아닌 듯 잘 지내는 듯 하던 둘 사이에 정막이 흘렀다. 각자의 짐을 챙기기 바빴다. 이게 진짜 둘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온몸으로 체감했다. 힐끔 열려있는 현관문을 쳐다본 고죠가 생각했다. 이제 저 문을 나서면 고죠 사토루와 이타도리 유지는 연인도, 룸메이트도 아닌 각자 살아갈 남이 되는 거겠지. 애석하게도 그 사실을 서로 인식하고 있는 건지 문 밖에 나설 때까지 섯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짐 다 챙겼어?"
짐짓 무거운 말투였다. 이별 답지 않은 이별을 했으니 현재의 헤어짐이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건 이타도리 역시 마찬가지인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상자를 손에 든 이타도리가 먼저 현관을 나섰다. 마지막, 마지막. 입을 열지 않던 이타도리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형,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래. 나도 즐거웠어."
고죠 역시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은 웃음으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앞으로 우리는 서로가 없는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서로의 공허함에 보고 싶다며 갤러리를 뒤적거리기도 하고, 추억이 떠오를 때면 그리워하다가 술을 마시기도 하고, 또 서로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씁쓸해하며 쓴웃음을 삼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더는 서로가 서로의 중축이 아님을 안다. 우리는 서로가 없음에도 웃는 날이 많아질 것이고, 서로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며, 추억을 떠올릴 때면 그땐 그랬지. 하고 장난스레 넘기게 될 날이 찾아올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서로를 사랑했으니 남은 미련도 후회도 없다.
단지 네가 술에 취했을 때 저 대신 데리러 가줄 사람이 있는지, 그게 못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안심 귀가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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