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죠유지]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 연령 조작 27 x 17
나는 항상 같은 요일, 같은 시간이 되면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평소 버릇대로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고 무턱대고 받은 탓이었다. 와아! 받았다! 처음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땐 그저 심심한 학생의 철없는 장난이거니, 작은 짜증과 함께 끊었다. 하지만 전화는 곧바로 다시 걸려왔고, 우렁차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장난 전화따위 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놔야겠다 싶어 받으니, 쾌활하던 음성은 어디가고 전화를 끊지 말라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내가 왜 모르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데?"
정말이지, 성가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아무도 안 받아주는데 형만 받아줬어요.
"실수로 받은 거야. 그러니까 하소연 하려거든 네 친구한테나 가서 해."
- 친구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처량한 사연까지도. 다른 이가 들었다면 동정심이라도 가지고 이 소년의 말을 귀를 기울여줬을 지도 모른다. 귀를 기울이지는 않더라도 건성으로라도 사연을 들어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쎄. 나는 남의 사연을 들으며 아픔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줄 만큼 감수성이 풍부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게 낯짝 한 번 깐 적 없는 남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생판 남인 네 얘기 좀 들어달라고?"
-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전화만 해주세요.
안 그래도 꽉꽉 막힌 도로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서 짜증나 죽겠는데 이제 막 변성기를 거친듯한 앳된 목소리는 자꾸만 제게 매달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다하다 이젠 방황하는 청소년 보모 노릇까지 해야 하나. 난 네 보호자가 아니란 말이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불난 집에 휘발유 갖다붙지 말고 끊어라."
- 왜 짜증나는데요?
"차 막혀서."
- 그럼 시간 떼울 겸 저랑 전화해요. 차 막히는 거 구경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해봐야 고삐리 정도 되는 주제에 말은 제법 잘했다. 나는 ’어디 한 번 해봐라‘라는 식으로 말했고, 통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처음에 바득거리며 이를 간 것이 무색하게 소년은 사람을 참 기분 좋게 만들 줄 알았다. 화법이 좋으냐고 물으면 단연 아니었다. 사회에 나와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겉치레 가득한 화법을 많이 듣고 구사하게 된다. 여기선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제 얼굴이고 제 명함이었으니까. 사서 제 얼굴에 침 뱉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 소년이 그런 겉치레식 화법을 구사하기에는 백 년도 더 일렀다. 그러나 말에는 겉만 번지르르한 화법 뿐만 아니라 다른 힘도 있다. 소년의 무기는 바로 그것이었다. 악의없는 순수함. 조곤조곤 읊조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있는 진심이 심신에 안정을 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간 지나는 줄 모르고 입을 놀려댔다. 네비게이션이 알리기 전까지 회사에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도착했으니까 끊어."
- 다음에 또 전화해도 돼요?
차마 안 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와 마음 편하게 대화하는 건 간만이었다. 어린 남자와 자신이 이렇게 잘 떠들 줄도 몰랐다. 너 알아서 해. 거절도 아니니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소년은 더 어렸더랬지. 귀찮으면 하지 않겠다며 물러서려는 것을 급히 잡았다.
"하라고. 해도 되니까."
- 네!
그렇게 나에겐 매주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이라는 이름의 전화 친구가 생겼다.
***
매주 전화하던 우리에게는 몇 가지 룰이 존재했다.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고,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는 개인 정보는 노출하지 않는 것.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이런 룰에 따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은 거절한다는 협박으로 소년의 번호까지 받아냈다. 요즘 시대에 번호 알면 다 아는 거 아니냐 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불공평하지 않은가? 이미 자신의 번호는 저 소년의 손에 넘어가 있는데.
- 형은 좀 신기한 것 같아요.
"내가?"
- 처음엔 성격 진짜 더러운 줄 알았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야."
- 아니 끝까지 들어봐요, 그래도 친절한 것 같다고요.
"몰랐어? 나 원래 친절한 사람이야."
- 에이, 그건 아니다.
열심히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하던 고죠가 안경을 벗었다. 기껏 전화하려고 야근거리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왔더니 듣는 말이 고작 이건가. 억울함에 울화통이 터져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하소연하니, 회사 생활의 설움이란 한 톨도 알지 못하는 건너편의 소년은 꺄르르 거리며 해맑게 웃고 자빠졌다.
- 형 사실은 형이 아니라, 아저씨 아니에요?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해요?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 으음, 생각 안 해봤는데. 몇 살이에요?
"스물 일곱."
- …저 17살인데.
"형이라고 불러. 아저씨 진짜 죽는다."
알겠어요, 알겠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흘러들어오는 순진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귀여운 말투나 성격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꽤 듣기 좋은 중저음이었다. 가능하다면 라디오처럼 듣기만 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변성기는 다 지난 건가.
- 형 있잖아요…….
항상 막힘없이 술술 얘기하던 소년의 목소리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다시금 입을 떼길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처음으로 전화라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말하길 기다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답답했다.
- 저 형이 점점 궁금해져요.
우리들이 지켜오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 그냥 다요. 이름은 뭐고, 어디 살고, 어떤 일을 하고, 또 다른 사람한테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부.
이거 그냥 고백이나 다름없잖아. 난처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상대한테 어떤 호감을 느끼고 이러는 건지. 하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저도 다를 바 없었다. 이따금씩 전화가 답답하게 느껴졌으니까. 방금까지도 걸려있는 제약에 짜증내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전화 너머의 소년이랑은 입장이 달랐다. 고죠는 소년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들의 암묵적인 룰을 잘 지키고 있는 건, 이타도리 유우지. 전화 너머의 소년 뿐이었다.
"유우지."
- …알고 있었어요?
짐짓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 지금까지 알면서 모르는 척한 거예요?
"……."
조금 흥분한 듯한 목소리. 이리 반응하는 건 아마도 배신감.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던 약속을 깨버린 것이 화가 난 것이겠지. 하지만 소년, 그러니까 이타도리 유우지와 고죠 사토루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서 있는 위치와 그럴 능력이 되는가 마는가. 고죠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됐다. 지금 다니는 회사 역시 아버지가 오너로 계신 회사였다. 밑바닥에서부터 거쳐 올라가는 것일 뿐. 그 말은 즉슨 고죠는 타고난 재벌가의 자식이란 소리였다. 돈이라면 넘치도록 많았고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 구할 수 있었다. 대포폰도 아니고, 고작 어린 남자 고등학생의 번호로 뒷조사 정도는 손쉽고 간단하다는 말이다.
- 실망이에요…….
"유우지!"
다급한 부름에도 전화는 매정하게 끊겼다. 처음 이타도리와 전화했을 때가 떠올랐다. 울음기가 서린 울먹이는 목소리. 하아, 씹. 이게 아닌데. 작게 욕을 지껄이던 고죠가 분에 못 이겨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닫아버리곤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오, 나보고 어떡하라고."
단지 네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고, 그때가 그 타이밍인 줄 알았을 뿐인데.
***
"너 제정신이야?"
"뭐가."
고죠가 취한 듯 말꼬리를 늘리며 쇼파에 자신의 몸을 늘어뜨렸다. 이마에 흉터가 길게 남은 남자가 짐짝 던지듯, 들고 있던 고죠의 겉옷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요즘 정신이 헤이해졌다 싶더니, 그게 고등학생 때문이라고? 너 그러다 잡혀가."
"스구루, 나 진짜 미친 거 맞지."
"잘 아네. 안 그래도 너희 아버지 너 요즘 벼르고 계신다."
"그래. 미친 게 맞네. 목소리 듣고 싶다."
그래도 친구라고 집까지 모셔다줬더니, 게토의 말은 아주 가볍게 귓등으로 스쳐지나갔다.
"사토루."
"아니, 보고 싶은 건가."
이젠 전화도 안 건다 이거지. 혹시나 싶어 항상 걸려오던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맞춰 기다려봤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먼저 연락할 생각도 못하는 주제에 괜히 애꿎은 전화기를 노려봤다. 자신의 말에는 대꾸할 생각도 없어보이는 고죠의 모습에 게토가 한숨을 내쉬며 맞은 편 쇼파에 엉덩이를 얹었다. 대체 뭘 하는 소년이길래 고죠 사토루가 저리도 안절부절 못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 누구보다 고죠 사토루를 가까이서 지켜봤다 장담하는 게토는 누군지 모를 그 학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전화……."
"야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막을 새도 없이 고죠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아무리 미친 새끼라고 해도 자신의 친구가 망가지는 꼬라지를 더 볼 수 없던 게토가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뒤를 돌았을 때 고죠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지껄이고 행동하다 툭 하니 잠든 고죠를 보고 게토는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주먹을 쥐던 손을 내려놓고 속을 눌러냈다. 연결이 안 된 걸 다행으로 알아라.
게토가 나가고 자는 줄만 알았던 고죠가 천천히 눈을 꿈뻑였다. 천천히 배가 오르락 내리락 반복했다. 자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더니 확 상체를 일으켰다. 술기운에 어지러운 머리 덕에 잠이 오지 않았다. 게토가 가기 전 맞은 편 소파에 던져둔 전화기를 눈으로만 쫓았다. 가지러 갈까, 다시 누울까. 술기운이 별것 아닌 것에도 고민하게 만들었다. 분명 손에 쥐고 있으면 연락할 게 뻔할 뻔 자였다. 보고 싶다. 넌 지금 자고 있을까. 일부로 전화를 받지 않는 건가, 보면서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건가, 별의 별게 다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이렇게도 제 머릿속을 들어차고 있던 건지. 지금 내가 연락한다고 해도 너는 받지 않을 것이 뻔했다. 헛꿈 그만 꾸고 자자. 가시는 술기운에 슬금슬금 졸음이 밀려왔다.
그렇게 잠에 빠져든지 10분? 20분? 아주 잠시 잠이 든 것 같은데 미세하게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꿈틀거리며 겨우 눈을 떴다. 대체 누구야. 눈이 떠졌음에도 늦장을 부리고 있으니, 진동이 끊겼다. 몸에 힘이 훅 빠져나갔다. 이미 끊긴 거 나중에 확인하자 싶어 다시 눈을 감으니, 또다시 진동이 울려왔다. 이젠 짜증이 나서라도 누군지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성큼성큼 걸어가 확인하니 익숙한 번호였다. 이제는 눈 감고 외워버릴 지경인, 그 번호.
"…여보세요?"
- 안 자고 있었어요?
다급하게 목을 가다듬고 받은 자신이 무색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간 얼마나 저 때문에 속을 끓였는지 이 소년은 알긴 알까. 하지만 말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몰라도 되는 일이었다, 모든 건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우리 만날까."
- 좋아요.
취김이었는지, 잠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막연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너와 약속을 잡아버렸다. 너는 그걸 기다렸다는 듯 덥썩 물었다. 더 이상 내가 너에게서 도망갈 길은 없었다.
***
[오늘 만나는 거 안 잊었죠?]
[내가 데리러 갈게.]
[주소도 알아요? 진짜 소름 돋는 거 알죠?]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건가. 자신은 이런 사람인 걸. 자신이 도망갈 수 없다면 이 어린 소년도 도망갈 수 없었다. 사람을 이렇게 만든 데에 책임은 져야지. 심장이 꿍꿍 뛰었다. 그게 들뜬 건지 긴장한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과속 딱지를 몇 개를 떼는 건지 가는 동안의 과속 카메라에는 전부 찍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엑셀 위에 올라가 있는 발은 무게를 더했으면 더했지 떨어지진 않았다.
- 어디 쯤이에요?
"거의 다 왔어. 나와."
- 예? 출발한지 얼마 안 됐잖아요. 30분 정도 걸린다면서요?
"몰라. 어쨌든 거의 다 왔으니까 슬슬 나와."
- 일단 알겠어요. 끊어봐요.
생각보다 이른 도착에 이타도리가 당황한 듯, 우당탕 거리는 소리를 내며 전화가 끊겼다. 이 속도로 계속 간다면 대충 5분. 이타도리가 준비하고 나오려면 넉넉 잡아 10분. 분명 시간은 충분하다는 걸 알면서도 진정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마음이 더 다급해져만 갔다.
끼익-.
갑작스레 도로로 튀어나온 고양이 한마리에 차량이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급작스럽게 멈춰섰다. 인적 드문 곳이라 다행이지, 아니라면 다른 차와 충돌사고라도 났을 것이었다. 그제서야 고죠가 핸들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이타도리한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비된 고죠는, 흥분 그 자체였다. 늦게나마 자각한 자신의 상태에 차를 제대로 정차 시키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태로 만날 수는 없었다. 조금이나마 진정하고자 몸에 힘을 쫙 빼고 눈을 잠시 감고 있자니, 누군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우지?"
창문을 살짝 내려 엿보니 보고 받았던 서류에 박혀있던 사진과 똑 닮은 엣된 얼굴이 보였다. 갈색을 머금은 듯한 분홍 빚깔의 머리카락, 따뜻하고 향긋한 커피가 떠오르는 눈동자. 분명 자신이 만나러 온 이타도리 유우지였다.
"진짜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었네요. 반쯤은 안 믿었는데."
"그게 만나자 마자 할 말이야?"
"그럼 뭐라고 해요? 솔직히 만나서 반갑다고 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진짜 말은 제법 잘한다니까. 처음과 지금 모든 인식이 바뀌었지만 이거 하나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 모든 사태를 제공한 고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화해하러 온 거 아니냐며 속으로 투덜댈 뿐.
"괜히 할 말 없어서 아무 말 안 하는 거 봐. 원래 어른은 그렇게 다 치사해요?"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자니 조수석에 앉은 이타도리가 조잘조잘 떠들어왔다. 애써 외면하며 창 밖만 바라보자, 이럴 거면 왜 만나자고 한 거냐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어느 하나 흘리지 않고 귀 담아 듣고 있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연기 중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 아이한테서 무얼 얻고자 여기까지 온 걸까 싶었다. 제일 중요한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막연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사무쳤을 뿐,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몰랐다. 계속 우리 관계를 유지하자고 화해를 하기 위해? 그거 하나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말이 안 됐다.
"형 저기서 세워요."
"카페? 너 커피 마실 줄은 알아?"
"꽤 좋아하거든요."
사실 제가 못 마셨다. 쓴 건 최악인데. 고등학생 밖에 안 됐으면서 무슨 벌써 커피를 좋아하나 싶었다. 커피를 꽤 좋아한다고 말하는 소년 앞에서 달디 단 초콜렛 프라푸치노 이런 걸 시켰다간 괜한 웃음거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도착한 카페에 내려 메뉴판을 보고 있자니 이타도리가 망설임 없이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최대한 어른스러워 보이는, 생각이 멈췄다. 이런 걸 언제 고민해봤다고.
"화이트 초코로 주세요. 휘핑 가득."
"형, 커피 못 먹어요?"
"안 좋아해."
자연스럽게 카드를 내미니 이타도리가 손목을 텁 잡아왔다. 뭐야. 고죠도, 종업원도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대충 씩씩대는 얼굴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였다. 계산 때문인가. 알고 나니 하찮은 게 귀여웠다. 이타도리의 손을 치우고 종업원에게 카드를 내밀어 계산하고 자리에 앉으니, 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자신을 노려봤다.
"애한테 얻어먹을 만큼 나 쪼들리게 살지 않아."
"그래도 고생해서 왔잖아요."
"다음에 네가 오면 커피 정도는 얻어 마셔줄게."
"밥이랑 다른 건 형이 다 사고요?"
"잘 아네."
"근데, 우리 다음이 있어요?"
뜻하지 못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거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한방 먹었다. 아무 말없이 팔을 괴고 빤히 쳐다보니 뭘 그리 쳐다보냐며 입술을 비죽였다.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 전형적으로 어려운 사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자라온 얼굴이네.
"어떤 쪽을 바라고 말하는 거야?"
"전 당연히 있는 쪽이죠. 근데 형은요? 또 만나고 싶어요? 제 질문들에 다 대답해줄 수 있어요?"
그 때 그 질문들 말하는 건가. 번뜩 이타도리가 고백 비스무리하게 내뱉은 발언을 기억했다.
"고죠 사토루. 아버지 회사 밑에서 개처럼 구르는 중이지. 그래봤자 다음 오너는 나로 정해져있지만. 그래서 재수없게 보는 사람도 많고, 내 편보다 적이 많은 사람이야."
"형 진짜 혼자 잘났네."
"세상 혼자 산다는 말도 많이 들어. 어때 궁금증 좀 풀렸어?"
"어느 정도는요. 제일 궁금한 건 대답 안 해줬지만."
고죠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때 더 들은 게 있었나, 아무리 되뇌어도 더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지금 이 소년은 뭐가 더 궁금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
"하긴 제대로 묻지도 않았네요. 좋아해요."
이리도 쉽게 고백한다고? 일상대화하듯 툭 뱉은 고백은 고죠의 뇌리에 꽂혔다. 좋아한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어린 소년이, 나를. 좋은 아침이라는 말처럼 너무 일상적이게 뱉은 말에 의구심이 일렁였다.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고 있으니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자세히 훑어보니 진동이 울릴 정도로 다리를 떨고 있는 거였다. 애는 애였다. 온 몸으로 진심이라는 것을 티내고 있었다. 소년의 진심은 잘 알았다.
그런데 나는?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무엇을 위해 밤을 새우고, 고뇌하며, 그리고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긴장한 듯 두 손으로 머그잔을 쥐고 라떼를 입에서 떼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더 생각할 게 있나. 앞에 앉은 이타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이 정도에서 시작하자. 고죠 사토루와 이타도리 유우지는 오늘 처음 만났잖아."
"…응."
"착하네."
폭신폭신한 머리를 계속 만지고 있자니 이타도리의 얼굴이 기분 좋은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는 것 같았다. 살짝 붉어진 볼이 엣된 얼굴을 더욱 어리게 보이게 만들었다. 내가 이런 취향일 줄은 전혀 몰랐는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기하기만 한 아이였다.
"이제 하고 싶을 때마다 전화해도 돼요?"
"응."
"문자도 보내도 돼요?"
"응."
"보고 싶을 때 찾아가도 돼요?"
"아니,“
“내가 올게."
나는 항상 같은 요일, 같은 시간이 되면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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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저장하지 않아도 될만큼 외워버린 번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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