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B by 설엿
8
0
0

작년이었던가 너랑 나랑 Y언니 포함해서 학교 앞 전통주점에 들렀던 때가 있었지. 동아리 애들 한 8명끼리 모인 자리였던 걸 보아 아직 활동이 종료되기 전이었을 거야. 내가 너한테 가사를 써 달라고 했던 거 혹시 기억나니?

동아리 활동이 끝나면 작곡을 해 볼 생각에 신났던 때였을 거야.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딱히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기타 뚱땅대며 코드 맞춰주는 수준에 그치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뭔갈 만들어보고 싶었어. 구체적인 상상을 하게 되면 괜히 기대감도 커지잖아. 무대에 서서, 무심하게 “이거 제가 만들었어요.”라고 멘트를 던진 뒤 노래를 시작하는 데에 로망이 있었던 걸까. 근데 쓰고 싶은 노랫말은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더라.

사랑에 대한 얘기를 쓸까? 너무 진부하지 않니? 엄마와 나눴던 얘기? 그 반응과 표정과 우리를 가로지르는 벽 사이로 피어오르던 감정들. 내가 밉다며 떠난 어떤 애에 대한 원망이나 나열해버릴까. 아주 중요한 걸 혼자서 외롭게 깨달아버리라고. 노래하고 싶은 이야기는 좀 있는데 그걸 내 입에 얹을 단어로 바꾸려니 너무 막막했어. 너는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런 일은 잘 하지 않을까. 그러니 내가 노래를 쓰면 네가 가사를 붙여줄래? 술김이지만 평소 해왔던 생각을 불쑥 꺼냈어.

그 때 네 대답이 잘 기억이 안 나. 만들어주겠다고 했던가, 아니면 잘 모르겠다고 했던가. 네가 자신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닌데.

그 당시엔 네 블로그에 적힌 시를 읽을 수 있었지. 내가 시를 즐겨 읽는 건 아니라 이게 잘 쓴 건지 뭔지 뭘 느껴야 하는지 딱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냥 너도 하고 싶은 말이 있겠거니 했어. 너는 가끔 혼자서, 내가 알 수 없는 생각에 깊이 빠지곤 하는 사람이라고. 맞지 않니? 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잖아. 그걸 티 내지 못해 안달이던데.

내가 슬픈 노래를 써주면 슬픈 가사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네가 드러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까? 그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멜로디를 만들어야지. 예상할 수 없는 템포로 음침하게, 인간 내면의 가장 추악한 부분을 드러내기 아주 적절한 노래를 만들어 버릴거야. 사람이 사랑할 때 스멀스멀 올라오는 아름답지 않은 감정들. 나의 질투가, 절망이, 한 없이 무채색이 되어가는 나의 모든 생활과, 관음적인 생각들이, 충동적인 마음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넌 그 날 일찍 집에 갔어.

남은 7명은 밤을 새겠노라 작정하고 신촌에 있는 코인 노래방에 나눠 들어가서 10년 전 케이팝을 부르며 놀았지.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주점에서부터 노래방까지 30분을 걸어가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난 너에게 카톡을 보냈어. 집에 조심히 들어가라고. 꽤 자주 그랬어.

그 와중에 몰랐던 너도 진짜 신기하다.

그게 벌써 작년 일이구나. 이번 달에 한국 오는 거 맞아? 단톡방을 확인 안 해서 잘 모르겠네.

너랑 완전히 단절된 사이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네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네 생각 거의 안 했어. 참 다행이지.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는 건 너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야. 너를 좋아한 일은 내 삶에 있어서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분명 그걸로 나의 일부가 만들어졌어. 내가 지금 나일 수 있는 건 그 때의 내가 있었기 때문이야. 날 이해해준 것도, 깨끗하게 끝맺어준 것도 고마워.

내가 너 없이도 혼자서 잘 버텨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안 됐네. 올해는 봄이 참 길었는데. 여름 다 되어서 귀국이라니…

네가 한국을 그리워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엔 너를 기다리던 친구들이 참 많아.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

우리 잘 지내자.

B로부터.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