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유켄] 枯木逢春

*쟈이로 상경 전 시간선.

*一場春夢(성인물)의 뒷이야기입니다.

https://penxle.com/dongza/1771132551

2시가 조금 지난 시간. 자주 가는 카페의, GYROAXIA의 지정석처럼 쓰고 있는 안쪽 자리. 미유키는 그곳에 앉아 켄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전날 켄타를 안는 꿈을 꾼 참이었다. 그 꿈의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를 만나는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지만, 오늘 만나지 않더라도 합동 연습일에는 다시 켄타를 만나야 하니까. 연습 스튜디오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되느니, 차라리 미리 만나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 연습에 지장이 덜 갈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미유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보다도 GYROAXIA이기에. 자신의 감정 때문에 밴드 활동에 지장이 생길 바에야, 자존심이든 뭐든 접고 부딪혀보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니, 이건 자존심을 접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GYROAXIA의 드러머라는, 미유키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의 근원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라 해도 좋을 터.

그런 생각으로 켄타를 부르기야 했지만, 미유키는 아직도 자신이 품은 이 감정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었다. 보통은 사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랑 같은 간질거리는 감정이 켄타를 향하고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미유키에게 사토즈카 켄타란 일 처리가 우수한 리더. 그리고, 그런 주제에 밴드 멤버 전원이 아닌 나유타를 위해서만 그 능력을 쓰는, 이해할 수가 없고 짜증 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그 꿈을 꾼 이유가 욕정 때문이라는 답을 내리는 건 사랑보다도 끔찍했다. 욕정 때문에 같은 밴드의 리더를 안는 꿈을 꾸었다니. 생각만 해도 자기혐오에 빠질 것만 같았다. 대상이 켄타인 이상, 정도만 다를 뿐 답이 어느 쪽이든 괴로울 터였다. 그렇다면, 미유키는 이 감정의 답을 찾는 것은 우선 뒤로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답을 외면하며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오늘 이렇게 켄타와 약속을 잡은 것. 아직 제 감정의 갈피를 잡지는 못했지만, 그렇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있었다.

물론, 이렇게 켄타를 기다리는 중에도 꿈의 잔상은 아직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런 만큼 켄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 괜한 생각이 들진 않으려나. 그런 불안이 머릿속을 채우고, 초조한 마음에 제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어느샌가 제 앞자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면, 초조한 제 감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처럼 무덤덤한, 감정을 담지 않은 초록빛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벌써 와있었나.”

“…네가 늦은 거라고.”

미유키는 어색한 기분을 어떻게든 티 내지 않으려는 듯, 부러 더욱 퉁명스레 대답했다. 다행히도 켄타의 얼굴을 보자마자 꿈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유키는 어떻게든 평온을 가장하며 먼저 주문해두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를 잘근 깨물 듯이 빨아들이며 목을 축였다. 지금부터 입 밖으로 낼 말은 어찌 보면 고백보다도 용기가 필요한 말. 그렇지만, GYROAXIA의 드러머라는 자리를 지키려면.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답이라 생각했다.

미유키는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은 것인지, 줄곧 입을 열지 않았다. 켄타 역시, 미유키의 비장한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주문한 제 몫의 커피가 도착할 때까지 굳이 그런 미유키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종업원이 켄타가 주문한 커피를 테이블에 두고 떠나고 나서야, 입을 열어 둘 사이에 흐르던 적막을 깨트렸다.

“그래서, 할 말은?”

“…….”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툭 던지고 털어내 버리자는 마음이었지만. 역시 이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켄타에게 말하는 것은 자존심이 꽤 상하는 일이었다. 입을 잠깐 달싹이던 미유키는, 결국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다시 빨대를 입에 물고는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목 뒤로 넘겼다.

찬 커피가 목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지금은 왠지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다. …그래. 지금 이 기분으로는 무얼 해도 어색한 기분이 들 뿐이다. 피하려 해 봤자, 지금의 어색한 시간이 배가 될 뿐일 테고.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준비해둔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겠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자 조금은 입을 열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켄타.”

“응.”

결의에 찬 목소리. 흡사 고백이라도 할 것만 같은 분위기로 미유키가 입 밖에 낸 말은, 켄타라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그. 고백받은 셈 치고. 날, 한 번만 시원하게 차 줘.”

“…….”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던 켄타의 손이 순간 굳은 듯 멈췄다. 제아무리 켄타라도. 이런 말에는 평소의 냉정함을 유지하기는 어렵겠지. 켄타는 들어 올렸던 커피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미유키를 응시했다. 자기가 스스로 입 밖으로 낸 말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미유키의 얼굴은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놀란 와중에도 그런 미유키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켄타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르며 빈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고, 차분한 시선으로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일단 물어는 볼까. 왜 그러는 거지?”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그냥, 쟈이로를 위한 일이야.”

“흐응.”

켄타의 질문에, 미유키는 대충 얼버무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켄타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고백보다도 용기가 필요한 말. 애초에 ‘차 달라’는 말은, 고백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말한다면 ‘좋아한다,’는 말을 제 입에 올리지는 않아도 되니까. 아직 제 감정의 답을 찾지 못한 미유키로서는, 이쪽이 차라리 편했다.

미유키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꺼낸 이유는, 제 감정의 답이 무엇이든 켄타에게 거절당하면 깨끗하게 마음을 접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켄타의 거절이니. 제 감정이 어떤 것이든,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깔끔히 포기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생각. 게다가, 구질구질한 남자는 인기 없으니까. 그렇다고 고백도 하지 않고 차 달라는 말부터 던지는 남자가 인기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켄타는 미유키의 답에 잠깐 고민하다가는, 결국 억눌렀던 웃음을 픽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연애가 밴드 활동에 방해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의외인데. 여자애들이랑 노는 건 좋아하더니.”

“밴드 내에서의 연애는 다른 문제잖아.”

“그 나이 먹고 공과 사의 구별도 못 하겠다는 건가?”

“큿……, 넌 어떨지 몰라도 난 너만큼 냉정하질 않다고. 음악이란 건 작은 감정 하나로도 나는 소리가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이런 이유로 나유타에게 필요 없다는 소리나 들으면서 쫓겨나고 싶진 않거든.”

“흐응.”

미유키의 말에, 켄타는 그저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다. 자신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아 하던 미유키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켄타에게는 흥미로웠을 터.

켄타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반응을 살피고 있으면, 미유키는 그런 태도가 짜증이 났는지 빈정대는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이런 부류의 스캔들은 다른 것보다도 여파가 클 테니까. 아무튼. 빨리해 줘. 너라면 식은 죽 먹기잖아, 켄타 선생님?”

“글쎄. 굳이 거절해야 하나?”

“……뭐?”

켄타의 말에, 빈정대듯 말하던 미유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켄타라면 이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승낙할 줄 알았는데. 미유키가 당황한 표정으로 켄타를 바라보고 있자면, 켄타는 살짝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스캔들 따위, 나유타의 음악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하아?”

“나유타는 너와 내가 사귀든, 자든. 자기가 요구하는 소리만 낸다면 신경 쓰지 않을 녀석이니까.”

“어이, 켄타…….”

잠깐. 이건 마치.

“널 차 달라고 했지. 그런데,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못 들었는데.”

이 녀석이.

“넌, 어떻게 생각해, 미유키?”

나에게. 감정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미유키는 아무 답도 못 한 채 시선을 떨구고 잔만 꽉 움켜쥐었다. 얼음은 이미 반쯤 녹았지만 잔은 여전히 서늘했고, 겉에 맺힌 물방울이 손을 적셨다. 그렇지만, 잔을 쥔 손보다도, 심장이 더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전개는 생각도 못 했는데.

…사토즈카 켄타가? 나를? …아니. 그럴 리가. 날 놀리기라도 할 셈이겠지. 저 수에 넘어가선 안 된다. 그런 생각에, 짧게 한숨을 내쉰 미유키는 켄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난. …마음을 정리하려고 여기 왔어. 그 결심을, 번복할 생각은 없어.”

“내가 한 질문은 그게 아닌데 말이지.”

턱을 괴고 있던 켄타의 손이 다시 커피잔을 잡았다. 그렇지만 그것을 들어 마실 생각은 않고, 잠깐 생각에 잠긴 것인지 그저 잔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

분명, 말하고, 차이고, 그렇게 끝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 켄타와 단둘이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뭐랄까, 뭔가. 묘한 기분. 켄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기분에, 미유키는 어쩌지도 못한 채 테이블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 들려온 말은 미유키가 지금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중 하나였다.

“저번 연습 때는 분명 평소대로였는데. 갑자기 나를 불러 이러는 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읏……,”

기껏 잊고 있었는데. 켄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다시 눈앞에서 생생하게 어제 꿈에서 보았던 모습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미유키의 눈앞에 있는 것은, 바로 꿈에서 제가 안았던 그 대상이었다. 화악, 얼굴에 열이 오르려는 것을 식히려 커피를 목 뒤로 넘겼지만, 이미 손바닥의 열 탓에 얼음이 거의 녹은 커피는 끓어오르는 열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리고, 제 한 마디에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는 미유키를 바로 앞에서 본 켄타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만무.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미유키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가. 대충 알 것 같군. 그럼, 섹스프렌드는 어때.”

“잠깐, ……뭐!?”

상상치도 못한 말. 당황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난 미유키는, 저에게 집중되는 카페 손님들의 시선에 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잠깐의 사고에도, 켄타의 표정은 여전히 평소 그대로. 도무지, 방금 막 그런 폭탄 발언을 내던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미유키는 아직 진정이 되질 않는지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을 뿐. 켄타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미유키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에 힘겹게 꺼낸 미유키의 목소리는, 여전히 동요하고 있었다.

“너, 너 말이야……, 대체 무슨 소리를…….”

“사귀는 건 네가 싫은 것 같고. 그렇다고 널 찬다고 해서, 깨끗하게 일이 끝날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아니, 아니……, 그렇다고 해서 왜 얘기가 그렇게……,”

“네가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서, 나유타의 음악에 영향이 생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

……아. 그런 건가. 그랬지. 이 녀석은. 이런 녀석이었지.

오르던 열이 확 식는 기분이었다. 어디까지나 나유타. 나유타의 음악.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녀석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필요 없어, 그딴 거. 정말이지, 대단하네, 넌.”

“하하.”

인상을 확 찌푸리며 빈정대듯 말했지만, 켄타는 그저 웃음으로 넘길 뿐. 그런 모습이, 더욱 미유키의 짜증을 불렀다. 이 녀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조금은 기대했는데. 아까 나온 이야기의 분위기, 그리고 제게 건네진 제안. 착각할 수밖에 없는 흐름 아닌가. 물론 섹스프렌드 같은 관계는 죽어도 사양이었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이 감정이 욕정일 뿐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것 같으니.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미유키의 모럴이 도무지 그런 관계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마, 보통 사람들이라면 다들 그럴 테지. 분명 그럴 텐데. 이 녀석은…….

이제는 얼음이 완전히 녹아버린 커피를 신경질적으로 들이켰다. 이런다고 타는 속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유키의 손에 들린 유리잔은 그렇게 텅 비어, 탁, 하고 공허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커피도 얼음도 모두 사라진 빈 잔은, 마치. 눈앞의 이 남자와 같았다. 아사히 나유타를, 아사히 나유타의 노래를 향한 헌신. 그것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존재. 켄타에게 소중한 것은 나유타의 노래, 그것뿐일 터.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조차도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남자를 상대로, 나는 대체 왜 그런 꿈을 꾸었던 걸까.

짜증이 조금씩 가시면서, 그 자리를 묘한 울렁거림이 채우기 시작했다. 이 울렁거림은, 불쾌함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인가. 영, 이 녀석과 함께 있으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자꾸 소용돌이치는 것만 같았다. 구역질이 나.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빈 잔만 노려보고 있으면, 켄타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나를 향한 마음은 좀 식은 것 같아?”

“……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울렁거리는 기분을 어떻게든 억누르려 애쓰며, 미유키는 눈을 치뜨며 켄타를 바라보았다. 그런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켄타는 마냥 평온할 따름.

“차여서 마음을 접을 셈이었잖아. 그렇지만, 난 널 찰 마음은 없고. 그렇다면 정이 떨어지게 하는 건 어떨까 싶어서.”

이 녀석 손 위에 놀아났다는 소린가. …그렇지만, 짜증 나게도. 사토즈카 켄타가 이런 녀석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이 정도에 정이 떨어질 정도였다면,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할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켄타와 약속을 잡아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고 있을 일도 없었겠지. …아니, 내가 이 녀석에게 떨어질 정은 있었나? 나는. 왜 이 녀석이랑 계속 얽히고. 짜증 날 뿐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거지.

사토즈카 켄타는, 짜증 나는 녀석. 일 처리도 깔끔하고, 기타 연주도 수준급. 그렇지만, 나유타의 노래를 위해서라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나유타 본인마저도, 도구로 써버리는 그런 녀석. 심지어는, 진심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제 몸까지도 나유타의 음악을 위한 도구로 쓰겠다는 소리를 꺼낸 녀석.

섹스프렌드 어쩌고 하는 소리에는 분명 짜증이 났다. 머리에 열이 끓어오를 정도로. 그렇지만, …아마도. 짜증이 난 이유는, 나유타의 음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조차도 아끼지 않는 켄타의 태도 때문이었던 것 같아. 자신을 아끼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제게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유타를 위해 한 말이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해버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정말, 나는 이 녀석을 좋아하는 건가. 이 감정의 이름은 ‘사랑’인 건가. 부정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머리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 내 마음을 알았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나. 켄타는 대체 왜 그런 말까지 해가면서…….

……잠깐. 이 녀석 방금, 분명.

“…찰 마음이, 없다고?”

“뭐, 그렇지.”

“……. …왜,”

“글쎄. 직접 생각해보는 건 어때.”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유를 물으려 하면, 켄타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 말을 잘랐다. 은근하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짜증 났다. 그래. 사토즈카 켄타를 향한 마음은 ‘짜증’이었다. 그렇지만, 이 짜증이, 저 녀석을 향한 가장 큰 감정이. 그 근원이 사실은 사랑이었다면. 애정이었다면. 그 꿈도, 이해가 됐다.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다, 사카이가와 미유키.’라고 했던가. 꿈속의 켄타가 말한, 그 말은. 줄곧 짜증이라는 이름으로 묻어왔던 이 감정을, 직시하라는 뜻이었던 건가. ……. 아니. 이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거다. 그럴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제 머릿속을 헤집어대는 이 ‘짜증’이라는 감정을, 이제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아아, 젠장. 아직 켄타 녀석이랑 대화도 끝나질 않았는데. 지금 상태로는 도무지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분명 이상하게 보일 테지만. 어쩔 수 없지. 생각을 좀 더 정리하고, 다시……,

“미유키.”

“……응?”

이 자리를 급히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미친 참에, 켄타가 부르는 목소리에 급히 사념에서 깨어났다. 켄타의 얼굴을 바라보면, 뒤늦게 자각한 제 감정 탓인지, 괜히 심장이 뛰는 기분. 젠장, 젠장.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꼬마 애도 아니고. 이래선, 좋아한다고 티 내는 것 같잖아. 어떻게든 제멋대로 뛰어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보지만, 그 사이 켄타의 말이 이어졌다.

“스캔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러니, 아예 사귀어버려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자, 잠깐. 무슨,”

나는. 분명, 이 녀석에게 차일 생각으로, 나왔을 텐데. 왜, 얘기가 이렇게.

“나도 싫지 않다는 뜻이라고. 말해야 알아듣는 건가?”

“싫지 않다니. 뭐가? 아니, ……뭐?”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켄타가 방금 한 말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잔을 들어봐도, 텅 빈 그것은 미유키의 목을 축여줄 리가 없고. 헤매던 손길이 다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동안에도, 켄타는 그저 올바른 시선으로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저를 바라보던 그 시선이었다. 똑바르고, 조금은 건조해 보이기도 한, 냉철한 시선. 도무지, ‘사귀어도 좋다’는 의사를 내비친 자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또, 놀리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켄타는 웃으며 말을 더했다.

“아무리 진담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에게 섹스프렌드니 뭐니 하는 제안은 안 해. 네가 생각하는 나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켄타의 말에, 미유키는 멍한 표정으로 켄타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네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도 있고.’ 하고 덧붙이며 미유키에게 싱긋 웃어 보이는 켄타의 모습은, 어딘가 조금 후련해 보였다. …이 녀석……. ……정말로?

“아니, 그렇지만……,”

“안 믿기는 모양이군. 뭐, 나도 네가 나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말이지.”

“읏……, ……아, 아니. 잠깐, 고백은 안 했잖아!?”

“글쎄. 나에게는 고백으로 들렸는데.”

빙긋 웃으며 말한 켄타는, 이제는 차게 식은 커피를 목 뒤로 넘겼다. 미유키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텅 빈 잔.

텅, 비었다라. ……사토즈카 켄타는, 정말로. 텅 빈 존재가. 맞는 것일까. 정말로 오로지 아사히 나유타만을 위해, 그의 노래만을 위해. 제 생각도, 의지도 없이 모든 것을 바치는 남자인가.

…아니. 그런 텅 빈 녀석의 기타였다면. 쟈이로는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터. 그리고 그 전에. 나유타가 그런 사람과 함께 밴드를 할 리가 없겠지. 그런 생각에, 울렁거리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네 답은?”

입장이 뒤바뀌었다. 분명, 오늘은 이 녀석에게 차이러 왔을 텐데.

…이제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의미 없나. 미유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밴드 내에서의, 동성연애. 보통 가십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GYROAXIA가 주목받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욱더. 더구나 같은 밴드의 멤버인 만큼, 무언가 마찰이 생기거나, 헤어지기라도 하면 분명 밴드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미팅이나 길거리에서 만난 여자애들과 사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GYROAXIA를 위해서라면. 거절하는 게 옳은 답일 텐데.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켄타가 한 말이다. GYROAXIA에, 그리고 나유타의 음악에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입에 올리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내가 내릴 답은.

“싫은데.”

“…그런가.”

툭, 말을 내뱉은 미유키의 표정은, 깊은 고민이 모두 해결된 것 마냥, 후련해 보였다. 그런 미유키의 답에, 켄타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굳이 추궁은 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가 싫어.”

“응.”

“무슨 일이든 나유타를 우선하는 그 행동도, 다른 멤버들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듯이 구는 태도도.”

“응.”

“그리고, 네 멋대로 이야기를 이런 흐름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그런 소리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을 짓는 것도.”

“……흐응.”

미유키의 단호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켄타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야, 전부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새삼스러울 정도의 내용이었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둘 생각은 없어.”

미유키는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긋, 미유키의 얼굴을 살피면, 여전히 만면한 후련해 보이는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가, 답을 찾은 것인가. 켄타는 살풋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내일. 다시 보자.”

“내일이라. 꽤 뜸을 들이는군”

“시끄러워.”

이것은, 두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일 보 후퇴.

사토즈카 켄타. 머리가 잘 굴러가고, 쟈이로를 위해서라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뒷공작도 솜씨 좋게 해내는 재주 좋은 녀석. 그런 녀석이 상대였다. 제 감정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할 녀석이 아니었다. 오늘은, 준비가 물렀어.

여전히 짜증 나는 녀석이지만. 그렇지만. 지금 깨달은 이 감정이 진짜라면.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를 끝맺을 수는 없었다. 이 녀석이 한 말도, 내 감정도. 제대로 살펴본 후에. 이 감정이, 그리고 저 녀석이 한 말이 진심이라면. 그때는 차달라느니, 그런 말보다는. 좀 더 제대로, 전해야겠지.

“그럼, 켄타. 난 먼저 간다.”

“역까지 같이 갈까.”

“…하아? 싫거든?”

투닥거리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떠나 사람의 그림자가 걷어진 테이블에는,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빈 잔에 가득 담기고 있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