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만남

22년 여름, 글숨봇 주최 '흡혈귀 선비가 밤길을 가네' 앤솔로지 제출작

얘야, 달도 별도 숨은 밤에는 밤길을 걷지 말아라.

왜요, 어머니?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는 삿된 것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에이, 그건 보름달이 둥근 날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런 어두운 날에는 어둠을 틈타 인간의 모습으로 고을에 내려오는 삿된 것들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날이란다.

 

옛날 옛적에 우리 마을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었대요. 삭월이 뜨는 밤에는 사람이 아닌 것들이 산에서 주르르 내려와 우는 아이를 홀라당 잡아먹고는 사람인 척 둔갑해서 마을에서 살아간다는 거예요! 어릴 때는 이 이야기를 할머니께 들으면 엉엉 울고는 했는데. 지금은 안 믿어요. 에이, 설마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 * *

 

“라훈 도령? 오랜만에 보는군.”

“아, 예. 한성에 다녀올 일이 좀 있어서 집을 오래 비웠습니다.”

“그랬군. 그렇지! 내 라훈 도령을 만나면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라훈 도령이 일전에 집에 머무른 이후로 묘하게 돈 될 일이 많이 생겼다네. 허허, 역시 그대가 돈을 불러온다는 소문이 허튼 게 아니었군그려.”

“정말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어르신이 복이 돌아올 일을 많이 하신 거지요.”

“허허, 그런가?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당연하지. 귀신같이 돈이 굴러 들어올 집터를 찾아 떡하니 번지르르한 대감댁을 세운 데다 겨우 하루 머무르는 동안 내 신통력까지 쪽쪽 빨아갔는데 돈이 안 굴러오고 배기겠냐. 덕분에 난 산속에 처박혀서 과일만 주워 먹으며 한 달을 버텼단 말이다.

얼굴에 욕심 주머니가 빵빵하게 붙은 대감이 멀어지자 나는 슬며시 얼굴을 찌푸리며 집 쪽으로 걸어갔다.

저런 것을 돕기 위해서 모은 신통력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재신(財神)으로 불리는 건 착실한 녀석들을 도와서지 저런 놀부 같은 녀석을 도와서가 아니라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문을 열자, 발자국으로 엉망이 된 마당과 대청,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지붕이 보였다. 음. 개판이군. 아니, 이 경우에는 여우판인가.

 

“대장!”

“어, 대장 내려왔네?”

“아. 집 하나도 안 치웠는데.”

“아. 망했다…”

 

평범한 인간들 눈에는 대여섯 살쯤으로 보일 아이들이다. 내 눈에는 하나같이 여우 귀와 꼬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게 문제지만.

 

“이…. 망할 것들이….”

“흐아악…. 대장, 우리가 잘못했어…!”

“전부 무릎 꿇고 손들어!!!”

 

역시 어린애들 보호자는 질색이다. 꼬리 아홉 개 있다고 이런 걸 나한테 다 떠맡기지 말란 말이다.

훌쩍대는 애들이 얼추 진정할 때쯤, 나는 꼬리를 바닥에 내리치며 애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은 없었고?”

“마을…에, 이사, 상한… 소문 돌았어….”

“울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라.”

“마을에 사람 피를 빨아먹는 악귀가 있대!”

“이미 허 대감 댁 송아지랑 김 첨지 댁 닭이랑 박가네 막내가 당했댔어.”

“그러…엄, 사람, 피만 먹는 게… 아니잖아….”

“아냐! 송아지랑 닭 옆에서 입만 버렸다고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댔어!”

“하온, 목소리 낮춰. 재진, 그만 울어. 시우, 설명해.”

“응, 마을에 피를 먹는 요괴가 있다는 소문이 보름 전쯤부터 돌고 있어. 마침 그날이 삭월이었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데 목소리는 여자처럼 여렸대. 허 대감 댁에 일하는 회계사 아가씨가 야근하고 나서는 길에 보았다나 봐. 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송아지 옆에서 얼굴을 문지르면서 입맛을 버렸다며 중얼거렸대. 너무 놀라서 숨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목소리는 확실히 여자였다고 하더라. 또 김 첨지 댁 며느리가 본 바로는, 바닥에 떨어진 죽은 닭을 쓱 보고서는 그냥 터벅터벅 걸어갔다는 거야. 발걸음이 마치 장원 급제해 돌아온 선비 같았다나?”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네. 어두운 밤을 무서워하는 인간들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기엔… 허 대감네나 김 첨지네 앞은 모두 가로등이 너무 밝은데?

 

“재밌네…. 감히 온새미로에서 우리 눈을 피해 인간을 해친 것들이 있단 말이지? 오랜만에 한 번 뒤집어야겠구나.”

“나도! 나도 할래! 악귀 사냥!”

“서하온, 우린 아직 너무 어려서 안 돼. 꼬리도 겨우 두 개밖에 안 되잖아. 악귀 사냥은 사미호부터 할 수 있는 거라고.”

“치, 서시우 재미없어!”

 

삐져서 성을 내는 하온이를 조금 쓰다듬어 줬다. 금세 풀려서 비비는 것 좀 보라지. 여우 모습이면 제법 귀여운데. 누가 이 말괄량이를 데려가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봤다. 오늘은 보름, 그리고 개기월식. 그것이 정말로 흡혈귀라면, 붉은 달이 떠오를 때 모습을 드러내겠지.

“와! 달이 푹 파였어!”

“가막나라에서 온 불개가 달을 가져가려고 와앙하고 물어서 그래.”

“아마… 우리 같은 건 한입에 삼켜 버릴 거야….”

“으앙! 대장, 구해줘!”

“그래그래, 불개가 오면 요놈하고 쫓아버릴게.”

 

월식이 시작되었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삼켜지는 순간, 붉게 빛나는 달은 악귀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악귀일까?

 

“대장, 근데 우리는 왜 인간을 지켜?”

“예전부터 그래왔잖아.”

“그러니까…. 왜 예전부터 그래 온 거야…? 시우는 그걸 묻고 싶은 거지…?”

“우리가 나고 자란 저 영산이 생길 때부터, 우리가 수호신으로 섬겨졌거든. 우리는 사람을 홀리니까 두려운 존재인 거지. 그래서 어딘가에선 쫓아내야 할 요물이고, 어딘가에서는 우리처럼 숭배받는 구미호들도 있을 거야. 우리는 후자니까 사람들이 믿는 만큼 보답해 주는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린이들은 이제 빠질 시간이다. 마을 한 구석, 외따로 떨어진 집 근처에서 사람이 아닌 것의 기척이 느껴졌다. 자, 그럼 ‘그것’의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 볼까.

마을 끝자락의 작은 집에 도착하니 소담스럽게 꾸며진 집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까진 폐가였었는데. 우리 눈에 띄지 않고 이런 술법을 부릴 수 있는 요괴가 많이 있던가?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에, 새하얀 도포를 입은 알 수 없는 자가 달을 보며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고운 도령께서 이런 여염집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그리 말하는 자의 흰 도포 자락에 불결한 붉은 달빛이 비쳐 마치 피가 얼룩진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 풍경이 쏟아지는 달빛과 어우러져 이루 말할 수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였다. 마치 우리가 부리는 매혹처럼 속절없이 보는 자들을 끌어들일 상이다. 인간이면 천하제일의 요부일 것이고, 요괴라면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 요괴겠지.

 

“인두겁은 집어치우고, 정체가 무엇이냐? 소문대로 악귀더냐?”

“악귀라니, 지나친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백가의 연화. 흡혈귀라 불리는 요괴지요.”

 

목소리도 그렇고, 옷을 둘둘 감아 가려보려 하지만 태가 난다. 저 녀석, 확실히 여자다. 둔갑이라 해도 저리 완벽하게 성별을 숨길 수는 없으니 맞겠지. 얼굴도 새하얗고 눈도 불그스름한 것이 이 땅의 요괴는 아닌 것 같은데.

 

“그저 이리 태어난 것을, 제가 살아가는 방법일 뿐인데. 인간을 홀리는 재물의 구미호가 어찌 요괴인 저를 핍박한단 말입니까.”

“너, 이 땅의 요괴가 아니구나. 어찌 멀리 서양의 요괴가 이 땅에 온 것이지?”

“섭섭하네요, 나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아비가 인간인지라 상사귀의 손에서 컸죠.”

 

배시시 웃는 얼굴이 달과 어우러져 제법 곱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명색이 구미호인데 내가 홀리면 안 되지. 저놈, 인간뿐만이 아니라 요괴도 홀리는 놈일세.

 

“이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시간?”

“달이 그림자를 벗어나 다시 햇빛을 받기 시작했답니다. 붉은 달은 이제 저물 시간이지요.”

“붉은 달이 뜰 때만 나올 수 있는 건가?”

“그리 생각하시지요. 아, 보름 전에 제가 실수로 물었던 그 아이는 아마 앓고 나면 훨씬 건강해질 겁니다. 월식이 다가오니 본능이 강해져서 그만 실수로 물어버렸지 뭡니까. 뺨이 복숭앗빛인 게 귀여워서 콱 물어주고 싶게 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물어버릴 줄은 저도 몰랐답니다.”

“지금 나랑 말장난 하자는 건가?”

“아니, 왜. 그런 경험 한 번쯤 다 있지 않습니까. 너무 귀여워서 그 볼때기를 콱 물어보고 싶은 경험 없으십니까?”

 

여태까진 없었는데. 방금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아 말을 삼켰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반쪽짜리 요괴가 생각보다 귀여웠다. 저기 머리 위에 강아지 귀가 팔락이는 건 내가 잘못 본 걸 거다. 그래야 한다.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영산의 군주시여. 저같이 이도 저도 아닌 존재는 지금까지 산에서 보호받으며 큰 것이 커다란 은혜겠지요. 저도 이제 약관이니 이곳을 떠나려 하는 차에 이런 일이 벌어져 죄송할 따름입니다.”

“너…. 아무리 봐도 여자인데…?”

“네. 영산에서 제일가는 규수지요.”

“그런데 어휘나 몸놀림이 어디 재야의 선비 같구나.”

“어릴 적부터 이렇게 배웠습니다만. 혹시 틀린 겁니까?”

“네 입으로 말한 대로 여염집 규수의 몸가짐은 아니지.”

“제 편한 대로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람인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싱긋 웃으며 뒤돌아 멀어지는 그녀를 딱히 잡지 않았다. 어느새 달은 제 모습을 다 드러내어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얘야, 달도 별도 숨은 밤에는 밤길을 걷지 말아라.

왜요, 어머니?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흡혈귀 선비가 말썽꾸러기 아이를 잡아먹으러 올 거란다.

에이, 뒷산의 구미호 님이 지켜줄 거잖아요.

글쎄, 그 선비는 수호신마저 반할 만큼 아름다워서 인간은 앞에만 서면 홀려버린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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