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재회.
머리가 군데군데 새어 잿빛을 띠고 허리는 잡뜩 굽은 여인이 끝끝내 분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아이고 아가씨!"
답답한지 제 옆에서 자꾸만 지팡이를 쿵쿵 찧어대는 노파에 새알을 바른듯 매끄러운 얼굴의 귀부인은 좁게 열린 창밖 틈 사이로 연신 시선을 피했다. 따분하다 귓볼을 매만지는 건 어릴 적부터 이어온 습관이었다. 가는 손가락이 근처의 머리칼마저 구불게 꼬으는 동안, 역시 유모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던걸까 하는 생각도 스쳐보냈다.
"듣고있어. 계속 말해봐, 유모."
"아이 참! 아가씨, 요즘 젊은이들을 어찌 믿어요? 제우스 님이라뇨, 지금도 날만 떴다 하면 온 신전마다 제우스님의 아이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그들 중 하나면 정말 더 큰일인거 아시잖여요. 그러니 아가씨도 조심하셨어야 했는데⋯ 다 이 늙은이 탓입니다. 아가씨는 아직 몰라도 될 일이라 여겼더니, 어휴. 그러니 아가씨, 그 막되먹은 놈이 누구인지 단단히 확인, 또 확인하기로 얼른 약속하셔요. 제 말 알아들었지요?"
당부, 당부, 다짐⋯ ⋯. 행여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소리를 낮추고 수 분을 이어오던 잔소리가 마침내 멎을 기색을 보이자 여인은 얼핏 부푼 듯한 배를 매만지며 노파를 바라보았다. 새삼 늘어난 주름살의 갯수가 눈에 들어온 것인지 엉뚱하게도 하나, 둘, 셋 숫자 외는 입모양에 또다시 성을 낸다.
"아이고오!!!"
이번에도 제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반증 탓인지, 이후로도 귀가 아플만큼이나 입을 움직이고는 제 일을 찾아나간 노파다. 주인에게 보일 행동으로 바른 것은 아니나 어릴 적부터 돌보아왔으니 오죽 걱정이 되었을까.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멜레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 틀어박혔다. 뱃속에 아이가 생긴 후로는 걷는 것도 입는 것도 모든 걸 조심하라 들어 외출도 삼가했는데, 며칠이나 이어지는 잔소리라니 너무도 하지. 목욕을 길게도 거부하니 결국 들키리라 생각은 했지만, 각오보다 더하고 또 각오보단 덜했다. 아직은 유모 외에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그녀가 나서서 일을 꾸미고 막아준 탓이었다. 덕분에 다시 몸도 씻을 수 있게 된 데다가 최악의 상황을 피했지만 여기서 더 배가 부른다면 아마 더는 숨기기 힘들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어미가 저와 같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아직 움직이지는 않아도 제 배 안쪽에 자리잡은 이것은 제우스님의 아이니까. 유모는 몰랐겠지만 신과 한낱 인간은 크나큰 차이가 있고, 저는 그것을 기민히 알아 채는 편이었다. 핏줄이 핏줄이니만큼 놀라운 일도 아니리라. 하물며 제우스 님은 주신이다 못해 신들의 정점에 있으신 분이 아닌가.
"헌데, 이를 어찌한다."
그럼에도 노파가 신신당부하며 외치던 말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까닭은 다른 신이 감히도 제우스 님을 사칭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는 제 어미 외의 다른 신들을 뵌 적이 없으니 혹여라도 속은 거라면⋯ 아직 젖조차 먹이지 못한 아이와 테베의 시민들, 가족들이 저로 인해 신의 분노를 떠안게 된다면. 자신은 아마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반드시 헤라 님 앞에서의 모습 그대로 와달라 청하셔야 해요."
헤라 님 앞에서의 모습.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시는 분의 전신. 고작해야 인간일 뿐인 내가, 그분을 오롯이 마주하는 영광⋯ ⋯.
넓다랗지도, 좁지도 않은 침상에 두사람이 기대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여느 집에서나 쉬이 보이는 풍경이었으나 건장한 남성에게 안긴 여인이 눈에 띄게 어두운 안색을 보이는 것은 둥글게 부푼 배를 어루만지는 부부이라기엔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매끄럽던 흰 뺨이 거칠어지고, 수심에 잠겨 입꼬리나 겨우 올리는 모습은 무릇 사랑에 빠진 자라면 쉬이 지나치지는 못하리라. 가벼이 얼굴을 쓸어주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나의 세멜레, 그대의 눈은 참으로 아름답소. 늘 환희와 즐거움이 가득했지⋯ 하지만 오늘은 슬픔이 방울져 흐르는 것 같소."
그러니 내게 말해보아, 그대의 걱정이 무어인지.
나직이 흘려보낸 소리에도 좀체 응함이 없자 남자는 귓가를 간질이며 사랑하는 여인을 기쁘게 만들 약속을 건네었다.
"스틱스 강에 맹세하지. 가여운 세멜레, 어서. 내 애가 다 닳겠어."
아름다운 세멜레, 사랑하는 세멜레⋯ ⋯.
끊임없이 제 이름을 불러 사랑을 속삭이는 제 앞의 이가 정말로 제우스 님이 맞다면. 여인이 큰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정말인가요, 제우스 님?"
"신들의 약속이오. 그러니 말해주어. 당신을 그리 속상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게는 확신이 필요해요."
확신. 눈앞의 이가 진정 신들의 왕인지에 대한 확신,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신. 오직 그 두가지. 당신이 스틱스 강에 맹세함으로써 사랑이 확인된⋯ ⋯. 세멜레는 아른거리는 유모의 모습에 잔잔히 고개를 흔들었다.
"⋯ 제우스 님께서 헤라 님과 계실 때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당신의 본래 모습을 제게, 부디."
"아니오, 세멜레! 그건 안 될 말이오. 오직 불사인 신들만이 나를 직접 마주할 수 있으니 그대는 결코 내 본모습을 볼 수 없어. 우리 사이의 아이 또한 그럴거요. 부디 다른 것을 부탁하시오."
"저는 이걸 원해요. 진정으로 절 아끼신다면, 제우스 님⋯ ⋯."
그래야만 당신과의 결실인 이 아이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 할 말이었다. 세멜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사라진 이를 잔향이 흩어 사라질 때까지도 눈에 담아두었다. 짧은 시간 불타오른 사랑이었다. 생각이고 무엇이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아기가 들어서고 나서야 깨어진 꿈이었다. 아이에겐 가족이 필요하니까. 하루가 갈수록 제 처지를 실감하였으나 벌이 두려워 무엇도 하지 못하였다. 저 하나로 끝난다면, 오직 자신만을 벌해주시기를⋯ ⋯. 마침내 화답해주신 분이신데, 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크게 뱃가죽이 움직인다. 어미의 뜻을 안 것일까, 맞닿은 부분을 문지르며 매일같이 읊어주던 인사를 건넸다.
제우스가 테베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으나 한 어미와 아기가 이별을 고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늘 하던 인사에 몇마디를 덧붙였을 뿐이니. 어쩌면 오늘임을 예상했던것이었을지, 혹은 그 매일을 이리 지냈을지. 신의 광휘에 나약한 인간의 육신은 찰나의 순간 잿더미로 변하였다. 사랑을 고백하지도, 마지막을 속삭이지도 못하였다. 예고된 죽음이었으나, 생각보다 더 순식간이었다. 제우스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새 없이 아이를 제 허벅다리에 넣어 키웠고, 그 아이가 자라 주신이 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여기, 이 디오니소스를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한 여인이여.
그대는 앞으로 나의 곁에서 영생을 살게 될 것이니."
어느 누구도 몰랐으리라. 긴 시일이 흘러 이리 마주할 줄은⋯ ⋯.
"티오네, 나의 부름을 받들겠습니까."
보고싶었습니다, 나의 아가.
3300자... 가 채 못되네요. 예전 포스타입에 올렸던 게시글을 조금 손봤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예지도 어느 정도 담당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바람들이 섞여서... 제목에도 그리다의 뜻을 내포시킨 것이기도 했고. 서로가 한번이라도 보고싶진 않았을지. 재미는 없을 지언정 바라던 한자락은 쥔 느낌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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