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acks, no.200

끼적 by 메엨

확실히 그 형태를 취하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되 그 무리 정점에 오른 지배자. 모든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일이 허락된 천박한 부호면서 결코 비참해본 일 없을 고귀한 존재.

제국의 초대 황제인 솔 조스 갈부스에게 그런 서술이 가당키나 한가하면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알맹이를 아는 이에게 그 이상 어울리는 말도 없다.

숨결 한조각마저 거짓으로 빚어진 인형이라는 점에서 무엇도 믿을 수 없는데 그래서 그가 진정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모르는 이상 까닭없이 밀어낼수도 없다. 그 탓이다. 이 인형은 쓸데없이 따뜻하고, 잘 정돈된 말과 목소리로 유혹해온다. 한때 저를 기만하고 조롱했으며 절망을 몰이해로 짓밟았던 존재의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몸만 바라는 관계가 아니라 해놓고 말이죠."

…이해할 수 없다. 불안 섞인 투덜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끌어안은 채인 나신의 남자는 조용히 잠들어있다. 실이 끊어진 듯 만져도 꼬집어도 반응하지 않는 상태에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게 달갑다는 뜻은 아니다. 생물적으로 '잠'이라 정의하고 싶어도 쓸데없이 얄미운 말을 해버린 탓에 오해의 단초가 쌓였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부르면 일어날 것이다. 심하게 귀찮게 굴어도 일어나겠지. 그게 평범한 잠든 사람의 반응인 것도 맞지만 그걸 '잠시 다른 장소를 보고 있으니 부르면 돌아오겠다.'는 식으로 말해버리면 일반적인 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렵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서 도망치려 다시 그 품으로 얼굴을 묻는다. 그와 함께 그 품안에서는 절대 들을 일이 없을 소리를 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깜짝 놀라 퍼뜩 고개를 들면 침대 사면에 드리운 얇은 캐노피 너머로 큰 그림자가 불쑥 나타난다. 치솟은 긴장감과 상관없이 그 그림자는 일렁이는 벽난로 불 아래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동작은 크고, 활기가 넘치며 모래와 바다의 냄새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날렵한 대형짐승과도 같은 동작의 바스락거림 사이로 다른 기척이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이번에는 방의 안쪽이다.

"아젬. 예정일보다 늦게 돌아왔을 때는 위원회 보고를 먼저 하고 오도록 해."

침대 머리맡에서는 사각인 벽난로 바깥의 모퉁이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다소간 책망하는 기색이 섞인 목소리에도 갑작스런 침입자는 벽난로 앞이 야영장이라도 되는 양 분방하게 앉아 가방의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네가 의사당에 있었으면 그쪽을 먼저 갔겠지만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네가 오늘 휴일이라고 누가 알려줬거든."

이게 무슨 일이지? 당혹스러운 기분에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잠든 남자를 올려보지만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침대 바깥의 기척들은 마치 이 침대가 없는 것처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젬'.

고대의 기억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꿈인가?

단번에 치솟은 호기심이 훔쳐보는 일이 본의가 아니더라도 옳지 않다는 생각을 밀어내버린다. 그렇다 해도 어떤 이유로 일어난 현상인지 알 수 없는 이상 캐노피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숨죽여 바라볼 뿐이다.

고대의 인간들은 만물을 창조하고 이데아라 불리는 청사진을 바탕으로 필요한 것을 손에 넣는다고 했으니 큰 가방이며 주머니는 무의미할텐데, 묵직해보이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늘어놓는 모습은 다날란 사막지대의 떠돌이 모험가와 다를 것이 없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액체가 든 유리가 부딛치는 소리, 그 요란함에 책망하는 목소리, 마른 찻잎의 냄새, 지푸라기로 묶은 마른 가지들의 사박거림, 다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일견 매마르다 떠올릴 정도로 여상한 순간들이 지나간다.

"2년이나 늦어버렸잖아." 

짧은 침묵. 그리고 다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린다.

"거긴 에테르 진공지대가 되어있는 상태여서 너라도 어쩔 수 없었을거야. 그러니까…"

"변명할 것 없어. 이미 지나간 일이니 보고나 제대로 하도록 해."

문득 느낀 이질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이 둘은…연인은 커녕 보통의 친구조차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익숙하게 서로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재회를 기뻐하지도, 그리움을 해소하려 하지도 않았다. 고대의 인간들은 이다지도 정이 없는 관계밖에 없는 것인가? 그걸 지극한 애정인 양 에메트셀크라는 원형은 포장해온 것인가? 그렇다면 정말이지 실망스럽다.

이어진 생각의 파도가 잠잠해지는 사이 캐노피 너머의 기척도 조용해진다. 책장 넘기는 소리, 고르게 뱉는 잠든 이의 숨소리. 그리고 곧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마저 멈춘다. 이제는 벽난로의 장작이 간헐적으로 내는 불티의 소리만이 이어졌다. 그 익숙한 적막함에 방금의 그림자는 착각이었던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또 한참을 지나 다시 잠들수도, 안심할수도 없었던 이는 불안을 이기지 못한 팔을 뻗어 캐노피를 들춰보았다. 혹여 들킬까 조심스레 열어 드러난 벽난로 앞은 이미 익숙한 그 모습 그대로지만 카펫 위에는 온통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쿠션과 쿠션의 사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편안히 사지를 뻗고 잠들어있다. 어째서인지 흰색인 가면은 발치까지 굴러가 멋대로 떨어져있었다. 

그 모습은 지극히 평화로워보이지만…늘 정돈되어있던 그의 공간에 썩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혼에도 경향성이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보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저 원형은 정말이지 영웅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보인다. 다만 다른 것은 상대방의 온기와 거리감이다. 어떤 의미로 영웅을 대하던 그 남자의 행동이 더 인간적으로 가까워보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조심스러운 시선이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멎은 안쪽으로 향했다.

벽난로의 빛이 발치에만 어른되는 그림자 속에 백발의 남자는 조용히 앉아있었다. 무릎 위에는 책을 올려둔 채, 푸르스름한 독서등이 멀리서 선명한 음영을 그린 탓에 마른 뺨과 깊게 패인 미간이 더욱 도드라져보인다. 다만―분위기만이 부드러웠다. 나직한 호흡, 책장을 넘기는 소리마저 소음이 될까 책 위로 가만히 손을 내려둔 곧은 자세.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듯 선명한 금빛 홍체가 벽난로 앞에서 잠든 남자를 미동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든 모습에 어떤 변화도 없음에도 그 모습이 무엇보다 흥미롭다는 듯이 응시하던 시선이 부드럽게 휘어 소리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것으로 전부 괜찮다는 것처럼.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불에 데인 듯 손을 떨어 붙들고있던 캐노피를 놓쳤다. 사락,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벽난로의 빛이 한 단계 어두워진다. 여전히 적막한 공기에 탄 나무의 훈내가 섞여들고 곁에 잠든 사람이 호흡하는 소리가 들려 그제야 존재를 깨닫는다. 다시 캐노피를 들추어 보았을 때는 카펫 위의 잡동사니도, 잠든 로브의 사람도, 안쪽에 보였던 책장이 있던 공간도 자취를 감춘 후였다.

어쩐지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본 기분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 초조함이 억측인지 아닌지조차 쉬이 판단할수가 없다. 그는 인간의 향락과 욕망에 익숙했지만 그런만큼 무엇도 형체가 없는 듯 공허했다. 이렇게 답답하리만치 선명한 마음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걷잡을 수 없는 한기를 느껴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도 이가 부딛칠정도로 추웠다.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은 이제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새삼스럽지만 그래도 아프다.

"거짓말쟁이…"

웅크린 몸이 신음하듯 비난의 말을 토해낸다. 가없는 절망에 도망치고 싶어지겠지만 끝내 다시 온기를 그리워해 그 품으로 파고들고 말것이다. 온유한 응함에 또 마음이 할퀴어 질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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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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