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Falling Down 3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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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가라앉게 되자 나누는 순무의 손을 이끌고 파티션을 당긴 뒤 그 너머로 향했다. 찝찝해진 옷을 벗고 벗겨서 다용도실의 세탁기에 넣는다. 어쩐지 이제는 껄끄러운 것이 없어진 나누는 둘 다 날것의 알몸이어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순무에게 먼저 씻으라고 욕실로 그를 밀어넣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슬리퍼만 질질 끌며 나옹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파티션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책상 위에 올려둔 담배를 꺼내 하나 소파에 앉은 뒤 그것을 입에 물었다. 맨살에 소파 가죽이 닿이자 몸이 한 번 움찔거린다.

욕실에서 전해져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담뱃불을 붙이고 빨아들인 뒤에 숨과 함께 연기를 토해낸다. 냄새가 밖으로 나가도록 손을 뒤통수 쪽으로 돌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실내 불은 아직도 켜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서 조금 전까지 있던 일을 떠올린다. 순무가 입맞췄던 왼손을 바라보며 그의 입술이 주었던 느낌을 기억해내려 한다. 그 입술이 지금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이 입술에 닿인 것도 떠올린다.

대체 무엇에 홀린 건지, 나누는 볼품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다본다. 어둠 속에서 컴퓨터 모니터 빛에 비추어지는 몸선은 뭉툭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못할 몸이다. 그렇다면 역시나 새끼 포켓몬들이 제일 처음 본 생물을 어미로 인식하는 것처럼 순무는 나누에게서 부성애-혹은 모성애를 느낀 것이 틀림없다.

보호해야 할 판에 몹쓸 짓이나 해버린 자기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한손으로는 담배를 들고 한손으로는 이마를 덮는다. 난 순무에게 왜 그랬던 걸까. 아저씨…. 그렇게 부르던 순무의 목소리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 떠올랐다. 눈동자는 애수를 닮은 것에 젖어들어가 피할 수 없었지만 나누는 그것을 피했었다.

여러가지 감정에 버무려지고 있을 때 순무가 욕실에서 나왔다. 오늘 샀던 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파티션을 밀자마자 달려드는 나옹들을 어르고 달래며 그 너머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아저씨, 한 마디에 나누는 담배를 재떨이에 끄고 일어섰다.

"먼저 자러 가도 돼."

순무가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나누는 재빨리 몸을 돌리고 그것을 못본 척 했다. 뜨끈한 물을 맞고 있으면 서서히 안정감이 스며들었다. 순무가 바라는 건 나누의 애정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정을 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할지 대책이 세워지지 않는다. 나누는 두손에 물을 받고는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세수를 했다.

말끔해진 상태로 욕실에서 나온 후 미리 꺼내두었던 옷을 줏어입었다. 순무는 이미 침실에 들어가있는지 작은 파출소 내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누는 열어두었던 소파 쪽의 창문을 닫고 문이 모두 잘 잠겨있는지 확인했다. 파출소를 털러오는 멍청이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문단속은 매일 하고 있었다. 출입문 쪽에 초인종같은 비상벨이 달려 있기에 밤중에 누군가 위급한 일로 찾아왔을 때엔 그 버튼을 누르면 되었다. 소리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따라오려는 나옹들을 안아올린 뒤 소파에 올려두고 마음껏 소파 가죽을 할퀴도록 허락해준다. 어차피 새로 살 거니까, 라고 생각한 나누는 피식 웃으며 즐겁게 노는 야행성의 나옹들을 지켜보다가 파티션을 당겼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침실 문을 열었다.

옷장 하나만 놓인 비좁은 공간에는 이부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순무가 누워있었다. 나누는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굴리며 순무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슬리퍼를 벗은 뒤, 발걸음을 옮기고 그 옆에 조심히 누웠다. 그러자 잠든 줄로만 알았던 순무가 나누 쪽으로 홱 몸을 돌려서 나누는 놀랐다.

"안 자고 있었니?"

당황한 것을 감추고 싶어서 부드러운 말투로 물어보면 순무는 대답없이 나누의 팔 안으로 파고든다. 나누는 미칠 노릇이었지만 일단은 순무의 어리광을 받아주며 팔베개를 해준다.

"소년, 아저씨는 네 엄마가 아냐."

온갖 이유를 벗겨내고서 단 한마디를 중얼거리면 순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자기 팔을 나누의 가슴께에 올려두기까지 한다. 졌다, 졌어. 마음 속에서 중얼거린 뒤에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나옹들이 우다다 뛰노는 소리와 울음소리들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침, 아침도 아니지만 어쨌든 나누는 적어도 해가 떠있을 때에 잠에서 깨어났다. 부지런한 순무는 이미 옆에 없었다. 나누는 앉아서 기지개를 켠 뒤에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런 뒤에는 슬리퍼에 발을 넣고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파티션을 드르륵 밀고 나가면 순무는 소파에 모로 앉아 무릎을 세우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투둑투둑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또 예고도 없이 비가 오는 모양이다.

나누는 순무에게 잘 잤는지 물었고 순무는 네, 하고 대답을 했다. 평소와 같은 풍경에 어젯밤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만 같다. 소파에 풀썩 앉아보면 어제 틀어놨던 영화의 마지막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간 화면이 모니터에 떠있었다. 나누는 파일을 종료하고 디스크를 꺼내 케이스에 넣었다. 앞으로 이 영화를 볼 때면 어젯밤의 일이 생각날 것만 같아서 찜찜해짐을 느낀다. 젊을 때부터 좋아한 영화였는데 아쉽군.

나누는 순무가 미리 책상에 올려둔 알로라 일간신문을 펼쳐본다. 요새 알로라는 평화롭다. 나누가 할 일이 없는 것도 그때문이다. 포 마을의 녀석들이 나간 이후로는 쭉 이런 상태였다.

순무는 몸을 돌리고 세웠던 무릎을 내린다. 아침을 차려줄까 싶어서 우선은 읽고 있던 신문을 접었다. 문득, 순무가 어제 샀던 옷을 입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잘 어울리네."

진한 푸른색에 하얀색으로 단어가 적혀있는 평범한 옷이지만 그냥 그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나누의 말에 순무는 가슴께를 내려다본다.

"근데 이거 무슨 뜻일까요?"

나누는 눈썹을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알로라어로 '희망'이라고 적혀있네."

"희망…."

눈을 끔뻑거리는 순무에게 읽는 방법을 알려주면 순무는 여러번 반복해서 따라했다. 일부러 고른 것은 아니었지만 희망이라,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다. 나누는 재주있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뭐라도 차려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사실로 가서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기름 두른 팬을 올렸다. 식사는 언제나 나누가 차렸고 뒷정리나 청소는 순무가 하고 있다. 혼자 차려먹던 식사에 입이 하나 더 늘어나자 식비 지출이 늘었다. 게다가 순무는 아직 팔팔한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라 먹기도 많이 먹었다. 겉보기엔 군살없고 탄탄한 체격이기에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나 싶다.

딱히 요리를 잘 하는 편도 아니고 미식가도 아니라서 먹을 수만 있으면 됐지, 라고 생각하는 나누는 되도록이면 설거지할 접시가 적은 쪽을 선호했다. 오래 전에 샀지만 아직 튼튼한 쟁반에 막 조리한 음식물이 담긴 큰 접시를 두 개 올린 뒤 어깨로 파티션을 밀었다. 나와서는 무릎으로 파티션을 힘겹게 제자리로 밀어낸 뒤, 업무용 책상 옆까지 가서 그 위에 접시를 둘 올린다. 나누는 다시 돌아가서 커피가 들어있는 머그잔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왔다.

소파에 털썩 앉으면 순무는 쓰지 않는 낡은 사무용 의자를 질질 끌고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순무의 잘 먹겠습니다, 라는 작은 목소리를 시작으로 나누는 읽다만 신문을 펼치고 첫끼니를 들었다. 발 밑에서 나옹들이 매달리지만 나누는 손을 휘이 내저으며 저리가라고 쫓아냈다. 사람먹을 걸 함부로 주다간 입맛이 바뀔 수도 있고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

식사를 마치면 순무는 알아서 접시 두개를 겹친 후 쟁반에 올려두고 일어섰다. 그가 설거지 및 취사실을 정리하는 동안 나누는 선 채로 창밖에서 빗방울이 내리는 걸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평소와 같은 시작, 평소와 같은 흐름이지만 마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불안정한 상태의 순무의 어리광을 다 받아줄 수 없다. 지금은 나누에게 의지하고 있기에 성욕을 포함한 애정을 느꼈겠지만, 또래친구가 생긴다든가 밖으로 나가 여러사람과 어울리면 그런 경향도 없어지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순무는 아직도 파출소 혹은 이 주변만 돌아다니며 있고 싶어했다.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기 위해 소파에 앉은 후,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온 순무에게 용돈을 줄 테니 섬 관광이나 하고 오라 했더니 그건 싫다며 나누의 곁에 딱 달라붙어 앉은 것이다. 맥빠진 나누를 올려다보는 그 눈빛은 마치 비오는 날 버려진 포켓몬같아서 나누는 더이상 말하기를 포기한다. 지금의 순무는 대할 때에 섬세함을 요하고 있기에 난감했다.

거절당한 김에 장난이나 쳐볼까 싶어서 나누는 바로 코앞에 있는 순무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훅 내뱉었고 순무는 깜짝 놀라 기침을 하며 나누에게서 멀어진다. 새빨개진 얼굴에서는 거센 기침이 멎을 줄 몰랐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토악질을 닮은 그 소리와 함께 그의 턱 라인을 타고 타액이 주르륵 흐른다. 어쩐지 선정적인 그 모습에 장난 한 번 쳤다가 도리어 당한 것은 자기라고 생각한 나누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순무는 훌쩍이며 원망 가득한 얼굴로 나누를 노려보았다. 벌건 얼굴로 그렇게 쳐다보면 나누는 흠칫한다. 약간 좋지못한 버릇이 되기 전에 마음 속으로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한다. 나누마저 순무에게 빠져버린다면 남은 인생에 후회가 가득할 것만 같다.

아, 사람이란 왜 이리 단순한 존재인 걸까. 자길 따르는 이 청년이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썩 나쁘게 느껴지진 않는 것이었다. 어젯밤, 밤보다 더 깊은 눈동자를 보았을 때 쉽게 눈을 돌리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누는 손짓을 했고 순무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나누의 곁에 바싹 붙는다. 나누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미안하다며 머릿결을 따라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 샐쭉하던 순무도 조금은 웃었다. 아, 사람이란 왜 이리 단순한 존재인 걸까.

울라울라섬은 무역풍의 영향으로 비가 잦은 곳이었다. '밤'을 뜻하는 곳답게 포 마을을 비롯한 포 파출소가 있는 도로 부근은 안개도 자주 발생하고 해가 뜬 날이 잘 없었다. 특히 요즘은 민원도 줄어서 여가시간이 늘었기에 시간 감각이 무뎌지곤 했다. 심심하다고 생각할 때는 순찰이라는 이름의 산책을 나갈 때였다.

나누는 혹시나 모를 방문객을 위해 파출소 문을 닫기만 하고서 순무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순무는 처음 가보는 곳이었기에 가는동안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살펴보느라 바빴다. 방치하고 있는 포 마을의 상태를 둘러보기 위해 입구문을 열면 아무도 없어서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불법침입하여 거주하는 자는 없는지 가끔 이렇게 기습적으로 방문하고 있었다.

저택은 다 살펴보기엔 넓어서 항상 둘러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순무도 있으니 수월할 것 같다.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나누는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지쌓인 퀴퀴한 냄새가 났다. 포 마을에 머물던 조무래기녀석들이 슬슬 한두명씩 떠나기 전에 되도록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나가라고 했던 말대로 큼지막한 가구들 외에는 대부분은 정리되어 있다.

나누가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추며 나아가면 순무도 그쪽을 살펴보았다. 고스트타입 포켓몬 하나 없이 고요하다. 원래 너저분하고 엉망인 곳답게 완벽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녀석들이 머물던 때보다는 깔끔해져 있다. 차마 버리진 못한 가구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알록달록했던 스프레이 색도 지금은 먼지가 쌓여 색이 바랜 것처럼 보인다.

인기척도 없고 문을 잠근 상태로 두기 때문에 누가 침입하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아 대충 둘러보고 끝내기로 한다. 순무는 호기심에 이 방 저 방의 문을 열고 구경 중이다. 나누는 계단을 보고 이층도 올라갈지를 망설이다가 한 번은 봐두면 다음에는 올라갈 일이 없겠지, 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뒤따라온 순무는 두칸씩 뛰어올라 나누를 따라잡았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역시나 사람사는 냄새라곤 없는 방이 나타난다. 방을 쓰던 사람은 단정한 성격이었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 위의 이불은 개어져 있었고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옆에 놓인 책장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쓰다만 화장품같은 플라스틱 용기들이 줄지어 서있다. 순무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려하는 걸 본 나누는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다. 침대 쪽에 달린 작은 창문 밖을 보면 여전히 검은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대충 봤으니 이만 가볼까, 하고 나누는 손전등을 든 채 몸을 돌렸다.

"순찰 종료. 슬슬 돌아가자."

순무는 재밌던 모험이 끝나자 아쉬운 아이처럼 표정에 실망을 띄운다. 나누는 놀러온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랫입술을 삐죽이는 것이 보인다. 낯선 곳을 탐험하는 것이 재미있나보다. 나누는 그럼 자기는 옆방을 보고 올 테니 여기 있고 싶으면 있으라고 말한 뒤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순무가 어두운 데 혼자 있는 건 무섭다며 뒤를 따라오려한다. 그 말을 들은 나누는 문득 순무가 저택에서 까불지 못하도록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손전등의 불을 껐다.

"뭐야, 고장났네."

그 말에 순무는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를 냈다. 나누는 손전등을 탁탁 두드리고는 전원 버튼을 여러번 누르는 척 했다.

"아예 안 켜져요?"

"잘 쓸 일이 없으니 건전지가 닳았나봐. 잘못하다간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수 있겠어. 조심해야겠는걸."

순무가 나누의 곁에 바짝 붙어서서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뭣하면 손정도는 같이 잡고 가도 되겠지, 라고 생각한 나누는 그렇게 권유하려고 순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무가 겁먹고 두려워하는 것을 본 것이다. 어둠이 익은 눈을 통해 순무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무는 나누의 팔을 잡았다.

"아저씨, 빨리… 저 무서워요."

제발요. 나누에게 매달리는 걸 보자 나누는 엉뚱한 부분에서 잘못했음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재촉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고 순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렇게 했다. 순간적으로 비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순무는 깜짝 놀라며 나누의 팔을 더욱 세게 잡고 그에게 매달렸다.

아마 기억하진 못해도 울트라홀을 통해 넘어올 때의 경험이 머릿속 어딘가에는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어둡고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무서운 곳. 나누는 팔을 꼬옥 붙잡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순무의 등을 탁탁 토닥여준다. 순무는 기대고 있던 얼굴을 떼고 나누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왜 피하냐고 묻던 때처럼 처량함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나누는 자신이 이런 표정에 약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버릇이 들어버린 것처럼 눈높이가 비슷한 순무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몸이 절로 움직였다. 이런 감성적인 분위기에 약해진 것은 나이를 먹은 탓일까, 알게 모르게 자라난 순수한 애정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안심시키고 싶었던 걸까.

"그…… 진정됐니?"

머쓱한 기분을 안고서 그렇게 물어보면 순무는 입을 살짝 벌리고 굳어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두손으로 어깨를 잡았기에 나누는 놀라서 손전등을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아, 진짜로 고장났을 거 같은데. 기습적으로 다가오는 순무를 보며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까지 미쳤다.

순무는 나누의 어깨를 잡고서 다시 입을 맞춰왔다. 몸이 밀려나는 그 충격에 나누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해서 순무의 옷을 쥐었다. 그것을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순무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여유없이 나누에게 달려들었다. 팔팔한 청년의 힘을 뿌리치는 게 늙은이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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