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過失責任
黃始木 X 徐美道
차 판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네? 서미도가 쥐었던 휴대전화를 가만히 내려둔다. 대기화면이 잠시 불빛을 내다 검게 꺼진다. 왜요? …… 차태주 판사 거기서 오려면 멉니다. 시간도 늦었고요. 나랑 가죠. 전에 없던 소리를 하는 사람답지 않게 음성도 어조도 평이하다. 차 판사님 오시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서미도 손가락이 의미 없이 액정만 툭툭 건드리고 만다. 화면이 한 번 더 점멸한다. 봤습니다. 며칠 전에. 잘못한 것도 없이 조바심이 나서 괜히 눈치를 다 본다. 저 혼자 가도 되는데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파티션 너머를 힐끔 바라보면 언제나와 같이 하얗고 무던한 얼굴이 아무 감정도 없이 공소장을 넘기고 있다. 검사님 오늘 차 안 가져오신 거 아니에요? 황시목 손아귀의 빨간 플러스펜이 두어 번 짧은 밑줄을 긋는다. 걸어가도 됩니다. 네 …… 그래요, 그럼. 저, 잠깐 담배 좀 ……. 황시목이 말 없이 고개를 까닥인다. 먼저 내려가 계세요.
[차 판사님 오늘은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ㅠㅠ]
담뱃갑보다 휴대전화를 먼저 꺼낸다. 차태주에게 짧게 메시지 한 줄을 남긴다.
메시지 뒤의 숫자 1이 사라지고 십여 분쯤 지나서야 답이 온다.
[검사님이 데려다 주시는구나. 알겠어요 ㅎㅎ 오늘도 고생했어요]
황시목은 말이 없다. 서미도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 다 원체 말수가 적고 침묵이나 시선이 대화의 대부분을 대신하는 편이었으나 그것도 물리적 거리가 충분할 때나 괜찮은 소리다. 늦은 밤중에 주택가나 번화가 하나 끼지 않은 거리를 말도 없이 나란히 걷자니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그렇다고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여는 것 또한 그 나름대로 멋쩍은 일이라 그냥 걷는다. 어차피 먼 거리도 아니고 애초에 황시목이라는 인간 자체가 편한 존재였던 적도 딱히 없긴 했으니 그런대로 됐다고 생각한다. 적색 등화의 횡단보도 앞에 두 사람이 멈춰 선다. 황시목이 서미도의 왼편에, 심장과 조금 더 가까운 쪽에 한 걸음 반 정도 뒤에 있다. 거리가 한적해서 붉은 불빛이 도로에 엎질러진 듯 부옇다. 그 속에서 황시목이 서미도의 목덜미를 가만히 응시한다. 목을 살짝 덮는 길이의 머리카락과 그 틈으로 희미하게 드러난 살갗 …… 그것이 거리의 붉은 빛에 이염되어 혈색을 의태擬態한다.
여기만 건너면 돼요. 혼자 갈게요 여기서부터 ……. 그렇게 말하려던 서미도의 입이 가만히 다물린다.
황시목의 약간 서늘한 손끝이 서미도 뒷목에 닿는다.
황시목은 타인이라는 언어를 감각으로써 통역하지 않는다. 시각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논리나 사고 따위로 해석하면 충분했다. 사람이 가진 피부와 근육, 살덩어리 같은 것보다야 희고 무정한 서류 모서리 따위가 익숙하다. 굳이 감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시목이 그의 손끝, 그러니까 손가락 끝의 가장 둥글고 아무 것도 해칠 수 없을 것처럼 부드러운 부분을 서미도의 목덜미에 대어본다. 체온이 지문만큼의 크기로 느껴진다. 이것을 충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가 …… 황시목은 생각한다. 이내 고쳐 묻는다. 아직 제게도 그런 것이 남아있기는 한가. 그렇다면 이것을 충동이라고 명명하기 위해서 조금 더 행위의 양태를 취하는 편이 좋다. 그러므로 조금 더 나아간다. 이제 손가락 전체가 목덜미의 둥근 곡률을 따라 감싸듯 닿는다. 손바닥 안쪽, 신경다발이 밀집하여 감각하는 것에 최적화 된 신체 일부가 딱 그만큼의 온도를 취한다. 손가락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따위를 느끼며 살갗을 지그시 감싸쥔다. 따뜻한 피부가 약간 짓눌린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서미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황시목이 그랬던 것처럼 역으로 감각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내내 둘 사이의 눅눅한 공기를 비집고 그 틈새로 빽빽하게 차오르던 불편이 극대화되는 것 같아서 …… 극도의 어지러움을 동반하는 묘한 감각을 내리 받는다. 서미도가 그 팽팽한 긴장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몸을 살짝 뒤로 떼어내려 할 때, 황시목이 손아귀에 힘을 준다. 입술이 마르는 기분으로 몸을 돌려 황시목을 바라보면 황시목의 엄지손가락이 서미도 턱뼈에 닿는다. 그리고 그 때 황시목은 느낀다. 손바닥 안쪽에서, 한 겹 얇은 살갗 아래에서 뛰는 맥박을, 어떤 생의 반증을 …… 살아있는 사람을.
살아있는 서미도, 가 문득 낯설어서 황시목은 손을 떼고자 한다. 그 때에 마침 신호는 바뀌어 청색 등화다.
검사님 손이 차갑네요 ……. 서미도가 황시목 손목을 쥔 채 눈을 맞추고 말한다. 아무도 길을 건너거나 가로지르지 않는다.
아주 미약하게 서늘한 손 …… 그것의 온도를 감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 숨을 쉬고 맥이 뛰고 저를 응시할 수 있는 …… 이미 죽은 채로 저를 기다리는 피해자도, 피해자이기 이전에 영은수였던 것도 아닌 …… 서미도. 황시목 손끝이 아주 미약하게 떨리는 채로 서미도의 목덜미를 더듬듯 타고 오른다. 턱뼈 끄트머리에 닿던 엄지가 뺨의 점을 훑는다. 여기에 점이 있으셨네요 ……. 황시목 얼굴이 부쩍 가깝다. 숨이 내뱉는 말만큼의 부피를 가지고 입술에 닿는다. 밀어낼 수도 당길 수도 있는 지극히 애매한 위치에서 방황하던 서미도의 손이 황시목 코트 자락을 가볍게 움켜쥔다. 청색 등화가 점멸한다. 황시목의 눈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 서미도도 그것을 안다. 살아있는 서미도를 앞에 두고 이미 죽은 영은수를, 꼭 그와 비슷한 위치에 점이 있던 영은수를 떠올렸다는 것은 서미도도 알고 있다. 당신은 나를 가늠하고 나서 고작 그런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됐다. 끌어내리듯 잡아챈 옷깃을 제쪽으로 당긴다. 다시 적색 등화. 황시목의 희고 단단한 뺨과 마른 입술 위에도 발간 생生의 기운이 옮겨 붙는다.
Lana Del Rey - Ride
https://youtu.be/oSyDuBGRa3w?si=olLWPXZljwqfhnv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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