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랜지나와 서향! 엇갈리는 꿈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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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 by 점멸

 

 

새로운 태양이 뜨는 상쾌한 아침, 대부분의 사람은 눈을 뜨면서 듣고 싶은 소리는 없어도 듣기 싫은 소리가 있다. 트레이너 스쿨에 가라는 부모님의 잔소리, 혹은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라는 부모님 잔소리, 그리고 또 부모님 잔소리, 그리고 아무튼 부모님 잔소리…. 그러나 파트너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게 익숙해진 베테랑 트레이너라면 차라리 부모님 잔소리가 더 나을만큼 듣기 공포스러운 소리가 있는데, 바로 포켓몬의 울음소리였다. 어느덧 열여덟이 된 서향은 자신할 수 있었다. 트레이너라면 절대 포켓몬의 울음소리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진 않을 거라고. 그 울음소리가 겁에 질린 비명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나 지방의 챔피언 로드까지 얼마 남지 않은 23번 도로의 외진 숲속. 지나치게 잠이 많은 유성과 지나치게 잠이 없는 백랍의 정확한 중간에 위치한 서향은 텐트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낭에서 기어나가 아직 쌀쌀한 아침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텐트의 입구 지퍼를 내린 뒤에는 예상과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광경에 머리를 짚었다.

“캬웅-! 캬우웅-!”

지면과 조금 떨어진 허공에서는 탕구리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고 있었다. 탕구리가 얼굴을 숨기는 어미의 뼈는 버랜지나의 발톱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자신의 버랜지나였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사냥에 경악하는 것도 잠시, 팔의 힘이 다한 탕구리가 지면에 떨어진다. 서향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머플러로 탕구리를 받아냈다. 희미하게 들린 소리로 모든 걸 예상했던 만큼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얼굴을 가릴 뼈를 잃은 탕구리는 안심하지 않고 머플러 속으로 얼굴을 완전히 파묻었다. 공포로 가득한 잔떨림이 팔로 느껴져 온다. 그러든지 말든지, 탕구리를 떨어트린 버랜지나는 더 망설일 게 없다는 듯 뼈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모든 자연이 그렇듯 포켓몬에게도 생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자연이 아닌 트레이너의 곁을 택한 포켓몬들은 야생의 법칙으로부터 멀어진다. 인간이 만든 음식과 가까워지고, 트레이너의 패턴에 익숙해지면서 야생의 습성을 잃어가는 대신 포켓몬 본인의 꿈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수많은 만남과 부딪치며 강해지는 배틀. 자신의 장기를 뽐내는 콘테스트. 혹은 인간처럼 빵을 굽거나 함께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면서. 종류는 다양했다. 배틀에서 남을 속이는 플레이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자신의 버랜지나는 신맛이 나는 나무 열매를 좋아했고, 신맛이 나는 나무 열매로 만든 포핀을 그냥 열매보다 더 좋아했으며, 열매로 끓인 백랍의 카레를 가게에서 파는 포핀보다 더 좋아했다. 그런 버랜지나가 밤중에 탕구리를 사냥해온 것이다. 마치 야생의 버랜지나처럼.

야생에서 탕구리는 버랜지나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였다. 어미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개체인 만큼 사냥이 손쉽기도 했거니와 탕구리의 뼈는 야생의 버랜지나에게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였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탕구리를 버린 버랜지나가 향하는 곳은 백랍의 텐트였다. 서향이 아침의 소동에 진정 당황스러운 이유였다.

거무칙칙한 텐트 앞에서 버랜지나가 소란스럽게 굴면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일어나있는 백랍이 나왔다. 잠은 잤나 싶은 몰골이었다. 그의 품에는 제가 감싸 안고 있는 탕구리만큼이나 작은 포켓몬이 있었다. 최근에 알을 깨고 나온 고디탱이었다. 백랍의 마지막 엔트리를 차지할 포켓몬이기도 했다. 쌀쌀한 아침 공기에 눈을 비비고 뜬 고디탱의 품속으로 탕구리의 뼈가 떨어진다. 서향이 당황스러워하는 만큼 이 일이 익숙해진 고디탱은 신나게 웃으며 뼈를 갖고 놀았다. 날개를 접고 지면에 내려온 버랜지나가 삐약거리는 고디탱의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며 흐뭇하게 웃는다. 매사 크게 반응하지 않는 백랍이 뼈를 주고도 고디탱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버랜지나를 쓰담다가, 비로소 저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랜지나.

뼈 독수리 포켓몬.

넓은 하늘을 선회하며 약해진 포켓몬을 노리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탕구리. 야생 버랜지나에게 탕구리를 비롯한 포켓몬의 뼈는 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도구이다. 뼈로 자신을 치장하거나, 둥지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둥지 속 새끼를 보호하는 것이다.

 

*

 

“버행지아가 호 사냥을 갔다 왔다호?”

가장 늦게 일어나 아침을 챙기던 유성이 말했다. 입 안에는 양갱이 한가득이었다. 볼에 넣고 자는 건 나도 봤는데. 꿀꺽 삼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음식물을 넘긴 다음에는 아까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밤에 나가서 탕구리를 잡아 오는 버랜지나, 정확히는 필요 없는 사냥을 해서까지 백랍의 고디탱을 보살피려는 버랜지나는 구성원 모두의 고민이 되어 있었다.

“그럼 탕구리는 어떻게 된 거야?”

“다시 머리뼈 씌워주고 야생으로 돌려보냈지. 땅에 내려놓자마자 울면서 도망가는데 죄책감이…….”

“흐음, 그렇다면! 역시 내 괴력몬을 불침번으로 세워놓을까?”

곧바로 다음 양갱을 집어 든 유성이 물었다. 그 옆에서 탁자만 바라본 채, 그때그때 상대가 필요로 하는 티슈나 포크 같은 걸 건네던 서향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누가 꺼내준 건지는 뻔하니까.”

맞은편 탁자에서 식사하던 포켓몬 무리 중 한 마리가 눈에 띄게 굳는다. 열받는 리액션이었다. 알에 깨어난 순간부터 함께 해오며 말보다도 더 많은 것을 나눠온 파트너의 생각을 헤아리는 데는 많은 걸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아, 글라이온!!”

조심스럽게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모양새에 부들부들 떨던 서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자몽의 뒤로 숨으려던 글라이온이 순식간에 날개를 펼치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밤에 자꾸 그러면 너도 볼에 넣어버린다고 했지?! 그리고 눈여아한테 품어달라고 해버릴 거야!!”

그가 부유하는 하늘을 향해 고함치듯 말해도 글라이온은 낄낄낄 웃을 뿐이었다. 얼굴이 웃고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꼴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이다.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빠진다. 이런 와중에도 백랍의 테이블에 붙어있는 버랜지나 때문이었다.

“이쪽은 완전히 관심 밖이네.”

슬쩍 옆으로 온 유성이 말했다. 백랍과 그의 포켓몬들이 식사하는 테이블은 유성과 서향이 쓰는 테이블과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백랍의 드문 고집이었다. 함께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 길어지며 포켓몬끼리도 친해졌지만, 그럼에도 조심해야 한다고. 하늘에 흩날리는 불씨와는 다른 샹델라의 불꽃에 매료됐던 서향은 아쉬움을 표했지만 백랍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다.

드래곤 타입과 고스트 타입은 포켓몬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대부분의 드래곤 포켓몬들은 긍지가 높아 트레이너여도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몸 자체가 커다란 흉기에 가까웠다. 모노두 시절부터 봐온 삼삼드래는 오만하게 굴지 않았고, 특수한 경우 유성이나 저의 명령도 곧장 따랐지만 마음 속 깊은 곳부터 인정하는 건 백랍 하나였다. 유대감이 깊어질수록 비틀린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고스트 타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단단하고, 예민하며, 불완전하다. 그리고 백랍은 잠잠하고, 무던하며, 가라앉아 있다. 눈이 몰아치는 폭풍의 눈. 그 가운데 있는 차가운 얼음은 강하고 아름다운 용과 변칙적인 그림자의 중심을 무겁게 지키면서도 결코 안심하지 않는다.

한때 서향은 그런 백랍이 그대로 녹아서 사라지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는 했으나, 챔피언 로드까지 얼마 안 남긴 지금에서는 부끄러운 추억이었다. 요컨대 백랍과 그의 포켓몬들은 남들과는 다른 유대로 뭉쳐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 바구니 속에 자신의 포켓몬이 들어가려고 할 뿐. 백랍처럼 섬세하진 못 해도, 백랍만큼, 아니, 자유로움을 추구한다면 백랍보다도 더 끈끈하게 이어져 있을 자신의 버랜지나는 제게 완전히 등 돌린 채였다.

“원래부터 버랜지나는 백랍이네랑 잘 맞긴 했지.”

보이는 광경에 대해 꺼낸 유성이 아무렇지 않게 주제를 이었다. 말마따나 자신의 엔트리 중에서 그들과 가장 친하게 지내며 옆집에 살듯─엄연히 틀린 표현은 아니긴 했다─지내는 건 버랜지나였다. 제 엔트리 중에서 유독 진화가 느렸던 버랜지나는 벌차이 시절에는 날지 못했고, 그러면서 모노두와 붙어 자랐다. 비슷한 시기에 벌차이와 함께 진화한 모노두에게 아직 한 번의 더 진화가 남았다는 건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일이긴 했지만서도.

“같은 악 타입이어도 완전히 다르거든?”

그 모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음에도 괜히 퉁명스레 대꾸했다.

“삼삼드래는 파워로 밀어붙이는 편이지만 버랜지나는!”

“아. 알지, 알지. 엄청 깔짝거리는 거.”

“깔짝거린다니!!!”

유성이 별생각 없이 가볍게 말을 잇고, 곧바로 서향이 발끈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서향이 쓰는 배틀 전략에는 깔짝거린다는 표현으로도 설명 못 할 만큼 졸렬하고도 치사한 부분이 있었다. 여기서 화를 낸다면 가뜩이나 불리한 상성으로 정직하게 화력 싸움을 시도하다가 고꾸라지는 유성이 하는 게 정당할 테다. 그러나 유성은 그러지 않는다. 전력을 다했다면 치욕스러운 패배마저도 후련해하는 천성 덕분도 있었지만, 당장은 친구가 갖는 고민의 깊이를 알고 있어서였다.

“…버랜지나가 모성애가 강한 포켓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포켓몬에게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

열 내던 것도 잠시, 서향은 힘없이 테이블 의자에 쓰러져 앉으며 말했다. 시선의 끝에는 버랜지나와 고디탱이 있었다. 직전의 글라이온에 화를 내다가도 금방 포기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고민에 빠진 서향은 최근 흔들리는 불꽃과 비슷했다. 순식간에 일었다가도 얼마 못 가 위태롭게 일렁였다.

“받았던 걸 되돌려주고 싶은 건 아닐까?”

거의 주저앉다시피 쓰러진 서향의 옆에 똑같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유성이 물었다.

“버랜지나가 아직 벌차이일 때, 파이어로랑 스왈로가 거의 맡아서 키우지 않았어?”

“날게 될 때까지 보살펴주긴 했지만…….”

서향이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스왈로와 파이어로가 한동안 벌차이를 끼고 돌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날개를 갖고도 날지 못하는 어린 새에 대한 걱정이었을 뿐, 먹잇감을 사냥 해온다든가 하는 헤프닝은 없었다. 그조차도 벌차이가 버랜지나로 진화를 해내고 자연스럽게 날게 되면서부터 끝난 보살핌이었다.

“그런데 비행 타입도 아닌 고디탱에게 꽂힌 건 신기하긴 하네. 물론! 고디탱은 타입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 귀여운 막내긴 하지만!”

“타입이나 그런 건 아닐 거야, 아마도.”

으으, 소리를 내던 서향은 얼마 안 가 자신의 머리를 싸맸다. 유성에게는 추측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서향은 이미 버랜지나가 고디탱을 자식처럼 여기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백랍의 알이 부화하던 날, 사람이고 포켓몬이고 할 것 없이 모여서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던 그때. 갓 태어난 고디탱의 다리에 기저귀처럼 걸려있던 알껍데기. 흡사 벌차이의 뼈 껍데기처럼 보였던 그게 버랜지나의 마음을 흔든 게 분명했다. 점점 블로스터처럼 등이 굽어간다. 정작 알일 때는 관심도 없던 버랜지나가 생각나서였다. 그때는 오히려 다른 포켓몬이 난리였다. 지금까지 같이 연습하고 훈련했던 걸 다 잊은 건지, 아니면 기어코 저 대신 양심을 버린 건지. 파이어로부터 리자몽에 믿었던 윈디까지. 하나같이 자기가 알을 덥힐 수 있는 불꽃몸이라 굳게 믿고 알을 끌어안고 잠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진짜 불꽃몸인 샹델라와 알의 주인인 백랍이 진정 난처해했던 순간까지 떠올리면 서향이 감싸 쥐었던 자신의 머리를 거의 쥐어뜯다시피 헤집었다.

“아!! 정말!! 우리 애들은 왜 이렇게 육아를 좋아하는 거냐고! 확 다 접고 키우미집이나 차려버릴까 보다!!!”

가라앉은 서향의 곁으로 모여서 자리 잡고 있던 포켓몬들이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덩달아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도 포켓몬을 돌본다고 한다면 서향이 너는 박사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리고 박사를 한다면,”

호기롭게 꺼낸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보다도 먼저 하얀 가운을 입은 어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자신의 부모님이었다. 천 년 전 사람의 기도를 받아 모습을 바꿨다던 전설의 포켓몬. 칼로스 지방에서 발견되는 메가 스톤과 호연 지방의 운석으로 된 메가 스톤. 유대 진화. 부모님이 아직까지도 연구하는 주제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밤하늘을 지나가는 거대한 새의 형상이었다. 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마저도 모두 가려지고, 거대한 장막이 세상을 뒤덮었던 날. 그때 느꼈던 고양감에 휩싸이는 순간 옆으로 익숙한 기척이 내려앉는다. 바람을 타고 하늘을 부유하던 글라이온이었다.

뒤이어 무릎 위로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감각이 닿는다. 이번에는 윈디의 턱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포켓몬들이었다. 북슬거리는 털을 익숙하게 쓰다듬던 서향은 떠올린 기억을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냈다. 그런 경험이 있든 없든 자신이 꿈꾸는 것은 하나였다.

“…난 백랍이랑 챔피언, 그리고 너까지 모두 이기고 포켓몬 챔피언이 될 거야.”

“오우! 그건 기대하고 있다고!”

유성이 시원할 정도로 상쾌하게 대답했다. 근심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모습에 덩달아 맥이 풀린 서향이 따라 웃었다.

“그럼, 슬슬 오늘도 파이팅 넘치게 시작해볼까?”

목소리에는 기합이 넘쳤다. 하늘을 향한 그녀의 주먹이 어떤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포켓몬과 트레이너 구분 없이 하룻밤 묵었던 텐트를 치우고 여행을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고, 집에는 사람이 배어 나온다는 말이 있듯 포켓몬들을 보면 그들을 넘어서서 트레이너의 성향이 보인다. 유성의 텐트는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열혈 넘치게, 그리고 절도 있게 정리됐다. 챔피언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사소한 일상조차 훈련의 일환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텐트는 포켓몬들이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정리를 떠넘기는 듯, 분명하게 있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향의 손에 닿지 않는 높이의 텐트의 대를 접기 위해 대신 나서던 파이어로가 낮게 울었다. 본래 그것은 파이어로가 아닌 버랜지나의 몫이었고, 버랜지나는 그때까지도 고디탱의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젯밤에 버랜지나는 사냥을 다녀와서 힘들었을 거야. 선배잖아. 봐줘, 파이어로.”

서향이 달래듯 말하면 파이어로가 보란 듯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여행을 시작하며 세 번째로 만난 그는 사이에서 군기반장을 맡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파트너는 글라이온이었지만, 무거운 성격은 못됐다. 지금도 윈디와 함께 땅에서 구르며 놀다가 머쓱하게 파이어로의 눈치를 봤다. 그다음으로 오래 봐온 스왈로 역시 다른 이들을 챙기거나 달래기를 좋아했지, 까칠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파이어로라고 항상 다른 친구들에게 예민하고, 까탈스럽게 구는 건 아니었으나 교체 타이밍에서 이득 보는 것으로 천천히 굴려 가는 자신의 배틀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따라오는 그에게 최근 버랜지나의 이탈은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꽤 오래 참아오다가 내뱉은 울음이라는 걸 알고 있던 서향은 입을 열다가도 멋쩍은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자꾸만 느려지려는 손을 억지로 움직였다. 슬쩍 주변을 확인하면 언제 정리를 시작하려나 싶은 백랍은 떠날 채비까지 마친 채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출귀몰한 솜씨가 놀랍지는 않았다. 백랍과 그의 포켓몬들은 언제나 그렇듯 누구보다 조용하고 빠르게, 그러나 빠진 것 없이 꼼꼼하게 텐트를 정리했으리라. 서향은 그런 신속함과 고요함은 버랜지나와는 절대,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챔피언 로드가 가까운 23번 도로에는 가파른 절벽이나 동굴이 많았다. 도로 끝에 가서는 편의에 의해 나 있는 길보다는 힘겹게 다져진 산길처럼 느껴졌다. 도로 끝자락부터는 도시 간의 이동보다도 챔피언으로 향하는 고난과 수련을 위해 있는 길이었으니 틀린 감상은 아니었다. 도전을 위해 있는 길답게 주변에는 어느 때보다 위험한 스릴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흉포한 포켓몬부터 눈 마주치는 것만을 기다리는 강한 트레이너까지. 그러나 서향을 비롯한 백랍과 유성에게 전자는 두렵기보다는 설레는 것이었고, 후자는 그들 자체이기도 한 것이었다. 안개 낀 돌길의 끝이 두렵지 않은 이유였다.

“!”

“격투의 기본은 심신 수련! 배틀의 기본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격투와 배틀의 기본을 통달한 우리는 무적!!”

마주친 건 도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였다.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맞아들어가는 그들의 호흡은 배틀룰을 설명하고 있었다. 소유한 포켓몬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의 더블 배틀.

“이거야, 원! 절대 물러설 수 없겠는걸!!”

무인의 정신이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 유성이 성큼 앞으로 나왔다. 그런 게 아니어도 배틀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 게 유성이었다. 서향이 슬쩍 옆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백랍이 서 있었다. 흘긴 시선을 피하지 않는 백랍은 다른 말을 하는 대신에 어깨를 으쓱였다. 품속에는 고디탱이 있었다. 고디탱은 안전하고 포근할 몬스터볼보다 백랍의 품에 안겨있길 좋아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생각을 나눈 뒤에는 서향이 유성의 옆에 섰다.

정면 싸움을 결코 피하지 않는 유성의 성격상 나오는 건 분명히 같은 격투 타입인 괴력몬, 아니면 초염몽일 것이다. 서향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배틀에서 지기 싫은 마음으로 판도를 분석하는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더블 배틀에서 제일 효과가 좋은 건 광역 기술. 그렇다면 더더욱 유성이 뛰놀기 좋은 포켓몬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파워 싸움에서 치고 빠지는 서포팅은 비겁해 보이겠지만, 서향은 그걸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칭찬의 다른 표현 정도로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격투 포켓몬은 위협에 약했으니 첫 번째로 승부할 포켓몬은 뻔했다. 배틀을 펼칠 필드와 트레이너가 정해지면 망설임 없이 몬스터볼이 던져진다. 당연히 격투 타입이 나올 거란 예상을 깨고 나온 건 몰드류와 악비아르였다.

“격투가 아니잖아?”

땅 타입 포켓몬의 등장에 유성이 쓰고 있던 별 모양 선글라스를 이마에 걸쳤다.

“모든 수련의 시작은 땅에서부터 오는 법!”

“수련은 한 치 앞길을 모르는 모래폭풍! 헤쳐가는 길을 너희가 찾을 수 있을까?”

“완전 비겁하네!!”

직전에 했던 생각─비겁하다는 건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최상급 표현이다─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서향이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백랍이 땅 타입에 강한 얼음 타입 트레이너라는 걸 알아서 일부러 격투 타입 트레이너인 척 한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의심까지 들었다. 당장 서향이 꺼낼 포켓몬은 변함없었다. 격투 타입만큼 압도적으로 유리한 건 아니었지만, 땅 기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타입의 이점도, 그들이 위협에 약한 것도 똑같았다. 허리춤에 매여 있는 몬스터볼 중에 두 번째. 파이어로. 상대의 전략에 따라 아마 오래 꺼내두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작게 축소된 구체에 닿은 손가락이 멈칫한 건 그때였다.

“서향?”

타입과 상관없이 배틀할 생각으로 이미 들뜬 유성이 행동을 멈춘 상대에게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꺼낸 포켓몬은 역시나 괴력몬이었다.

“…가라! 버랜지나!”

손가락으로 골라냈던 몬스터볼 바로 뒤에 있는 것을 꺼내 던졌다.

“버랜지나 선두는 오랜만인걸! 난 당연히 파이어로일 거라 생각했는데.”

함께하게 될 배틀 파트너를 본 유성이 반갑게 말했다. 서향이 유성의 선두를 읽은 것처럼 유성 역시 서향의 선두를 예상하고 있었다. 초염몽과 괴력몬 중에서 후자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꽃 타입만 두 명이면 동시에 잡히기 쉬워서.

“조용히 해.”

수를 읽힌 서향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쾌활한 유성의 웃음소리 너머로 작게 삐이, 삐- 우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백랍의 품에 있는 고디탱의 응원이었다. 텐트 구분할 것 없이 예쁨 받았던 고디탱은 새침데기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지극정성으로 저를 돌보는 버랜지나는 그래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기 포켓몬의 울음소리를 놓칠 리 없는 버랜지나가 전혀 다른 울음소리로 화답했다.

“버랜지나! 순풍을 깔아!”

애써 무시하고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응원에 보답하듯 높게 날아오른 버랜지나가 크게 날개를 움직였다. 등 뒤에서부터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서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향과 오래 겨뤄온 유성에게도 익숙한 순풍이었다. 한 번 바람이 깔리고 나면 우선권은 이쪽에 있었다.

“괴력몬, 인파이트로 몰드류를 노리는 거야!”

이어서 턴을 받아 든 유성이 명령을 내렸다. 네 개의 팔이 우직하게 상대의 단단한 몸을 두들겼다. 강철 타입에 속해있기도 한 몰드류에게는 효과가 굉장했다. 그러나 한 번에 쓰러지진 않았다. 상대 악비아르의 위협 때문이었다. 서향이 작게 혀를 찼다. 이어진 상대의 턴에서 먼저 기술을 선보인 건 악비아르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먼지가 흩날리는 돌길 위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모래폭풍 속에서 칼을 가는 것처럼 날카롭고도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모래바람 날씨에 칼춤이라.”

그렇다면 특성은 모래의 힘인가? 이거 골치 아픈걸. 모래에 뒤섞인 소리의 정체를 듣자마자 알아챈 유성이 말했다. 곧이어 모래바람이 괴력몬과 버랜지나를 덮쳤다.

“에이스는 몰드류야. 아직 바람은 우리 쪽으로 불고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턴을 끌게.”

“이번 턴만 부탁해.”

선글라스를 제대로 쓴 유성이 몬스터볼을 꺼내 들었다. 리스크가 큰 기술을 쓴 괴력몬은 조금만 스쳐도 치명상을 입기 쉬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쉽다는 표정을 하는 괴력몬의 다음으로 나온 건 핫삼이었다. 유성의 에이스 포켓몬이자 강철 타입인 그는 모래바람에 면역이었다. 이걸로 서서히 말라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머플러가 풀어지지 않도록 고쳐 맨 서향의 눈에 몰드류가 딛고 서 있는 땅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다른 곳보다 확연하게 틈이 갈라진 게 보였다.

“버랜지나, 몰드류에게 속임수!”

“파트너어!!”

속임수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이었다. 일전에 인파이트를 맞고서 체력이 닳아있는 데다가, 칼춤으로 힘을 끌어올린 몰드류에게는 상당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피하게 된다면 몰드류가 서 있을 필드가 불안해지고 만다. 그렇게 된다면 일단 지진 같이 위협적인 땅 타입 기술은 봉인할 수 있으리라. 자칫하면 전략의 에이스를 잃기 쉬운 상황에 상대 트레이너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부딪친다면 지금까지 모래폭풍에 스친 게 전부인 버랜지나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니, 내릴 명령은 회피 말고는 없다. 몰드류는 반드시 이 공격을 피할 것이다. 어떤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말이다. 배틀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서향의 확신은 얼마 가지 못한다. 모래폭풍 속 바람이 고요한 탓이었다.

“…버랜지나?”

분명히 지시를 들었을 버랜지나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가만히 날고 있었다. 침착함을 잃었던 남자가 금방 표정을 바꿨다.

“문답 무용! 아가씨는 여길 지나가기엔 체육관 뱃지가 아직 모자란 모양이로군!”

“이게 무슨 일이야?”

유성마저도 답지않게 당황해서 물었다.

“버랜지나, 몰드류에게 속임수를 써!!”

서향은 다시 한번 버랜지나에게 외쳤다. 속임수라니까! 버랜지나!! 혹시라도 안 들렸을까 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지시를 내려도 버랜지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악 타입 특유의 오라를 감싸고 몰드류에게 덤벼드는 대신에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조명시켰다. 상대방이 직전에 쓴 기술을 강제하는 앙코르였다. 버랜지나가 트레이너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기술을 쓴 것이다. 서향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시 한번 날카롭게 강철이 다듬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유성아!!”

서향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곧 순풍이 끝날 때가 다가왔다.

“그래, 앙코르가 풀리면 몰드류는 괴물이 되겠지.”

마지막 차례에 악비아르가 쓴 건 핫삼을 향한 헤롱헤롱이었다. 그 역시 몰드류를 위해 턴을 버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트레이너의 말을 듣지 않는 버랜지나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서향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혼자만의 배틀이 아닌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유성과 그의 핫삼이라면 분명 지친 몰드류를 쓰러트리고 위기를 넘길 것이다. 유성이 이해했다는 듯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하지만, 이 승부를 피한다면 그것 또한 어불성설!”

“뭐?”

“가라, 핫삼! 먼저 악비아르부터 쓰러트리는 거다!!”

서향이 소리 나게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야 이 자식아!! 하고 크게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비아르에게 헤롱헤롱이 걸린 핫삼은 쉽게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음! 기합이 부족했군! 양손을 당당히 허리에 올린 유성이 어깨를 피고는 말했다. 바로 그거다! 도복을 입은 트레이너들이 그에 화답하듯 자세를 취했다. 충격을 이기는 강한 충격에 골이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은 서향이 심호흡했다. 시선을 올리면 모래폭풍 속에서 고고하게 날고 있는 버랜지나의 등이 보였다. 배틀을 하고 있으니 등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갈비뼈 안쪽이 침바루에게 찔린 것처럼 콕콕 쑤셨다. 더 보지 않고 허리춤에서 몬스터볼을 꺼냈다.

유성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니, 전혀 미안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자신은 주먹의 의리 같은 건 한 번도 온전히 이해해본 적 없었다. 저에게 있어서 심신을 가다듬는 무예란 결국 광활한 창공에게는 닿지 못할 연약한 몸부림이었으며, 모래폭풍 속에 숨어 상대의 정신을 깎아 먹는 건 어릴 때부터 해온 자신의 주특기였다.

 

*

승부는 서향이 글라이온을 꺼내면서 급격하게 기울었다. 땅 타입인 글라이온은 마찬가지로 모래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턴을 잡아 늘이며 상대에게 맹독을 뿌리는 등 천천히 그들을 조여갔다. 결정타를 날린 건 장난하는 것처럼 보였던 유성의 핫삼이었다. 불릿펀치로 몰드류가 움직이기도 전에 단번에 쓰러트린 것이다. 그 뒤로도 눈이 마주치길 기대하던 트레이너들에게 몇 번이고 길이 막혔지만 스코어는 전승이었다. 가장 많이 배틀을 치른 건 유성이었고, 때에 따라선 관전을 좋아하는 백랍이 나서기도 했다. 유성보다는 적고, 백랍보다는 많은 배틀을 치른 서향은 더블 배틀 이후로는 버랜지나를 꺼내지 않았다.

해가 저물고 쉬어가기 위해 자리를 편 곳은 가파른 절벽 부근이었다. 챔피언 로드 바로 근처인 만큼 트여있는 그곳은 이전에 다른 트레이너나 백팩커가 머물다 간 흔적이 엿보였다. 여기저기서 따온 나무 열매와 도시에서 사둔 재료로 오늘치 저녁 식사를 만들고, 유성이 간을 보겠다며 절반을 비워버리고, 백랍이 다시 그만큼 만들고, 포켓몬들이 나와서 놀고, 각자의 잠자리를 준비하는 평소의 일상은 빠르게 지나가고 나면 세 사람은 드물게 모닥불 앞에 둘러앉았다. 어른이라고 하기엔 어렸으나 설렘을 공유하다가 밤을 새버리는 실수 같은 걸 저지를 만큼 철없지도 않던 셋이 말없이 앉아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괜찮은 척 해봐도 둘에게는 소용없다는 걸 안 서향이 얼마 못 가 자연스럽게 모았던 다리를 아예 끌어안았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이 잔뜩 쌓여갔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무 장작 틈새로 불꽃이 파고들며 타닥이는 소리가 적막함을 메웠다. 뒤로 팔을 뻗어 상체를 지탱한 유성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밤하늘을 보고 있었고, 백랍은 그때까지도 품에 안긴 고디탱을 신경 쓰고 있었다.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배려가 스며든 분위기가 더더욱 입가를 간지럽게 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비밀을 만들어본 적 없던 서향이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급기야 다리를 떨던 즈음에 고디탱이 울었다. 어디가 아프다기보다는 칭얼거림에 가까웠다. 배도 부르고 모닥불까지 쬐고 나니 슬슬 편한 곳에서 자고 싶은 것 같았다. 몇 번 어르고 달래던 백랍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재우고 올게.”

“피곤하면 너도 먼저 자도 되는데.”

그를 따라 어색하게 상체를 세운 서향이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덩달아 고개를 원위치시킨 유성은 오우! 같은 특유의 감탄사로 거들었다.

“…봐서.”

백랍이 고디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가 애매모호하게 구는 것은 대부분은 이미 정해진 답이 있다는 걸 아는 서향은 멀어져가는 백랍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포켓몬들을 미리 몬스터볼에 넣어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백랍의 뒤에는 그림자가 하나 따라붙었을 것이다. 물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우아하고, 용만큼 고귀하며 자유로운 새의 그림자가. 그리고 백랍은 그것을 부담스러워하거나 함부로 손을 들이밀면서 친근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사람보다도 그림자에 숨어드는 것들을 좋아하는 백랍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난, 버랜지나가 원하는 걸 몰랐던 걸까.”

오랜 침묵 끝에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생각이었다. 밤하늘을 보던 유성의 고개가 다시금 서향에게로 향했다. 웬만한 소리를 들어도 끄떡하지 않던 그녀는 어깨까지 아래로 떨어트린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차라리 백랍이한테 부탁해보는 게 어때?”

“뭐를.”

“백랍이도 그렇게 꽉 막힌 녀석은 아니야, 알지?”

이어지는 애매한 대답에 서향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면 유성이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 안에 있는 의미를 금방 파악한 서향이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가, 보란 듯이 미간을 구겼다가, 마찬가지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농담이었다고 말해야 할 차례에도 유성은 계속 웃는 채였다. 그런 뒤에도 이어지는 기묘한 침묵에 서향이 점점 웃음기를 잃었다.

“진심이야?”

“서향이 너라면 백랍이도 고디탱을 믿고 맡길 거라고 생각해.”

“트레이너는 여섯 마리의 포켓몬만 소유할 수 있는 거 알잖아. 내 엔트리는 이미 다 찼어.”

서향이 단번에 대답했다.

“…물론 고디탱이 고디모아젤로 진화를 한다면 텔레파시 특성으로 내 퍼스트 가드 스왈로와 함께 더블 배틀에서 좋은 서포터가 될 수 있겠지.”

“오…….”

안된다는 말과 달리 이미 고디모아젤과 함께하는 노후 계획까지 끝내놓은 듯한 서향의 모습에 유성이 많은 의미가 담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고디모아젤이니까 더더욱 백랍이가 아니면 안 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서향이 주먹을 쥐었다.

“고디모아젤은 별점을 쳐서 미래를 읽는 포켓몬이야. 그래서 트레이너의 수명을 점치고 미리 미래를 읽고 괴로워하기도 하지.”

도감에 적힌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해도 고디모아젤의 타입은 알고 있던 유성이 이번에는 흐음-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에스퍼 타입과 고스트 타입은 정반대인 것처럼 보여도 평범한 인간은 알 수 없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인지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오히려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난, 이미 끝에 있는 포켓몬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포켓몬에 대한 지식이라면 웬만한 베테랑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서향인 만큼, 자신이 에스퍼 타입을 다루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유대 관계를 쌓는 건 다른 일이었다. 텐트를 정리하는 방법이 가지각색인 것처럼, 트레이너들은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포켓몬과 친구가 되었다. 유성의 방식은 포켓몬의 행동을 직접 따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배틀을 하며 무엇을 느끼고, 또 어떤 기분으로 기술을 쓰는지 알기 위해서 시작했다던 흉내는 끝내 배틀 중 일촉즉발의 상황에 함께 구호에 맞춰 기술을 피하는 끈끈한 유대로 자라났다.

“포켓몬과 트레이너는 함께 강해지는 거잖아. 그래서 고디모아젤은 백랍이가 아니면 안 돼. 그들의 마음과 넋을 달래줄 줄 아는 걔가 아니면…….”

“그런가?”

“네가 나라고 생각해 봐.”

“고스트 타입은 주먹이 통하지 않아서 곤란하고, 에스퍼는 주먹에게 강해서 곤란할 것 같아.”

아주 짧은 고민 후에 나오는 대답에 눈을 크게 뜬 서향이 웃음을 터트렸다. 트레이너 스쿨 시절부터 배틀을 잘하는 사람을 꼽으면 세 손가락 안에 들었던 서향은 누구보다 배틀을 좋아하고 즐긴다고 자신할 수 있었지만, 때때로 유성의 앞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기분을 느꼈다. 배틀을 향한 그녀의 열정과 애정을 느낄 때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보는 것 같았다. 볼을 던지기 전부터 패배를 내다보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었음에도 서향은 챔피언 리그 끝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보다도 유성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쉬웠다. 버랜지나가 멋대로 사냥을 나가기 시작한 뒤로는 더더욱.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다가온 친구의 노력에 저도 모르게 풀어지던 서향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번진다.

“나는 그냥, 버랜지나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게 충격이야.”

끌어안은 무릎에 얼굴을 기댄 서향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심하고 창피해. 자기 포켓몬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무슨 챔피언한테 도전하겠다고.”

하고 싶은 말이었고, 트레이너로서 해야 할 말이었으나 하기에 쉽지 않은 말이었다. 또랑또랑하던 목소리는 흐리멍텅했다. 스스로가 만든 굴속으로 완전히 얼굴을 파묻으면서 소리가 막히고 발음이 뭉개진 탓이었다. 서향으로서는 답지도 않은 일이었다. 사실, 챔피언 같은 건 못 되어도 상관없었다. 배틀의 정점에 서는 것만을 목표로 지금까지 꿈꿔온 길이었으나 이루지 못한다 해도 절망스럽진 않았다. 그저 포켓몬과 함께 강해지는 게 좋아서 그 끝까지 가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라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의 밑바탕에는 그들과 함께 강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그걸 원하고 있을 거란 믿음.

“만약 내 욕심으로 버랜지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거면 어떡하지.”

서향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배틀 같은 거 별로 재밌지 않았던 거라면 어떡해? 다른 야생 버랜지나처럼 자기 둥지가 갖고 싶었던 거라면? 어쩌면 나는,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버랜지나를 이 하나 지방에,”

“좋아! 거기까지!!!”

치고 들어오는 큰소리에 서향이 반사적으로 처박았던 고개를 들었다. 유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있었다.

“3:3 배틀하자!!!”

유성이 주먹까지 불끈 쥐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배틀 제의에 서향은 저도 모르게 시큰거리는 눈 밑을 닦았다.

“이 시간에 무슨 배틀이야.”

“버랜지나와의 사이가 고민인 거잖아? 음, 역시 배틀이야. 이런 건 배틀로 해야 해.”

유성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이야기에 대한 대답은 끝에 가서는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다시 한번 배틀로 버랜지나의 마음을 읽어보는 거야. 오늘 더블 배틀 이후로 버랜지나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잖아?”

유성이 그때까지도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서향에게 손을 뻗었다.

“배틀을 하면서 버랜지나의 동작을 따라 해보는 것도 괜찮겠네! 동작을 따라 하다 보면 무슨 기분으로 배틀을 하는지 좀 더 와닿는 법이니까!”

우스꽝스럽게 새의 움직임─추측해보건대 순풍을 쓰는 버랜지나의 모습인 것 같았다─을 따라 하는 모습에 잠시 벙쪄있던 서향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지극히 유성다웠고,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난 관찰하는 걸 더 좋아하는 거 알잖아.”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한 서향이 유성이 뻗은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3:3이면 랭크 배틀 룰인 거지? 핫삼이 얼마나 민첩해졌는지 한 번 볼까.”

머플러를 고쳐 매고 말했다. 트레이너의 역량과 별개로 파티의 타입 상성은 서향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만큼 둘이서 매치할 때면 유성은 주력 타입인 격투보다도 서브 타입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아니? 오늘의 승부는 독개굴, 괴력몬, 그리고 초염몽으로 할 건데.”

옷에 붙은 흙먼지를 툭툭 털던 서향이 동작을 멈추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출전 포켓몬을 당당하게 다 밝힌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설마 버랜지나랑 붙으라고 일부러 봐주려는 건가 싶었다. 배틀에 한해서 유성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의문이 드는 라인업이었다. 설마 봐주는 거냐고, 그런 거라면 오히려 싫다는 말을 좀 더 둥글게 다듬고 있으면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유성이 씨익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너와 비행 군단을 이겨주겠어!”

해맑다 못해 천진난만한 대답에 지금보다 어리숙했던 트레이너 스쿨 시절을 겹쳐본 서향이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잡고 바로 섰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쪽도 제대로 막아주겠어.”

“좋아! 그럼, 지금 바로!”

“-는 좁으니까 위험하고. 내 텐트 쪽으로 가자. 근처에 낙석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공터가 있어.”

당장이라도 배틀을 시작할 것만 같은 유성을 제지했다. 그러면 유성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텐트 쪽으로 뛰어갔다. 분명 자신과 버랜지나를 위해서 하게 된 배틀임에도 순수하게 즐거운 것 같았다. 따라서 그쪽으로 가려던 서향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백랍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그늘에 있는 그의 텐트는 오늘도 역시나 조용했다. 지금부터 배틀을 하게 될 공터는 그가 있는 텐트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 뒤에 다시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노린 게 아니라는 자기합리화가 무색하게도 이번엔 고디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큰 평화로 다가왔다.

*

 

한밤중에 시작된 배틀은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나만큼이나 나와 내 포켓몬을 잘 아는 상대와의 싸움은 마치 거울과 싸우는 것 같았다. 유성이 독개굴의 맹독으로 서향이 그러했듯 상대 파티를 병들게 하려고 하면 포이즌 힐 특성을 가진 글라이온으로 받아쳤고, 서향이 파이어로의 브레이드버드로 유성이 그러했듯 상대 파티를 화력으로 뚫으려 하면 환상적인 방어 타이밍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길어지는 배틀에도 다행이랄 게 있다면 아직까지는 버랜지나가 지시를 어긴 적 없다는 것이었다. 정면 승부보다는 상대를 골탕 먹이길 좋아했던 버랜지나는 도발과 속임수로 적절하게 랭업기를 쌓는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더블 배틀에서 버랜지나와 하고 싶었던 배틀이었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에 유성의 포켓몬이 열받아하면 버랜지나는 약 올리는 듯한 울음소리로 웃었다. 사람으로 치면 배를 잡고 깔깔 웃는 것 같았다. 서향은 배틀의 유리함보다도 버랜지나의 그런 모습이 더 신이 나서 늘어지는 배틀이 싫지 않았다.

치고받으며 팽팽하던 배틀을 끝낼 기회가 찾아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상대의 카드 중에 가장 거슬리던 괴력몬이 슬슬 지쳐가기 시작한 것이다. 피로가 누적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기에,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서향은 날개 쉬기로 틈틈이 체력을 비축해둔 버랜지나에게 마무리 지시를 내리는 대신 파이어로를 내보냈다. 유성이 혀를 차며 몬스터볼을 꺼내 드는 순간 서향은 승리를 확신했다. 당장 파이어로를 잡을만한 건 바위 타입 서브 웨폰을 들고 있는 초염몽, 혹은 독 타입 기술이 있는 독개굴밖에 없었고, 둘 다 글라이온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파이어로, 유턴으로 돌아와!”

아니나 다를까 파이어로를 잡기 위해 나온 초염몽을 보자마자 서향이 지시를 내렸다. 천천히 날고 있었던 파이어로는 지시를 듣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날쌔게 움직였다. 초염몽에게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파이어로가 몬스터볼로 귀환하고 곧이어 글라이온을 내보냈다. 깔끔한 교체였다.

“이렇게까지 당황스럽기도 오랜만이네!”

다른 기술 없이 교체만 반복되었을 뿐이었으나 자신이 핀치에 몰렸음을 직감한 유성이 소리쳤다. 당황스럽다는 말과 달리 그는 입꼬리 한쪽만 끌어올린 채 아주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어딜 봐도 배틀에 신난 사람의 모습이었다.

“너, 역시 맹화 특성 갖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맹화인지 모르겠는걸!”

그 말대로였다. 유성만큼이나 환한 웃음이 서향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얼음펀치를 들고 있는 괴력몬이 나오든, 초염몽을 내주든, 체력이 보존된 독개굴이 나오든 글라이온이 선공을 잡은 이상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망설임 없이 글라이온에게 땅 타입 기술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지진을 명령했다. 둥둥 떠다니듯 부유하던 글라이온이 땅을 흔들었다. 불꽃 타입 초염몽에게는 치명타였다. 그러나 글라이온의 지진은 초염몽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쿠구구궁, 글라이온은 멈췄음에도 땅의 진동은 더욱 거세진다. 그 흔들림은 비교적 안전한 곳에 서 있을 트레이너의 발밑까지 느껴져 왔다. 트레이너와 포켓몬 할 것 없이 당황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어서 쿵, 쿵, 쿵. 큰소리가 점점 빠르게 다가오다가 금방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수십 개의 낙석이었다. 거인이 다가오는 것 같았던 소리는 산의 울림이었던 것이다! 글라이온의 지진이 지반이 불안정했던 산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돌을 다 깨부숴서,”

“글라이온! 유성과 초염몽을 부탁해!!”

“우왓!”

서향은 유성의 계획 같지도 않은 소리를 무시하고 지시를 내렸다. 그에게도 비행 포켓몬이 있었지만, 뷰티플라이의 연약한 날개로는 유성과 초염몽을 버티기엔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글라이온이 쓰러진 초염몽과 유성을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서 있던 땅이 무너졌다. 절벽 근처에 있던 공터는 배틀과 낙석의 충격을 더는 버틸 수 없는 것 같았다. 날개를 편 글라이온은 충격으로 생기는 바람을 타고 안전한 곳까지 날아들었다. 다음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 리자몽이 있는 몬스터볼로 손을 올린 그때였다. 그보다 앞에 있는 몬스터볼이 미친 듯이 달그락거렸다. 버랜지나가 있는 몬스터볼이었다. 이미 배틀로 지친 그에게 낙석이 떨어지는 이곳은 너무 위험했다.

“네 턴이 아니야, 버랜지나! 지금은 너무 위험해!”

“서향아, 너도 빨리 피해야 해. 이 낙석들, 아무래도 산사태인 것 같아!”

글라이온 덕분에 넓은 시야로 산을 내려다보던 유성이 다급하게 외쳤다. 서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선의 방향 끝에는 백랍의 텐트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백랍에게도 알려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갑작스러운 버랜지나의 돌발행동이 하나로 맞아들어갔다. 포켓몬의 육감으로 위험을 감지한 버랜지나는 고디탱을 지키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한 것이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서향이 양손으로 버랜지나가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꽉 움켜쥐었다.

“네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지금 여기서 나오면 너도 위험하다니까. 네가 가지 않아도 고디탱은 백랍이가, 백랍이의 포켓몬들이 지켜줄 거야.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너도 알잖아!”

그러나 외쳐도 몬스터볼은 거세게 움직일 뿐이었다. 마치 함께하기를 거부하고 몬스터볼 밖으로 튀어나오는 야생 포켓몬 같았다. 거친 반항에 서향이 표정을 찌푸리고 아예 몬스터볼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안 돼. 안 보내줄 거야. 네 트레이너는 나야, 버랜지나!”

들으라고 외쳐도 소용없었다. 몇 번이고 되새기듯 말할수록 눈 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유성과 배틀하면서 잊고 있던 생각들이 밀려들고 나면 몸의 흔들림이 산사태 때문인지, 버랜지나의 반항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사실만을 말하며 버랜지나를 설득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반복할수록 그것은 자신의 소망처럼 들렸다.

“왜 그렇게 고디탱에게 집착하는 거야? 처음은 아주 조금 비슷했을지 몰라도, 그 아이가 벌차이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아니면 버랜지나, 너는 역시…….”

“서향아!!”

“나랑 같이 가는 게 싫은 거야?”

안 되겠어, 핫삼 너라도 나와! 유성이 급하게 몬스터볼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핫삼이 낙석을 부수거나 서향을 대피시키기도 전에 그녀가 딛고 서 있던 땅이 무너져 내렸다. 저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에 서향이 뒤늦게 리자몽을 꺼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로부터 감싸진 것처럼 허공으로 두둥실 떴다. 떨어지던 낙석과 무너지던 흙바닥은 물론 빠르게 서향을 낚아채려던 핫삼까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광경은 꼭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상황을 이해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틀이 벌어지던 반대편에는 몸집이 작은 포켓몬이 마찬가지로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다. 항상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 투정을 부리던 포켓몬은 신비로운 빛으로 눈을 빛내며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었다. 고디탱의 염동력이었다.

“너, 그런 스킬도 쓸 줄 알았구나!!”

타이밍 좋게 나타난 구세주에 유성이 외쳤다. 위기를 넘기며 저도 모르게 안심하던 그때였다. 움켜쥐고 있던 몬스터볼에서 버랜지나가 튀어나왔다. 서향이 다급하게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깃털조차 남기지 않고 하늘 위로 날아들었다.

“버랜지나!!”

서향의 외침이 허공에 울렸다. 그러나 곧바로 고디탱을 향해 날아갈 거라 생각한 버랜지나는 그것보다 더 높게, 높게 하늘을 향해 날았다. 쫓아가기 위해 이번에야말로 리자몽을 꺼내 들었다. 타이밍 좋게 고디탱의 염동력이 풀렸다. 아무래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덩달아 바닥으로 추락하는 고디탱을 캐치한 건 핫삼이었다. 그 모두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둔 서향이 리자몽과 함께 버랜지나를 뒤쫓으려던 순간이었다. 묵직한 돌덩어리가 제 위로 떨어졌다. 낙석이라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거대한 돌덩어리는 비탈길을 타고 내려오던 다른 돌들과는 달리 산에서부터 내리꽂히듯 자신의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위기를 직감했으나 충격으로 굳은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뒤늦게 뭐라도 지시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충격과 달리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끽해야 작은 돌멩이 파편들이 스치는 느낌이 고작이었다.

“까악, 까아악-!”

귀에 익숙한 울음소리에 서향이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앞에 있는 건 저 멀리 날아갔다고 생각한 버랜지나였다. 서향이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봤어?! 서향아, 버랜지나가 널 구했어! 널 구하기 위해 나온 거야!”

멀리서 모든 걸 목격한 유성이 신나게 외쳤다. 덩달아 신난 버랜지나가 칭찬을 바라는 듯이 울었다. 리자몽 덕분에 버랜지나와 같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서향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고디탱이 태어난 이후로는 한동안 쓰다듬어본 적 없던 그의 부리에 손끝이 닿는다.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자연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인공적인 형태였다. 위화감을 느낀 서향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어둠이 움직이는 것 같은 형체가 밤하늘에서 움직였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랬기에 모두에게 익숙한 존재였다.

“…그래서, 이게 다 무슨 일인데?”

삼삼드래와 함께 나타난 백랍이 물었다. 얼음만큼, 어쩌면 얼음보다도 더 차가운 시선에 서향과 유성은 조용히 눈을 피했다.

​*

 

“그러니까 지금 포켓몬과의 유대를 위해 앞도 잘 안 보이는 시간에, 낙석 위험 팻말이 붙은 이곳에서 배틀을 했다는 거지.”

그것도 지진까지 써가면서 말이야. 백랍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읊었다.

“그게 내 고민이었던 건 맞는데, 배틀은 유성이가 하자고 그랬어.”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서향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나 자리에 없는 이의 이름을 둘러대봤자 돌아오는 건 싸한 눈빛뿐이었다. 예전부터 백랍은 사람을 걱정시키면 시켰지, 혼내는 입장이 아니었던만큼 한 번 화를 내니 그 온도가 남달랐다. 서향은 잠시 백랍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로 유성을 돌려보낸 것을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그녀를 불러와야 하나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일단 맛있는 걸 잔뜩 먹고 화해하자’라는 유성만의 방법으로 이야기가 끝날 것을 알았다.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답게 고개를 숙인 서향이 무릎 위에 올려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배틀은 버랜지나 때문에 한 거야.”

“…….”

“사실 너한텐 계속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포켓몬 알 때부터 그렇고 내 포켓몬들이 네 알을, 고디탱을 너무 좋아해서… 넌 원래 그렇게 들이대면 좀 부담스러워하잖아. 포켓몬한테 쓴소리도 못 하고. 물론 나나 유성이도 못 하긴 하지만. 아니, 트레이너라면 그래선 안 되는 거지만. 정도라는 게 있으니까. 내가 버랜지나를 잘 막아서고 해야 했었는데, 어쩌면 배틀보다 돌보는 걸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니까. 나중엔 그냥 키우미집이라도 차릴까 봐.”

횡설수설 말을 이을수록 서향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분명 머릿속으로 정리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 말은 끝에 갈수록 엉망진창이었다. 무슨 의미로 말하는 건지 자기 자신도 모를 정도였다. 차라리 트레이너 스쿨 시절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네가 데려갈래?”

잠자코 듣는 것처럼 보였던 백랍이 대답했다.

“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말에 멍청한 대꾸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예 고개까지 들고 그를 바라보면 백랍은 무릎 꿇고 있던 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닥불이 있었다. 백랍이 그곳에 포켓몬과 함께 준비한 마른 장작을 집어 던졌다.

“고디탱, 내가 말하기도 전에 스킬을 썼지. 반응 속도가 굉장히 좋아. 넌 좋은 트레이너니까 분명 이 아이도 강하게 키울 수 있을 거야.”

“너 어디 떠나려고 이래?”

백랍이 덤덤하게 말하자마자 서향이 되물었다. 응? 아니. 한순간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조금은 얼빠진 채로 대답한 백랍은 어쩐지 불길함을 느꼈다.

“그럼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역시 혼자서 떠나려고 이러는 거지.”

“그런 거 아냐. 난 그저 잘 돌봐준다면야…….”

“고디탱은 네 포켓몬이야!!!”

서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설마설마했으나 바로 옆에 터진 기습 고함에 백랍이 눈을 감고 고막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전통적으로 고스트 타입은 기습에 약했다.

“나한테 보낸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알이었을 적부터 굉장히 아꼈잖아!!! 그리고 우리 중에 네가 아니면 누가 에스퍼 타입을 감당한다고!”

서향은 횡설수설했던 직전보다 더 크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러다 아예 머리를 헤집는 등 고디탱이 자신의 포켓몬이 되는 일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인지 온몸으로 표현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필 백랍이어서였다. 그는 유성처럼 즉흥적이지도 않았고 자신처럼 변덕스럽지도 않았던 만큼, 내뱉는 말 하나하나의 무게가 달랐다.

“고디탱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들으면 상처받을 거라고!!”

“…그래도 기운은 여전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서향의 독선적인 턴이 끝난 뒤에야 백랍이 말했다. 자신의 진심 같은 건 조금도 전해지지 않은 듯한 태연한 대답에 서향이 표정을 찌푸렸다가, 뒤늦게 그가 다행이라고 말하는 주어가 고디탱이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랜지나도, 나한테 보내겠다고 하면 상처받을 거야.”

백랍이 다시 장작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버랜지나를 그에게 보내겠다는 건 유성에게만 털어놓았던 생각이었다. 그 역시 버랜지나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부끄러운 한편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버랜지나의 기분에 서향이 조용해졌다. 그즈음 꺼질 것 같았던 불씨는 장작에 조금 옮겨붙어 가고 있었다.

“네 포켓몬들이 배틀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싫었다면 진작 떠나지 않았을까. 네가 구상하는 배틀은 그냥 명령만 수행한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까.”

핵심을 콕 찌르는 말에 서향은 윽, 하는 소리를 냈다. 평소에 백랍에게 저런 말을 들었다면 난이도 높은 전략을 쓰는 저와 그것을 훌륭하게 해내는 포켓몬들에 대한 칭찬으로만 들었겠지만, 지금 같은 때에는 반성해야 할 부분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와다다 쏘아붙였던 게 무색하게도 금방 가라앉은 서향의 모습에 백랍은 변칙적으로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네 배틀을 보고 있으면 비행 포켓몬도 아름답다고 느껴.”

친구를 비난할 마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백랍이 나지막하게 이어 말했다. 그 뒤로 벌어지는 서향의 변화는 다시금 살아나는 모닥불의 불씨보다도 변덕스러웠다. 말이 끝난 직후에는 원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뜬 채로 자신을 반짝반짝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그렇지? 하는 눈빛이었다. 이제야 너도 비행 포켓몬의 아름다움을 알아준 거냐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당장이라도 비행 포켓몬의 역사─역사 자체는 싫지 않았다─에 대해 늘어놓을 것 같았던 반짝임은 한 번 눈을 깜빡였을 때 희미해졌고, 두 번 깜빡였을 때는 사그라들었다. 순간 나갔던 이성이 돌아온 것 같기도 했고, 끝내 해소되지 못한 문제에 발목이 붙잡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백랍은 서향이 저가 자리에 없는 틈을 타 유성에게만 고민을 털어놓았던 게 단순히 자신이 고디탱의 트레이너여서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틀만큼 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서향이 세 번째로 눈을 깜빡였다. 바닥에는 모닥불에 의해 길게 늘여진 자신의 그림자가 있었다. 빛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음에도 저 끝까지 길게 뻗은 그림자는 꼭 커다란 무언가의 형상 같았다. 애써 잊으려 했던 밤의 그림자가 저편에서부터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래도, 제일 즐거운 건 배틀이야. 나와 내 포켓몬은 배틀 하나만을 위해 여기까지 왔어.”

서향이 말했다. 백랍은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라면 그림자에 홀린 상대의 눈을 가리고, 살아있는 자를 홀려 그림자 저편으로 끌고 가려는 존재를 쫓아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서향은 그림자 속에서 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배틀 말고 다른 걸 한다고 해서 너와 네 포켓몬이 걸어온 길이 없어지진 않아.”

…조금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져도,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백랍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 사실 백랍이 아니라 팬텀이지.”

걔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아는 게 많아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그의 과묵한 성격을 아는 서향이 괜히 틱틱거리듯 대답했다. 그러면 백랍은 평소의 뚱한 표정으로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너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정말 백랍이어서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랍은 승부욕이라든가 호승심 같은 게 물리적으로 제거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틀에서 무미건조한 부분이 있었다. 어릴 땐 이해하지 못했고, 좀 크고 나서는 이 세상에 백랍 같은 사람도 있음을 알았으며, 좀 더 큰 다음에는 사막 같은 건조함이 바로 백랍의 열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날들이 지나고 오늘이 되어서야 서향은 비로소 배틀과 가까운 듯 멀어져 있는 그의 삶이 자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느꼈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

장작이 타는 소리가 적막함을 메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랍이 입을 열었다. 서향은 다른 말을 얹는 대신에 주변을 정리했다. 더 대화할 게 없다는 걸 서로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잘 자.”

“너도 잘 자.”

형식적인 인사까지 마치고 나면 각자의 잠자리로 향했다. 다행히 산사태는 금방 멈췄지만 낙석과 지진의 여파로 인해 텐트는 전부 부서져 있었다. 새로 텐트를 구입할 도시나 작은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길거리 노숙자처럼 밤을 보내게 될 예정이었다. 서향뿐만이 아니었다. 유성도, 백랍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셋 중 누구도 불평불만을 늘어놓거나 무리하게라도 도시에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포켓몬들이 있어서였다. 지금처럼 아직 트레이너로서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포켓몬과 함께 온기를 나누면서 잠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위험했던 절벽 근처 대신에 숲 안쪽에 잠자리를 따로 꾸리게 된 서향이 글라이온과 다른 포켓몬들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걸어가는 대신에 멈춰 섰다. 손이 향하는 곳은 머플러로 가려둔 윗옷 재킷 주머니였다. 그곳에는 작게 축소된 몬스터볼이 있었다. 중앙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몬스터볼이 다시 제 크기를 되찾았다. 손바닥을 꽉 채우는 구체를 바라보던 서향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앞에 사뿐히 던졌다. 몬스터볼이 열리는 트리거가 작동되고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버랜지나가 나왔다. 볼 밖으로 나오자마자 날개를 펴고 하늘로 올라간 버랜지나는 금방 눈 마주치기 편한 높이까지 낮게 내려왔다. 작게 바람이 일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는 상대를 앞에 두고 서향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까 구해줘서 고마웠어! 버랜지나!! 그리고 오늘 배틀, 난 정말 즐거웠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눈을 질끈 감고 마치 소리 지르듯 내뱉었다.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언어가 달라도 인간과 포켓몬은 서로 소통과 교류가 가능하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경우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꼭, 처음으로 사귄 친구에게 책─친구가 많은 어린이가 되는 방법-럭키 편-─에 적힌 대로 시도하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네가 배틀만큼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걸 알아.”

그러나 서향은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고서 처음보다는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그건 내가 같이 못 해주는 일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난 네가 밤에는 안 나갔으면 좋겠어.”

낮게 떠 있던 버랜지나는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고디탱을 위해서 뼈다귀를 찾는 거라면 낮에 같이 찾자. 밤에는… 위험한 포켓몬들이 너무 많단 말이야. 이 근처에는 동굴이 많아. 거기엔 백랍이의 삼삼드래 같은 포켓몬이 있을지도 몰라. 네가 백랍이의 삼삼드래랑 잘 지내는 건 알지만, 야생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서향이 자신의 머플러를 움켜쥐었다.

“네가 걱정돼, 버랜지나.”

부모님이 선물해주신 그것을 손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고 있으면 또다시 눈 밑이 왈칵하고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강한 포켓몬들은 자긍심이 높아, 약한 트레이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알았으나 더 이상 삼키기는 어려웠다.

“내가 약하거나 부족한 게 있다면 좀 더 노력할게. 난, 챔피언 같은 것보다 너랑,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여행하는 게 더 즐거워. 너에게도 꼭 알려주고 싶은 경험도 아직 잔뜩 있어. 그러니까 버랜지나…….”

눈꼬리 끝에 아슬하게 매달려있던 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계속 너의 트레이너로 있게 해 줘.”

너랑 계속 모험하고 싶어. 끝내 서향이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꼴사납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울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백랍에게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거나, 하나 지방에 그를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식의 체념을 몇 번이고 입 밖에 냈지만, 사실은 계속 같이 모험하고 싶었다. 같이 악 타입에 어울리는 전략으로 상대를 골탕 먹일 길을 찾아내고 싶었고, 그에게도 어느 날 밤에 보았던 거대한 새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트레이너로서, 친구로서 버랜지나와 함께 계속 모험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시간 위로 새로운 추억들을 쌓고 싶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풀숲에서 훌쩍이는 시간이 길어지는 때에, 텁텁한 바람이 불어왔다. 새가 날개를 접고 땅에 착지할 때 일어나는 작은 바람이라는 걸 아는 서향이 얼굴에서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작게 벌려진 틈으로 버랜지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버랜지나…?”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어느새 땅에 내려온 버랜지나가 깍깍거렸다. 기분 좋을 때 자주 내던 울음소리와는 달랐지만, 크게 낯설지도 않았다. 그게 고디탱을 달래주기 위할 때 내던 울음소리라는 걸 떠올린 서향이 자신의 품에 들어온 버랜지나에게 조심히 손을 갖다 댔다. 그러면, 버랜지나가 마저 고개를 움직여 손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울음소리도 없었음에도, 버랜지나 특유의 붉은 동공과 눈이 마주친 순간 서향은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벅찬 마음에 땅에 내려와 있는 새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간 해온 마음고생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덩달아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이번에는 주저앉지 않았다. 버랜지나가 자신을 지탱해준 덕분이었다.

“약속할게. 난 더 강해질 거야.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에게 더 많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서향이 속삭였다. 그때까지도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있었지만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버랜지나는 그 뒤로도 오랜 시간 동안 서향에게 얌전히 안겨있었다. 꿈을 이루게 될 때까지 남은 길이 험하다 해도 더는 아무런 상관없었다.

얼마나 헤매게 될지 몰라도 버랜지나와 자신은 엇갈리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손깍지 낀 양손을 명치께에 올려놓고 잠을 청하던 서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천 번 고민하고 꺼낸 말이었으나 원인 제공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평생 기억할 벅찬 순간을 지나보내고 버랜지나와 함께 돌아온 자리에는 다른 포켓몬들이 전부 나온 채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몬스터볼이 더 편할 거라는 설득과 내일 배틀을 위해서라는 정당한 트레이너의 지시에도 포켓몬들은 앙탈을 부렸다. 텐트까지 망가진 지금, 밖에서 잘 거라면 예전처럼 다 같이 자고 싶다는 그들의 소심한 항의였다. 서향으로서는 절대 이기지 못할 반항이었다.

볼로 돌려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따뜻한 윈디와 리자몽 중심으로 모여든 포켓몬의 틈바구니 가운데에 누웠다. 따뜻한 불꽃 타입 포켓몬과 함께 있으니 확실히 기온이 떨어진 산의 밤도 춥지 않았다. 비록 너무 모여있어서 조금 덥고, 답답하고, 살짝 숨이 막히는 것도 같았지만 그들이 그러고 싶은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글라이온, 아직 깨어 있지?”

오지 않은 잠을 쫓는 것을 포기하고 눈을 뜬 서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면 발치에서 답지도 않게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글라이온이 한쪽 눈만 떴다가 다시 감았다.

“너는 처음부터 다 알고서 버랜지나를 꺼내 준거지.”

이번에 글라이온은 보란 듯이 색색거렸다.

“다시 또 그랬다간 그땐 진짜 백랍이한테 부탁해서 눈싸라기 내려달라고 할 거니까 각오해.”

시치미 떼는 모습에 서향이 윈디에게 기대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소란스러움에 진짜로 잠들었던 리자몽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평소와 같은 일상에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말고도 슬슬 잠에 드는 다른 포켓몬을 깨우지 않기 위해 서향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다시 몸을 뒤로 뉘었다. 글라이온에게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있잖아, 혹시 기억해? 네가 진화했던 날 밤에, 우릴 스쳐 지나갔던 검은 그림자 말이야.”

아까보다 좀 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게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함께 모험을 떠난 친구들은 모두 잠들고, 글라이거와 함께 날개 치기를 연습하던 도중에 그가 진화했던 밤. 꼬리와 날개가 더 커진 자신의 모습을 어색해하면서도 신나 하던 글라이온과 그보다 더 기쁨을 느끼던 자신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앞으로의 여정을 더욱 기대하던 그때에 덮치듯 지나간 그림자.

“그때 눈이 마주쳤었지.”

글라이온 말고도 다른 포켓몬들이 귀 기울이는 기색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주 큰 포켓몬이 지나갔다는 서두만 꺼내도 잘못 본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기에 한 번도 자세히 말하지 못했으나, 서향과 글라이온은 그날 자신들을 스쳐 지나갔던 포켓몬과 마주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던 역안의 눈동자를 떠올린 서향이 몸의 힘을 풀고 완전히 윈디의 털 속으로 파고들었다.

“…챔피언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눈을 깜빡이거나, 일부러 들리라는 듯이 숨을 쉬었던 전과 달리 이번에는 말 그대로 완전히 무응답이었다. 그러나 서향은 아무것도 못 들은 포켓몬처럼 가만히 있는 글라이온의 침묵이야말로 진정한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의 질문은 대답할 필요가 없을 만큼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챔피언 로드의 끝에 있는 건 당연히 챔피언이다. 어쩌면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면 어느샌가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버랜지나와 눈이 마주쳤다. 남을 약 올리고 골탕 먹이길 좋아하는 버랜지나는 그렇게 한참을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게 뭐가 됐든 간에 괜찮다고 말하는 버랜지나의 격려 같았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서향은 더 생각을 이어가는 대신에 몸을 옆으로 틀어 좀 더 잠들기 편하게끔 자세를 고쳤다. 먼 길을 돌아온 지금은 물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헤매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자신에게는 배틀만큼 하고 싶은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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