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빌런AU
너는 왜 빌런을 하냐?
란은 굽힌 한 쪽 무릎을 심드렁하게 끌어안는다. 저 멀리서는 한창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빌런 대 히어로. 끝나지 않는 굴레의 전쟁. 무언가를 부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놈들과 그런 놈들을 꼭 막아야 하는 이들이 부딪히다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그가 부수는 쪽이라고 한다면 글쎄. 히어로들은 본부가 있고, 협회니 뭐니 잘 짜인 체계를 갖고 있었다. 그에 비해 빌런들은 보스라고 불리는 강자가 한 명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내키는 대로 구는 제멋대로의 집단이었다.
그냥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걸지도.
보통 인간들과 다른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필연적인 선택의 과정이었다. 그는 거의 활동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명령이 있을 때에는 이동 셔틀이 되기 위해서 꼭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가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걸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가 약하다고 생각해서 묵인했다. 그런 오해를 굳이 풀어주는 것마저 그는 귀찮았다.
느긋하게 발을 흔들거리며 그가 시선을 두는 곳은 건물의 잔해가 무너진 곳이었다. 한 히어로가 사람들을 구해내고 인도하고 있었다. 보통 저런 일을 하는 건 신입인데. 확실히 아직 조금 어려 보였다. 그는 그와 제법 안면이 있는 편이었다. 어쩐지 자주 마주치는 것도 이유였지만, 때때로 란이 찾아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아, 눈 마주쳤다.
“이런데서 뭘 하는 거예요?”
“안녕,”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지 말라니까요!”
평온하게 인사를 건네자 파르륵 화를 낸다.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게 상당히… 귀엽다. 꽤 긴 갈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걸 꼭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다. 현장에서도 열심히 돌아다니는 게 꼭 작은 강아지 같았다. 실제로 그만큼 작은 사람은 아니지만 (키는 란과 그럭저럭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냥 인상이. 혹시 그를 만날까봐 요즘에는 명령이 없어도 고분고분 부수러나가는 이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를 만나서 이렇게 대화할 수 있어 즐거웠다.
란이 이유를 모를 미소를 짓자 그는 어쩐지 움직임이 어색해진다. 꼭 잡아갈 거라고 단언하는 것과는 다르게 어설픈 태도였다. 현장에서는 긴장하는 타입인가. 그래도 구호활동 같은 건 꽤 잘 하는 것 같던데. 옥상 난간에서 발을 잘못 디뎌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히어로들은 이런데서 떨어진다고 해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몸이 나갔다.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손이 옆구리 언저리에 닿았다. 거의 품에 안긴다시피 한 자세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 흩날려서 얼굴을 간질였다. 머리카락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가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살짝 휘어진다.
“집중을 못하네……. 음, 그러니까, 이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자, 이엔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그리고 곧장 란을 밀쳐내었다. 뭐, 뭐하는……! 차마 말을 다 끝맺지 못했는데, 란은 왜인지 제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에 감기던 허리가…. 음. 그는 그냥 눈을 휘어 웃어버린다.
“가야겠다.”
“네?!”
“그럼 다음에 또 봐.”
그 땐 좀 더 집중하고. 날 잡아야 하잖아. 남겨두는 말은 어쩐지 얄미울 정도였다. 그렇게 휙 사라져버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엔은 어쩐지 허망해지고 말았다. 여전히 심장은 크게 두근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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