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충족적 예언
이엔생존 AU
불쾌하지 않은 침묵이 방 안에 맴돌았다. 란과 이엔이 함께 있는 시간이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란은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고, 이엔도 최근 열올리던 게임에 몰입 중이었다. 뻔뻔하게 주인의 침대를 차지한 란은 대충 삐로롱 정도로 들리는 게임 BGM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문자에 집중했다. 듣노라, 운명이여. 나는 발버둥쳤으나 끝내 이 순간에 도달했노라...
"이엔."
"엉?"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일거라는 예언을 들었잖아...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이루어지고 말았고... 너는 운명에 대한 예언을 들으면 어떨 것 같아?"
이엔은 란의 질문을 듣는 둥 마는 둥 잠시 답이 없었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방향키나 공격버튼을 누르다가, 결국 허무한 효과음과 함께 화면에 LOSE 라는 글자가 뜨고 말았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게임기를 든 손을 내린다. 등을 조금만 뒤로 젖히면 침대의 매트리스 모서리가 닿고, 여전히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란이 보였다. 그는 뜬금없는 질문에도 익숙한 듯 또냐... 같은 지겨운 표정이었다.
"또 뭔 소린데..."
"그냥... 어차피 이루어질거면 예언이 의미가 없지 않나 싶어서..."
"넌 쓸데없는 거에 너무 신경을 쓴다니까."
"게임은 쓸 데가 있고?"
"게임은 하면 재밌지."
"매번 지는 걸로 봐선 재미 없어 보이는데..."
"매번 지는 지 어떻게 알아?"
"지금도 졌으면서..."
처음의 질문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실없는 만담이 남았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 그리고 실없는 투닥거림. 란은 이런 순간들을 썩 좋아했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이엔의 집에서 주인의 침대를 차지하고 뒹굴거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건 이엔도 마찬가지일거라고 문득 당연하고도 오만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엔이 갑작스럽게 말을 걸었던 그 점심시간, 란은 제법 까칠하고 밉살스러운 첫인상을 보였으니 떠나가려면 기회가 많았으리라. 그 뒤에도 끈질기게 말을 걸더니 지금은 이렇게나 편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에는 란도 조금쯤은 감탄하는 바였다.
그런식으로 투닥거리고 있으면, 똑똑, 하고 누군가 방 문을 두드리더니 열린 문 사이로 쏙하고 고개를 내민다.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슌이었다. 형, 전화왔는데... 제 형을 부르는 목소리는 아직 조금은 앳되었다. 이엔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방의 주인이 없이, 친구와 동생만 남게 되었다. 란은 다정한 미소를 짓고, 읽고 있던 책을 내려두며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이따 보러 가려고 했는데. 속삭이는 목소리는 한껏 다정하기만 해서, 방금 전까지 이죽거리던 이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다정한 부름에 슌은 조금 눈치를 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란은 제 가방을 끌고 와 뒤지더니 그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건넨다.
"자, 전에 궁금하다고 했던 책..."
"와... 이거 절판된 거 아니에요? 중고로 구하기도 어렵다는데..."
"난 절판 되기 전에 샀거든... 다 읽었으니까 편하게 읽어..."
"가, 감사합니다."
책을 받고, 슌은 잠시 그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란은 그런 슌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힌다.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로 넘어가자 눈치를 보던 슌도 슬쩍 대화에 동참했다. 두 사람은 좋아하는 책 취향이 꽤 비슷한 편이라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화제가 끊이질 않았다. 란은 눈여겨본 작가의 신간에 대해서 말을 꺼냈고, 마침 그 책을 예약해두었던 슌도 눈을 빛낸다. 문득 란은 그 금빛 눈동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도 이엔을 붙잡고 처음 꺼냈던 말이 '네 동생 귀엽네...' 였으니 상당히 새삼스러운 생각이기는 했다.
"그러고보니 슌은 어떻게 생각해? 반드시 실현되는 예언이라는거..."
"네?"
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란은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살짝 들어 제목을 보여준다. 오이디푸스는 부모와 더는 만날 수 없도록 버려졌으나 그 탓에 죄책감없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세계를 지배하던 크로노스는 자신보다 더 뛰어날 것이라는 예언에 자식들을 집어삼켰지만, 그 행위로 인해 마지막 자식에게 단죄당하고 만다. 운명을 피하려는 몸짓은 결국 존재를 운명의 길로 인도하고 만다. 예언이 운명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종종 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마는 예언에 대해서 생각했다. 델포이는 존재하지 않으나, 거대한 운명에서 추방당한 신은 파편화되어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너는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그 예언은 한 번도 음성으로 전해지지 않았으나, 비극에서 전율을 느끼는 사고는 음성보다도 생생하게 예언을 전달했다.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그 날카로운 단언은 호즈노미야 란을 허무하게 만든다.
"애초에 예언이라는 건 문학적 장치지만..."
슌은 성실하게,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에도 고민했다.
"설령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일 아닐까요?"
란은 미소를 지었다. 슌은 자신이 정답을 말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애초에 정답이 정해진 질문도 아니었다.- 그 답이 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란은 손을 뻗어 슌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손가락에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감긴다. 어쩐지 간질간질해지는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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