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있나요?
같스진 AU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고, 섬뜩함이었으며, 떨림이었고, 동시에 죽음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갔다. 저택 곳곳에 붉은 피가 흘러 새카만 웅덩이를 만들어갔다. 비명은 점점 신음으로 변해갔고, 절규는 곧 절망으로 변해간다. 왜 이런 일이 생긴것인지 이해조차 못한 채 그들은 그저 달렸다. 괜찮아. 마치 자신에게 말하듯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란은 이엔의 손을 여전히 꼭 잡고 있었다. 그 걸음이 차차 느려지고, 곧 멈추어섰을 때에는 굳게 닫힌 문이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문을 밀어 보았지만, 도저히 열리지 않는다.
호즈노미야 란은 무언가 깊은 허공에 가라앉고 있다고 느꼈다. 새카만 웅덩이. 피로 가득 채워진...
"어떡하죠..."
울음이 묻어 있는 이엔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다급하게 현실로 되돌아온다. 란은 낮게 숨을 몰아쉬며 이엔을 돌아보았다. 애써 참고 있는 듯 힘을 준 눈가에는 차마 견딜 수 없었던 눈물이 고여 있었다. 두 번의 사고. 두 번의 죽음. 두 번의 이별. 란은 가만히 생각으로 잠겨드는 자신을 붙잡는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저 달려야 했다. 멈춰 서 있을 여유같은 건 없었다. 란은 말을 꺼낸다. 창문으로 나가자. 어디선가 창문도 열리지 않을 거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란은 무시한다. 불가능한 길일지라도 이 순간의 어둠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만 했다.
맞은 편에서 붉은 꽃잎이 흩날렸다. 또각이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걸어온다. 주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그는 얼핏 이질적이었지만, 란도 이엔도 그를 알고 있었다. 저택 홀에 크게 걸려있던 초상화의 주인이었다. 에르제베트. 그는 정중하게 치맛자락을 잡아 펼치며 인사를 건넨다. 계속해서 쫓아오던 것이 그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산뜻한 태도였다. 란은 무의식적으로 이엔의 앞에 나서며 팔로 그를 보호하듯이 숨겼다. 언뜻 지지부진한 대화였다. 차분한 태도로 이어지는 대화는 그저 죽음의 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주는 것에 불과했다. 피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으며, 그저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호즈노미야 란은 제 뒤로 이엔을 좀 더 바짝 숨겼다. 이 상황에서 그를 더 숨기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말을 전할 수 있을정도로 가까워지려는 마음이 더 컸다. 바짝 붙어온 이엔이 내쉬는 숨결이 언뜻 목덜미에 닿았다.
"이엔, 내가... 시간을 벌어볼테니까. 틈을 봐서 도망쳐."
속삭이는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이엔은 란의 옷자락을 더 세게 쥐며 고개를 젓는다. 눈물이 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란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싫어요... 형님을 두고 가지 않을래요. 그러기 싫어요... 가늘게 이어지는 애원에 란은 잠시 숨을 멈췄다. 힐끗, 시선을 옆으로 돌려도 이엔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네가 도망가줬으면 좋겠어."
란의 옷자락 쥐고 있는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손 아플텐데. 도피라도 하려는 듯 그런 사소한 걱정을 하던 란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그는 조금 힘이 빠졌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애써 눌러참아온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제 옷자락을 쥐고 있는 이엔의 손을 겹쳐 잡았다. 옷자락에서 떼어내자 완강히 붙잡고 있던 이엔이 결국 손을 놓는다. 란은 밀어내는 대신 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언제까지나 이 손을 잡고 있고 싶었다. 그가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호즈노미야 란은 줄곧...
"나는, 항상... 네가 불행하기를 바라왔어."
불행에 잠겨 있었다.
떨리는 이엔의 시선이 닿아오자, 란은 다정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것을 내어놓으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미소 뿐이라니. 그렇게 비참한 일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계속...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행하길 기대해왔어. 그러면 나도 불행해질테니까... 그 순간이 기뻐서."
사랑했던 사람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호즈노미야 란이 느낀 것은 모순적이게도 기쁨이었다. 상대가 불행한 만큼 그도 불행했다. 불행에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몸이 떨렸다. 배 안쪽이 욱신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다는 가장 원초적인 쾌감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호즈노미야 란은 그 감각이 광인의 것임을 알았다. 다정한 마음만을 남기고 싶었다. 미쳐버린 본성을 외면한 채, 사랑에는 사랑으로. 애정에는 애정으로. 기쁨에는 기쁨으로. 오직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지가 않아."
그는 남은 손으로 이엔의 머리카락을 살짝 쥐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에 남는다. 이엔은 고개를 들고 란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맺힌 눈동자는 금빛보다 조금 더 짙은 꿀색이었다. 언제나 애정을 담아서 란을 바라봐주는, 소중하고 상냥한 눈빛. 호즈노미야 란은 수많은 불행들의 무게를 재어보았다. 자신을 경멸하는 이엔, 혼자 남은 이엔, 죽어버린 이엔... 그 모든 것들을 재어보고 나서 이엔을 도망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을 표정이 두려워서.
"형님께서 바란다면... 불행해질게요. 제 불행으로 기뻐지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형님을 사랑하니까..."
"이엔."
"그치만 형님을 두고 살아남고 싶지 않아요. 이미 너무 많이 잃었잖아요. 최소한... 끝까지 함께 있어주세요."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형님이 죽으면 그게 더 불행할 거예요. 저는..."
차라리 같이 죽는게 나아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말을 하면서, 이엔은 붉은 꽃잎에 휩쓸렸다. 미소짓는 마녀와, 흩날리는 꽃잎과, 두 팔 가득 안겨드는 이엔이... 이엔?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마지막에 그는 웃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온전히 품 안으로 쏠린 이엔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란은 떨리는 손으로 이엔을 끌어안았다. 손바닥에 축축한 것이 묻어났다. 조금 뜨거웠다가, 곧 식어간다. 란은 이엔을 끌어안은 채. 그저 말없이. 마녀만이 웃고 있었다. 마녀만이 웃고 있던가?
"호즈노미야 란, 지금 웃고 있나요?"
차라리 같이 죽는게 나을거야. 그렇지? 속삭여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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