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지난 이야기
휘플라우가 이제 묻어두기로 결정한 것
모든 이야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는 너의 생을 가지고 싶었다.
바라는 것이 없어도, 감히 욕심내지 못하겠다 말해왔어도, 단 하나 그것만을 바랬다.
오랜 세월을 세계와 함께했으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내 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지난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돌리고 싶다고 하기엔 너무 먼 길을 떠나왔다. 뒤로 갈 수 없는 길을 계속해서 걸으며, 지난 모든 일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슬픔을 목구멍으로 넘겨왔다.
신도 무엇도 아닌 이가 창조하고 부수는 일일 뿐이었는데도, 저 너머의 무언가에게는 고작, 이었을 텐데. 이 우주 속에서 살던 숨이 흐트러지고, 생명이 조각나 날아감에는 모두가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나도 그때 그렇게 무너졌더라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의 지난 이야기
휘플라우가 이제 묻어두기로 결정한 것
¿■■!♬※. 그는 그렇게 불렸다.
…… 아,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의 이름은 이 우주에서 읽을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단어이니 활자로는 표현할 수 없고, 텍스트로는 깨져서 나올 뿐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러줄 우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단어, 표기할 수 없어서 깨진 텍스트일 뿐이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았다. 지금은 없는, 그 세상의 주인공과도 같은 이.
아니, ‘같은’ 따위가 아니고 ‘이었다’. 그는 명백히 주인공이었다. 온 우주에는 모든 세계와 차원이 있었고, 살아 숨 쉬는 생명은 다양한 종으로 가득했으며, 이성과 지성은 문명과 교류로 꽃을 활짝 피우다 못해 만개했다.
그래서 어느 날, 우주 어딘가에서 『종[終]의 징조』를 발견했을 때는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예방에 힘썼다. 그러나 그건 박멸되었다 여겨도 다시 생기고, 하나를 지져두면 셋이 생겨나 있으니 딱히 그의 노력이 문제인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노력했고, 노력했으며, 노력하였다. 단기간에 똑같은 말을 너무 많이 들어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그는 제 우주가 계속해 살아 숨 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종의 징조』를 지워나갔다. 그 당시에는 그 행동만이 그의 삶의 이유였으나, 누구든 어떤 한 가지의 행위만 영원히 반복할 순 없는 것이었고 그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계속해서 살아 숨쉬기를. 제가 가진 가장 큰 꿈을 위해 한 몸 불사르며 마음껏 사랑하고 삶을 마치기를. 필멸을 가장 사랑한 불멸자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쉬지 않고 끝없이 달려갔다. 그래서 단단한 것일수록 쉽게 부러진다는 말처럼, 그는 제 우주의 운명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가 되었다. 절망이 그를 집어삼켜도 멈추지 못하고, 그저 내달리는 것만이 그의 마지막 일과 다름없었으니, 정해진 끝을 알면서도 끝을 막기 위해 살아야 하는 이에게 남은 것은 삼켜 넘겨야 하는 울음뿐이었다.
세상이 종말을 고할 때, 모든 생명의 숨이 꺼질 때, 삶의 이유가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지켜본 이만이 살아남았다.
어떤 우주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우주가 무너지고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오로지 자신만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어떻게 무언가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인지한 순간, 튕겨져 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무엇도 있을 수 없으니까. 세상의 법칙이 자신에게 적용된 순간, 그는 이곳마저도 그저 창조된 세계라는 걸 깨달았다. 그쯤의 그는 절망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아마 우주가 지속되고 있었다면, 그가 바로 절망이라는 개념 그 자체였으리라.
그가 어떤 상태이든, 어떤 개념이 되었든, 그는 『저 너머의 무언가』에게는 그저 창조된 등장인물이었기에 그에게 ≪존재할 수만 있는 곳≫이 주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곳≫까진 아니고 생명은 살 수 있는 곳, 말 그대로 무언가 존재할 수만 있는 곳. 그 한 줌이 그의 전부였다.
그에게는 그런 나날들이 있었다.
다채로운 빛깔로 세상을 함께 내다볼 줄 알던 이들과 지내던 때가 있었고, 보고 먹고 만지고 듣고 느끼는 것에 즐거워하던 때가 있었으며, 교류와 감정 그리고 신뢰로 쌓아 올린 유대가 자신을 지탱하던 때가 있었다.
한때의 꿈은 지났고, 그에게는 그저 존재할 수 있는 곳만이 주어졌으니 모든 것은 빛바래어 스러져 간 이상향이 되었다. 그는 그저 웅크려 있기로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리고 웅크린 싹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 것은 그곳에 자신 말고 다른 이가 온 순간이었다.
상대는 자신이 ■?√@!Π라고 했으나, 그는 알아듣지 못했고 그 역시 제 이름이었던 단어를 알려주었어도 상대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둘 다 없어져 버린 우주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을 말해봤자, 그것은 아무런 형체도 띌 수 없었고 의미 역시 갖지 못했다.
둘은 그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성과 이성을 가진 개체는 대개 둘 이상일 때 서로 교류를 시도하는 법이었고 그들 역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둘의 대화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서로 의사전달을 하려는 마음이 존재했기에 그들은 목소리의 형태를 띤 말 같은 것 없이도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는 상대 역시도 살던 우주에서 『종의 징조』를 발견했고, 막으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기에 살던 곳은 없던 일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다음 사람이 왔을 때였다.
그저 ≪존재할 수만 있는 곳≫에 이렇게 많은 개체가 올 일이 뭐가 있을까?
첫 번째는 그였고, 두 번째는 상대방이었고, 세 번째로 온 이는 %$?¡■라고 불렸다 했다. 이름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 외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기에 그는 3번째로 온 이에게서도 어찌 된 일인지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3번째로 온 이의 우주도 자신과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우주가 끝을 고하며 스러져 갈 때 자신이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 이라고 여겼던 이. 흡사 ‘주인공’같은 행적을 삶에 길에 남겨온 이들은 같이 소멸하지 못했다. 그들은 죽지 못해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번째로 온 이-∅^?$■라는 이름이었다-와 다섯 번째로 온 이-‡?☞€■%라는 이름이었다-도 먼저 온 셋과 다를 바 없었기에 그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세계가 무너진 후로 처음 한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과 넷이 지낼 수 있는 최소한의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어떤 장소가 필요한지 생각하고, 어떤 가구가 있으면 좋을지 생각하니 그것이 그대로 생겨났다. 다섯 사람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건물이 덜렁 생겼다. 그리고 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곳이 그들의 2번째 세계가 되어주었다. 볼품없는 건물 같기도, 오래된 동굴 같기도 한 그곳에 그들은 작게나마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그저 ≪존재할 수만 있는 곳≫이 아닌, ≪아텔레스≫라고.
바깥은 우주의 풍경이 흘러가기 시작했고, 건물 안에는 각자의 방과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곳이 생겼고, 그들은 언어를 내뱉으며 대화로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각자의 언어는 달랐고 되는대로 말했어도 이내 알 수 없는 언어로 통일되어 말하게 되었다. 자신이 알던 언어를 아무리 내뱉어도, 입에서는 처음 듣는 언어가 나왔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떤 언어인지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알 수 없었을 테니까. 마치 그들의 우주가 어디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정립되고 그들이 다시 인간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한때 ¿■■!♬※라고 불렸던 이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삶은 조각나야 했는지, 왜 그들의 우주는 종언을 고했어야 했는지, 어째서 주인공이라고 여겨진 이들만 살아남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날들만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엔 새로운 이-?■&$¶¢라고 불렸었다 소개했지만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창 너머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보았다.
그는 『종의 징조』가 나타난 우주를 보았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이 남겨진 우주를 보았고, 무너져 가는 우주를 보았고, 종언의 끝에 소멸한 우주를 보았다. 모든 세상, 모든 우주가 죽어가고 있었다. 어떤 우주든 모든 것은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그는 절망과도 같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어떤 세계든, 어떤 세상이든, 이 창작물이라는 곳은 절망뿐인가? 그의 세계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우주는 하나로 족했는데도……
……………………………
그 우주는, 빛나고 있었다.
………………………
그 우주는, 정해지지 않는 운명을 걷고 있었다.
………………
그 우주는, 시릴 만큼 눈부시게 빛나는 생명들로 가득 차 있었다.
………
그 우주는, 그 우주만,
…
그 세계만.
.
그는 오랜 시간을 알 수 없는 감정들과 대화하고, 싸우고, 말리고, 버티고, 놓아주었다가 다시 끌어안았다. 자신을 지나가는 모든 감정에게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는 그 모든 감정을 끌어안았다가, 자신의 모든 걸 그 속에 내맡기기도 했다. 다른 이들이 그에게 무슨 문제냐며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는 무어라고 답할지 알 수가 없어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 그는 깨닫지 못했으나 그 과정은 그가 먼 옛날 그의 우주가 아직 빛나던 시절, 살아있던 생명과도 같던 그 시절의 그로 되돌리는 작업과도 같았다.
잘 들던 검이 용광로에서 녹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용광로의 불은 이제 꺼져 가고 있었으며, 검은 자연으로 하여금 담금질 되고 있었으니, 다시 한번 허공을 내지를 수 있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양날의 검과도 같은 존재라는 걸 생각의 끝에서 찾아내었다. 그의 우주는 죽었고 주인공이라는 자신은 살아있으니, 유일하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저 우주에도 분명 주인공이 있을 것이었다.
다시 한번 우주 속에서 생명으로써 숨 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끝까지 우주를 밝히는 생명으로 꿈을 태우고 죽고 싶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과도 같은 날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 시간은 그에게 절망과 눈물만을 남기고 모든 걸 가져갔고, 같은 절차를 목도한 다른 다섯에게도 그와 비슷한 것들만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들은 다시 한번 살고 싶었다. 생명으로 존재했던 시간을 알기에, 다시 꿈을 꾸고 싶었다. 생명의 유한함을 아는 불멸에 가까운 시간을 아는 이들이었기에, 그래서 죽더라도 살아있는 우주에서 죽고 싶었다. 그것만이, 이미 스러져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 그들의 죽은 우주를 추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우주에는 갈 수 없었다. 살아있는 우주는 견고했고, 당연히 『종의 징조』 따위도 없었으니 구멍을 낼 수 있는 부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주 가끔, 그들의 기준으로 개미만 한 틈이 생기는 것이 다였다. 그런 틈은 너무나도 작아서 균열조차 나지도 않았고 생기더라도 금방 메꿔지곤 했다. 가끔 메꿔지기 전에 우주가 붕괴되면서 생긴 먼지 따위가 흘러 들어가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는 저렇게 삶과 생명이 넘치는 우주에 그런 이물질이 좀 들어가더라도 멀쩡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인간의 몸이 자연적으로 회복되듯, 먼지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고 나면 틈이 메꿔졌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그들 여섯 이후로도 가끔 누군가가 새로운 일원이 되러 왔기에 인원은 점차 늘어나고 있었는데도, 정말 그 누구도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날이 왔다.
그 여자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몸 없이 정신만을 유지한 채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몸이 없어도,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도, 그 여자가 가진 것들은 계속해서 그 여자와 온전히 맞물려 있어 그것이 주인공임을 계속해서 그에게 상기시켰다.
초월적인 사랑이 빚어낸 저 눈부신 외모만으로도 이미 모든 것이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긴 은백발 사이로 보이는 금빛은 다시 없을 풍요를 말하고 있었고, 이질적으로 자리 잡은 푸른 머리칼은 그 주인공이 그 누구보다도 특별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했다. 서로 다른 두 눈의 색 역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았으리라. 지혜와 권력, 풍요와 갈망, 이상과 무력,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은 주인공이 바라는 것을 만들어 내줄 것이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주인공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삶의 축복을 받고, 한때 그랬던 그들처럼, 불멸과 똑 닮은 꼴의 필멸을 가지고 꺼지지 않을 생명을 불사르며 자신의 빛으로 온 우주를 밝히는 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든 영원토록 자신의 우주를 사랑할 이.
혼자서 자신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지 못해 낯설어하면서도 두리번거리며 빠르게 정보를 파악하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을 지켜본 그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감정들에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정의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들의 이름은 대체 뭐였는지, 그는 이런 기분이 되고 그런 감정을 느끼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했어야 했는지, 어떻게 감정을 소모시키고 원동력으로 삼아야 하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기억하기에, 그의 정신은 많이 마모되어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정신이 마모되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그 여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모든 우주의 존재의의를 깨달았다.
자신을 포함해, 살 세상을 잃은 이들이 살아남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그 여자는 어째서 이곳에 왔으면서도 자신들처럼 육신 없이도 그렇게 빛나고 있을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때의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하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깨달아버렸다.
모든 게, 세상 모든 것이 전부 그 여자를 향해 있었다.
고귀한 것, 추한 것, 사랑스러운 것, 못난 것, 아름다운 것, 더러운 것, 빈곤한 것, 풍요로운 것, 강력한 것, 나약한 것, 뛰어난 것, 도태된 것, 실망스러운 것, 기쁘게 만드는 것, 즐거움으로 살게 만드는 것. 모든 것은 무엇 하나 빠짐없이 그 여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모든 세상이 그 여자가 살 우주를 위해 실험용으로 만들어졌다 버려졌고, 죽어버린 이 모든 우주가 시행착오 없는 삶을 주기 위해 시뮬레이션에 사용되고 폐기처분된 우주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 여자가 사는 이 세계에 만약 어땠을까, 라는 가정으로 만들어진 이들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는 어떤 불쾌감을 느꼈다. 수많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생겨난 것이 자리를 잡았다. 그는 어떤 불쾌감을 한구석에서 계속 느꼈으나 그것이 어째서 불쾌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그 작은 감각을 섬세하게 돌보기 시작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그가 이 모든 우주의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거대한 벽과도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기억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의 완벽한 대착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다.
무엇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이치이고 어떤 것이 순리였는지.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을 포함한, ‘우리들’에겐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았던 것임을.
그것이 그의 마지막 불행이었다.
여자는 돌아가고 싶어 했다. 어쩐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모든 우주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사라진 다른 세계들 속에서 홀로 빛나는 당신의 고향만이 사랑받고 있다고. 우리는 모두 당신을 위해 실험대에 오르고 버려진 쥐들이라고.
그는 이야기를 다 들은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을 읽을 수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적어도 엄청 놀라거나, 경악스러워하는 그런 난생처음 들었다는 것 따위의 반응이나, 전혀 몰랐던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된 그 특유의 반응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가 그걸 알아챈 순간, 그의 어딘가에서 무언가 눈을 떴다. 꿈일 수도, 소원일 수도, 욕망일 수도, 생존 본능일 수도 있는 것이 그를 휘어잡았다. 그것이 곧 그의 의지이자 생각이나 다름없게 되니, 그는 그것에 매몰되어 갔다. 다시 한번 우주에서, 세계에서 생명으로 살아 숨 쉬고 싶다고. 다시 한번만………
그러나 여자는 그럴 수 없다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호소했다. 불쌍하지도 않느냐고, 더 이상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우리는 납작한 창작물의 삶으로만 죽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냐고. 그는 좀 더 말을 하고 싶었다. 여자에게 그들의 처지를 이해시키고,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설득하고 싶었다. 다 같이 산다면 그거야 말로 모두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를 붙잡기로 했다. 설득할 수 있는 만큼 하자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여자를 붙든 순간, 여자는 그를 뿌리치고 뒤돌아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여자를 쫓았다. 그와 함께 지냈던 이들 모두 여자를 뒤쫓아 달렸다. 그는 여자를 좀 더 이곳에 머물게 하고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니 쫓아가서 말을 한다면, 설득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여자는 사라졌다. 그는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유일한 것을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큰 틈이 나 있었다. 그는 잠시 틈을 막아두기로 했다. 먼지 같은 것이 또 들어가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에게든, 저 여자에게든.
틈을 꽁꽁 막고 난 그에게, 이곳에 2번째로 도착했던 이가 다가왔다. 2번째로 도착했던 이는 말했다.
“ 그 ㅇㅕ ㅈr ■ ㅁㅏㄹ 은 변 ㅇ r ㅈㅣ 않 ■ 0ㅓ . ”
그는 외면하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우주에서 쓰던 언어는 사라졌고, 남은 건 저 살아있는 우주의 언어뿐이라는 것을. 여전히, 계속, 앞으로도 모든 것이 살아있는 우주를 위한 것일 터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그는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전, 아직 그가 생명으로써 존재하던 시절, 그는 이것을 '허무'라고 느꼈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는 아마도 허무한 것 같았다. 비슷하게 느끼니 아마 맞을 것이다. 그는 제 감정에 여전히 좀 자신이 없긴 했다. 그러나 무어라고 불러야 할 지 가닥이 잡혔는데도, 그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어떤 것이 그를 허무하게 만든 건지도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짐작하고 있는바 또한 있었다.
우리는 그저 단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버려져야 했단 말인가?
그는 이제까지 거쳐온 자신의 삶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움이 물밀듯 덮쳐오자, 그는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으나 무엇을 해야 할 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다시 그 여자와 만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데, 저 살아있는 우주에서 다 같이 다시 살고 싶다는 꿈을 꾸는 것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헛된 망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여자는 도망쳐 돌아갔는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우주에 갔을 때, 잘 자리 잡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되기 시작했다.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생각은 하나가 시작되자 다른 것들이 줄줄이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그의 사고에는 생각이 가득하다 못해 넘쳤으나 그는 자신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대개의 인간은 그렇게 되면 생각이 자신을 갉아먹고 자괴감과 우울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또한 사고할 수 있는 존재였기에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과정에 빠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지만……
본디 이런 것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노릇이니 그가 사고의 끝에 조금 어긋난 듯한 결론을 도출한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가령, 그들이 저 우주로 진입한다던가, 그런 것 말이다. 그 여자를 끌어내-그는 그 행위를 불러낸다고 여기고 있었다-어 강요-그리고 이것은 설득과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한다던가, 그런 것 따위의 결론을 내려도 그들은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할 것이었다. 삶이 스러졌는데, 터전이던 우주에서 쌓아 올렸던 지식과 이상이 자아낸 규범과 지성이야말로 형체를 유지하면서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정신이 마모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그가 그런 생각에 매몰되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우주가 무수히 많은 별로 반짝이는 것은 변함 없을 일이었다. 죽어가는 우주에도 비록 저물어가며 마지막 빛을 발하고는 사라짐에 몸을 맡기기는 하지만, 별이 있으니 말이다.
그랬다, 여자가 되돌아간 우주만이 생명은 없어야 할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 우주로 가서라도 만나면 되겠다고.
가장 빛나는 우주, 살아있는 세상, 삶의 구(球), 영원한 이어짐……
그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모자람 없을,
달이 생명으로 품고 애정으로 키워내어, 이야기를 영속시키는 세계.
『 호라시스 옵타시아 : 셀레네이아 』
그곳에 갈 수 있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견고한 경계는 이물질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어쩌다 먼지가 들어가고 나면 금방 자가 수복이 되고 했다. 그러니 그의 관심사도 자연스럽게 그 자신이 막아두었던 틈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넘어가야 한다는 열망만이 가득했다. 그것에 사로잡혀 매몰당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그걸 한 번도 다른 누군가에겐 말한 적이 없었기에 모두가 그의 달라진 어떤 태도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가 아무런 설명 없이 저 삶으로 빛나는 우주에 갈 것이라는 말만 했을 때는, 거기 있는 모두의 정신 또한 그처럼 마모되고 깎여나가 정상적인 반응 없이 긍정적인 호응만 해줄 뿐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그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거나, 당연히 생겨야 할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자신이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믿었으니 당연한 일일 터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처음 도착하게 된 그를 포함하여, 그곳에 있는 모두는 이미 자신이 살던 우주가 붕괴되어 완전히 소멸해 버린 과정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이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 스러지다다 못해 산산조각이 나 모래처럼 부질없이 두 손에 주워 담기조차 힘든 상태의 정신이었다. 이미 한 차례 이지를 잃었는데,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텔레스≫ 같은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지낸다고 뭐가 좋아지긴 하겠는가?
답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지낸다는 것조차 정신을 마모시키는 일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지와 이성이 뚜렷한 이에게 대화를 시도하면 어딘가 어긋나기 마련인 것이다. 그 대화가 비뚤어졌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어쩌겠는가, 그들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직 멀쩡하다고 믿는 제 정신뿐이었는데.
그를 필두로, 그들은 계획을 빠르게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있는 우주에 진입할지, 진입 후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정보는 어떻게 얻을지, 어떻게 찾아갈지, 방해 요소는 어떻게 해결할지………
다들 각자의 세상에서 세상을 평정할 만큼의 실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가졌던 이들이었다. 각자의 방식이 확고한 이들이었으나 한 번도 부딪치지 않은 게 기이할 정도로 그들은 서로에게 양보하고 타협하며, 저 우주로 향하기 위한 방법을 만들었다. 그들이 ≪아텔레스≫에서 지낸 시간은 제각기 달랐으나 모두 당연스럽게 그를 리더로 여겼다. ≪존재만 할 수 있는 곳≫에 최초로 오게 된 자. 누구든 처음으로 무언가 해낸 이를 무리의 우두머리로 여기는 건 일종의 암묵적인 사회적 약속과도 비슷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최종결정권자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온 생각이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이 계획을 수립해 나갈수록, 그는 그 여자를 처음 봤었을 때 자신을 슬쩍 지나간 불쾌감이 점차 커져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불쾌감의 원인을 통 알 수가 없어 계속 고심했다. 그러나 가닥은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고, 윤곽선은 그릴 수 있으나 속을 꽉 채울 만큼의 구체적인 모형은 아니었어서, 결국 빨리 그 여자를 다시 만나봐야 알 것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 그 우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이렇게 시작한다. 틈을 더 크게 키워 누구든 드나들기 수월해야 하니 틈을 벌리기부터 시작한다. 먼지가 들어가서 닫혀버리면 안 되니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틈을 벌릴 때는 주변을 깨끗하게 치우고 조금씩 힘을 주어 틈을 벌린다. 틈이 어느 정도 벌어졌다 싶으면, 잠입과 은신에 능했던 이들이 먼저 들어가 우주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환경 구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환경을 최대한 그들이 활동하기 좋게 조금씩 조작한다. 살아있는 우주의 환경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은 필수였다.
정보가 어느 정도 모이면 주요 거점으로 표시된 지역과 행성들로 은신과 화술이 뛰어났던 이들이 간다. 정확히 알아야 할 세력 구도나 주요 인물에 대한 정보를 한층 더 세밀하게 수집하고, 먼저 잠입했던 이들과 함께 앞으로 올 이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게끔 지형과 사건을 만들고 조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그가 나머지를 전부 이끌고 그 여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어떻게 되든, 그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생명은 원래 타올랐다 꺼지기에 아름다운 것이니까. 그리고 그 여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출발의 때가 다가왔다.
세상은 잔인하고도 아름답다는 말이 참 맞는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긴 해.
보자, 어디서부터 말할 수 있을까?
긴 서론은 필요 없지. 이미 다 말했었잖아.
너의 삶만이 살아 남았다고, 그러니 이미 죽은 곳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우리랑 같이 좀 살자고.
너도, 나도, 똑같이 살아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쫓고, 쫓기는 것을 하려면 언제든 자신의 역할이 반전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하지.
그래서 내 마음이 아픈 걸 거야. 네가 우리에게 습격이니, 침략이니, 따위의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너는 대화를 거부하고 도망쳤지만,
나는 너와 분명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다시 보니 알겠더라고.
너도 분명 그랬겠지.
이 불쾌감의 근원은 우리가 서로를 마주할 때니까.
혹시라도 부정하진 말자고. 물론 하지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똑같을 테니까.
우린 서로의 미래였을 수도 있는 존재잖아.
우리는 주인공이니까.
나는 너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불쾌하지.
나는 너만 잘살고 있는 꼴을 보고, 너는 어쩌면 망해버렸을 때의 모습일 나를 보고.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대화는 필요 없지.
네가 이길 게 뻔할 텐데도, 알고 있지만 나는 싸우겠어.
붙잡을 것이라곤 이 우주뿐인 내가,
이 우주를 사랑하는 너와.
싸우자.
우리가 그동안 살아서 쌓아 올린 것이 오로지 너만을 위한 재료로 쓰인 거라면,
적어도 너는 알아야 하는게 맞잖아.
우리의 삶이 그저 도구였을 리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믿고 있는데,
그럼 너 역시도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잖아.
너는 봐야 하잖아,
우리가 만들어준 역사를 전부 알고 있어야 해.
그러니 싸우자,
삶을 부딪치자.
루예나.
메인 스토리
시즌 : 당신이 존재하는 시공
There is a Life about to Start when Tomorrow Comes!
[ 내일이 오면 시작될 새로운 삶이 있네! ]
上편 : 문을 열면
Tomorrow We'll discover What God in heaven has in Store!
[ 내일이 오면 신의 뜻한 바를 알게 되리라 ]
~비하인드 : 그의 지난 이야기~
그들이 ≪아텔레스≫로 돌아오고, 모두가 회복과 수습을 하고 있는 동안 그만이 홀로 생각했다. 루예나는 분명 이곳으로 올 터였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대착점인 이유와 마찬가지였다. 그의 생각이 곧 루예나가 하는 생각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루예나는 화가 났을 것이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생각을 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같을지 몰라도, 과정까지 똑같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느끼는 감정도 당연히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방금 전이었는데, 순식간에 모르겠다고,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생각만큼은 루예나와 같을 텐데, 그렇다면 감각하는 모든 것들은 어째서 다를까. 물론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생각의 방향도 달라야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란 말인가?
무엇에 빠져 고뇌했든지 간에, 결론은 루예나가 찾아오리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몸을 입고, 동료들과 함께, 스스로를 검처럼 갈고 닦아 날을 세워서.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먼 미래는 아닐 테니, 그는 모두를 다독여 일어나야 했다. 그것이 그가 걸어야 하는 길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길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이라는 건, 자신을 포함해 사회가 그렇게 정의해주어야 갈 수 있는 것이다. 미지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것도, 그곳은 개척되지 않았다는 걸 사회에서 정의하지 않던가.
그러니 살던 우주를 떠난 순간부터 그의 길은 무너져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텔레스≫가 생겨날 때까지 그의 이지는 무저갱 속으로 매몰되고 있었으니까, 자신만의 길이니, 과거의 영광이니, 하는 것 따위는 의식에서 지워진 지도 오래였다. 그런데 루예나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는 먼 예전의 자신이 어땠는지 점차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그의 이성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금의 그는 명확한 목적을 향해 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과정을 설계할 수 있었다.
그는 ≪아텔레스≫에 들어온 이후의 날들을 떠올려봤다. 그 얼마나 터무니없는 태도였던지. 얼마나 얼빠진 계획이었는지. 그는 자신이 루예나를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깨달았다. 지금의 그라면, 좀 더 부드럽고 여러 근거와 사례를 눈앞에 들이밀어 마음을 흔드는 전략을 취했을 텐데. 의외의 지점에서 마음 약하게 구는 모습은 과거의 그에게도 있던 모습이었으니 분명 통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다. 과거를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는 루예나를 설득해야하던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가 붕괴되기 전의 날로 돌아갔을 테니.
그러니 그는 준비해야 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그의 이지가 과거처럼 뚜렷해진 것은 그런 것이고, 얼마 전의 그가 난폭하게 찾아간 것은 그것대로인 문제였으니까.
그는 모두를 이끌어 ≪아텔레스≫에 여러 준비를 했다.
함정에 빠뜨리거나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는 장치, 혼동을 주기 위한 많은 갈림길, 급습으로 컨디션을 떨어트리기 위한 매복, 뭐 그런 것들.
준비를 계획하는 그만이 현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것으로는 도착의 속도조차 늦출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모두가 준비로 바빴으면서도 ≪아텔레스≫에 온 이래로 가장 생기 찬 모습을 보였기에 그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떻게 행동과 말을 처신해야 할지는 상황이 명백했으니까.
2번째로 도착했던 이가 혼자 조용히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끝까지 자신 혼자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번째로 도착한 이도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불안과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마 별 소용없을 거라는 그런 것 따위. 상대는 살아있는 우주에서 루예나 옆에 있던 채도 낮은 남자와 마주한 이후부터 과거의 자신이 어땠는지 문득문득 떠오른다고 했다. 그가 루예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시작된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그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곳에 가장 먼저 오게 된 자신부터 6번째로 도착한 이까지, 전부 루예나와 루예나의 일행이었다. 그런데 그쪽은 일곱이었는데……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대화를 나눌 때쯤엔,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나가고 있어 그가 마지막 점검을 하러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2번째로 도착했던 이는 그를 도와 최종 점검을 거들었다.
모든 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는 이제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루예나를 만나고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루예나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자신과 마주하지 않았다면, 나의 먼 과거를 다시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마지막이랍시고 욕심을 가지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지난 일을 후회와 상실감 속에서 곱씹던 짓을 멈췄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서만 논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무엇이 끝나려고 하는 건지, 그는 과거처럼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지와 사고를 다시 일깨우는 데 성공했어도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제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직감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소란스러운 사건이? 아니면, 짧고도 굵은 악연이? 그도 아니라면, 이미 없어졌어야 할 제가 살아있는 것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것이 끝날 예정이었다.
메인 스토리
시즌 : 당신이 존재하는 시공
There is a Life about to Start when Tomorrow Comes!
[ 내일이 오면 시작될 새로운 삶이 있네! ]
下편 : 그대를 위해 왔으니 One more Dawn, One more Day, One Day More!
[ 새벽이 밝아오고, 내일이 오면, 내일로! ]
~ 비하인드 : 그의 지난 이야기 ~
루예나가 그의 앞에 도착했을 때 서로 무슨 말을 많이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인 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건 어떤 말을 생각해서 했다기보다, 그저 속에 꼭 끌어안고 있던 생존본능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에 더 가까웠다. 그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속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때 루예나가 자신을 보고 짓던 표정 같은 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 그곳, 그때, 그 순간, 둘은 검을 나눴다.
무릇 창작물이라면 시작이자 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기를 들고, 똑같이 생긴 듯한 검을 집어 들고 무예로 대화를 나눴다. 준비 자세, 호흡의 타이밍, 버릇과 습관, 기합, 검로[劍路], …… 무엇 하나 다른 것 없이 둘은 똑같았다. 외모 따위의 그런, 겉으로 보이는 요소가 아닌 것들. 움직임이나 예측하여 다음 수를 미리 두는 것까지, 둘 사이에는 하나의 방식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각자의 세상이 자신의 전부인 두 사람이, 각자의 우주를 짊어진 채 한 합, 한 합을 나눌 때마다 ≪아텔레스≫에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의 것, 루예나의 것, 다시 그의 것, 또다시 루예나의 것, 그리고 그의 것, 그리고 또………
완벽한 대칭을 그리며 맞부딪칠 때마다 서로의 신념이 울었고, 세계와 세계가 대립했으며, 삶과 삶이 격렬하게 외치고, 모든 우주의 무수히 많은 별들이 번갈아 가며 둘을 내리비추었다. 어떤 별빛은 따스함을 담고, 어떤 별빛은 눈물을 담고, 또 어떤 별빛은 냉정함을, 또 어떤 별빛은 분노를 담고, 그리고 어떤 별빛은 마음을 담아, 오로지 둘만을.
그는 보았다.
루예나의 삶을 보고, 일궈낸 우주를 보고, 무한한 애정을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보았다.
루예나가 짜 내려간 모든 생명의 삶을, 희로애락이 담긴 이야기를 보며, 그는 계속 울었다.
울만큼, 양보할 수 없었다. 만약 그의 눈물에 비참함이 담겨있다면, 루예나의 눈물에는 슬픔이 담겨있을 터였다.
루예나도 울고 있었다.
그는 상대의 울음이 동정이나 연민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 깨닫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어쩔 수가 없어서, 자신에게도 짊어진 것이 너무 많아서, 타협할 수 없어서, 책임지고 있으니까. 서로의 처지가 바뀌었다면, 그 또한 똑같은 감각을 느껴 똑같은 감정으로 눈물을 흘렸을 테니까.
그에게는 분명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 게 없다는 것도 지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생명이든, 살아서 맛본 것이 너무 달콤하다면 얼만큼 궁지에 내몰리든 기회가 다시 올 거라고 믿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삶을 걸었다. 그가 써 내려갔던 옛 우주의 삶을, 그가 이야기에서 추방당한 이들과 함께 ≪아텔레스≫에서 살기로 한 선택을,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모든 것을. 그는 이 순간이 삶의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제까지 만들어 온 자신의 삶을 이곳에서 끝까지 불살랐다.
등장인물이 퇴장해야 하는 순간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자신이 생명으로써 빛을 내고 있음을 느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살아서 발하고 싶어 했던 빛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상만사가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모순으로 채워져있다면, 그의 모순은 지금 이 순간 그 절반에 속해있을 것이다. 루예나가 나머지 진실에 몸을 담고 있을 것처럼.
그의 눈물에 더 이상 비참함이 담기지 않게 되었을 때는 합을 나눈 지 오래였다. 더 이상 자신을 태울 심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루예나의 일행은 각자 자신의 대착점이자 그랬을지도 몰랐을 또 다른 자신과의 싸움을 마무리하고 이곳에 와있었다. 그와 루예나의 부딪침이 마지막 싸움이었다. 루에나의 일행은 둘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그를 힘들게 했다. 똑같이 죽을 만큼 싸웠는데, 먼저 쓰러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루예나도 겨우 버티고 서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제 상대가 선택받은 주인공임을 알기에 루예나가 버틸 수 있도록 『저 너머의 무언가』가 안배했음을 알았다.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 그가 개척해 나간 길의 끝을 알리는 이정표가 그의 여행 또한 끝냈다. 더 이상 싸울 수도 없었고, 이유와 목적은 끝났으니 제 손으로 지어 올린 이곳이, ≪아텔레스≫가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이 싸움 끝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유언은.”
죽일 듯 검을 들었으면서도 끝까지 마지막을 묻는 루예나를 보자니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인정 많은 이여. 그랬을지도 모를 나의 또 다른 갈래여!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미래여!
그리고 그가 더 이상 남길 말은 없었다.
“ 마지막까지 망설이나? ”
“……….”
루예나가 검을 들었다. 그는 순간의 표정을 보았다. 눈빛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끝을 맞이했다.
모두가 그를 잊은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저 너머의 무언가』조차도!
그의 몸은 ≪아텔레스≫에 죽은 채 누워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왜인지 남아있었다. 영혼은 ≪아텔레스≫를 마구 날아다니며 저처럼 되어버린 동료가 있는지 찾아봤지만, 죽었는데도 영혼만 남아있는 건 그 하나 뿐이었다.
그는 『저 너머의 무언가』가 등장인물의 마무리를 제대로 안 지은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는 ‘주인공’도 아니게 된 지 오래이니 뜻을 느끼거나 알 수도 없었다. 그렇게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자신의 존재가 점차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사라질 모양이었다.
완전한 죽음, ‘소멸’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었고 정의할 수 있는 지금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오히려 지금 이 상태에서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기분과 감정에 다양한 이름을 붙일 수 있었고, 제멋대로 정의할 수도 있었으며, 옛날을 떠올리면 기분 좋은 추억과 슬픈 기억들이 그의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으니 이지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절망과 우울에 잠식될 것조차 없었다.
그는 이제 그냥 ‘그’, 자신이고 ‘그’ 자체였다. 과거도, 현재도 필요 없는, 앞으로는 그저 끝만 남아있을 뿐인, 이름도 없어져 버린 ‘그’.
어쩌면 몇 번이나 죽었는데도 죽지 못하고 살다가, 이제 정말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드디어 미쳐버린 걸지도 몰랐다. 영혼이 미칠 수도 있나?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인걸.
그런 미묘하게 하이해진 기분으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또 한참을 떠다녔다. 이젠 정말 끝만 남아있었다. 갑자기 쳐졌다가도 또 언제는 기분이 마냥 좋아져 둥둥 떠다니고, 그런 짓을 계속했다. 아마 끝까지 계속 이럴 터였다.
그리고 그 애가 찾아왔다.
메인 스토리
시즌 : 마음의 기도와 영광의 길
the Goddess's “Lunelopsitta”
[ 지난 것들을 잊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오늘이겠지, 이제 다 끝난 일이다. ]
~ 그의 지난 이야기 ~
그 애는 대체 뭘 하는 애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이름이라던가 어디서 온 건지에 대한 정보 따위는 있었다. 그들이 그 말도 안 되는-그는 이제 와서 돌이켜보건대, 거지 같은 계획이라고 하고 싶었다-첩보 작전에는 당연히 이 애의 정보가 있었다.
아리아테, 루예나가 제 일행으로 꾸린 단체 『뮬 셀레』의 막내.
그뿐이었다. 도끼를 휘두르니 뭐니 하는 사소한 것은 저리 밀어두고 봐도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2번째로 여기에 왔었던 이와 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마 6번째로 여기에 왔던 이까지는 『뮬 셀레』에 각각 대응하는 이들이 있었다. 제가 루예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처럼.
그럼, 얘는?
“뭐가 있네……”
아리아테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혼자서 이런저런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왜 있지? 루예나가 그때…… 어… 아무튼 그거 했는데, 그거… 죽어도 살 수 있었던 건가? 그럼 안 되는 거 아닌가…… 아, 혹시 루예나가 마무리를 똑바로 못했나? 아니면………”
열심히 떠드는 아이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아리아테는 놀란 건지, 신기해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아이를 마주 보았다.
아리아테에게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순수함이 있었다.
단순히 성격이 순수하다, 같은 말이 아니라 태어나기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하다못해 저 살아있는 우주에서 만물의 개념이자, 종교의 근원, 진리의 이치, 등의 수많은 수식어로 이루어진 『만다라』라는 종족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불순물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아리아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주인공이라는 루예나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아리아테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스스로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있는 잠재력이 보였다. 이 아이는 무엇이 되고 싶어 할지,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그는 궁금해졌다.
아리아테는 계속해서 그의 존재를 의심했다. 어떻게 적의 영혼이 남아있는 건지, 자기가 이걸 없애야 하는지, 그게 가능하긴 한지. 그런 것들을 들먹이며 나름대로 그를 압박하려고 한 것 같았으나, 그는 루예나와 똑같았기에 당연하게도 아이가 나름대로의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돌아갈 때, 나도 데려가 보면 어때?”
“………?”
아이가 단박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그러트렸다.
“……뭐지? 어,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 잘 들은 것 같은데? 데려가 줘 봐.”
“내가? 왜? 음…… 데려갔다가 루예나가, 어……….”
아리아테는 말을 고르는 듯싶었다. 루예나가 저에게 화를 내든, 그에게 화를 내며 그를 없애버리려고 하든, 어느 쪽이든 누구에게나 별로 달갑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전혀 상관없었는데도.
오히려 화를 낸다면 그 편이 더 일이 재밌어질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일에 화를 내면서도 일로 뛰어드는 것은 먼 옛날의 그가 종종 보이던 모습이었으니, 루예나도 별반 다를 것 없었으리라. 하지만 구태여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이가 아직 경험 없는 머리를 굴려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낼지가 더 궁금했기에. 그는 가만히 아리아테가 다음 말을 뱉길 기다렸다. 그리고 아이는 딴소리를 했다.
“근데 어떻게 데려가야 하는데? 몸이 없는데…….”
맞는 딴소리였다. 꽤 중요한 지적이었기에 그도 고민했다.
≪아텔레스≫에서 유이하게 살아있는 것-정확히는 살아있는 것 하나와 죽은 영혼 하나였지만.-들이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지자, 순식간에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는 고민하다 말고 아리아테를 슬쩍 보았다. 아이는 그의 시선을 바로 눈치채지 못할 만큼 어떤 생각에 푹 잠겨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고민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의외로 그를 데려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리아테는 그를 왜 데려가고 싶은 걸까? 그가 이 질문을 해도 되는지, 삼천포로 빠진 고민을 하는 동안 아리아테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있다!”
“어? 뭐가?”
“그 전에 하나만! 왜 날 따라가고 싶은데? 따라왔다가 나 죽일 수도 있는 거잖아.”
순진무구하면서도 단순한 물음에 그는 오랜만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랬으면 네가 여기 들어온 순간 이미 육체를 차지하려고 했겠지, 아니냐?”
틀린 답은 아니었는지 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 대화를 재촉하지 않고 아이가 무슨 말이든 하길 기다렸다. 어차피 그에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으므로 그다음에 올 것은 아이와의 대화, 아니면 소멸뿐이었다.
한참을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 아리아테는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들어와. 그럼 데려갈 수 있어.”
아이가 그 말을 하며 꺼낸 것은 알이었다. 꽤 작은, 새의 알.
그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봤는지, 아리아테가 마저 설명했다.
“내가 키우는 새인데, 잘 안 깨어나거든. 내가 아직 부족하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여기 들어와도 상관은 없지 않을까?”
그는 잠시 고민했다.
이 제안을 수락하면 그는 두 번 다시 두 팔과 손, 두 다리와 발이 달린 사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과거의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알기에 그는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때 인간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기억을 가진 채 다시 한평생을 살게 될 것이다. 새로.
하지만 살아갈 수 있다면 뭔들. 그는 혼자서 ≪아텔레스≫를 날아다니던 그때를 생각했다. 그리고 혼자서 여러 감정에 모든 걸 맡기고 자유롭다고 느낀 그 순간을 떠올렸다. 다시 살 수만 있다면. 살아서, 그때 느꼈던 걸 생생히 살아있는 온몸으로 감각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새가 되는 것 정도는 꽤 좋은 선택지이지 않은가.
그렇게 그는 아리아테의 패밀리어가 되기로 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생명으로 빛나는 우주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리아테가 원래 이 새를 ‘솜솜이’라고 불렀다는 걸 알자마자 펄쩍 뛰었다.
그런 이름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솜솜이가 다 뭐냐고!
그가 그렇게 고함쳤지만, 아직 어린 새의 몸이었던 지라 그는 꽤 높은 톤으로 삐약거리는 새의 울음소리처럼 내지른 것이 다였다. 당연히 아리아테에게는 큰 타격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을 안 바꿀 수는 없으니, 그는 좀 더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 불러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리아테는 난감했다. 이 새는 정말 귀여웠는데, 솜솜이처럼 귀여운 이름이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름을 새로 짓기가 더 어려워졌다. 새 한 마리와 신 하나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잔뜩 인상을 썼다.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리아테가 운명 속에서 태어난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원한 인간의 신이라니, 어떻게 봐도 어디에 사는 누구의 짐을 나눠질지는 뻔하네, 그것이 처음 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내 부럽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런 것 좀 만들걸 그랬나. 하지만 만들어 봤자였을 것이다. 생각 하나에 바로 다음 생각이 무섭게 치고 들어와, 그가 상념 속으로 빠질 뻔한 것을 건져내었다. 큰일날뻔했다. 과거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제가 또 어떤 바보 같은 계획을 세울지 몰랐다. 그는 그냥 스스로 이름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대충 입안에서 굴렸을 때 멋진 어감이면 될 터였다.
“자. 솜솜이 같은 이름보다는 ‘휘펠’, 이런 이름이 더 멋지고 괜찮잖아. 겉모습하고도 잘 어울린다니까?”
“휘, 휘펠, 휘펠, 휘펠, 훼펠, ………어려운데, 그냥 ‘리리’ 같은 이름-”
“그, 그럼! 그럼, 휘, 휘… ‘휘플라우’ 같은 이름은 어때? 줄이면 라우~ 하고 부를 수도 있지!”
아이가 싫증 내기 시작하며 또 제멋대로의 마냥 귀엽기만 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자, 그는 마음이 급해져 급하게 대책을 제시했다.
이것마저 어렵다고 하면 정말로 포기해야 했다.
“라우…? 라우, 라우… 라우…? 라우. 라우……. 괜찮은 거 같긴 한데……”
“그럼 휘플라우로! 이제부터 내 이름은 휘플라우인 거야, 오케이?”
아이가 다른 말을 할까 봐 겁이 난 그가 급하게 못을 박았다.
“으응……… 그래, 라우!”
그리고 그는 휘플라우가 되었다.
『호라시스 옵타시아 : 셀레네이아』, 그러니까 우주의 중심 부근. 그러니까 구[球]의 안에서 중앙쯤인 곳에서 조금 위쪽인 부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위치에는 ≪태초의 도시≫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리 특이할 일은 아니었다.
≪태초의 도시≫는 이름답게 거대한 도시였다. 처음부터 도시의 주인이었던 이들이 거주하는, 1만 개를 조금 넘는 신전의 부피, 그의 몇천 배는 되는 도시 인구의 거주 지역, 그리고 매일 같이 1억을 훌쩍 넘긴 숫자의 유동 인구까지 다 하려면, 그 정도의 면적으로는 좀 부족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태초의 도시≫의 면적은 늘리고 싶다고 무작정 늘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도시와 『만다라』의 대표인 루예나는 가끔 올라오는 도시의 확장에 대한 안건을 볼 때마다 도망가고 싶었다.
루예나가 일은 다 내팽개치고 놀러 나가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즐거움만을 좇는 삶에서 먹고 살려고 억지로 일하는 게 뭐 그리 즐겁겠는가? 가끔 직장 내의 이벤트 중 팝콘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재밌는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었지만, 대게 그런 일은 최종결정권자인 루예나를 사건의 당사자가 되도록 끌어들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오늘도 대표는 도망갈 궁리나 하며 서류를 검토하고 도장이나 쾅쾅 찍어내며 힘없이 서류 위에 사인을 갈기는 것이 그나마 하루의 전부이길 바라는 것이었다.
만물의 근원, 사물의 개념, 신앙과 종교의 원천, 진리의 이치, 세계의 시종[始終], 차원의 관리자, 신들의 신 혹은 신들의 어버이, ……
그런 수많은 수식어로 불려 온 태초의 종족, 『만다라』가 이 우주에 있었다. 루예나 또한 그중 하나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도, 그는 후천적으로 만다라가 된 케이스였으니 또 어찌 보면 그리 당연하진 않았다.
루예나가 모든 『만다라』의 위에서 힘으로 군림하여 대표의 자리에 눌러앉은 지가 몇억, 아니 몇십억 년일지도 모를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많은 일이 있었다. 살면서 겪은 수많은 일 중, 가장 기억의 남는 일을 꼽아보라면 하나만 고르진 못할 것이다.
게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제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자신이 ‘주인공’이란 걸 알게 되었을 때였는데,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걸 어느 정도 명확히 인지한 순간부터 루예나는 자신의 감 또한 주인공이기에 보장받은 능력 중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런 걸 안다고 해서 사용하지 않고 순리를 거스르겠다느니, 뭐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아주 잘 써먹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이 이끄는 대로 가면 쉽거나, 혹은 재밌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얻어걸리니 루예나는 이 우주를 존재케 만드는 네(4) 『존재[存在]』의 뒤를 이어 다섯 번째 존재가 된 후에도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것을, 제가 살아있게끔 만드는 것을 열심히 좇았다.
방금도 말했지만, 감이라는 게 늘 쉽고 재밌는 것만 속삭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인간들이 일명, ‘쌔한 감’을 느끼고 자신의 위험을 피한다고 하지 않는가, 루예나 역시도 그러했다. 알 수 없는 이끌림을 통해 루예나가 배운 것은 행복과 즐거움만이 아니라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으며, 혹은 무언가를 예고하기도 한다는 것이었으니 그날 밤, 루예나는 제 감이 이끄는 대로, 그리고 또 무언가를 짐작하여, 방의 창문을 열어두었다.
≪태초의 도시≫는 우주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있었기에 태양의 만다라가 큰마음 먹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낮에는 태양이 뜰 일 없었다. 그러니 낮이든 밤이든, 항상 까만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만 촘촘히 들어앉아 도시를 내려다만 보고 있으면, 낮의 만다라와 밤의 만다라가 번갈아 가며 제 옷깃으로 장막을 드리우곤 했다.
그리고 밤, 꽁지깃이 긴 보랏빛 새가 루예나의 방으로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창문은 이미 열려 있었으니 새는 막힘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긴 소파의 등받이 위로 안착했다. 방의 주인은 처음부터 팔걸이가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제 방으로 들어온 것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방 안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고요했고, 두 생명체 사이에 오가는 것은 눈빛뿐이었다. 한참을 겉으로 보기엔 눈씨름 하는 것처럼 보이던 풍경만 계속되다, 루예나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눈싸움에서 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고개를 먼저 돌린 쪽이 운을 뗐다.
“그래서, 솜솜이라고 불러야 해?”
“겠어? 휘플라우야.”
휘플라우… 휘플라우. 루예나가 몇 번 이름을 입속에서 되뇌다 자그마한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새는 그제야 멈춘 줄도 몰랐던 숨을 내쉬고는, 다시 들이마셨다.
“나쁘지 않은데, 그 애가 용케도 그러겠다고 했네.”
“그쪽 같으면 솜솜이, 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겠어?”
“아, 죽어도 싫으니 죽지 않고 버텨야겠는데.”
“이게 내 앞에서 할 소린지.”
그리고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가 멈췄다.
밤이 드리운 옷깃이 길어져 가는 동안에도, 둘 사이에는 아무 말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루예나와 휘플라우가 지금 서로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는 것 따위 말이다. 알고 있는데도 휘플라우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문득문득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두려움의 일종이었으니, 결국 그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두려웠다. 상대의 입으로 듣게 되는 순간, 그 무게가 다르게 느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망치고 싶어졌다.
휘플라우가 그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상대가 ‘그래서 왜 왔어? 꾸역꾸역 그렇게 오고 싶어?’ 같은 말을 제게 내뱉는다면, 그는 별로 견디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 마리의 새가 되어 아이의 옆에서 말동무로 지내려고만 했다. 하지만 아이가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정해진 이 옆에서 자라나고 있었으니 대면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고 싶었어?”
“……”
“……같은 말 하는 건 예의가 아닐 거 같아서,”
루예나가 말의 방향을 훅 틀었다. 휘플라우는 잠시 멍청해진 얼굴로 루예나를 쳐다봤다. 상대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너에게나, 널 데려오겠다고 결정한 아리아테한테나.”
루예나가 말을 맺었다. 그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애. 아리아테가 자꾸만 무언가를 비틀었다. 그는 아리아테에 대해 명확히 아는 것이 여전히 많지 않았다. 이제 좀 더 알게 된 것이라곤, 뮬 셀레가 만들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애는, 뭐지?”
“그 애? 아, 아리아테. 질문이 너무 광범위하지 않아?”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루예나는 별로 답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루예나가 제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내놓을 때까지 따라다닐 자신이 있었다. 루예나는 계속 딴청을 피우며 하라는 대답은 안하고 시간만 질질 끌었다. 아주 능숙하게.
“하……. 신이야, 알잖아. 필요한 것도 있고 좀… 그래서 만들었어.”
한숨을 푹 쉰 루예나가 답했지만 확실했으나, 그리 명확한 답은 아니었다.
“신을 만들어? 보아하니 만다라라면 신 정도야 점토에 숨결을 불어넣어도 권능을 가지던데, 구태여 만들었다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나 싶군.”
“어차피 여기서 살기로 했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그러려니 넘어가주면 안될까…….”
“그거 아나? 우리가 맞부딪쳤을 때, 그 애가 승기를 시작을 판가름 냈었어. 그 애의 대착점만 존재하지 않아서. 나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루예나는 미묘한 눈빛에 복잡한 표정이 되더니, 그를 보지도 않고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네가 살던 우주는 어떻게 구성을 유지했는지 몰라도, 여긴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어.
음, 아리아테랑 도시까지 오는 길에 들린 곳이 있다면 바로 이해할 텐데, 아마 어딘가에 들리진 않았을 테니까, 말하자면……”
말하자면, 이 우주는 처음 시작될 때 『존재[存在]』가 함께 생겨났다고 했다. 생겨난 『존재』는 넷으로, 쌍을 이루는데 각각 『무[無]의 존재』와 『유[有]의 존재』, 그리고 『선[善]의 존재』와 『악[惡]의 존재』가 있다고. 넷 중 하나라도 없다면 우주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유의 존재』가 없다면 만물이 있을 수 없으니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고, 반대로 『무의 존재』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질 수 없으니, 우주가 꽉 차버려 살아 있는 것은 압사당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고통 속에서 끼인 채 쭉 살다가 우주가 터져버릴 것이고.
그리고 루예나는 이 세계가 창작물임을 알게 된 순간, 세상의 법칙을 깨닫게 되어 이 우주의 다섯 번째 『존재』가 되었다. 다섯 번째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사실상 있으면서도 없는 취급을 받는 『존재』였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루예나는 모든 걸 알게 되고도 미치거나 도망치거나 없어지지도 않았으니 그걸로 된 것이었다.
그렇게 『자각하는 존재』가 된 루예나가 홀로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기에 가장 오래되어 믿을 수 있는 일행에게만 우주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친구인 클레이넬, 언니인 에르아, 동생인 오스카, 인연이 닿아 함께해온 드레케논, 그리고 가장 깊이 사랑하는 칼레우스에게.
각자 모든 정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은 달랐으나, 결국 좋든 싫든 다 함께하게 되었으니 루예나는 무언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 우주를 아끼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 영원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었다. 루예나는 사명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질 이가 필요했다. 그렇게 아리아테를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다.
클레이넬의 인간성, 드레케논의 유연함, 오스카의 통제력, 에르아의 리더쉽, 칼레우스의 다정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예나는 제가 가지고 있던 주인공의 자질을 주었다. 너는 무엇으로든 개화할 수 있으리라고, 아직 만나본 적도 없는 아이를 믿고.
그리고 아리아테는 완벽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대신 감정을 잘 습득하지 못했다.
왜 인간이 감정에 충실한 건지, 일의 관계에 있어 감정이 어떤 작용을 한 건지, 사람이 죽었는데 왜 우는 건지, 나는 지금 행복해야 할 순간이라는데 행복이 뭔지 모르겠는지.
루예나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냥 여섯이서 아이에게 사람은 보통 어느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건지 말해주고, 알려주고, 그저 옆에서 몇백 년을 붙어 몇천 년을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어느날 스스로 알게 될 순간이 올 때까지. 루예나가 아이를 믿으니 나머지 다섯도 자연스럽게 그러기로 했다. 이런저런 잡다한 것을 다 떠나, 아리아테는 여섯의 자식이자 조카이며 동생이나 다름없는 아이였으니까. 부모는 아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도 지금은 꽤 많이 좋아졌어. 어떤 일이 일어나면 왜 슬픈 건지, 자기가 언제 무슨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는 알아, 여전히 잘 느끼진 못하지만.”
사회생활 할 정도는 되지. 농담을 덧붙이며 루예나는 말을 맺었다.
그는 아리아테에 대해 알듯, 말 듯했다. 결국, 만들어진 아이라는 건데도 자유가 있었다. 원하는 걸 얻고자 하면 가능한 세상에서 자란 아리아테는 노력이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신할 터였다.
“이 얘기는 이쯤 할까? 자, 앞으로 어떻게 하려구.”
휘플라우는 뭘 더 생각하려고 했으나 주제가 바뀌고 질문이 날아오니 그의 생각도 끝났다.
앞으로는 그저, 아리아테의 옆에 붙어있는 게 전부일텐데 질문의 의도를 바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음…… 좋아, 그렇게 할까. 자, 너는 태고의 생명에서 태어난 새야. 아직 인류에게는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이나 다름 없는 새인거지.”
루예나는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휘플라우는 다음에 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루예나가 말하는 것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생김새가 좀 소형 앵무새를 닮긴 했어. 네 꽁지깃이 길게 빠진 모양이… 우리집 귀염둥이들이 생각나는군. 걔네는 사랑앵무거든. 아, 근데 네 머리는 왕관앵무를 닮았지. 그러니까 네가 발견된다면 아무래도 앵무새로 분류가 되겠네.”
“그래서?”
“학자들이 널 보면 새로운 종이라면서 학명을 붙일테니, 이름은 내가 제시하지. 너도 알고는 있어야지, 네가 혼자서 고유한 학명을 가진 유일 개체가 될 테니까.”
둘은 알고 있다.
둘의 이름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그 이름이 그들의 시작이자 본질이고 끝이다.
그것만이 그 둘을 상징한다. 그것이 아니면 무엇도 의미가 없다.
그러니 루예나가 말하려는 학명은 이미 둘 다 알고 있는 단어이다.
그는 아리아테의 ‘루넬롭시타’이다.
아침이 오기 전, 그는 아리아테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니, 바로 돌아가진 않았고 도시를 좀 돌아다녀 보았다.
아침이 곧 올 텐데도, 해가 뜰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영원한 밤의 도시라고 불릴 법도 했는데, 한 번도 그런 별칭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뭐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그는 돌아갈 곳으로 날갯짓을 시작했다.
집으로 향하는 새의 눈에는 끝없는 별빛만이 가득했다. 아득할 정도로 시리게 빛나는 별빛 아래에서, 태초부터 자라왔던 도시를 제 발아래에 두고 날아가던 새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제서야 그동안 있던 모든 일련의 일을 이해했다.
휘플라우는 깨달았다.
루예나는 그때,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엔딩으로 하나의 챕터를 마무리했었다. 그러니 그의 결말이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는 걸,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루예나는 그저, 엔딩에 작은 여지를 남겨뒀을 뿐이었다.
루예나가 그를 완전히 죽이지 않았다,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오히려 루예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어떤 주인공이든 똑같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루예나야 말로 『저 너머의 무언가』가 이 우주에 내려보낸 전신과 다름없지 않은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고통도 괴로움도 없이 행복하기 만을 바라는 건, 어떤 마음이 담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마치 동화처럼.
그러니 루예나가 남겨두고 간 것이야말로 『저 너머의 무언가』가 자신에게 보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옛일은 이제 거의 다 지워진 칠판처럼 자국만이 흐릿하게 남아있는 정도였으나, 『저 너머의 무언가』가 하고 싶은 말은 비로소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무엇도 가짜가 아니었다. 그의 삶은 그저 그의 삶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살아서 걸어온 궤적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었다. 『저 너머의 무언가』는 그저 그의 궤적이라는 사레를 가져가 루예나에게 더 예쁘게 만들어 넣어준 것이었다. 오히려 ‘그’야말로 루예나보다도 더 운명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왔을 터였다. 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이른 오후, 아리아테는 휘플라우에게 도대체 아침 내내 어딨다가 이제 와서 점심만 홀랑 먹고 가려냐며 화를 냈다.
어느 날이었다. 아리아테가 ≪엔스파일≫이라는 행성에 간다고 했다.
휘플라우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패밀리어가 어찌 감히 주인 가는 곳에 따라가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게 휘플라우는 이동하는 내내 아리아테에게서 ≪엔스파일≫이 어떤 행성인지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가 제대로 귀담아들은 것은 그곳이 루예나의 고향이라는 것뿐이었다.
≪미스티쇼어≫라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아리아테는 ≪루네트≫ 제국의 수도인 ≪아르세온≫시까지 가는 것이 여행의 목적지라고 했다. 아리아테가 지금 그들이 있는 대륙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말했으나, 휘플라우는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얼마 전에 여기에 가기 위해 행성의 세계 지리와 역사, 행정 체계에 대해 복습하고 공부했다더니, 아는 걸 죄 말해버리는 일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아리아테가 혼자서 ≪아르세온≫에 위치한 ≪황성 루네티카프≫에 걸어서 가겠다고 했었을 때, 보호자 다섯이 그러지 말고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었던 것은 꽤 진풍경이었었다. 그리고 루예나는 휘플라우를 한번 흘긋 보고는 패밀리어와 함께 가는 거라면 아주 혼자는 아닐 테니 한번 다녀와 보라는 말만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어찌 되었든, 그가 지금 아리아테의 정신 공격을 받는 건 다 루예나와 요 꼬맹이 주인 탓이었다.
≪아르세온≫까지 가는 동안, 휘플라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리아테의 말에 의하면, 보랏빛 저녁노을은 루예나가 고향땅에 새겨넣은 축복의 증거라고 했다. 그리고 예전에 휘플라우가 쳐들어왔을 때도 여기로 피신했었다고.
아이에겐 벌써 예전의 일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나쁜 일이 너무 강렬하면 삶의 평생 안 좋은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는데, 아리아테에겐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비록 아리아테의 몸이 인간의 기준으로는 20대 초반의 성인에게 가까울지라도, 정신은 아직 10살도 채 되지 못한 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정신으로 몇천만 년을 살아왔다는 게 살짝 기묘하다 느끼긴 했으나, 아이는 제 눈에도 보일 만큼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니 휘플라우는 더 생각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여행의 마지막이라고 여긴 날,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아르세온≫의 외곽에 겨우 도착했기에, 결국 방을 잡고야 말았다. 둘은 녹초였고, 도시의 외곽에서 ≪황성 루네티카프≫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리아테가 씻으러 가버려 방에 혼자 남겨진 휘플라우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이 하루의 마무리를 알리고 있었다. 축복받은 하늘 아래 펼쳐진 제국의 모양이 제게 속삭였다. 다시 살게 되어 좋지 않느냐고.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삶의 빛으로 가득 찬 세계를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 뭐 해 , 휘 플 라 우 ? 〗
그의 공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휘플라우가 태초의 도시에서 루예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그날 밤, 루예나는 돌아가려는 휘플라우에게 공간을 하나 붙여주었었다. 감시냐고 했더니,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꽤 요긴할 거라고 했다. 필요하긴 했다. 그는 이제 고작 새였기에 우주를 건널 때 숨을 쉴 방법이 필요했으니까.
루예나는 특별한 공간에게는 자신이 이름을 직접 붙여 불러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공간은 ‘호무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공간인 호무라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공간에 형체가 있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으나, 없다면 또 없는 대로 대화해야 할 상대만 불편할 터라, 모든 공간은 같은 공간이 아닌 것과 대화할 때 희끄무레하게 있는 듯, 없는 듯, 불투명한 윤곽선을 띄워 제 존재감을 알렸다.
그리고 루예나에게 고정된 이름을 받은 공간은 몸에 어렴풋한 색깔도 띠었는데, 호무라는 연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색에 의미가 있냐고 물었으나 루예나는 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알게 되면 아는 것이고 말면 말겠지.
“하늘이 예쁘네.”
휘플라우의 한마디에 호무라는 그의 말이 맞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모든 건 살아있는 생명으로, 세계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굴러가기에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 막 잠에서 깨어난 휘플라우가 몽롱한 의식 속에서 방금 꿨던 꿈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는 과거, 『아텔레스』에서 자신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2번째로 도착했던 이와 대화하던 때를 꿈꿨었다.
그때는 그저 대화하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목소리니, 언어니 하는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도 가능했는데, 그의 꿈에서는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내어 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화의 내용도 그 당시 나눴던 내용이 아니었다.
꿈이니 그럴 수 있겠다마는, 그는 어쩐지 꿈에서 나눈 대화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분명, 후회하냐느니, 보고 싶지 않냐느니, 되돌아가고 싶을 거라느니, 따위의 말을 주고받으며 과거에 매여있고 싶게 만들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2번째로 도착했던 이의 목소리를 잊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도. 오히려 꿈속에서나마 들었기에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목소리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는데도, 2번째로 도착했던 이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귓가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맞는 말이라서, 그는 그 문장을 마음 속에 간직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그 세상을 사랑하겠네. 당신은 생명이 생명으로써 살기 바랬으니까. 당신은 할 수 있을 거야.
휘플라우가 그리운 악몽을 꿨던 날, 아리아테는 루예나로부터 엔스파일의 또다른 대륙으로 향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으니 이것은 조금 나중에 꾸게 될 꿈이었다.
휘플라우는 타협했다. 지난 것은 이제 의미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이젠 떨쳐야 하는 것이 맞다고.
그래서 휘플라우는 타협했다. 과거는 이제 부질 없는 것이니 지난 우주의 나는 이제 없다고.
그렇기에 휘플라우는 타협했다. 그 시절의 자신은 영원히 없는 것이라고.
그의 길은 앞으로 이어지는 길만 남았기에, 뒤돌아 볼 수 없기에,
그의 우주는 이제 이곳이기에.
그는 다시 한번 세상을 꿈꿀 것이기에.
그의 지난 이야기, 끝.
1. 고유명사 표기 방식 : ≪창작 지명≫, 『창작 단어』
2가지가 복합적일 시, 지명은 ≪해당 괄호≫ 우선 사용,
2. 『저 너머의 무언가』는 이야기와 세계관의 창작자, 즉 작가.
3. 메인 스토리 챕터 <어떤 것은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되니>의
영문명과 캐치프라이즈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 인용.
4. 휘플라우의 과거이자 루예나의 what if? 버전인 ‘그’는 남성.
아텔레스에 2번째로 도착한 이는 민재윤의 what if? 버전은 여성.
5. 휘플라우의 학명인 ‘루넬롭시타’ 영어표기
: Lunelopsitta = Luna(달) + Melopsitta(사랑앵무)
6. 휘플라우의 공간인 ‘호무라’의 뜻은 ‘Home+ra’, 혹은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의 등장인물 ‘아케미 호무라’에서 따옴.
INSPIRATION by.
휘플라우가 메인 스토리에 등장한 부분 정리
첫 등장
마지막 등장 및 결전
휘플라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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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5화
추락한 성녀 05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05 루블, 보쓰, 히즈 *** 사용인들이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그녀는 쉬고 싶다며 침실로 돌아갔다. 응접실에 남아 다 식은 차를 마시던 헬레니온에게 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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