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원의 꽃은 춤춘다
:: 살기 위한 춤은 늘 그렇듯 찬란하게 빛나고 ::
정원의 꽃은 춤춘다
살기 위한 춤은 늘 그렇듯 찬란하게 빛나고
사람들은 햇빛 속에서도 얼마든지 불행해 보이고
이야기를 몰라도 이야기처럼 산다.
<영화관, 김상혁>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했기에 이토록이나 길게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
시작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헷갈릴 만큼, 수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긴 밤의 시간에는 새벽이 도시에 흘렀고, 돌아온 밤에는 주인공이 주인공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넘쳤으며, 오후의 느지막한 식당에서는 뭐가 다르기에 마음에 들어 하는지 모르겠다던 것들이었다. 거기에 세계와 우주와 아득한 존재도 있다.
그러니 여기서 뭘 좀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이제 와서.
캄파뉼라는 사실 조금 불편했다. 아니, 사실 불편하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이것은 불안이라고도, 언짢음이라고도, 혹은 찝찝하다고나 찜찜하다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미묘한 것에 그는 아주 조금 매여있었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했던 말에 대한 대답은 단 한 문장이었고, 루예나는 그 이후로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젠 돌아가게 되는 걸까.
‘기꺼이, 라…… 그래. 나도 기꺼이.’
계단 밑,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듯이 앉아있는 캄파뉼라처럼 루예나도 돌아오는 길에 했던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 없이 계단 저 위쪽에 앉아있었다. 그는 생각 중이었다. 고민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었는데, 그게 좀처럼 정리되질 않았다.
캄파뉼라는 루예나가 마치 세상만사를 전부 다 아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물론 그것을 대놓고 그렇게 말한 적도 없거니와, 그의 행동이 그런 티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튼 루예나는 너머의 세상에서 둘의 이야기가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대충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고민이었다. 대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나 사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하지 않아? 사실 우리 얘기는 누가 쓰고 있는 창작의 이야기야? 아니, 뭐가 어찌 되든 별로 썩 좋은 반응은……
캄파뉼라는 뭘 가르쳐줄 수 있냐고 말했으면서도 제게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기꺼이, 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죽음이나 영혼 같은 것이 아니다.
만다라에게 대가라는 건 말이지, 딱 하나면.
그것은, 아주 깊고도 신념 있는 믿음의 힘. 따를지어다, 믿고, 부르짖으며, 가약 없는 약속을 홀로 하고, 고요히 기도하라. 너의 종교에, 나아가 물질을 상징하는 신에, 무언가를 믿고, 따르고, 숭배하는 것. 신앙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의 하잘것없는 물질 따윈 관심도 없다.
모든 종교는 믿어지기에 존재할 수 있다. 잊혀버리는 순간 더 이상 존재할 가치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래쪽의 만다라일수록 더, 물처럼 흐른다. 씻겨져 내려가듯, 있었다가도 어느 날 보면 다른, 새로운 계열의 만다라가 생겨나 있다. 그들을 믿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나 같은, 그들 같은, 그리고 우리를 믿는 생명은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장담컨대, 그 안에 너는 없으리라.
인간은 예로부터 종교를 만들어 믿고, 따르고, 휘둘리며, 그렇게 무언가에 기대어 살아갔다. 하지만 넌 그런 부류가 아닌걸, 나는 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똑바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알고 있다. 전에는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게 결코 아니었다. 이건 그런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넌 절대로 내가 원하는 걸 주지 못할 텐데. 처음부터 기대, 아니 생각하지도 않았지, 이 정도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근데 말이지?”
물난리를 통해 깨끗하게 다시 태어난 가게에서의 첫 대화를 시작한 것은 루예나였다.
“나라고 막 그렇게 다 아는 건 또 아니거든? 예를 들어서 말이지, 음…”
캄파뉼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계단의 단 사이사이로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루예나는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낑낑거렸다. 뭔가 말할 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으로 보였다.
“아, 그래! 네가 했던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었잖아?”
루예나가 노래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저의 모든 면을 본 사람이라곤 여태 단 한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 어째 오늘 바꿔야 할 것 같지요?’ 라고 했던 거, 말인데.
C.C의 그것으로 불꽃이 흔들리듯, 말했던 그것임을 저 사람은 모르지 않을 텐데. 상대가 흔들리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건가. 그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무덤덤하게, 잘 모르겠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왜요.
“그러니까, 예시를 들어서 말하려고 한 게 맞는 거긴 한데… 생각, 바꿔보지 않을래?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고, 한… 85% 정도밖에 모르는걸~”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시니 어째 신뢰가 떨어지는 느낌이네요.”
너무하다! 루예나는 그 말을 시작으로 다섯 살 먹은 아이처럼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사소한 한탄 따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정석인 만큼, 캄파뉼라는 멍을 때리며 가만히 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내가 방금 무슨 말 했게?”
“………네?”
“이거 봐!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투정을 부리는 그의 말에 캄파뉼라는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당연하겠지만, 째려보는 시선이 매우 느껴졌다.
“으음…… 뭐, 그래. 원래 나 보다 높은 사람 말은 잔소리라는 말도 있으니까. 좋아, 만회할 기회를 주지! 나는 엄청 착하니까!”
착한가? 그건 잘 모르겠으나 아마 높으신 분치고는 착한 편이 맞긴 할 터였다. 루예나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닌데. 으응… 그러니까, 네가 그랬잖아. 가르쳐주겠다고…?”
그건 춤을 가르쳐드리는 것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기꺼이, 라고 했던거죠. 꽤 심하게 왜곡된 말을 캄파뉼라가 정정해주었다. 그가 제대로 된 말을 듣자 씩 웃으며 마저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것이 어째, 꽤 신난 모양이었다.
“그래! 그거, 그거. 아무튼 일단 받기로 약속했으니까. 말해볼래?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어! 한 번뿐이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꽤 특혜지? 아! 난 너무 자비롭다니까!”
가깝게, 하지만 가깝지 않게. 강렬한 차가움처럼, 냉랭한 뜨거움처럼. 노래하듯이, 비수를 박아 내리듯이. 불려라, 노래여. 나아가라, 행진이여. 오늘도 반역을 꿈꾸는 자들은 세계를 구축하고, 너 역시도 그리하리라. 필라테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그는 마음으로 조용히 캄파뉼라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 그 아이들 대신 축복을 내려주기로 했다. 루예나가 보기에 그는 그것들과도 닮았지만, 반역의 길을 걷는 이들과도 닮았다. 그래서 그에게 그렇게까지 호감이 가는 걸지도 모를 것이다. 마치, 제가 먼저 스스로 이끌려 만난 오랜 인연들처럼.
조용히, 여전히, 하지만 아까보다 더 화려하게 웃는 얼굴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모른다. 그래, 나는 그만큼 즐겁다.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감추어야 할 이유가? 가면을 쓰고 아닌 척해야 할 이유가? 그런 게 내게 있을 리가 없다, 이것은 그저 여유로운 사람의 한낱 즐거움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여유로움은 전부 내가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수많은 만다라 중, 그중에서도 아주 오래된 거목처럼 자리를 잡은 고세대는 오래된 만큼의 힘으로 권력자의 의견을 반대한다. 정치라는 게 다 그렇지. 살아있는 것들이 하는 일이라면 어디나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나는 특별하다. 인간 출신의 만다라는 자기도 모르게 인간을 동정하기 마련이다. 고세대는 오랜 세월 동안 알려고 하지도 않은 체, 경멸만 해왔다. 이익만 보고 싶어 하는 자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이해하는 척, 전부 다 안다는 척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관심조차 없겠지. 그래서, 말했듯이 나는 특별한 것이다. 나만큼 관심 있는 만다라가 어디 또 있을까!
달빛은 기쁨과 즐거움이 만연한 절대자의 웃음으로 캄파뉼라 안에 서린 겨울에 화답해왔다. 그래, 그도 처음부터 다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호기심이 생겨 들여다보고. 그런 일들을 기나긴 시간 동안 하나도 빠짐없이 스스로 겪었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루예나의 재미가 되어주었다. 언제나 세상만사를 거의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처음 알았다는 시늉을 하며 지내게 되었지. 그러니 아무도 모르는 캄파뉼라의……
아니, ‘아무도’까지는 아니고. 여하튼. 네 본심을 다 알 순 없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라는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네 과거, 네 신념, 네 정보, 호불호 정도는 알 수 있지. 어쨌거나 난 내가 모르는 게 있단 점이 정말 싫으니까!
“당신의… 이야기는……”
캄파뉼라가 살며시 입을 뗐다, 다시 닫았다. 그리고 짧은 두 마디에 루예나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가 무엇을 물어보려 할지 안다는 것처럼.
“음, 잠깐 와볼래? 왠지 알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이 건물 내 거거든? 옥상에 예쁜 정원을 꾸며뒀지!”
무려 도심의 옥상정원이라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서 아래쪽의 캄파뉼라에게 손짓했다.
이거 부자만의 특권이다? 건물주 말이야, 창조주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한국의 건물주. 루예나는 흥얼거리듯 가볍게 말하며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밟고 2층의 복도로 들어섰다.
캄파뉼라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반드시 날 따라올 테니. 나비가 나는 것처럼, 깃털이 떠다니는 것처럼, 유려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춤추듯 달빛이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어쩔 수 없어, 지금 기분이 더 좋아지고 있으니까!
레드 카펫이 깔린 2층의 복도 끝에는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3층을 지나고, 4층도 지나고, 5층도 지나자 마침내 계단 끝에서 기다리는 철제 테두리의 유리문이 보였다. 루예나가 품속에서 열쇠를 찾는 동안 올라온 캄파뉼라는 유리 너머의 하늘을 보았다. 어두운 청보랏빛 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별 같은 것이 있긴 했으나 다른 사람들의 말로는 그건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이라고 했다. 인간이 쏘아 올린 거대한 기계장치, 그런 게 날 수 있다니. 이 세상은 정말 뭘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대륙에서는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을 테니까.
아, 됐다! 루예나가 별안간 그렇게 외치며 쪼그렸던 몸을 쭉 피고 일어났다. 문은 부드럽게 빌렸고 그렇게 둘은 옥상으로 나왔다. 그냥 보기에는 얼마 없는 탁 트인 공간, 이지만 모든 건물들이 으레 그렇듯 이런 경우에는 나온 문 뒤편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예나는 시원하게 불어오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왼쪽 옆으로 돌아갔다. 캄파뉼라는 아무 생각 없이 사장의 반대편인 오른쪽 옆으로 돌아갔는데, 기묘하게도 옥상과 건물 안을 이어주는 작은 건물 같은 그것에는 문이 달려있었다. 안에서 봤을 때는 유리문 말고 다른 문은 없었는데, 이 문은 뭐지? 캄파뉼라는 문고리를 잡고 열려고 해보았으나 이내 들려온 건너편의 외침으로 포기했다.
“어차피 안 열리긴 할 텐데, 옆문 실수로라도 열면 넌 진짜 집에 못 가는 거다? 내 능력으로도 어떻게 못 해주는 거라고!”
루예나는 반대편을 향해 무시무시한 협박 비슷한 것을 외치며 눈앞의 옥상 마당을 보았다. 식물들은 죽은 지 오래였고, 기물들에는 먼지와 녹이 그득하다. 아! 나 정말! 생각해보면 그의 남편을 찾은 이후로 옥상에 온 적이 없었다. 손길이 닿지 않은 지 한참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대단하네요. 그새 옆으로 온 캄파뉼라가 한마디 했다. 왜 과거의 나는 예쁘다고 했을까? 몇 분 전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루예나는 오른손을 들어 무언가를 쓸어버리듯 손짓했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정원은 화려한 모습이 되었다.
생기 찬 화단은 싱그럽고, 캐노피의 기둥에는 담쟁이가 푸르고. 플라스틱으로 위를 막지 않은 나무 캐노피에는 라벤더가 아름드리 늘어져 있고, 그 아래의 벤치는 광이 나고. 벤치가 있는데도 무슨 생각으로 설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동방풍의 작은 육각정은 만월의 빛을 받아 검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루예나가 가게를 2번째로 열었을 때의 정원이었다. 분명 누-사실 루예나의 기준이라면 뭐든지 다 미물이겠지만-군가 본다면 시간이, 공간이, 법칙이, 괴현상이, 등등의 온갖 진부한 말을 늘어놓으며 이러쿵저러쿵 떠들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겨우 간단한 공간 뒤집기였을 뿐이었다. 공간의 만다라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 그리고 캄파뉼라는 이런 거로 뭐라고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그는 제가 과거로부터 가져와 되돌려놓은 정자에 다가갔다. 먼지가 없으니 신발도 벗고 마루로 올라선 루예나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제 상대에게 까닥이는 고갯짓만으로 이리오라며 불렀다.
이리 오렴, 캄파뉼라. 자, 속삭여 보아라.
푸른 한 송이, 다가서면 꽃잎에 베일 것 같기에 더 화려해 보이는 꽃아. 혁명의, 반역의, 잿더미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그 불씨를 머금고 부정부패의 척살을 원하는 자야. 오랜 고인 것들을, 씻어내어 자기만족을 위해 춤추는 사람아.
옥상 꼭대기에서 달빛을 받는 당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찬란하였도다.
정자의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당신의 주변으로 달무리가 몰려 빛을 발하는 것이, 어쩌면 당신이 달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은 착각이 들게 만들었다. 사람의 미美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그였다 하더라도, 감히 찬양할 만했다. 그리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빛나는 만큼, 당신은 강렬하고도, 위험한 사람이었노라고.
이리 오렴, 캄파뉼라.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당신은 고갯짓한다.
그래서 기꺼이,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 전의 당신을 따라 계단을 오르고, 초저녁의 하늘 밑으로 나와, 마법 같은 장면을 목격했을 때처럼.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을까, 이것이 만다라의 힘이라는 것을. 달의, 공간의, 회색의 축복임을. 이런 당신을 섬기는 자들이 있는 것도 당연했으리라. 믿음을 기꺼이 바치는 것도, 아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목숨을 바치는 이들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비록 스스로는 그 누구에게도 이유 없는 믿음을 주지 않을지라도, 당신의 신도들은 오늘도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있으리라.
당신은 스스로 알고 있을까. 그것은 매력이라 하면 매력이었다. 그래, 진실에 가까운,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제국을 휘어잡던 그 어느 황제라 해도 당신의 발끝에 미칠 수나 있을까. 영원히 저 위에서 머무를 것만 같은 당신에 비해, 천천히 민심을, 믿음을, 신앙을 잃어가는 제국의 태양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황제 폐하, 그대의 빛 영원하소서, 비웃듯 그대의 백성이 한탄하는 음절을 읊조렸다. 황제 폐하, 일식에 집어 삼켜져, 당신의 목이 단두대에 오를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 돌아오면서 얘기했었지? 난 말이야, 그거 듣고 감동했지 뭐니!”
루예나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캄파뉼라에게 뜬금없는 말로 조곤조곤 말을 시작했다.
“그거, 그거 정말 멀리도 돌아와서 말해줬잖아? 하지만 그럴 수 있어. 좋다는 말도, 싫다는 말도 전부 말할 때는 조심해서 잘 말하는 게 현명한 법이지.”
루예나가 말하는 것은 가게로 돌아올 때 했었던 호감에 관한 말이었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말을 이었다.
“네가 했던 말은 마치, 모든 생명 하나하나가 전부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다, 같은 말처럼 들리는데. 내가 맞게 이해한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매우 맞는 말이긴 하지. 근데 내가 말했던… 말했었나? 말하고 싶다고 하자.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네 말도 맞지만 내가 하려는 말과는 논점이 다르다는 거야.
이건… 비유하자면, 극 중의 영웅과 악당 같은 거지. 개인은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그러니 너도 내 기준에서 보자면… 음, ‘지나가던’ 여행자 손님쯤?”
아. 이상한 건 아니고, 내가 전에 살던 곳에서는 전래 동화마다 나오는 ‘지나가던’ 사람이 꼭 대단한 일을 하게 되는 주인공이었거든. 그런 의미야.
루예나는 그렇게 말하곤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끝맺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그런담. 이상한 곳이로군. 하지만 결론은 그도 주인공이라는 말이었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기분은 기분대로 내버려둔 채 그런 생각을 하던 캄파뉼라에게 루예나는 텀을 두고 넌시시 말을 던졌다.
“그래서, 그건 어때? 생각 좀 해봤나? 생각 바꾸지 않을래?”
어느덧 같이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올라 당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늘 그렇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같이 밤의 산들바람을 만끽한다. 그래, 당신이 아까 했던 질문에 답을 아직 안 했었던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집착하듯이 물어보는 것은 역시 싫다. 물론 당신은 아직 두 번 밖에 물어보지 않았지만.
“글쎄요. 바꾼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점이 있을지.”
그렇지 않은가, 생각 같은 거 하나 바꾼다고 삶이 바로 뒤바뀌진 않을 텐데.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바뀌었을 것 같은데, 자신은 그렇지 않다.
사랑받던 체리시, 춤추는 캄파뉼라, 혁명을 피워내는 C.C. 자신이 특별한 존재인가 묻는다면 선뜻 긍정의 답을 주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냐 물었다면 그렇다고 했으리라. 다르기에 특별하다 할 수 있는가. 다르고 특별하기에 대단하다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작은 고갯짓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루예나의 말대로 ‘지나가던 여행자’와 다를 것 없었다. 캄파뉼라는 그것이 그리 나쁜 표현은 아니라 생각했다. 대단한 사람이든, 조금 부족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전부 언젠가는 시간에 흘러 지나가리라. 나는, 나만의 이야기에 충실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저의 이야기는 혁명의 불로 타오르는 길이었다. 루예나의 시선으로 본다면 짧고도 짧은, 혹은 흔해빠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은 알고 있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물음이 확신으로 자란다면 더는 당신 앞에서 두려울 필요가 없겠지, 그러니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제 극의 끝이 보이나요? 그 끝에 다다르면 저는 웃고 있을까요, 아니면 울고 있을까요?“
당신은 알까. 몰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으나 결국 미래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신일지라도, 만다라일지라 해도 오지 않은 미래를 전부 꿰고 있을 거란 믿음이 캄파뉼라에게는 확실히 없었다. 설령, 그 끝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루예나가 제게 말해줄 이유 또한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흐르듯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기는… 흔히 기승전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죠, 제 이야기에서의 저는 지금 어디쯤 와있을까요. 아직 간신히 도입부에서 다음 계단을 찾으려 발버둥 치는 중일까, 준비가 끝나 검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기만을 기다리는 시기일까, 그도 아니면 마지막 한 장만 남긴 채 저물어가는 사람일까.”
어디서부터 시작이었기에, 어디까지 가야 끝나는 이야기일까. 대게의 생각은 문득 들기 마련이고 그 생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이야기는……”
그는 고개를 돌려 루예나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미소 지은 채 그저 자신을 바라보며 가만히 듣고만 있는, 만다라.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 속에서 수많은 것을 보았을까. 인간이 보는 당신의 이야기는 무한하고 무궁무진하겠지,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당신의 너그러움은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서 조금은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이 기꺼이, 단 한 번의 기회를 준다 하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물어야 하나. 어떤 이야기를 들려 달라 할까.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품에 있는 청색의 꽃, 글리베릴에 대해 물어볼까. 아직까지 시들지 않은 것이, 신기하면서도 약간은 부러웠노라.
생의 끝에서 시들지 못하고 너무 일찍 꺾여 죽어간 진홍색 장미를 애도한다. 주변의 생명을 흡수해 어거지로 생을 이어가는 푸른색 장미를 증오한다. 마지막까지 홀로 피어나는 붉은색 동백에게 검을 겨누고, 백색 연꽃의 그림자에 얽혀든다. 홀로 떨어져 짓밟힌 하늘색 물망초는 핏빛 재에 쓸쓸히 묻혔고, 남은 일곱 송이의 꽃은 여전히 태양 아래 군림한다. 연보라색 캄파뉼라야, 우리들의 정원은 언제야 낙원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절대자라 하였습니까. 세상 꼭대기에 서 있는, 신들의 신이라 하였습니까. 그렇다면 답해주소서. 낙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아직 이것을 물을 시기가 아니려나요.”
“후후, 글쎄. 어떨까.”
말을 삼키고는 미소 짓고 유려하게 흘려 넘긴다. 의문에 의문으로 대답했다면 더 물어봐도 확실한 대답을 해주지 않겠지. 캄파뉼라는 주제를 전환하듯 시선 또한 돌려 옥상을 눈에 담았다. 이곳 또한 정원이었지. 그의 마음에 들 만큼 어여쁜 곳이었다.
“이곳의 꽃들은 당신이 관리하는 건가요? 이 정도 규모면 상당한 정성이 필요할 텐데. 아니, 당신에게는 나름 쉬운 일이려나요?”
아까의 기적 아닌 기적을 떠올리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사뿐사뿐 정자에서 내려와 다시 신발을 신는다. 그래, 이 정도의 공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정자에서 조금 멀어졌을까, 몸을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약속드린 대가를 치르기엔 지금이 딱 좋은 순간인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럼 일단 받고 볼까?”
루예나가 미소 지으며 한번 보자는 투로 말했다. 그럼 캄파뉼라야, 밤을 노래해볼까.
제 허리춤에서 검 한 자루를 익숙한 손길로 꺼낸다. 이곳에 온 후로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지만 그의 손길에는 망설임 한 조각도 없었다. 거의 한평생 검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제는 몸의 일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달빛 아래의 무용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검무 한 차례, 보시겠어요?”
고요한 하늘 아래, 캄파뉼라는 은빛을 머금은 검과 함께 달을 위한 왈츠를 추었다.
그 손끝이, 발끝이, 몸짓이, 시선이, 그리고 검의 끝이, 향하고 향했다 향한다. 빛을 받으며 추는 검무를, 관객은 홀로 정자에 앉아 지켜보았다.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듯이, 분위기를 만들고 끌어올려 간다. 그래, 네 춤은 아름다워. 마치 캄파뉼라 꽃밭에 와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루예나는 정말로 오랜만에 무언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뭔가 느껴지는 건진 잘 모르겠고 그냥 그런 기분일 뿐이었다. 이런 기분을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더라. 너무 일이 많아서 이런 게 맞는 건지, 저런 게 맞는 건지 그는 계속 헷갈려서 그냥 생각을 그만두었다. 루예나에겐 그것 말고도 생각할 것이 있었다.
그것들을 쥐새끼라고 부르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어떻게 보면 별 이유는 아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조금 중요한 이유. 쥐가 식량을 훔쳐 가고 역병을 퍼트리듯, 로제베르는 ‘물건’을 탐냈고 훔치려고 했었다. 그래서 루예나는 그저 오른팔을 내어주고 물건을 지켰을 뿐이었다. 결국 그 오른팔 때문에 자신만 일이 난잡해져서 화가 엄청나게 났지만. 여하튼, 그게 이유였다. 결론만 보더라도 이미 도둑 아닌가? 이미 한참 지난 일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날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처럼 꽁하게 계속 감정을 품는 것도 별로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중에는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는 정말로 좋게 보려고 애를 썼다. 엄청 애를 썼더니, 나중에는 다르게 만났더라면 분명 괜찮은 사이가 됐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로제베르가 제베르나로 활동하게 되면서 모든 일이 틀어져 버리는 바람에 루예나는 그냥 ‘그 일’ 이후로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어쩐지 노력이 부질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자꾸 되지 않는 것에 매달리지?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달려들더라, 마치 불나방처럼.
그래. 사실 너도 그래, 캄파뉼라. 너는 답 같은 거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런 너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더 알 수 없어. 안 될 일에, 제 끝만 안 좋은 일에,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왜? 대항은 무엇을 위해 하는 거야? 거스를 수 없는 순리에 반역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친히 직접 말해주는 데도, 그러지 말래도 자꾸 하네.
아, 그렇지. 루예나는 제가 간과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적어도 눈앞의 인간이 원하는 목적은 쥐새끼들이 원하는 것과는 한참 달랐다. 부패한 권력의 개혁을 꿈꾸는 것과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를 부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네, 널 그런 것들과 동격 선상에 잠시라도 둔 내가 잘못했네!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을 혼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캄파뉼라가 추는 것은 아름다워서, 그 누구라도 이 춤을 본다면 저도 모르게 웃을 것이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러고 보면 자신이 남의 춤을 보는 일은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늘 추었던 입장이었기 때문일까, 왠지 같이 춰야만 할 것 같더라. 그래서 그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던 순간부터, 아니 사실은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검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이란 걸.
그 눈은 예리하게 벼려진 검날만큼이나 단호했고 일말의 망설임 하나 없는 눈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캄파뉼라는 아주 긴 시간을 혹독하게 살아와야 했을 것이었다. 그는 젊었으니 긴 시간은 분명 이제껏 살아온 나날들, 모두였을 것이다. 그 사이에 잠깐이라도 편안했던 시간이 있었을까. 생각이 너무 바보 같다, 분명히 있었겠지. 사람은 달콤함을 느껴보았기에 씁쓸함을 더 절실하게 느낀다.
그러니 네가 그렇게 된 이유에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겠지. 그래서 그 시절을 마음 한 켠에 품고 평생을 살아가는 중이겠지, 나처럼.
유려한 몸짓이, 달빛을 받던 칼의 움직임이 어느덧 멈춘다. 잦아든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을까. 흐르던 강이 여러 갈래의 냇물로 갈라져 조금씩 잦아들듯 춤은 끝을 맞이하고, 캄파뉼라의 눈은 다시 달을, 루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정말 오랜만에 좋았는걸.”
“나쁘지 않았다면 다행이네요. 제가 어디 가서 검무로 인정받지 못한 적은 없긴 했지만.”
당신이 다른 이였다면 조금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내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되새겨본다. 얼마나 많은 춤을, 검무를 보아왔을까. 그리고 당신은 얼마나 많은 춤을 추었을까. 고고하고도 화려하게, 우아하게, 미려하게. 잠시 물어볼까 했지만 지금은 무희로서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고이 접어두기로 한다.
언젠가는 당신의 춤도 보여주시겠나요, 형식상 예의를 차리는 말이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당신의 무구한 시간에 비하면 덧없긴 했지만, 당신의 춤을 눈에 담지 못한다 해도 그저 인연이 아니었겠거니 수긍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울 거라 인정한다.
“그럼~ 나쁠 게 뭐가 있겠어?”
그래, 정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너는 빛났었다. 올려다보는 곧은 눈빛처럼, 흔들림 하나 없는 시선으로 너는 말하고, 묻고, 답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춤을 추자,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나였다. 그렇다면 화답해주는게 예의지 않겠어? 당장 추자는 것은 아니지만.
네 춤은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섬려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늘 호불호가 확실한 편이었다. 좋아하는 것에 매진하면 싫어하는 것은 할 줄 알아도 자연스레 멀어져갔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서라면 편식 같은 사소한 일 따위를 만들어선 안 된다. 그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리라.
“그나저나 다른 사람의 춤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이젠 기억도 안 나네, 아하하.”
그렇게 말하시면 정말로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알기가 두려워지는데요. 캄파뉼라가 말했다. 아니, 뭐… 최근일 수도 있는 거지. 루예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했다.
“뭐, 좋은 걸 봤으니 뭐라도 말해볼까…… 그래, 정원 내가 관리한 게 아니야. 그냥 좀 도움을 받은 정도지., 그거한테서.”
“그거요?”
“어, 그거. 그거…… 너도… 아마 한 번쯤 본 얼굴일걸…? 모란의 나라에 다녀왔다면 아마도 봤을 텐데. 황금 조각상 기억나니?”
손가락 끝으로 옅게 칼날을 쓰다듬듯 훑고 다시 검집으로 그 예리함을 감춘다. 캄파뉼라, 자신의 이야기는 검무를 통해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의 한계를 검으로,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쩐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자부하는 당신이라면, 자신이 살아오며 만난 그 누구보다 춤을 통한 이야기를 이해했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것을 보아온 당신이라면. 그리고 아마도 더한 것을 겪어온 당신이라면. 깊어가는 밤처럼 빠져드는 생각에서 벗어나 귀를 더욱 기울여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모란의 나라라면 당연히 기억하지요. 여러 의미로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거든요.”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으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 다 그 이유 정도는 알고 있었다. 권력의 폐해, 부패의 폐허의 끝에 떠난 꽃의 만다라, 결국 모행성을 떠났지. 만다라까지 갈 것도 없었다, 신이 버린 행성. 그 끝의 시작은 자유로우나 결국 혼돈으로 끝나겠지. 인간이란 혼돈 그 자체와 비슷하지 않을까, 캄파뉼라는 그런 생각도 해본 적 있었으니.
“그럼, 분명 네가 싫어할 줄 알았어! 거긴 애초부터 네가 싫어할만한 곳이었거든. 애기를 좀 해줄까?”
물어는 봤지만 그냥 말할 거야. 그래야 모두가 편하잖아. 그치? 어쨌거나 지금 보고 있는 당신이 편해야하니까.
큼. 아무튼, 일부러 의사를 무시하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듣는 너도 분명 묻고 싶은 게 있겠지. 그래서다, 그래서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문제의 답이다.
꽃의 행성, 앤블라썸드. 꽃의 만다라라 불리는 화일라가 태어나고 남은 자리에는 근원의 잔재만 남았다. 그것은 뭉치고 뭉쳐 생명의 증거인 행성으로 피어났고 화일라는 고향과도 같은 곳을 아꼈으나 그 꽃밭에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썩어들어가는 부패는 온갖 악을 몰고 나타난다. 종래에는 화일라가 제 손으로 고향을 버렸으니 천지지변이 하루건너 나타나는 일이 빈번해도 이상할 것 없는 것이다.
성공.
누군가는 이미 이루었을 테고, 그보다도 더 높은 이상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을 테며,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 그리고 실패한 자도 있으리라. 네게 모란의 나라를 말한 것은 당장 우리 사이에 아는 것이 그것뿐이기도 했지만, 그곳은 화일라의 실패이기도 하다. 성공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도중이 실패로 남겨진 세계라니, 재밌지 않은가.
하여간, 그런 일이 있었으나 천성이 착한 사람이라 그런지 인간에 대한 의견으로는 그 무엇도 나타내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는 중립에 가깝겠으나 그것은 방관과도 같았다. 그러니 일부러 들쑤시듯이 묻는 일만 아니라면야, 좀 거리 없게 지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친구…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 동업자쯤 되는 거 같다.
“그래, 그 얼굴이랑 아는 사이라서. 눈물 50mL를 주고 꽃의 만다라한테서 직접 받아온 꽃씨! 그야말로 몸의 일부! 그러니 다력만 불어넣어도, 짜잔~ 반응하는 멋진 식물! 와!”
루예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영부영 말을 흐리듯 마쳤다. 어쩐지 영혼 없는 광고 톤이 돼버리긴 했으나 그의 말에는 딱히 거짓이 없었다. 그저 내용을 추가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달의 눈물 50mL면 꽤 싸게 먹힌 편이나 다름없었다. 화일라의 꽃씨는 자신의 힘을 떼어내서 만들어주는 형식이니 아무리 비교해봐도 그쪽이 더 비싸다. 꽃의 만다라가 품어 만든 씨앗인데, 하품만 해도 나오는 액체보단 훨씬 더 높은 가치겠지. 한화로만 따져도 약 2조는 될 가격… 아, 아무튼. 어디에 내놓아도 끝내주게 비쌀 것이다.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근원, 정수의 결정, 해당 개체의 진리를 세우는 이치 그 자체나 다름없는 것의 일부나 다름없는 것이다. 알기 전에는 모르지만, 알고 나면 목적이 있는 이들은 탐을 낼 만한 그런 것.
“제가 만다라에 대해 이해한 것이 정확하다면 여기에 심은 꽃은 꽃의 근원 자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맞나요? 그런 희귀한 씨앗에서 피어난 꽃이라면 저보다 오랜 생을 산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겠죠.”
캄파뉼라는 그렇게 말하며 이게 맞냐는 시선으로 그를 슬쩍 보았다. 어쩜, 귀엽기도 해라!
“이런 문제로 귀엽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어? 내가 입 밖으로 말했나? 루예나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에이. 뭐,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 난 언제나 사실만 말하니까.”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 어쩐지 옆 통수가 진득한 눈빛으로 따가운 것 같다. 루예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캄파뉼라를 애써 모른 체하며 화단에 쪼그려 앉았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제각각 무리를 짓고 예쁘게 정렬된 채 싱그럽게 피어나 있었고 공기가 좋지 않은 도시답지 않게 선명한 달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하늘은 이미 짙푸르게 어두웠으니 당연하였다.
“아무튼 말이지, 걔 몸 조각… 아니, 만다라의 일부인 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확히는… 뭐랄까, 그 종의 근원 정도야. 비유를 들자면… 이게 만약 해바라기의 형상이었다면 해바라기의 근원 일부분, 정도? 하지만 뭐, 화일라랑은 이미 떨어진 지 한참 됐으니까 이젠 근원이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지. 근원의 파편 부스러기, 정도쯤 되지 않을까? 깊게 생각해봤자 정확한 답은 안 나오겠지만.”
루예나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만히 듣던 캄파뉼라는 모르는 이름이 나와 입을 열었다.
“화일라가 누군데요?”
“꽃의 만다라.”
아. 짧은 대답 한마디만이 그 뒤를 이었다. 루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말을 했다.
“뭐, 그래서… 이 옥상에 있는 건 좀 오래됐거든. 일단은 한참 됐지, 네가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들이니까… 그래도 네가 죽기 전보단 먼저 죽을 거고.”
그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내 다시 떼었다. 제가 생각해도 어쩐지 마무리하는 말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수명이 다한다는 뜻이야. 여타 생명들이 그러듯이.”
이건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들이니까. 루예나가 정말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장에선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것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부 살아있지만, 점차 죽어간다. 그래서 그런 걸까, 생명을 품고 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제가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려고 발버둥 친다. 이 눈으로는 무엇을 바라보아도 작디작은 것들 것들의 욕심 담긴 움직임들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 행성은 그렇게 난리를 피운 걸까. 자신들을 지켜주던 것이 떠난 세상이라니, 얼마나 절망적이겠나. 그러나 전쟁은 위험하고, 성공해도 잃은 것이 더 많을 수단이었으니 그곳은 실패한 것이다. 당장 저 같은 타인이 봐도 그래 보이는데, 행성에서 살아가는 것들은 오죽할까?
수없이 많은 대화의 주제들이 낮고 옅게, 혹은 깊게도 스치듯 지나가고, 의견과 의견을 흘려보내던 중 드는 생각은 그것이었다. 너 또한 한 생을 살아가는 꽃이라서, 그 아름다운 폐허를 본보기로 삼고 빗대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곳은 꽃의 근원이니까.
“자, 어쩌다 보니 조금 횡설수설한 감이 있긴 했는데…… 이렇게 얘기하는 거로 조금이라도 궁금했던 걸 해결했으면 좋겠네! 아니면 더 물어봐도 괜찮고? 난 원래 말하는 걸 좋아했으니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어. 너로선 이해 가지 않는 게 당연히 있을 텐데, 속으로 품고만 있으면 슬퍼~”
일어선 루예나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꽤 과장이 심한 몸짓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의 캄파뉼라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음… 아니다,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간 것 같아 보였다.
달의 눈물. 사실 그쪽이 좀 더 캄파뉼라의 고개를 기울이게 하는 단어였다.
달의 눈물이라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련지,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그 눈물은 당신의 머리칼을 닮은 빛나는 은색일까, 아니면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듯 투명하려나. 이런 것을 묻는 것은 실례일까, 그는 고민하듯 루예나를 잠시간 응시했다. 만다라란 참으로 신기하고,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이해할듯하면 더욱더 높은 곳으로 비상해버리는, 절대로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존재.
그러기에, 당신들을 섬기는 신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만큼 당신들이 한낱 미물들을 위하지 않아도 그것을 비난할지언정, 어쩌면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그토록 방대한데 인간을 한 명, 신도 한 명을 어떻게 일일이 챙기리랴. 그런 당신은 어떤 이유로 인간들에게, 저에게 관심을 보이는가.
캄파뉼라가 가진 의문의 답은 꽤 간단했으나 그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루예나는 답이 없었고 그렇게 둘의 사이에선 그저 말 없는 이야기만이 오갔다. 그것을 오갔다고 표현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는 만다라라는 존재가 너무 거대해서, 결국 그 본질이 종교인 점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대한다는 것이었다. 잊을 수야 없는 개념이긴 했다만, 그래도 당사자를 눈앞에 두었냐, 안 두었냐는 엄청난 차이이지 않은가? 마치 연예인은 화장실에도 안 갈 것으로 생각하는, 바보들이나 할 법한 착각의 종류와 비슷했다.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머리가 있는데 왜 모르겠나.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착한지, 알 사람은 다 아는데 우리라고 모를 일이 전혀 없다. 그저, 미물과 다른 점은 단 하나였다. 처음부터 진상을 알고 있다는 것.
오래 살아가게 되면, 일반적인 것들은 결국 영원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은 미쳐서 종래에는 흔적도 없이 무너진다. 일반적인 정신, 일반적인 의지, 일반적인 것들,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만다라는 일반적이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해야 하지만 다른 생명처럼 우리의 육신은 하나라서, 그저 남아돌 지경의 긴 시간을 적당히 활용할 뿐이었다. 쉽고도 간단하지만, 막상 하려면 쉽지 않은 것. 영원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그것이 만다라의 일반이다. 군림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면 다른 것들이 바라보고, 단순한 존경을 떠나 숭배를 해줘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모두가 잘 알듯, 인간이 그런 걸 잘한다고 해서 항상 똑같은 마음인 건 아니다. 물론 변치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래, 너무 잘 알고 있다. 대다수는 절대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보통은 대다수가 먼저 보일 수밖에 없다.
내가 그저 오밤중을 돌보았을 뿐이었는데 너희가 스스로 이것을 자애라 부르더라. 내가 권능을 행하니 너희의 마음과 생각이 고르지 못한 채, 겉으로만 똑같음을 내보이더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알려주어도 고치지 않는 것들을 어찌 신도라 하더냐? 내가 태어나기부터 부여받은 사명의 의무를 다하니 그저 자애롭다고만 칭송하고, 마음 쓰는 대로의 발걸음에는 그만두어라 부르짖으며 용서를 비는데 어찌 너희에게 마음이 생기랴. 너희에게 모순이 가득해 마치 흉한 것이 마음에서부터 똬리를 트니 어찌 이것을 심판하지 않겠느냐.
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물들인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내 이름도 팔아먹으며 사리사욕을 채우려 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앞의 너는 그렇지 않은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선물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이 길고 풍성한 머리칼을 좀 잘라서 끈 팔찌로 만들어줄까? 좋은 부적이 되어줄 텐데. 아아, 인간을 이토록 생각해주는 나라니, 얼마나 착해! 그야말로 옹호파의 모범적인 만다라네! 얼마나 바람직한 생각이람.
이런 만다라라서 좀 더 포교 활동이 잘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인간이 좋든, 싫든, 우주의 대부분은 인간이기에 신앙과 믿음을 얻으려면 그들을 상대로 장사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다라는 받는 신앙심이 클수록 강해진다. 게임으로 비교하자면 어떤 캐릭터로 플레이하든 기본 스탯은 완전히 똑같으나 끼고 있는 장비를 잘 구해둘수록 격차가 아주 심해지는 것과 같았다. 온 우주로부터 전해지는 신앙심은 만다라의 장비와도 같다. 그래서 내가 다른 것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게 아닐까. 그러니, 이렇게 계속 우호적인 모습으로 잘……
사람이 혼자 있게 되면 어떤 큰 감정들이 갑작스레 물밀듯 밀려오는 것처럼 나 또한 다를 것 없었다.
이런 생각은 대게, 관련된 무언가를 생각하다 몰려오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웃으면서 마냥 우호적인 척, 착한 척 같은 걸 해줘야 할까,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제라도 다른 애들처럼 인간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거나, 혹은 일반적인 만다라처럼 인간을 싫어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 생각해보아도 역시 그런 나는 상상할 수 없어서,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런 나 같지 않은 일을 이제 와서 하기엔, 생각만으로도 내 어린 나날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삶을 하고 싶은 것으로 불태우며 그렇게 종족을 이어나가는 자들.
그래, 이게 내 사명이겠지. 굽어살피리라. 작은, 아니 작다고 하기엔 이미 너무 커져 버린 것. 거대한 나의, 나만을 위한, 오직 나의 제국을. 위로는 공손히 받들어 모시고, 주변으로는 규율을 지켜 보이며, 아래로는 관용을 베푸는 착한 독재자가 되어 군림하지. 착한 사람 같아 보이겠지?, 그래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가끔은 비참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아닌가? 언제까지 비위를 맞추다시피 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래,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고. 이런 시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렇게나 오랜 시간을 살면서 느는 건 일과 일, 그리고 무료함이었다. 일은 하면 할수록 요령이 늘어갔고, 무료함은 그것의 세 배,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늘어갔다. 그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래전부터 해왔던 일을 계속, 끊김 없이, 아직까지도 하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늘 즐겁고 기대로 가슴이 부푼다.
이 이상한 카페를 운영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런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느는 건, 똑같거나 비슷한 일을 매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면하는 것이었고 그런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보를 흘리듯 떠들고 다니는 것이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일어나도록 적당한 정보를 흘리는 것에도 재미가 들렸다. 매번 같은 시작, 매번 다른 끝. 그것이 내게는 질리지 않는 장난감이었고 나는 매번 새 장난감을 찾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돌아왔다.
그래서 이젠 항상 어딘가에서 농땡이 치다 오는 만다라의 이미지가 반쯤 굳어져 버렸다. 이런 걸 인간이 알기라도 하면? 글쎄… 협박이라도 하려나? 근데 어떤 간 큰 인간이 그럴까? 태초에 인간이 우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 무료함이라고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 인간이 호기심을 안고 다른 무언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곧 내가 무료함에 버티다 지쳐 똑같이 호기심을 안고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 그러니 인간이 알든 말든 상관없는 것이다. 그들이 믿는 건 만다라가 만든 신과 태초의 도시에서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이지, 이런 사적인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 캄파뉼라 같은 예외가 있기에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처럼 스쳐 지나갈 법한 인간의 이야기는 모이고 모여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 좀 더 힘을 실어준다. 너처럼 다른 이들보다 좀 더 특별한 사람을 나는 구분할 수 있다. 어떻게냐, 고 물어봐도 대답은 못 하니 묻지는 마시고.
여하튼,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즐겁게 흔들어놓고 설레는 마음을 남겨둔 채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다. 그러니 네게 끊임없이 간섭하려는 이유는 별 게 아니야.
“물어볼 게 없는 걸까? 그렇지만 생각만 하기에는 모든 게 다 아쉬운걸. 생각의 뿌리부터 바꿔보는 건 어때? 물론 생각만 그렇게 바꾼다고 해서 뭔가 막 달라지거나 하진 않지. 보통은 그렇긴 한데, 지금은 네 앞에 내가 있잖아. 가끔은 큰 시도라던가, 그런 도전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루예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제가 큰 시도라도 된다는 것 마냥, 자신의 가슴팍을 탕탕 두들겼다.
“달라지는 게 왜 없겠니! 이 내가, 너를 아는데.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한 나 말이야, 나!”
루예나는 일단 그렇게 말했으나 사실은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로, 무엇을 물어보던 대답은 가능했다. 그러나 만약 제 삶의 끝을 다시 한번 물어온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랑받던 체리시. 그래, 한 송이의 연보랏빛 캄파뉼라. 그 길의 끝에 선 C.C.의 끝을…
나는 거짓 없이 말해줘야 할까?
자신의 끝을 알게 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카트레리아도 남의 미래는 말하고 다니지 않는데 말이지. 하지만, 만약에 혹시라도 네가 정말 알고 싶다면, 뭐. 각오는 알아서 했을 테니까, 그래. 좋아, 말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이 온다면, 겸허히 네 죽음을 받아들일지어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어쩐지 상대방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루예나는 슬쩍 고개를 들고 보았다. 캄파뉼라의 시선이 제게 닿아있었다. 그 눈길 속에 담긴 여러 의미를 루예나는 알 수 있었고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눈빛도 오랜 시간을 살아온 제게는 익숙한 일 중 하나였으니.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분명 궁금하겠지, 당연히 그럴 테지.
만약 네가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것을 물어본다면 나는 그 수많은 순간을, 네게 언제 다 말해줄 수 있을까? 사막의 오랜 이야기라 불리는 천일야화에 견준다면 아마 내 삶이 승리할 것이다. 마치 샤리아 왕처럼, 너는 듣기만 하면 될 테니 나는 세헤라자데처럼 노래하듯 읊어주리라.
네가 했던 말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궁금하다고 했던 것. 그저 넘기기에는, 알고 싶어지는 것이 많아 어쩔 수 없다고. 그래, 그게 바로 무언가에 의해 호기심을 안고 다른 것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에 관한 것을 궁금해했고, 주변을 궁금해했고, 이젠 저 너머의 진리를 통해 세계를 내다보려 하는 한 송이 캄파뉼라야, 네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것은 앞으로의 너일까, 지금의 나일까. 그도 아니면……
“왜 그러니, 정말로 진짜 물어볼 게 없는 거니? 아니면 아직 의심 한 조각이 마음 어딘가에 남아서 그러는 거니? 난 다 알고 있대두? 정말인데, 이쯤 되면 섭섭한 걸~ 아니면, 아직도 생각 중이니? 깊게 할 것 없어, 답은 나에게 있으니 말해줄게.”
이쯤 되면 집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계속되는 질문에 캄파뉼라는 슬슬 귀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 그만 물어보라고 하기엔 어쩐지 압박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애롭다고 해놓고는 이런 식으로 압박하는 건가.
안 그럴 것 같아서는 꽤 고집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고집 있다는 건 그간의 대화로 조금이나마 알 수는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분위기는 아무래도 대답을 요구하는 모양이었다. 그저 자신을 보는 눈동자일 뿐인데도 이런 걸 보면 역시 힘이 대단한 것일까. 어쨌거나, 그는 입을 열었다.
“그냥 넘겨도 됐는데, 정 그러시다면 물어봐야겠죠. 그동안 한 질문도 많았으니까요.”
정말로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었다. 그중에는 어쩌면 인간의 최대 관심사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생의 끝까지도. 하지만 그 대답을 흘려보내는 당신에게 그것을 재차 묻지는 않았다. 답을 기대하고 질문한 것도 아니었고, 인생이 길든 짧든 인간의 끝은 정해져 있었으니. 자신은 최대한 살아가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피어나는 것이, 전부.
“그러면, 말해주세요.”
내가 아닌, 당신. 달의 근원인 당신에 대해. 인간을 굽어살피는 당신에 대해. 우주를 오랜 세월 지켜본 당신에 대해.
당신이라는 만다라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만다라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도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자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그 어떤 솔레유 제국의 황제보다도 화려한 빛을 발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빛나기도 했지만 그만큼 어두운 시간도 거쳐왔겠지. 빛이 밝을수록 생기는 그림자도 더욱 선명한 어두움이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공감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사람을 여태 만난 적 있을까 생각해본다. 특이하고 뛰어날수록 이해해주는 자도 적어진다. 뛰어난 것이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과정을 봐주는 이들은 몇 없다. 오로지 결과에만 치중한다. 세상이 체리시를 잊고 오로지 C.C.만 기억하듯이. 당신도 언제나 '루예나'가 아닌 '달의 만다라'로서만 기억되지 않을까.
“나를,”
캄파뉼라의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길어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루예나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질문에 살짝 난감해졌다. 나의 이야기. 무궁무진한 길들 중 하나만 걸어야 하는, 모든 것의 사이에 있었을 수많은 선택. 주변의 작은 영향들, 내 선택으로 대소사가 결정되는 모든 순간.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나의 순간들.
“어디서부터 말해줘야 할까.“
그렇게 네가 물었던 너의 끝은 결국 대답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 버렸다. 정말 알려줄 수 있긴 한데, 보통 인간은 제 죽음을 달가워하진 않잖아? 그래서 그런 것일 뿐이었다.
부드럽게, 유려하게, 우아하게, 나아갔던 캄파뉼라의 검무를 떠올리며 루예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어디서부터 해줘야 할까… 가장 처음부터? 아니면 그저 어렸던 시절부터? 가장 슬펐던 시기도 있고 가장 기뻤던 순간도 있지. 그도 아니라면 꽤 최근의 이야기도 있을 거고.”
“처음, 초중반, 중후반, 최근… 어디에서 시작하든 결국 당신의 이야기라는 것은 변함없으니까요.”
누구나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한 발 내딛는 걸음은 점점 위태로워진다. 그도, 루예나도, 둘 다 뻔히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조금만 잘못 딛어도 기다리는 것은 추락뿐이고. 달콤한 휴식은 강자에게도, 약자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상은 잔혹하다고, 단언한다. 그런 세상이기에 자그마한 아름다움이라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안식처라 부르든, 사랑이라 부르든, 낙원이라 부르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끝이 죽음밖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검을 놓지 않고 휘두르는 이유였다.
포기하는 순간 수긍밖에, 인정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랬다. 작은 반란이라도 해보겠다, 억울한 고통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정 고르기 힘들다면… 당신을 당신으로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 는 어떤가요, 너무 대단한 것을 요구하는 걸까요?”
살풋 웃는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요구인지는 자신이 더욱 알고 있었다. 사람의 삶은 단 하나의 이야기로 단축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방대했다. 만다라라면 오죽할까. 자신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랐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궁금한 걸 어쩌겠나.
루예나에게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제일 소중히, 중요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낙원으로 여기는 기억이 무엇인가, 조심스레 파고들어 본다. 당신의 이해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가다 마주친 들꽃처럼 조용히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으리라.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했기에 이토록이나 길게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
시작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헷갈릴 만큼, 수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늦은 저녁의 옥상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장소였고 하늘과 맞닿은 아래의 정원은 오랜 로망 중 하나였으며 죽어 멈추었던 시간은 다시 살아나곤 한다. 춤을 추는 것은 제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 같아서, 두 사람은 삶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한다. 이곳에는 바라보는 무한한 세상의 진리와 유한한 삶을 사는 이야기를 말하는 꽃이 있다.
그러니 여기에 내 이야기를 해도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을까, 아마도.
나는 언제나 기억하려고 하면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모든 일을 언제나 똑같이 기억해낼 수가 없어서 기록된 기억들에만 의존해야 했다. 그래도 그중 중요한 내용인 것들은 몸이 본능적으로 알아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장치 같은 게 없어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간은 너무나도 길어서, 아주 일부분이라곤 해도 꽤 길었다. 그마저도 일반적인 인간의 삶의 서너 배쯤, 이라고 말해도 꽤 많이 압축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저 먼 이전의 이야기,
태어나고 나서부터 시작된 이야기,
짧은 생명 속으로 뛰어들며 시작된 이야기,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의 이야기,
자기만족만을 위해 세계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다시 돌아가려고 한 이야기.
그리고, 그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것처럼 찾아왔다. 쌓아왔던 이야기와 이야기를 지나 그 끝에서 생명은 당도했고, 더 큰 세상의 무대에 서 새로운 역사를 써보라고 그는 말했다.
오랜 시간을 사랑한 고향을 수호하는 일에서 벗어나, 더 넓은 우주로 오라는 것은 신으로써 영광된 일이긴 했으나 나는 고민했다. 정을 주고, 품음으로써 사랑했다. 그래, 그곳은 삶의 고향,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 어떤 세계도 완벽할 수 없고, 엔스파일도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어중간한 땅덩어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마냥 깊게 두기엔 조금 힘든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망설였다. 내가 만다라가 돼야 했던 일은, 솔직히 말해서 좀 반쯤 강요이긴 했으나 스스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기 전까지 계속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피를 남겨두었고 축복으로 사랑을 남겼다. 피를 이른 자들로부터 능력과 재능은 꽃을 피울 것이고, 보랏빛 하늘은 스러지기 전까지 영원토록 푸른 가호를 상징할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그럴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슬퍼서, 그런 것조차 없으면 살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위태로워서. 말살과 척결을 원하는 세대는 나를 가시처럼 여기고, 아이들은 내게 끊임없는 돌봄을 원하고, 정원에 숨은 쥐들은 자신들이 내 숨을 끊어낼 것이라 믿는다.
내가 내려다보아야 할 세계는 너무나도 많고, 아직 수습하지 못한 일들은 바다만큼이나 드넓게 펼쳐져 있다. 온전히 스스로 벌린 일이었다면 하다못해 고통스럽진 않았을 텐데, 그들은 그저 ‘네가 잘할 수 있으니까’란 말로 떠맡기고는 모른 척해버린다. 신앙의 견제는 이 숨통을 어디까지 조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알고는 있지만 역시 모르겠다.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멍청하게 만드는 TV 마냥, 과부하로 망가지기 일보 직전인 기계 마냥, 어떤 것도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다. 곧 망가져서 전원이 나가게 될 기계처럼, 끝나지 않고 추고 있는 너처럼, 이것도 끝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언젠간 끝날 텐데 아직 때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비참하지 않나?0
나는 그만 쉬고 싶어. 이런 이야기는 해봤자 너는 공감해줄까? 아마도 아니겠지. 그래도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저 너머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 있게 해주는 것이라… 넌 참 재밌는 질문을 잘도 하는구나?”
살풋 웃는 네 백합과도 같은 웃음을 그저 따라 미소 지어주었다. 웃음은 짓는 순간, 가장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꽃과도 같아서 그것은 마치 한철 지고 마는 꽃 같아 보였다. 삶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겐 한철 지고 마는 것. 또 누군가에겐 오랜 영원을 노래하는 것.
얼마나 오랜 시간들 속에서 끄집어내 달라는 것인지, 기억의 순서조차 헷갈릴 지경의 이야기들 중 하나를 해달라는 네 요구는 당돌하다 못해 용감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많은 것을 넘어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사건들을 쉴 새 없이 거쳐, 보고, 듣고, 응하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하나를…
어떻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나만 말할 수 있을까? 이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추억의 들판에는 그리움이 방울져 함박눈 흩날리듯 떨어지는 것으로 쌓여간다. 발자국 하나 없는 깨끗함은 마치 오랜 성역과도 같아 나는 그곳을 죽도록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 있게 해주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고, 너에게 들려주겠지. 그 이야기는 마치 음유시인의 말과도 같아, 나는 노래하듯 읊고 너는 단 하나뿐인 청중의 자리에서 경청할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아아,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건 나를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와는 다르게 네게는 낙원까진 아니더라도 안식처가 있기를. 그게 너에게 예정된 것이기를,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깊은 밤은 고요한 강처럼 말없이 흘러가고, 주인공의 긴 이야기는 하늘 아래의 정원에서 달빛과 함께 춤춘다. 만월이 져가며 끌어당기는 새벽하늘의 빛깔은 황금의 태양을 부르고 아침은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파도가 끊임없이 치듯, 잠에서 깨어난 생명이 하루를 살기 위해 쉼터를 떠나듯.
오래, 아주 오래……
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푸소서.
그래, 한때는 저도 그리 손 모아 기도를 한 적이 있었지요. 과연 저희가 그 구원을 받을 만큼 선한 사람이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찌 모든 사람이 당신의 자애를 받을 수 있는 행운아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모든 사람이 행복만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정녕 당신의 선택이라면, 저희를 심판하소서. 다만, 적어도 그 심판의 손이 공정하기를, 그저 소망할 뿐입니다. 그러니 기억해주소서, 달의 여인이시여, 달의 주인이시여. 오늘도 작은 이들은 당신을 우러러보고 있나이다.
……허나 구원이 아니라면, 자비가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나요?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는 걸까요.
그에게 꽃이라 함은, 익숙하고도 작은 존재였다.
위안을 주면서도 동시에 쓰라렸던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는, 아름답고도 증오스러운, 바람 속에서도 꿋꿋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제 손에서 바스러질 것만 같은 세상의 파편. 어찌 보면 저도 별다를 것 없겠구나 싶었다. 특히 당신 같은 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찌나 연약한 존재일까, 그런데도 얼마나 고집스러운, 그래서 추하게 시들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한때는 정말 아름답고도 화려하게 피어나는 존재일까. 이 푸르른 글리베릴처럼, 언젠가는 주어진 수명이 다해 바스라 지리라도.
“확실히, 당신 말대로, 싫어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네요.”
그것은 모란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의 감상평 같은 것이었다.
실패했다고 했었나. 모란을 비롯한 다른 꽃들이 엉켜 자라고 시드는 행성의 싸움이. 전혀 안면도 없는 이들이었지만, 잠시나마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위해서 싸웠는지, 무엇을 위해 전쟁을 일으켜 검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과 닮은 이들이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사실은 비슷했다. 동시에 좋아할 수 없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슷해서 좋아할 수 없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에 그곳에 있는 내내 불편했지만, 같이 있는 이들이 있었기에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시 카페로 돌아왔을 때 후련함마저 느꼈지만 계속 그곳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같은 운명을 짊어진 동료라 할 수 있는 미카엘라도, 락스퍼가 걸은 실패의 길을 걷게 될까, 우려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태양의 권력을 무너뜨리려 하면서도 동시에 태양을 사랑해 결국 질 수밖에 없었던 해바라기의 말로를 따라가게 될까,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곳을, 모란의 나라를 떠나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만큼은 다를 것이라 믿었기에.
벚꽃의 눈을 살짝 굴려 당신을 바라본다. 기나긴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간의 침묵이 흘러든 순간이었다. 그래,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은 꽃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감히 꽃에 비유할 수 없는 이였다. 활짝 피었다가도 시들고, 남겨진 그 씨앗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런 시간에 한 몸을 맡긴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일까. 달, 만다라, 루예나. 그 어떤 한 단어로도 완벽하게 정의될 수 없는 당신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재밌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흥미로운 답을 들려주신 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간단한 답이라기보단, 세월의 이야기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정리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 이상하고도 신비한 카페에 오기 전까지는, 그 누가 말해줬어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지금 와서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다른 세계와 차원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문,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 신들의 신이라 불리는 존재와의 대면. 한낱 꿈이라, 망상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작은 목소리가 속삭여왔었다. 그것이 정말, 네가 원하는 것이더냐고. 전부 부정하고 돌아가는 것이, 최상의 길이었냐고. 그래서 지금도 믿고 있다. 어쩌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일지라도. 사람을 의심할지언정, 당신이 하는 말이 진실임을 믿었다.
참 신기하지, 어찌 보면 당신이야말로 자신이 싫어하는 이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으니까. 권력의 상징, 한 제국의 여제, 뭐든지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와 말투. 그리고 미소 짓는 자신의 가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력.
다시 곱씹는다. 루네트 제국. 엔스파일. 축복을 받았다는 상징의 보랏빛 하늘. 비록 루예나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과 비슷한 점이 있었기에 더욱 관심이 가는지도, 뇌리에 남는지도 몰랐다.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솔레유 제국의 사람들처럼 제국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이들을 증오하고 있을까? 아니면 반대로 선한 통치자의 축복에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을까. 언젠가 한 번쯤 가볼 수 있다면, 어느 방면으로든 확신할 수 있을까. 캄파뉼라의 눈에 비친 달의 제국은, 태양의 제국과는 다른 빛일까.
뭐, 궁금하면 물어보라 했으니. 지금이라도 조금 물어볼까. 곧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 기회는 지금밖에 없겠지.
“그럼 물어봐도 괜찮다고 했으니… 시간이 된다면, 당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대해 더 말해주지 않겠어요? 엔스파일이라는 행성에 대해, 더 나아가서는 루네트 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당신이 옛날 옛적 군림했던 왕국에 대해. 묻는 이유는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당신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미묘한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파헤치려는 정확한 이유는 자신도 확신한다 할 수 없었으니까.
비슷하다는 확신. 다르다는 확신. 다를 수도 있다는 확신. 달라질 수 있다는 확신.
그래, 자신은 결국 뼛속까지 반란군이자 혁명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이기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의 기묘한 만남이 끝나, 다시 장미와 태양의 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그것만큼은 바뀌지 않겠지. 캄파뉼라는 결국, 다시 불꽃 서린 검을 손에 들리라.
밤이 지나 다시 밝아온 여명 아래, 작은 빛의 파편들이 내려앉았다. 시린 태양 아래, 푸른 꽃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푸른 공간은 웃었다. 그저 따라 웃는 웃음은 간지러운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안타깝게, 슬프게 느껴지는 웃음.
그래, 나는 슬퍼. 더 이상 말할 수 없어서.
아, 아이야. 시간이 되었어. 너는 돌아가야 해. 왜 지금이냐고는 묻지 말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 무희님?”
루예나는 어쩐지 이상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정자의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살짝은 따스한, 조금은 강한 아침나절의 바람이 옥상을 건드리고, 두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깃을 매만지고 지나간다. 휘날렸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은빛의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표정을 캄파뉼라는 읽을 수 없었다.
그 표정은 정말 알 수가 없어서, 그는 무언가에 휩싸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본능이 이성을 앞선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는 스스로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감각은 아주 찰나였고, 다시 본 루예나의 표정은 너무나도 온화해서 캄파뉼라는 자신이 본 표정이 착각이었나 싶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손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본 순간, 방금의 감각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샌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자루를 쥔 손은 아주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니, 정말로 느껴졌다. 아까보다 더 강한 바람이 정원에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기류를 이기지 못한 꽃들은 제 이파리를 허공에 놓아주었고 그것은 이내 작은 꽃잎 폭풍과도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만을 감싸고 있었다. 캄파뉼라는 손을 보기 위해 내렸던 고개를 들어 올려 정면에 있을 루예나를 보았다.
기묘하게도, 루예나는 평온했다. 그 어떤 바람도 그에게는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머리칼은 그저 평소대로 파도가 치는 것처럼 보였고, 옷깃은 끝자락에 추라도 단 것인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루예나는 한 발자국씩, 점차 그에게로 다가왔다.
작은 회오리로 인해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루예나도 들어오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너무나도 쉽게 꽃바람의 벽을 뚫고 왔다. 생각해보면 이런 이상한 일은 전부 루예나 말고 할 사람이 없는데.
“갑자기 얘기해주기 싫어지셨나 보네요.”
“으음. 아니야, 아이야. 그건 절대 아니야.”
루예나는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어루어 달래듯 부드럽게 부정했다. 그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캄파뉼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올려 캄파뉼라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었다.
“말해주면, 믿을까? 뭐, 이제까지도 너는 전부 다 들어주긴 했으니 말해도 상관없겠지마는.”
대체 무엇을? 고향 땅이라는 곳에 대해 말해주려던 것이 아니었나? 그는 알 수가 없어졌다. 루예나의 태도가 너무 급변한 탓이었다.
“시간이 없어, 너는 가야 해…”
루예나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젠 그의 모습도 아득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 얼굴에 대어진 손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볼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부모가 아이를 달래주는 듯한 손길이 그런 것이었을까.
“지금은… 아직 허락을 받지 못했었어…… 그래서, 너를 보내줘야 해…”
지금은? 못했었어? 현재형과 과거형이 뒤섞인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에게 허락을? 목소리는 점차 아득해져 갔고 그는 어쩐지 제 몸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못다 한 이야기는 앞으로의 꿈에서 하자, 차원 너머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게, 너는 그저 장미꽃밭에서 나를 기다려……”
루예나의 그 말을 끝으로, 얼굴에 머물러있던 희미한 온기마저 사라졌다. 이상한 기분에 캄파뉼라는 이제는 뜨기 힘든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돌려 보내주는 것인가 보다.
아, 그럼 이 눈을 뜨고 나면……
캄파뉼라가 떠나고 남은 옥상에 루예나는 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을 타고 저 하늘빛으로 올라갔던 꽃잎이 알음알음 흩날리듯 눈처럼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그도 보냈다. 이젠 정말로 돌아가야 한다.
너무 오래 떠나 있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나 매우 즐거웠다. 원래부터 있던 과거를, 조금 더 아름답게 바꾸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와의 만남은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일이었고, 루예나는 그저 조금 더 멋있어지도록 손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허락된 미래에서 그에게 다시 이야기해주면 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의 너는 있겠지만,
더 먼 과거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없는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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