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의 꽃 :: 캄파뉼라와 함께 춤을

2. 시간은 돌고 돌아

:: 아마도 이것은 해피엔딩의 이후 ::

시간은 돌고 돌아

아마도 이것은 해피엔딩의 이후

우리는 훨씬 오래 산다,

하지만 덜 명확한 상태로

그리고 더 짧은 문장들 속에서.

<책을 읽지 않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것이 마지막일 줄, 귀띔이라도 해주면 좋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오늘도 지난 나날들처럼 헛수확일까 싶었다. 다른 손님들과 함께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고, 인파에 쓸리고, 또 사람과 대화하고, 다시 인파에 쓸리고, 그리고… 하여튼. 그러니 그때의 사람 없던 유채꽃밭은 마치, 노란 바다와도 같아서 그 위로 쏘아 올려진 불꽃은 바다 위에 피어난 꽃과도 같아 보였다.
그랬던 것들도, 이젠 이런 이상한 일들도 끝인 것이다. 빙글빙글 굴러가는 카페와는 이별하고, 돌아갈 일만 남았으니 전부 다 신기루처럼 스러져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으헤헤헤헤."

괴상한 웃음소리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테이블 위에서 턱을 괸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뭐……"

캄파뉼라의 어이가 없어졌다. 하.


이런 곳에서 오래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는 제 문만 열어주질 않았다. 오래 있을 이유가 없는데, 짜증 나게. 물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화사하게 웃어주며 집으로 보내주세요, 라고 하자 루예나도 화사하게 웃어주며 딱 한 마디를 했다. 싫어요!
저도 싫어요, 라고 할 뻔했으나 그는 17-아무튼 루예나는 그 나이가 맞다며 우겼으니까-살보다는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어른이었고, 눈앞의 청소년은 저를 을로 만드는 갑의 위치였다.

왜 그리 서둘러, 네 답도 못 들었는데. 사장이 그렇게 말하자 캄파뉼라는 할 말이 없어졌다. 맞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의 끝은 거의 제가 한 말을 루예나가 답해주었던 것이었다. 그래, 이 사람은 내 말이 듣고 싶을 수도 있지. 애써 합리화하며 캄파뉼라는 그대로 루예나의 맞은 편에서 의자만 끌어 뺀 채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래요,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언젠간 보내주시긴 하겠죠. 그가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하자 루예나는 좋다고 손뼉을 치며 헤벌쭉 웃었다.

"아주 좋아요! 그래, 그래, 우리 어디까지 했더라? 음, 어디 보자………"

거기까지 말한 루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 대화를 시작했던 창가 쪽으로 다가가 어설프게 쳐져 있던 커튼을 활짝 걷었다. 가게의 절반 중 창가와 가까운 부분은 불이 꺼져있었고, 안쪽에는 그대로 불을 켜둔 게, 마치 영업 종료 후의 내부와도 같았다.
다들 좀 남아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나 했는데, 어느새 손님은 저뿐만 남았고 직원은 그만 남은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캄파뉼라가 관심 있는 것은 그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대화의 끝맺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그래, 그래. 우리 많은 얘기를 했네요. 나한테 인간적이라며 칭찬도 해줬지, 가혹한 현실 속 회색의 크나큰 힘과 여러 영향도 말했지, 인간 공부는 자의로 한다고 알려준 거랑 만다라가 3세대까지 있다는 거랑…… 아, 맞아! 이런 내가 궁금하냐고, 까지 물어봤네. 어때요?”

확실히 루예나가 짚어준 것은 효과가 있었다. 인파에 휩쓸려 녹초가 된 캄파뉼라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으며 계단 아래의 왕 소파에 몸을 뉘다시피 파묻었다. 그대로 창가 쪽 의자에 앉은 루예나가 작게 웃는 것이 마치 지금의 제 모습을 보고 그러는 것 같아 왠지 심기가 언짢아진 캄파뉼라가 부루퉁해 입을 뗐다.

“뭐, 대부분 인간적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듣긴 하죠. 인간적이라는 게 꼭 좋은 점만 포함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뜻으로 말인 건 아니에요.”

행여나 나쁘게 말한 거라고 오해라도 살까 봐 캄파뉼라는 뒤늦게나마 해명을 덧붙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가 다음 이야기에 답하기 위해 넘어갔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생각이 끝났는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회색… 인간 자체가 회색이라고 해야 할까요? 꼭 다른 만다라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사실 제대로 대화해 본 만다라는 당신밖에 없으니 섣불리 정의할 수도 없지만, 당신은 좀 특별한 감이 있는 것 같아요. 말하는 어투라던가.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잠시 말이 흐려졌으나 그것이 결코 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맞다는 듯이, 캄파뉼라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더 많은 걸 알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릴 이유는 없죠. 제가 보는 시점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세상을 마냥 밝게 보지 않고 그대로 봐왔던 것을 말해줄 수 있으면 더욱 좋지요. 저 같은 경우는 재밌어서 하는 게 아닌, 오로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하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뒤통수치는 이야기도 엄청 흥미롭고요.”

그가 말을 끝마쳤으나 상대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저 앞의 가게 바닥만 보고 말했던 캄파뉼라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루예나를 보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듯해 보였다. 표정의 변화는 조금씩 머물렀다가 스러졌고 그것은 찬찬히 바뀌어갔다. 캄파뉼라 쪽은 보지도 않은 체, 어딘가 한 곳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깊은 눈빛을 하고 있던 루예나의 표정이 바다의 수평선 일출처럼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굳게 여기고 있는 눈빛이었다.

“알아, 알지. 내가 네게 나쁜 일 한 적도 없으니까, 당연히 칭찬이겠지! 뭐, 우리 만났던 시간 동안 그렇게 극단적인 헤프닝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진짜 당연한 결과려나?”

좀 전부터 중간중간 반말과 존댓말을 어중간하게 섞어 말하던 루예나의 말투는 이제 완전히 반말로 넘어가 자유분방하게 가게 안을 맴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이 가게에 왔을 때부터 주인과의 그리 큰 접점은 없었다. 오히려 그 접점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었고, 캄파뉼라는 의외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과연 제가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하려 해도 순순히 당해주실까요? 특별한 능력도 없는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이나 건드릴 수 있을까.”

“에이, 한 올쯤은 건드릴 수 있지 않겠어? 우후후. 음, 농담이 과했나? 그래도 우리 무희는 검을 쓸 줄 알잖아?”

어느새 계단 근처로 다가온 루예나가 캄파뉼라의 검자루를 톡톡 건드리며 미소 지었다.

“난 엄청 착한 편인데~ 합의 하에 대가 없이 맞아줄 수도 있지. 너라면 말이야, 너라면.”

그는 꽤 ‘너’라는 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검자루를 두드리러 온 루예나는 2층에 다녀오기 직전만큼이나 얼굴을 가깝게 들이대고 있었다. 그가 상체만 겨우 일으킨 캄파뉼라의 면전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자, 잘 생각해봐…… 인간 자체가 꼭 다 회색일까?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 우리도 확실하지 않은 일 가지고 함부로 말하거나 그러진… 않으려고 하거든.”

말하면서 몸을 일으킨 루예나의 말에 잠깐 공백이 생겼으나 그것을 알아들은 캄파뉼라는 조용히 들었다. 이상만 말해주기에는 저쪽도 그리 평화로운 편이 아닌 모양인가 보지. 그가 생각했다. 그런 것은 어딜 가나 똑같은 것이다. 부조리와 평화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제 과거에게 보내는 말과도 같았다. 삶의 다음 장을 넘기면 바로 죽음이 기다리는 것처럼, 잔인한 시절에는 오랜 대가가 필요한 것처럼……
내용이 다르더라도 맥락은 같았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캄파뉼라는 알았다. 종족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지만, 이 대화는 그런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권력과 초월은 상상을 뛰어넘고 루예나는 마치 모든 것의 집합체 같다. 그러니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이 사람에게 닿지 않을 테지. 그러니 얻은 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알겠지,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은 이런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그럼 제가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는 거의 전부 확실한 거라 봐도 되는 거네요? 정보의 양도 중요하지만, 정보가 맞는 것인지 확신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지요. 불완전한, 또는 틀린 정보 때문에 여태 공들여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니까요.”

그가 조금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남들이 들으면 추궁과도 같았겠으나 캄파뉼라는 그저 확인차 물어본 것이었다. 지난날의 실패로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는 건 한 번이면 족했으니까. 그러니 정확한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후후… 맞아, 아는 게 힘! 이라는 말도 있듯이, 세상은 정보 싸움이나 다름없지. 아, 그래서 내가 아는 게 많은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꼭 그렇다기보단… 아까 그쪽이 말한 대로 날 특별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편인 것도 한몫해서, 그런 것 같지만. 아, 맞다!”

차분히 말을 마무리하던가 싶더니만, 루예나가 벌컥 소리쳤다. 진짜 중요한 걸 잊어버렸었다 드디어 떠올랐다는 표정이었다.

“나 계속 이렇게 말해도 되지? 뭐, 이미 벌써 말 놓긴 했는데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 것 같지만, 아니! 근데 영업도 끝났는데 굳이 내가 존대를 해야 할까? 생각해봤지만 역시 그건 아닌 거 같아서! 그러니까, 괜찮지?”

물어보는 척, 강요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고작 반말에 화낼 것도 아니고. 캄파뉼라는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상관없다고 답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었으니까.

“아하하. 좋아, 좋아! 난 이래 봬도 공사 구분이 확실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라구, 엣헴! 뭐, 아니라는 애들도 있겠지만… 아이고,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아무도 반박 못 하네? 어머나, 아쉽겠다~ 그런 의미로 말해주는 내 뒤통수치기는 뭐랄까, 그냥… 자꾸 야금야금 갉아먹으러 오는, 그런 거지 같은 쥐새끼들에게 엿 먹이는 거? 아, 안에 쥐약이라도 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의 표현이 꽤 거리낌 없어졌다. 쥐를 잡고 싶은데 못 잡는 건가. 뭐, 자세한 내막은 알려주지 않는 이상 몰라도 되는 것이겠지.

“잘 생각해봐, 강하다고 해서 꼭 약자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게 아니잖아. 무엇보다도 난 그럴 목적으로 강자가 된 게 아니고. 나처럼, 너도 힘을 추구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분명 있겠지. 난… 음, 자꾸 어설프게 행동해서 어중간하게 되어버리고, 불완전하게 이룰 바에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그쪽은 어때?”

캄파뉼라는 답이 없었다. 정확히는 아직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그저 조용히 상대를 관찰하고 있었다. 가게의 주인으로써 내보여주던 모습하고 다른 게 무엇인지 찾는 모양새가 새주인을 탐색하는 고양이 같아서 루예나는 퍽이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런 속내도 모른 체 캄파뉼라는 고민에 잠겨있던 의식을 끌어올렸다.

“표현을 보아하니 ‘거지같은 쥐새끼들’을 상당히 싫어하시나봐요? 솔직하신 점은 좋아하는 편이지만.”

 캄파뉼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강자가 약자를 수호할 의무는 없지만, 강자가 강자라는 이유만으로 약자를 억압해서는 안 되죠. 전 그게 싫어서 힘을 추구하는 거예요. 강자가 된다면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말하고 보니 저도 딱히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네요. 오로지 저 자신만을 위한 목표니까. 선으로 포장할 생각조차 애초부터 없긴 했지만요. 이런 제가 경멸스러우신가요?”

그가 말을 마치며 웃었으나 눈은 전혀 웃지 않고 그저 입꼬리만 끌어올린 채였다. 귀엽게도, 루예나에게 있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인간이 캄파뉼라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악마가 일자리를 잃을 정도라는 농담이 난무할 만큼,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제 잘못 하나 모르쇠로 일관하고 버젓이 다니는 마당인데 뭔들 놀랍지 않을까? 오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오히려 캄파뉼라 정도면 준수한 신념인 편임을 루예나는 온몸으로 잘 느끼고 있었다.

“에… 그런 거로 네가 경멸스러워진다면, 인간에 대한 내 자비나 인내심은 이미 파탄 나서 나락으로 떨어진 지 수십억 년이 흘렀을 거야. 그러니 내 앞에선 그런 말 안 해도 돼! 인간이 다양하긴 하지만, 내 눈엔 또 거기서 거기 같아 보이는 면도 있고… 여하튼 말이지, 결론은 네가 어떻든 나는 상관 없다는 거야!”

루예나가 뭐 그런 말을 하냐며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하곤, 캄파뉼라의 어깨를 힘차게 두들겼다. 계속해서 툭툭, 두들기던 루예나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흠, 말의 내용이라… 그냥 거의 내 얘기를 하다시피 하는 건데, 그렇게 남의 입으로 들어보니 왠지 쪼오꼼 부끄럽다, 호호!”

“아무리 아는 게 많다고 하더라도 그걸 전부 드러내는 것엔 위험이 따르는데, 그런 면에서도 당신은 참 특이하다 할 수 있네요.”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은 건지, 아니면 반대로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자인지, 루예나를 보며 가늠하려 해봤으나 캄파뉼라는 그것을 이내 관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아무리 봐도 후자의 경우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마냥 살짝 고개를 흔들자, 루예나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이게 또 그렇게 되나? 뭐, 그렇겠지? 딱히 숨기면서 말해야 할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숨겨야 할 정도로 어중간한 위치의 사람은 또 아니란 말이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엔간한 건 그냥 말해도 상관없어. 뭐랄까, 사람의 심리란 역시 강자 앞에서 자연스럽게 수그러지게 만들기 마련이지. 그러니 난 오는 약자 막지 않아, 하이에나처럼 대가 없이 이득을 취하려는 부류가 싫은 거지. 자, 생각해봐… 아, 어디까지나 만약이야! 그러니까… 네게 죽도록 싫고 미운 상대가 있어. 네 기준으로 아주 약해 빠져서, 가지고 놀다가 언제 죽여도 상관없을 정도라서 좀 가지고 놀다가… 이젠 슬슬 질렸어! 라고, 생각한 그 순간!”

루예나가 손짓과 함께 예시를 설명했다. 달빛이 드는 창가로 보이는 긴 머리의 인영은 어쩐지 우아한 인형처럼 보였다. 

“네가 믿고 따르던, 음… 일종의 후원자라고 하자. 아무튼, 그런 사람이 네가 질려서 치우려는 애랑 놀아주래. 자기는 너랑 쟤가 노는 걸 봤고 그게 너무 흥미로우니 잘 부탁한대! 그리고 걔는 그 후원자 같은 사람이 자길 보호해준다고 생각하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는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는데, 어때? 그런 약자까지 수호해줘야 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말을 마치며 루예나는 우아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캄파뉼라의 시선은 창가를 향해 있었다. 그가 눈동자만 굴려, 바로 창가 옆으로 물러나 서 있어 상대적으로 그늘이 짙게 진 자리에 있는 루예나를 보았다. 캄파뉼라의 눈빛은 서늘했고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자신만을 향한 것이 아님을. 그는 그 너머의 있을 자신의 불꽃과 그림자, 살아왔던 빛과 어둠을 보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루예나는 조용히 눈앞의 인간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밉고 싫은 상대야 많다지만…… 그 관계에서 제가 우위에 선 적은 없었던지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가지고 놀아지던 쪽이었을 테니. 그렇지만 만약 상황이 바뀌었다면 상당히 기분 나빴다, 만으로 표현이 다 안 되는 기분이었겠죠. 평생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믿고 제 앞에 나타난다면 글쎄… 뭐, 여태 참고 있는 거로 대단한 거겠죠? 하지만 먼저 가지고 놀던 쪽이 그 대가로 돌려받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업보라고 생각해요. 애초에 자신의 강함을 무기로 휘둘러, 자신만의 흥미를 위해 약자를 괴롭히는 것도 악행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서 하는 말은 제 상황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었다. 캄파뉼라의 말은 언제나 굳게 가지고 오던 신념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오래 살려면, 쉽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 가지만 보고 살아온 것도 있었다.
하지만 업보, 그것은 업보였을까? 그렇다면, 나는 처음 만난 순간 그것을 죽여야 했을까? 그러나 한참 전에 과거는 지났고 다가오는 것은 미래다. 인제 와서 상상해봤자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루예나는 아무 말 없이 열어둔 창문의 창틀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 작은 동작에 고개를 잠시 돌려 캄파뉼라는 창밖을 보았다가 다시 루예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말을 마저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수호할 필요도, 의무도 없어요. 그러나 그저 무시하고 방관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치듯 넘겨버린 거라면… 이미 되돌리기엔 늦은 관계라고 보아요.”

캄파뉼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상대의 기색을 살폈다. 그의 너그러움이 어디까지 허용될까,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당신의 인내심이, 자비가, 당신을 비난하는 듯한 말에도 여전한지, 그리 확인하고는 그는 마저 입을 때었다.

“여전히 당신과 다른 사상을 내비치는 제가 괜찮으신가요? 따지자면 저는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부류와 비슷한 인간일 텐데. 심지어 저는 당신을 섬기는 인간도, 신도도 아니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딱히 당신에게 필요하거나 쓸모 있는 사람도 아닐 테고.”

그렇군.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난 루예나는 턱을 매만지며 딱 한 마디를 했다. 그 이후로는 침묵뿐이었고 루예나는 도통 입을 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그저 바닥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오래 걸리는 침묵에 할 말이 없자 캄파뉼라는 상대를 힐긋 보았다. 그는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캄파뉼라가 먼저 운을 땠다.

“그런데 유난히 제게 너그러우신 것 같은데, 달리 이유라도 있나요?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정도로, 저희가 오래 안 사이도, 가까운 관계도 아닌 것 같은데. 당신 말대로 당신은 그런 정보까지 드러내도 화를 입지 않을 만큼의 강자이고, 저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인간인걸요."

타인의 아량을 믿지 않는다. 그것이 악의에서 오는 것이든, 진정한 호의에서 오는 것이든. 또는 회색의 어떤 감정에서 오는 것이든. 그 타인이 인간이든, 신이든, 만다라든 그에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니 그가 어떤 반응을 취하든, 받아들일 수 있다. 수용과 이해는 완전히 다른 영역일 테지만.

“………흠, 내가 아까 말 안 했나?”

루예나가 마침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저를 보는 그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정말 별 이유 없는데… 넌 마음에 들었으니까? 진짜야, 그러니까 이렇게 막 다 말해주고 있지. 뭐랄까… 그래, 인간에게 정말 소중한 애완동물이 생긴 것 같은…? 아,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닌데, 비유가 좀 그랬다. 그치? 미안, 미안.”

어느새 창가 자리의 의자에 앉은 그가 아까보다는 좀 덜 활기찬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까 말했지만… 나도 딱히 착한 일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너한테 다 말해줬잖아? 하긴, 또 네 말 듣고 보니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 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네가 남들 같은 인간이 아니라 다행이다, 신도들이 들으면 신앙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겠는데! 그치?”

루예나가 말을 마치며 킬킬 웃어댔다. 캄파뉼라는 웃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다 따라서 웃어보았지만, 눈이 날카로워졌으면 날카로워졌지, 여전히 부드럽게 휘지는 않았다. 그저 겉으로만 동의하는 척, 그런 낌새였을 뿐이었으나 루예나는 딱히 상관없어 보였다.

“애완동물이라. 확실히 듣기에 좋은 표현은 아니네요. 옛날 생각나기도 하고.”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는지 벚꽃을 머금은 듯한 짙은 분홍빛의 눈동자가 살짝 어두워졌다, 다시 돌아왔다.

“글쎄요, 꼭 그럴까요. 당신이라면 신도 정도는 어떻게든 만들어 낼 것 같은데. 오히려 당신이 떨어져 나가는 이들을 얌전히 보내준다면 모를까. 그러니… 제가 당신에게 손대는 것도 아마 당신이 봐주신다는 가정 하에겠죠? 검무를 춘다 해도 그건 검술과 엄연히 다른 것인걸요.”

말이야 그렇지만 보통 실전용 검과 같이 날카롭게 갈린 칼날을 숨기고 있는 검집을 손끝으로 캄파뉼라는 매만졌다. 눈은 루예나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당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경계심이 깃든 시선이었지만. 그러다 살짝 고개를 흔들며 마저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제가 당신에게 해를 입혀서 받는 이득이 없는데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나요. 필요 없는 싸움은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요. 그러니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저에게 그리 자비를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으음, 이거 경계하는 걸까? 그래, 이런 걸 두고 아기고양이라고 하지? 파란 아기고양이?”

동문서답을 하는 루예나가 하하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것이 캄파뉼라를 향하고 있진 않았다. 창문 너머로 휘황찬란하게 뜬 만월은 따스하고 포근하게 도심을 내리비추고 있었고 루예나의 시선은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캄파뉼라의 얼굴에는 자신을 아기고양이 같다 칭하는 말에 여러 표정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이없어하는 눈빛, 살짝 짜증이 깃든 찡그림, 그리고 다시 입꼬리만 올려 만드는 그림 같은 웃음까지, 한 폭의 파노라마와도 같은 모양을 루예나는 그저 모른 척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후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자비로운 척하는 거라고 말 바꿔줄까? 물론 이런 것도 너에 대해 아는 게 많으니까 가능한 태도지만. 난… 내 성격을 잘 아는데,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걸 엄청나게 싫어해. 아까 말했지? 세상은 정보 싸움이라고! 그러니~ 네가 아닌 척해도 난 다 안다? 지금도 봐, 이렇게 아는 척 엄청 하잖아? 네가… 모르는 척, 숨기는 것도 괜찮아. 내가 다 아니까! 그러니 언제가 되든 나중에 같이 춤추자, 그걸로 비밀 지키기는 대가는 퉁쳐줄게! 난 엄청나게 착한 편이니까! 아하하!”

묘하게 가라앉아 있던 기분을 떨치기라도 한 건지, 루예나는 고개를 조금 뒤로 젖히기까지 하며 크게 웃었다. 언뜻 보기에는 해맑은 웃음에 가까웠으나 자세히 들여다볼 배짱만 있다면 아리라, 그것은 절대자가 언제까지고 모든 것을 제 뜻대로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즐거워하는 웃음임을.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잠시 뒤 웃음소리가 그치며 루예나의 자세가 바로 돌아왔고 그 표정은 마치 제가 방금 웃기라도 했느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이렇게 웃고 있을 때 가끔 돌발 상황이 닥쳐오는 경우도 있거든? 뚜껑을 열어보면 꼭 쥐새끼들이 물건을 훔쳐 가려고 하고 있더라고. 내가 여태까지 참은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단해, 그렇지. 그래! 너처럼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내가, 뭐? ‘아버지께서 관심을 가지시니 죽이지는 말아라, 네 힘을 믿는다.’ 같은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아… 이건 생각이 날 때마다 짜증 나, 진짜…”

‘거지 같은 쥐새끼’가 생각나기라도 한 모양인지 루예나가 한 손으로 눈을 짚고 신경질적인 말투로 식식거렸다. 얼마나 그러다 그가 손가락 새의 틈으로 눈을 굴려 캄파뉼라를 힐긋 보았다.

“아이, 참. 갑자기 화풀이해서 미안하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왜 그런 것들을 대신 관리해서 놀아주고 있는지… 남의 물건을 탐내고, 하지 말라는 짓은 아주 열심히들 하시고… 섭리로 따져보자면 하면 안 되는 일을, 날 이기겠다며 억지로 배워서 나대고……”

거기까지 말한 루예나가 손을 내리며 고개를 숙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숨소리였다.

“됐다, 이젠. 너무 푸념만 한 것 같네. 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네가 그런 것들이랑 똑같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널 향한 화도 아니었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넌 일단 마음에 들었다구! 음, 좀 많이?”

그가 의자에 앉아 흔들거리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며 말을 마쳤다. 캄파뉼라도 따라 상대의 발끝을 보았다. 흔들흔들,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마치 제멋대로이기 짝이 없는 사람의 마음과도 같았다. 변덕 때문에 좋아해 주는 것일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좋다고 하는 이유를 여전히 모르겠으나 루예나의 대답은 시종일관이었다. 아무리 처음 만난 사람이 좋아도 이렇게까지 개인사를 드러내진 않을 텐데, 역시 종이 달라서 그런 걸까. 캄파뉼라는 어깨를 슬쩍 으쓱이며 입을 뗐다.

“마치 절대자 같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하지 않고 참고 있는 게, 네, 대단하죠. 그런 당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건가요? 신들의 신, 그리고 그의 대표에게? 관리하고 '놀아주는' 것이 싫다면 제거하시거나…”

‘놀아준’다는 표현이 그다지 마음에 안 든다는 어투로 말을 하던 캄파뉼라가 순간 말을 멈추었다. 스스로 내뱉고도 뭔가 이상했다. 제거를, 하려면 진작 하지 않았을까? 아직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뭔가 다른 사정 때문인가. 그렇게 되면 제거는 안 되는 거겠지. 이쪽에도 이쪽 나름대로 개인사가 있겠지,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낫겠지.
 자신도 그런 위치였었다. 지금도 그렇겠지. 그러니 상대가 그토록 치를 떨며 싫어하는 것들과 다를 게 없다. 똑같지 않다는 말을 하셨던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캄파뉼라는 부정의 표시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요.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직 당신이 말하는 그들과 제가 크게 다른 점을 못 찾겠거든요. 이미 제 인상 관리하기는 그른 것 같지만?”

그러니 당신이 화를 내든, 화풀이하든 상관없다. 그렇다는 표시로 작게 손짓을 한 캄파뉼라가 살짝 의아함을 담아 말했다.

“이렇게까지 본심을 드러냈는데 마음에 들어 한다니, 신기하네요. 유용한 동료나 장기 말로 보일지언정, 제가 그리 호감 가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더 말해야 하나? 저도 모르게 달싹거린 입술을 보기라도 한 건지 루예나는 계속해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저 사람은 정말로 모르는 게 없는 걸까.

“그러고 보니, 모르는 게 싫다 하셨죠. 그럼 저에 관한 건 다 일고 있다고 예상해도 되겠죠? 그래도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네요, 저를 어디까지 아시는지.”

그가 한 차례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캄파뉼라’가 아닌 저를, 어디까지 알고 계시나요.”

그것은 마치, 상냥한 가면을 쓴 사람의 본심과도 같은 말이었다. 깨어진 항아리에서 물이 새는 것처럼, 깨져버린 웃는 가면의 틈에서 보이는 입매는 상냥하지 않은 것처럼. 얼핏 본다면 상냥하고 다정했겠지, 그러나 그 너머에도 똑같은 모습이 기다리라는 보장은 없다. 무희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러니 생각해보면 고작 춤 한 번만으로 퉁치기엔 조금 깊은 비밀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만도 한데?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요, 단순한 흥미? 말해주세요,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엔, 알고 있는 세계엔… 저도, 제가 살아가는 세상도 들어가 있는 건가요?”

어조가 꽤 공격적으로 들릴 만도 했으나 표정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정말로 궁금했던 모양인지 루예나를 보는 시선에는 대답해달라는 표정이었다.


오후의 느지막한 햇살은 따사롭고 캄파뉼라는 나른했다.

어디선가 루예나가 '파란 아기고양이'는 조는 것도 귀엽다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뭐.

가게가 위치한 거리는 사람 하나 다니지 않고 조용했다. 비현실적인 곳에서 이런 휴식이라니, 저 멀리 양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이 그의 기분을 더욱더 붕 띄워,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이런 휴식을 취해본 게 얼마 만이었던가. 이렇게, 경계 없이 무방비하게……
아니지, 경계를 풀기는 왜 푸나. 제가 아무리 대항하지 못할지라도 루예나 또한 온전한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른함이 가시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옆에 내려두었던 검을 찾기 위해 소파를 더듬던 그의 손에 제 검자루가 잡혔다. 그는 일어서서 검을 다시 허리춤에 매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는데…

“아, 거기 서 있지 마! 비켜줘!”

갑작스런 외침에 놀라 한발짝 뒤로 물러서자 양동이가 쏜살같이 제 눈앞을 날아 지나갔다. 양동이가 날아? 뛰어? 나가다시피 나는 양동이를 눈으로 쫓자, 양동이가 제멋대로 안의 구정물을 밖의 거리에 버리고는 다시 날아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일어나셨구만. 기왕 자는 거 그냥 내일까지 자지 그랬어. 그동안 청소도 좀 하고 장도 봐올랬는데.”

“청소, 요.”

그가 어색한 말투로 짧게 대답했다. 가게 바닥은 온통 물 바다와 거품 산으로 듬성듬성 이루어져 있었고, 탁자 위에는 의자들이 서너 개씩 거꾸로 올려진 채 저 멀리 한쪽에 모여 있었다. 대걸레, 손걸레, 그리고 푹 젖은 솔들…… 공통점이라면 모두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 마냥 사람도 없이 혼자서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이 주인은 지금 마법으로 가게를 청소하고 있었다. 여긴 초능력이나 마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청소해도 되는 거에요?”

“응? 뭐가?”

“전에 그러셨던 것 같은데, 여긴 초능력이 없는 세상이라고요.”

“아, 그거? 괜찮아, 괜찮아!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 없으니까! 아, 아깐 네가 있었지!”

농담하듯이 가볍게 말하며 넘겨버리는 루예나의 태도에 알 수가 없어진 캄파뉼라는 반문했다.

“사람이 갑자기 지나다니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럴 일은 없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에 말에 따르면 이 일대의 거리와 건물들을 전부 제가 사들였기 때문에 거리만 못 지나다니게 하면 된단다. 그러니 공사 중이라고 거짓 표시를 해두면 아무도 지나다닐 일이 없어 괜찮다는 것이었다. 뭐, 이런 짓도 언젠간 그만둬야겠지만. 사장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을 마쳤다.

밖에 좀 앉아있어, 기왕이면 소파의 먼지 좀 털어주면 더 좋고!
루예나가 캄파뉼라에게 마스크와 먼지털이개를 쥐여주곤 밖으로 쫓아내며 한 말이었다. 물바다에서 쫓겨난 캄파뉼라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대로 다시 들어가기에는 더 별로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손님에게 일을 시키는 가게가 어딨담. 그렇게 생각해봐도, 영업은 이미 끝났으니 손님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닌가? 잘 모르겠군. 그가 마스크를 쓰고는 먼지털이개로 조금씩 소파를 털며 생각했다. 어쨌거나 맡게 된 일이니 꼼꼼하진 않더라도 성실하게 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소파는 계단 아래 있던 그 소파였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내내 앉아있던 거기. 언제 어떻게 옮긴 거지? 더듬어서 떠올려본 기억으로는, 아마 물을 마시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루예나가 돌아오질 않아, 한참을 기다리다 그대로 소파에서 저도 모르게 잠든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힘이 그렇게 센 건가. 아니면 마법으로 소파를 띄워서…… 곰곰이 생각하던 캄파뉼라는 어느 쪽이든 그가 꽤 센 사람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어느 쪽이든.

그가 한참 먼지를 터는 동안 정오가 지났다. 햇볕은 처음 왔던 날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고 캄파뉼라는 허기를 느꼈다. 어젯밤에 다녀왔던 유채꽃밭의 시장에서 뭔가를 먹었던가? 아마도 먹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여튼, 뭔가를 간단하게라도 먹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먼지는 건성으로 턴 채, 그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먹……”

그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무생물들은 전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유일한 생물인 루예나만 자리에 없었다. 대체 어디를 간 거지.

“어? 왜 다시 왔어? 화장실 가게?”

2층 계단 위에서 얼굴만 거꾸로 내밀며 루예나가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가 물었다. 루예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다시피 청소하지?
딱히 할 말은 없었으나 이 상태라면 뭔가 제대로 먹기는 글러 보였다. 이거 언제 끝나죠? 캄파뉼라가 다시 물었다. 좀 걸린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슨 일인데? 상대가 여전히 얼굴만 내민 채 물었다.

“아뇨, 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많은 걸레와 솔들의 분주한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을까, 싶었으나 루예나는 들은 모양이었다.
배가 고프구나, 일단 올라와 봐!

루예나는 순식간에 캄파뉼라의 옷을 갈아입혔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마법인지 뭔지, 아무튼 그가 원래 입고 있던 동방 풍의 옷은 고이 접어 건넨 루예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래 꼬락서니가 이러니 내가 대접하긴 무리지, 외식할까?

그의 손에 이끌려 거리로 나온 캄파뉼라는 순식간에 쏟아지는 주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눈 돌릴 틈 없이 바빠졌다.
처음 보는 나라의 거리, 이색적이고 동시에 어색하기만 한 문화. 건물은 왜 이렇게 많지, 높이가 웬만한 귀족 저택 저리 가라 할 정도인데. 건물 때문에 이렇게 하늘이 좁아 보이는 풍경은 처음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서운 속도로 기계처럼 모형이 지나갔다. 저건 또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거지. 일종의 초능력인가… 싶다가도 여긴 초능력이 없는 세상이었지, 깨닫고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새롭고, 이상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사람들. 제국의 수도보다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데, 왜 갑자기 그 카페에서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인파에 치이던 기억이 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어깨 근처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는 것을 간신히 피했다. 아, 정신없다, 숨 막힌다.

이러다 루예나를 놓쳐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으나 다행히 루예나는 고난을 겪고 있는 캄파뉼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었을까. 그런 것 치곤 그저 재미있다는 듯 자신을 돌아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이끌리듯, 떠밀리듯, 캄파뉼라가 완전히 지쳐버리기 전에 도착한 곳은 음식점이었다. 이곳도 익숙하지 않은 풍경인 건 둘째치고, 루예나가 제 앞으로 밀어준 메뉴판은 모르는 언어로 쓰여있어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대충 사진을 보고 적당히 계란덮밥 같아보이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재화가 통하려나, 아차 싶었지만 안된다면 일단 루예나를 통해 환전하든지 물물교환을 시도하든지 해야겠다 싶었다. 어차피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루예나가 아니었던가.

“무슨 생각 하니?”

사람 없는 한적한 가게는 갑작스런 대량 주문을 준비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제멋대로인 상대가 그 소리 사이를 비집고 말을 걸었다.

“글쎄요, 돈은 어떻게 내야 하는지?”

“뭘 걱정해? 내가 있는데.”

 내가 사주는 건데! 그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가 가진 돈이 여기서 쓰일 턱이 없었다. 카페의 재화는 쓰일까 고민했으나, 좀전의 루예나가 사용한 화폐를 생각해보면… 글쎄. 허기가 진 것은 숨길 수가 없으니 일단 얌전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갚는 것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캄파뉼라는 루예나가 아무 생각 없다-그야 그럴 것이, 정말로 아이처럼 이랬다저랬다 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루예나는 고민 중이었다. 네가 말했던 다른 점, 호감, 내가 아는 것과 보는 세계. 우리의 대화는 부자연스럽게 끊겼고 루예나는 이것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대화를 위해 쓰여진다. 나는 알고 있고, 너는 모른다. 여기서 갑자기 이런 생각을요? 라고 생각하셔도, 결국 어떤 이야기든 진행에는 그에 알맞은 개연성이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개연성을 위해 내가 이끌어가기라도 해야겠지. 밥을 다 먹고 난 다음에는, 네가 나 보라며 검무를 춰줄 테니, 옥상으로 가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반드시 그런 전개로 흘러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얌전히 식사를 기다리는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루예나였다.

“흠… 밥 나올 때까진 좀 걸릴 것 같고, 얘기라도 할까? 어디 보자, 네가 잠들기 전에 했던 얘기라도 마저?”

여기서요? 캄파뉼라는 반문하려 했으나 이내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적한 시간의 식당이니 준비하는 데 조금은 걸리겠지.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으나 어쩐지 조금은 찝찝함이 느껴졌다. 상관, 없겠지?

“어디까지 했었죠… 아, 제가 마음에 드시는지?”

“그것도 있지, 그것도 있고…”

루예나가 제 머리를 빙빙 돌려 꼬며 그의 말에 답은 제대로 해주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묘하게 대답을 회피하는 모양새였다.

“뭐, 여러 얘기 했었네! 네가 놀아준 게 대부분인 거 같긴 한데!”

그가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제멋대로인 대답에 캄파뉼라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대차게 웃었던 모양인지 그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고는 겨우겨우 입을 뗐다.

“아, 아, 아… 정말, 웃겨… 아… 농담이야… 농담인데, 그런 얘기는 했었지. 기억나?”

“……네. 제가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과 다른 점을 못 찾겠다고 한 거, 말이죠.”

“그래, 그거. 아. 이젠 대놓고 찌푸리는구만, 역시 인상 관리는 때려친 거지?”

상대가 너무 웃는 바람에 기분이 언짢아진 캄파뉼라는 겸사겸사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모르시는 게 없으시니 퍽이나 즐거우시겠어요, 저를 꽤 잘 아시는가 보죠.”

의문형은 아니었으나 질문이긴 했다. 상대도 그것을 알았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걸? 왜, 궁금해?”

“…뭘 궁금해야 하죠, 제가……”

그가 말을 흐렸다. 무언가 생각나기라도 한 것 마냥, 벚꽃의 눈이 조금 어두워졌다 돌아왔다. 그것은 루예나가 간밤에 보았던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흩날리는 벚꽃처럼, 피었다 지는 꽃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생명처럼… 네 눈은 한 송이 꽃을 떠오르게 하고 그것은 너희가 다녀왔던 곳을 떠올리게 한다. 모란의 나라, 여정, 내가 보낸 이유…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어 늘어지지만 오래 빠져있을 여유나 이유는 없었다. 그런 것에 깊게 빠져있기에는 눈앞의 상대가 훨씬 더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도 될까?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을 스치는 표정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일을 해왔고, 캄파뉼라 같은 부류의 사람을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진실을 너머에 감추고 그저 누구에게나 똑같이 웃으며 사람을 대할 뿐이다. 잘 알고 있는데도 계속 관심이 가는 건 역시 재밌어서 그런 거겠지, 그러니 말해주어야 한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아노라고. 그러니 네게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나는, 다 알고 있지. 네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그 가슴에는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아~ 이거 정말 말해도 되는 걸까? 이런 데서? 진짜로? 네가…”

권력자를 싫어해서, 전부 죽여버리고 싶은 것? 아주 날을 갈고 벼르고 있다는 것? 어떤 걸 말해야 할까? 네가…

소곤소곤, 의자를 끌어 네게 가까워진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나면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조곤하게 노래하는 거야, 너의 진실을. 불타오르는 네 가슴팍에 조용히 잠가둔 혁명의 씨앗, 네가 꽃 피워낼 날이 언제인지. 그래, 이건 나의 기대야. 너울너울 춤추듯 흔들리는 불꽃처럼… 그래, 춤을 추자. 같이, 너는 검무를, 나는 내 무수식舞修式을. 뭐, 그날이 오긴 할까 싶지만!

“식사, 나왔습니다. 오므라이스는 어느 쪽에…”

“아, 저쪽이요. 연어 이쪽에 주세요.”

팍 꺼져버리는 불꽃처럼, 루예나는 종업원이 오자 아무 말 한 적 없다는 것처럼 바로 캄파뉼라에게서 멀어졌다. 저 사람은 제가 무슨 말 했냐는 듯 웃으며 종업원에게 감사 인사를 했지만 캄파뉼라는 눈꽃의 결정처럼 시리게 빛나고, 일렁이는 물처럼 요동치는 마음을 담아 이미 제게 고요히 건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뭐해? 얼른 먹어?”

루예나가 그를 재촉했다. 상대는 이미 세 입 째 먹는 중이었다. 먹는 속도가 경이로울 만큼 빠른 것에 놀랐으나 캄파뉼라가 진짜로 놀란 것은 그가 죄다 연어회로 보이는 메뉴를 4인분씩 쌓아두고 먹는 것이었다.

“그거 우리가 다 먹긴 하나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루예나는 꽤 복스럽-사실 게걸스럽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게 제 식사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깊게 생각해봐야 자신만 피곤하다는 것을 앞선 대화들로부터 깨달은 캄파뉼라는 빠르게 생각을 관두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관두는 것이 덜 피곤했다. 그게 무엇이든, 최대한 빠르게. 그것은 감정 또한 매한가지였다.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빨리 감추든, 이 사람에겐 전부 소용없다. 이것도 예상대로였을까. 그러나 아무리 각오를 했어도 살짝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 딴에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 익숙해졌다지만 어쩐지 당신 앞에서는 깊은 본심마저 까발려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이 만다라여서 그랬는지는, 아니면 당신의 말대로 당신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예리한 사람들은 충분히 상대해본 자신이었다. 그들과 손도 잡아 왔었다. 그러나 속속들이 다 읽히는 것 같은 느낌은, 글쎄.

"저의 모든 면을 본 사람이라곤 여태 단 한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 어째 오늘 바꿔야 할 것 같지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몸을 살짝 숙여 키를 맞추고, 스치듯 가까이에서 마주 속삭인다. 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음성이었지만. 마주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지만, 절대로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래요, 전부 맞추셨네요. 전부 부인할 길 없는 사실이에요. 권력자가 싫고,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싫고, 나는 오늘도 혁명을, 불꽃을 꿈꿔."

잠시 말투가 바뀌었다. 사실 당신이라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대해 확신했었겠지만. 여우 가면만 쓰지 않았지,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C.C.의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다시 캄파뉼라가 웃었다. 아마 당신도 웃고 있지 않았을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후… 그래, 그러니 네게 춤을 신청했는걸. 알지?”

그는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고, 말투에는 자신이 가득했다. 캄파뉼라의 생각대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보였다. 아느냐고? 내가 당신을? 아니면, 무엇을? 알고 있다고 긍정하기에는 범위가 너무나도 넓었다. 나는…

“글쎄요…”

“흐응… 그렇구나~”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이것이 최선의 답이었던 게 맞는지는, 그 이후로도 모를 일이겠지.

“뭐! 몰라도 돼! 나는 다 아니까!”

이야기가 어째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지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이 사람에게는 상식이 별로 통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를테면… 네가 그랬지, 고작 춤 한 번으로 퉁치기엔 좀 깊은 비밀 아니냐고. 그치만 춤이 어때서? 넌 무희니까 나보단 춤에 대해 더 잘 알지 않겠어? 한 수 배우겠다는 마음도 담아서, 신청했는걸. 어때, 이렇게 보면 꽤 그럴싸하지 않나?”

루예나는 그렇게 말했으나 사실 그의 본심은 별거 없었고 심심해서 그랬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한다기보다 상대가 대답하며 보일 태도를 더 기대하고 있다는 편이 맞았다. 사실 그가 캄파뉼라를 호의와 선의만으로 응대하기에는 이미 저 스스로 세워둔 정도의 기준을 지나친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루예나가 그를 살가운 태도로 대하는 것은 별로 큰 이유가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몇몇 부위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노는 아이라면 보통은 집어던지고 뜻대로 잘 움직이는 다른 것을 가지고 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화자찬 중이었다.

아, 난 너무 착해! 루예나는 머릿속으로 제가 아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태도를 비교하며 자신이 너무나도 착하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언니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부숴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 나서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루예나는 제가 아는 가장 과격한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고 있었다. 동생이었다면 그냥 미련 없이 버렸을 것이고, 친구였다면… 아, 아니다. 그가 밥을 크게 한술 떠먹으며 생각했다. 루예나의 친구인 혜린은 인간 출신이라 그런지 만다라치곤 성격이 꽤 무른 편이었다. 루예나가 제 주변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동안 상대 또한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캄파뉼라는 대답했다.

“한 수 배워가시겠다라, 그 비밀만큼 값어치 있는 춤으로 보이길 바랄 수밖에 없네요. 그럼 이젠 말해주시겠어요? 당신의 눈에 비치는 세계에 대해서.”

"내가 보는 세계? 음… 그게 뭘까? 그러고 보면 생각해본 적이 없네. 당장 일들만으로도 헤쳐나가기 쪼오끔 벅차서 그랬나?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너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놀아주는' 것들은 없었으면 좋겠다. 흠, 세계라…… 내 눈에는 엔간한 세계가 다 똑같지, 전부 우주 안에 속해있는 것뿐이야. 그렇지, 우주의 이야기를 조금 해줄까?”

인간은 태어나는 차원 하나에 의해 평생의 삶이 갈린다. 그것은 마치, 아기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약자는 부조리에 굴복하고야 말듯, 뜻있는 정의가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쓰듯… 당연한 이야기들은 모이고 쌓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것은 우주를 모르는 이들이 가지는 당연한 법칙이다. 이렇게, 시공을 넘어 다른 차원의 카페로 와놓고도 이 현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게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일인지…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손님들이 차원을 넘어왔다는 일은 큰일인데도 이렇게나 조용한 것이다. 부와 권력이라는 게, 힘이라는 게 얼마나 강력한지, 얼마나 압도적인지. 그것들을 내가 휘둘렀기에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있다. 사는 곳이라는 게 다 그렇다. 그래서 더 이해를 못 하는 것들도 있다. 자신만의 세상에서 벗어나 맛보게 된 세상의 원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못 받아들이고 부정해도 괜찮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 다 그런 법이다!
무지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가, 그런 아이들을 깨우치게 해주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사실 어떤 일이든 그 멍청하고 사납기 짝이 없는 장미 정원의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단 훨씬 더 재밌겠다만. 네가 그랬었지, 제거하는 게 어떻냐고. 기억나나? 근데, 그러지 못해. 누구나 개인의 사정이 있듯이, 뒤에서 거래되는 어른의 사정이 있는 것처럼. 네 말대로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끝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수많은 실패를 딛고 마침내 맞는 길에 발을 들인, 무패의 왕도를 걷는 이에게 네 걸음을 방해하는 것이 재밌다며 내버려 두어라, 말하는 절대적인 존재 때문에. 내가 이 길을 걸을 수 있게 안배해주신 것도,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게 안배를 내려주신 것도 전부 다 같은 존재이기에, 그래서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존재라는 게 무엇이냐… 아, 참. 그거 비유 아니야. 진짜로 ‘존재’라고 부르거든. 아무튼.
 자, 봐. 어디서 살아가든 간에, 살아있는 생명은 존재하지? 생명 자체가 다 존재하기에 살아있는, 그런 거지. 그런 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것-무생물도 마찬가지야-의 존재를 유지 시켜주는 ‘존재’가 있다. 말 그대로, 비유도 아니고 다른 명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명칭으로도, 그냥 그 자체만으로 ‘존재’라고 불리신다.
‘존재’가 없다면 그 누구도 살 수 없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그런 분들이지. 다들 자비로우신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슬러도 된다는 말은 아니니까, 특히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나 거대하시고 위대하신 것들이니 아는 이들은 거의 없어. 너도 알겠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조용히 없는 것처럼 사는 게 최고니까.
 그러니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보통… 만다라, 와 만다라가 알려준 주변 정도지. 흠, 내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너도 이제 내 주변쯤 되겠다. 축하해, 만다라의 주변?”

자, 어때? 루예나가 그렇게 말하며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한 술 떠먹었다. 날 것의 연어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에는 재밌다는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재미인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이런 말도 안 되는 커다란 얘기를 들으면 뭐든 말하기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상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으니 저도 해야 한다. 캄파뉼라는 씹던 것을 마저 삼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젠 제가 당신 주변쯤이나 되는 건가 보죠?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해주시니 영광이네요.”

그는 천천히 운을 때었으나 어쩐지 입을 열기 전처럼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렇지만 그런 것 치곤 꽤 빈정거리는 말투의 높낮이였다. 살짝 올라간 톤의 목소리로 고요하게 울리는 것은 그의 상대가 다음 숟갈을 뜨게 만들던 것을 멈추게 했다. 루예나는 한가득 입에 몰아넣고 씹던 것을 마저 꿀꺽 삼키고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거하고 싶다는 것 말인데요. 그-캄파뉼라는 잠시 그들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들이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으나 그것들도 결국 사람인 모양인 것 같아 그들이라고 하기로 했다-들이랑 저랑 무슨 차이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어제도 말했던 것 같은데… 제 어디가 대체 그렇게 마음에 드시는지 이유조차 모르겠고……”

그가 말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이거 알맞은 대답인가? 전에는 그냥 했던 질문이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물어보려니 왠지 좀 꺼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말은 이미 내뱉었으니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4가지 빛깔의 눈빛이 가만히 캄파뉼라를 응시했다. 그는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눈을 돌리기엔 저의 마음도 있었으나 눈빛이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든 것도 한몫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던 루예나는 왜 참고 있었던 건지 모를 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해주었다.

“그런게 걱정이었던거야? 깜찍해라!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어떤 것이든 내가 기준이니까. 그러니 네가 걱정하는건 내가 싫어하는 것들과 같은지, 다른지를 떠나서 결국 내 마음에 들었냐, 안 들었냐, 라는거지! 그리고 원래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 하나 없다잖니? 그러니까 달라. 그래서 내 마음에 드는거지!
음… 좀 억지스러운가? 부연 설명을 좀 더 해보자면, 난 감이 엄청 좋거든? 그래서 내 느낌 상으로는 괜찮으니까 어쨌거나 상관없지! 그러니 인상… 아니, 표정 관리도 안 해도 괜찮아, 우리 사이에! 그렇지?”

루예나가 동의를 구하며 말을 맺었다. 그러나 캄파뉼라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저것이 그의 마음인가? 진심을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드러내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요구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 또한 자신을 숨기며 살아왔다. 무희인 자신으로 복수를 숨겼고 가면 속에서 칼날을 숨겼다. 삶이란 게 녹록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골똘히 생각하느라 캄파뉼라는 조용했다. 그가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쯤은 훤히 드러났다. 시선부터가 이미 가게 안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 그것보다 더 먼 곳을 보는 분위기였으니. 그의 얼굴을 스치는 표정들을 보려 해도 거의 변화가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루예나는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할 근육의 움직임들은 아주 섬세하게 그의 표정을 가면처럼 똑같아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보였다, 수많은 종류의 의문이 그의 얼굴 위를 떠돌아다니고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이해하려고 해보는 것들을. 내 마음을 너무 많이 보여줘서 그러는 걸까? 루예나는 조금 난감하다고 생각해버렸다. 괜히 너무 말해준 건가? 싶은 느낌이었으나 이미 말하고 난 뒤였다. 아이, 참. 그렇게 깊게 생각할 필요 없는데.

많이 말해준 이유는 당연히 이 애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본심을 드러내는 게 뭐, 어때서? 너나, 나나 이미 말할 것 다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난 알고 있다, 주인공은 나라는 걸. 너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나였다. 아무튼, 그러니 이제까지 해온 것들이 어떻게 안 실패했겠어. 처음부터, 너를 만난 이 끝까지.

“얘, 얘!”

루예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캄파뉼라의 눈앞에서 손을 튕기며 그를 불렀다. 딱, 딱 하는 소리와 눈앞의 움직임에 그가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제 상대를 그제야 시선 맞추어 보았다.

뭐요? 그가 살짝 떨떠름한 느낌이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

“아니,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거 같아 보여서?”

그가 그렇게 말하며 말을 시작했다. 생각나니? 너 어젯밤에 ‘이렇게까지 본심을 드러냈는데 마음에 들어 한다니, 신기하네요. 유용한 동료나 장기 말로 보일지언정, 제가 그리 호감 가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라고 한 거.

요, 는 안 붙였는데요.

아이 참! 사소한 건 넘어가!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난 그것도 같이 생각해봤어. 어쨌거나 둘 다 네가 꺼낸 호감에 대한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난 역시 할 말이 하나뿐인 거 같아. 내가 보여준 생각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 게 맞는다면 말이지… 본심을 드러내는 게 뭐 어때, 나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내 마음에 드니까 말해준 거고! 널 친근하게 여긴다고 봐도 되는 거잖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본심을 드러냈었는데도 난 계속 널 마음에 들어 하잖아! 그러니까, 결국 호감의 기준은 서로 다르다는 거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문제가 될 게 뭐 있겠어? 오히려 내가 네 마음에 들지 말지를 걱정해야 한다고~”

말의 내용은 그랬으나 그의 말투는 매우 장난스러웠다. 루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빈 그릇들을 옆으로 치우고는 물었다.

“그래서, 넌 어때?”

“뭐, 가요?”

“나 정말 많이 말하지 않았나? 그럼 나도 네가 가진 나에 대한 호감도, 같은 거 물어봐도 되지 않겠어? 하하하!”


“아, 배불러~”

그의 옆에서 그렇게 말하는 상대가 제 배를 통통 쳤다.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먹는 걸 정말 좋아하는 모양인가 보군. 솔직히 말해, 저를 대접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보다 자기가 잘 먹고 싶어서 나온 게 틀림없어 보일 정도였다. 
으응, 어느 쪽이었더라… 잠시 가만히 있던 루예나가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번 지나왔던 길이라 그런지 아까보다는 덜 두리번거릴 수 있었다. 사람도 아까보단… 어쩐지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아, 이리 와!”

갑자기 루예나가 불쑥 팔목을 잡고는 어느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만다라… 힘이 이렇게 셌었나? 

캄파뉼라가 반쯤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그는 방금 그 길보다 사람이 좀 덜한 길로 끌려들어 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 자꾸 두리번거리느라 날 못 쫓아오니까, 좀 돌아가더라도 이쪽으로 가야겠어.”

루예나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옷을 한번 가볍게 털어주었다. 갈까, 여기로 가면 대화 정도는 하면서 갈 수 있겠지.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아까와는 다르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사람이 다니는 이 길은 아까의 큰길과는 다르게 좀 더 더럽고, 지저분하고, 양옆으로는 건물의 뒷면들이 복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루예나는 배부르다고 한 지가 언제였는데 그새 드문드문 열린 가게 중 한 곳에서 기다란 아이스크림을 사 와 할짝대고 있었다. 안 쓰러질까 싶어 보일 정도로 위태위태한 길이를 그는 잘만 먹었다. 생각을 그만둔 캄파뉼라는 마음을 비우고 입을 뗐다.

“그 정도 길이면 좀 위험하지 않나요?”

“음… 누가 치지만 않으면? 뭐, 이 정도는 말하면서도 먹을 수 있지!”

캄파뉼라는 이제 루예나의 기행이 그러려니 싶어졌다. 만다라가 그럴 수도 있지… 어쨌거나 행복해 보였으니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체념 비슷한 것을 한 캄파뉼라에게 루예나가 물었다.

“나 어때?”

“네?”

“아니, 아까 물어봤잖아. 나 어떠냐고?”

“아, 그거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만, 식당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의 연장선을 루예나가 들고 왔다. 호감도라니. 세상이 수치로 이루어진 줄 아는 건가.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그렇게 느낀다 해도 주변에서 아무 말 못 할 것이다. 권력이란 건 그런 것이니까. 그러니 당신은…

“당신에 대한 호감도, 라… 글쎄요. 보통 사람에게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은 걸 묻는다면 ‘좋아한다’ 나 ‘싫어한다’라는 답은 나오지 않겠죠.”

음, 음! 맞는 말이야. 루예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맞장구까지 쳤다. 분명히 다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뭐가 좋은 걸까? 이 사람을 알 수는 없으나 대답은 마저 하는 게 맞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추었던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 느끼는 거리감 정도, 면 적당할 것 같네요.”

“그게 끝은 아니지?”

“네, 뭐. 아실 것 같지만… 당신을 만다라가 아닌, 지금 제 앞에 보이는 당신 그대로를 말하고자 한다면… 딱히 좋아하지 않아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따지자면 당신도 권력자니까. 다 안다는 듯 아픈 곳을 족족 찌르는 능력, 뭐든지 알고 있다는 그 시기할 만큼의 자신감.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항상 하나의 신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온 이에게는 호감이 될 리 없었다.

“그렇지만, 당신을 싫어하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에요.”

어찌 되었건 명백히 강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너그러웠다. 충분히 저를 내칠 수 있었음에도 이리 친절하게 하나하나 답해주는 것이 그 증거 아니었을까. 더 깊이 파고 들어가자면 그래, 그는 마치 ‘주인공’ 같은 인물이었다. 고난의 길을 걸을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 상대가 ‘악당’만 아니라면 진심으로 미움받지 않을 주인공.

“더 깔끔하게 정리하자면…… 그래, 당신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요. 당신 말대로 당신이 ‘최고’여서 그런 걸까요? 그런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면 저도 마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려나요. 물론 반대로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는 사람들도 남다른 존재겠지만.”

다시 모르는 척.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신경을 쓰는 탓이었을까, 슬쩍 멀어지기까지.
캄파뉼라는 식당에서 했던 말을 곰곰이 되씹어봤다. 세계와 우주. 우주와 존재. 오로지 대륙 안, 제국 안에서만 살아온 자신이 한 번에 알아듣기에는 벅찼고,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으나 생각했다. 되뇌고, 이해하려 다시금 노력했다. 당신 말대로 우주와 비교하자면,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었다. ‘솔레유 제국’이란 이름을 가진,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우물.
사실 우주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 제국 밖 섬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제국과 다름없을 신분제도에 숨 막혀 죽어가는 삶일까.

올리아, 그 자식이 그토록 갈망하던 평등한 삶을 살고 있을까. 자신이 바라 마지않는 썩어빠진 권력체제가 없는, 그런 나라일까. 섬나라를 지나서 무언가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세계가 펼쳐지진 않을까. 잠깐씩 스쳐 지나가던 생각들이었지만 깊게 파고들 여유는 여태 없었다. 반란의 씨앗을 키워 혁명의 꽃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일이었다. 마치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다 알고 있는대도, 이렇게까지 보이는 태도는 무엇일까. 그는 마치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당신은 한 수 배워가겠다고 했지. 그런 게 내게, 당신에게 존재하기나 할까. 이 춤을 배울 만큼 가벼운 것일까, 무거운 것일까.

“제가 당신에게 무얼 감히 가르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기꺼이.”

그것은 화사하고도 수려하고, 여전히 얼어붙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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