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31218

어제 처음으로 이력서라는 것을 써 보았다. 이력서를 쓰는 시간은 대체 그동안 내가 뭘 하고 지냈는지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반성의 시간이었다. 쌀알로 만들어 쥐면 한 줌도 안 될 이력을 정리하고 나니 다가온 것은 자기소개서 작성의 시간이다. 자기소개서는 내 인생을 토대로 쓰는 소설이라고 하더이다. 어쩐지 한 문장도 쓸 수가 없더라니, 철골이 있어야 콘크리트를 발라 집을 짓는 것이지.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거기서 또 뭘 뽑아내야 저 사람들이 나를 이용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판단해 줄 지는 자기소개서를 200번을 써도, 2000번을 써도 모를 것 같다.

일단 되는 대로, 정말 되는 대로 아무거나 써 보라는 친구의 조언에 자기소개서의 주제는 일단 접어두고 쓰고 싶은 모든 말을 적었다. 일필휘지에 완성 작품을 뽑아내려 하는 욕심이 너무 컸는지 자꾸 문장과 문장 사이를 망설였다. 쓰는 중에도 자꾸 앞으로 돌아가서 문장을 예쁘게 만들려 했다. 문장이 너무 짧으면 내가 하고픈 말이 다 안 담긴다는 생각에 자꾸 문장을 질질 늘인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지금 쓰는 것이 내 인생의 역작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게 되었고, 나는 자기소개서라는 자전적 소설을 쓰는 대신 진짜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글뭉치는 그래도 나름 글의 구색은 띠고 있는 걸로 보였다. 우선 시작했으니 제출은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주변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내용에 중심이 없다. 애매하다."

칭찬을 바라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칭찬을 바랐다. 처음 쓴 것 치고는 잘 썼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고쳐야 할 지를 물었다. 문장이 너무 길고, 필요 이상으로 감성적인 묘사가 많다는 평을 들었다. "사례 위주로 다시 적어 봐라" 라는 처방전을 받아 들고 다시 책상에 앉아, 이번에는 그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에 싸가지와 개념을 양손으로 비벼먹던 시절, 이 버릇 못 고치고 계속 내 맘대로 살다가 결국 친구 없이 지냈던 중/고등학생 시절, 대학생 때 최대한 피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거쳐가야 했던 팀 프로젝트의 늪과 군복무 시절 말 안 듣던 후임병과의 사투, 최근에 내게 벌어졌던 일들과 당장 어제먹은 저녁 메뉴까지. 그 속에서 내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행동하는 경향성이 있는지의 윤곽선 정도는 볼 수 있었고, 이것을 "사례 위주로", 내가 겪은 일을 기반으로 적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 있게 자기소개서를 들고, 내심 완치 판결을 기대하며 병원(?)을 찾아갔다. 속절없이 또 다른 처방전이 붙었다. "여전히 문장이 길어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그래도 앞에 방향성을 잘? 잡아서인지 내용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삼고 이번에는 문장 단위로 첨삭을 시작했다. 여러 문장에 걸쳐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많다. 내가 고통받았던 것을 질질 끌며 하소연하고 싶은 것인지, 그걸 슬기롭게 이겨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지 애매한 문장들이 보인다. 과감하게 자르고 합쳐 본다. 매끄럽다. 매우 잘 읽힌다. 끊어내고 이어 붙인다. 단점을 부각하고 이를 극복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문단이었는데, 단점에 무게중심이 쏠려 뒷 내용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깎아내고 뒷 문장에 힘을 조금 더 싣는다. 주제를 벗어난 불필요한 문장은 덜어낸다. 처음에 썼던 내용에 비해서 분량이 굉장히 줄었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같았다. 오히려 더 강해진 느낌도 들었다. 다시 한 번 훑어 보고, 다음 처방을 고대하며 한번 더 피드백을 요청한다. 드디어 결재 도장을 받고, 이력서를 제출했다.

호흡이 긴 문장은 유려하다. 아름답고 달콤하다. 반대로 짧은 문장은 단단하고 딱딱하다. 묵직하게 꽂히는 느낌이 들지만, 뭔가 부족해 보인다. 사람이라면 달콤한 것을 찾기 마련이다. 예쁘게 쓰려고, 어떻게든 나를 포장하고 싶어 자꾸 문장을 늘린다. 호흡이 억지로 늘어난 글은 질질 끌리고,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소끔 끓여내 욕심을 날리고, 최대한 담백하게 한 문장씩 뽑아낸 글은 굉장히 정제되어 있었다. 물론 내 필력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내 안을 먼저 채워 내고 이를 가감없이 뱉은 글이 예쁘려고 노력하며 어떻게든 치장하기에 급급했던 글보다 오히려 더 무게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 배워 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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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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