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y the horror

621 X 러스티 X 621

AC🎲 by 혼전

6러6. '아이스 웜 격파' 이전의 시점이지만 내용상 4챕터 스포일러 약간. 해방자 루트. 

사실 원작 시공에서 이런 사건이 존재하기는 애매한 듯하지만? 그냥 보고싶어서 썼습니다...😃

- 줄거리: 화톳불을 두고 강화인간 C4-621과 러스티가 이야기를 나눈다.


거절하자니 아쉬운 제안은 하책이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중책이고.

상대가 제안을 자발적으로 수락하게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상책이지. 알겠나, 러스티?

러스티는 아주 잘 알았다.

 

“나 혼자 마시기에는 쓸쓸해서 말이야. 어울려주지 않겠어?”

 

그러니 고작 보급용 증류주 한 모금을 권하는 일에도 이런 방식으로 발화하는 것이다. 본론은 부드럽게. 맥락을 이루는 감정은 은근하면서도 방향이 명확하도록. 파고들기 적당한 빈틈이 여기에 있다는, 우연을 가장하여 주어지는 단서가 더욱 먹음직스러운 법이다. 뻔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문제를 풀어 과분한 성취감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대개의 인간이 공유하는 동력원이므로.

말인즉슨…… 언제나 예외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핸들러 월터의 개는 코앞에 들이밀어진 힙 플라스크를 주의 깊게 관찰한 끝에 느리게 고개를 흔들었다. 러스티는 그 가로젓는 것 같기도 끄덕이는 것 같기도 한 움직임의 다음을 너그러이 기다렸지만, 개는 순순히 술을 받아마시는 대신 뭘 기다리느냐는 듯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러스티를 찔러댈 뿐이었다. 쉽게는 안 넘어오신다 이건가? 바라던 바다.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풀린다면 오히려 그 진의를 의심해 마땅했다.

 

“빈말로도 고급품은 못 되지만 나름 베스퍼 상위의 특혜라고? 핸들러 휘하의 보급이 얼마나 양질의 기호품으로 구성되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훨씬 분명하게 머리통이 움직인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이쪽, 횡으로. 직전의 발언에서 어느 부분이 얼마나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정의 뜻만은 전해졌다. 역시나 부연 설명 없이. 좋다 이거야. 대인 상황에서의 정보수집 능력에 관한 자가 평가를 수정할 필요가 있겠군……. 수숙의 말마따나 스파이로서의 러스티는 여즉 갈 길이 멀다는 증거가 이로써 갱신된다.

척박한 루비콘의 야외에서 불을 피우는 재주나마 탁월한 게 다행이었다. 어둠과 추위를 쫓아내는 한 아름의 불꽃이 아니었다면 그 ‘레이븐’을 AC 밖으로 끌어내는 건 어림도 없었으리라. 바위굴 틈새로 흘러든 밤바람이 그들이 앉은 자리까지 들이닥쳐 사납게 윙윙거렸다. 레이븐에게 내뻗었던 손을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거둬들인 러스티는 보란 듯이 한 모금을 먼저 넘긴다.

 

“원래 이 정도 물건이 추위를 잊기에는 제격이지.”

 

과장하여 어깨를 움츠려 보이기까지 하며 재차 권하자 레이븐은 비로소, 정말로 천천히 응했다. 경계심이 지독한 건지, 숫기가 부족한 건지, 혹은 아르카부스 소속 파일럿과 업무 외적으로 얽힌 작금의 상황이 성가셔서 견딜 수 없는 건지. 일렁이는 불빛을 반사하는 눈알은 지금껏 러스티가 봐왔던 그 어떤 시선(당연히 시체는 제외하고)보다도 무기질적이었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게 아니라, 읽어낼 감정 자체가 없다. 암만 4세대 강화인간의 실물을 접하는 게 처음이라도 이건…… 묘하군. 교전 상황에서 레이븐과 통신했을 때는 필요에 의거한 단답형의 문장일지언정 모종의 활력이 존재했는데. 착각이었나?

어쨌거나 레이븐은 술을 마셨다.

딱 한 번, 독주에 익숙하지 않은지 억눌려 울린 기침이야말로 그가 이 별에서 드러낸 모든 행동을 통틀어 가장 인간적이었다.

움직이는 목석을 상대로 얻은 약간의 성취에 흥이 오른 러스티는 돌려받은 술병을 한 번 더 길게 기울였고.

 

“설마하니 내가 임무 중 음주를 즐긴다는 오해는 말아줘. 이런 호사는 등을 맡길 전우가 있으니 가능한 거다.”

 

주문하지도 않은 변명을 주워섬길 기분이 든 것도 그 덕분인지.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쪽에서 저쪽에서 이쪽을 향해 종으로 움직였다는 의미다. 투명하기에 도리어 불순하게 느껴지는 시선은 그저 모닥불을 할퀴어댈 뿐. 러스티도 불길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문질러지는 밝고 뜨뜻한 잔상에 집중하는 얼마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여야 하는지를 잊었다. 잊은 척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때문에 순간이어야 할 정적이 하염없이 늘어졌다…….

두 사람을 에워싼 대기는 제법 싸늘하지만 루비콘의 밤을 두려워할 사유로는 부족하다. 이렇다 할 생태계조차 없는 황량한 행성에서 경계해 마땅한 건 오직 동족과, 그들이 움직이는 강철의 흉기와, 그것들이 간구하는 코랄의 은혜일지니.

사고의 가지가 코랄에 도달하자 러스티의 정신은 면도날로 저며낸 듯 명료해졌다.

 

“좀 적적하지 않나?”

“…….”

“자네 생각이 어떻든 일단 나는 적적한데. 자고로 이런 상황에서는 괴담을 나눠야 하는 법이지.”

 

난데없는 의견 개진이 황송하게도 레이븐의 주의를 끌어냈다. 웬 무익한 발상이냐고 캐묻는 듯한 두 눈동자로써. 마주한 모든 이의 속내를 파헤치지는 못하더라도, 딛고 선 무대를 신속히 파악하는 기술에 러스티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해방전선을 떠나온 이래 경합이라도 벌이는 양 숨 가쁘게 이어진 위기 상황에서 여태껏 목숨과 가짜 신분을 보전하지 않았겠는가.

 

“이른바 액막이라는 거야. 금시초문인가?”

 

어깨의 으쓱임. 맞았다는 건지 틀렸다는 건지 명확히 알아내려 애쓸 것 없다. 어떻게 해석하든 아무래도 좋을 신호를 보내온 쪽에 귀책이 있으니 이쪽은 이쪽이 좋을대로 대응하면 그뿐이지.

 

“말을 꺼낸 내가 먼저 하지. 코랄이라면 환장을 하는 도저 이야기야. 물론 모든 도저는 코랄에 환장하지만, 어쨌든.”

 

러스티는 적당히 한심하고 경멸스러운 도저의 일상을 묘사하며 분위기를 잡는다. 어떤 식으로든 도저를 상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부분에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 당초의 계획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듣게 된다. 비록 레이븐은 웃지 않았지만, 그가 러스티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럴 수밖에. 러스티는 베스퍼 내에서도 알아주는 달변가였다(이건 사회성과 언변이 평균 수준 미달인 표본 집단의 탓일지도). 담화의 완급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다년간에 걸친 훈련의 성과이기도 하다. 음성은 부드럽고도 선명하게. 감정은 변화무쌍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도록. 말을 뱉는 너 자신이 진실로 그 말을 믿어야만 한다. 알겠나, 러스티? 알아. 알아. 아주 잘 안다고.

일련의 서술에서 기름기를 걷어내고 담백하게 요약하자면. 꿍쳐놓은 대량의 코랄에 한껏 취한 도저(물론 모든 도저는 한껏 취해 있지만)가 컨테이너에 머리를 처박고 곯아떨어졌을 때 밀웜 한 마리가 숨어든 게 문제였다. 녀석이 왕성한 식욕으로 코랄을 거의 다 갉아먹었을 즈음 깨어난 도저는 안면부를 기는 통통한 밀웜을 움켜쥐었고, 때마침 허기를 느껴 그대로 먹어치웠다(가공되지 않은 살과 체액의 이미지에 청자가 질색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게 관건). 포만감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웬걸. 눈이 부셔서 도무지 잠에 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감아도? 달콤한 암전은커녕 머리맡에 남겨둔 밀웜의 찌꺼기에 빼곡하게 박힌 이빨이 너무나 잘 보였다. 그 사이사이 끼어있는 살점과, 거기에 돋은 속눈썹까지.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슈나이더와 베스퍼에서 욕설이 뒤섞인 호평 일색이었던 이 괴담은 실화를 일부 차용하여 구성에 설득력을 갖춘 것이다. 주인공이 도저가 아니라 성실한 루비콘의 주민이었고, 코랄에 취하는 대신 밀웜 농장에서 낙상을 당했고, 눈꺼풀 대신 박살 난 다리를 뜯어먹혔다는 점이 달랐지만.

뜬눈으로 잠이 들었나 의심될 정도로 침묵을 지키던 레이븐은 느리고 기력 없는 박수를 세 번 보내왔다. 아하, 이건 좀 열 받는 반응인데. 스치는 감정을 단어로 정제하는 동안에도 러스티는 평소의 뿌연 웃음기를 입꼬리에 머금은 채다. 제법 양이 줄어든 술을 다시금 권하며 이어질 발언을 독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물처럼 받아 마신다.

 

“내가 할 이야기는…….”

 

사람의 성대에 녹이 슬었다면 분명 이러한 울림을 가졌으리라.

 

“단순해. 그다지 괴상하지도 않을 거다.”

 

음질이 기계를 거치며 열화된 게 아니었군. 연이어 움직이는 입술과 그 너머의 치열을 멍하니 바라보며 러스티가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적당한 게 없군. 내 눈으로 직접 보기는 했지.”

 

이어서 레이븐은 비활성 상태의 구세대 강화인간을 수용하는 거대한 동면 시설에 관하여 기술한다. 각각의 개체는 균일하고 꼼꼼한 방식으로 밀봉 포장되어 효율적인 용적이 가능하다. 레이븐이 보았던 곳은 면적에 비해 층고가 상당히 높은 구조였는데 시설의 관리자는 강화인간을 직립형으로 매달아서 보관했다. 상품성이 높은 것들을 더 낮게. 안 팔리는 것들은 더 높이. 밑바닥에서 올려다보면 시야를 그득히 채우는, 인영이라는 표현도 사치스러운 덩어리들이 간신히 반사하는 파르스름한 조명의 부스러기를 점차 식별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응시하면 바닥이 꺼진 구덩이를 내려다보는 것도 같다. 재고 품목들은 혈액과 코랄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빼앗겼으므로 그 누구도 자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귀를 기울이자면 아주 가끔, 아주 희미하게. 바스락대는 소음이 들려온다.

레이븐은 그것이 괴상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게 전부다.”

 

그리고 그들의 야영 또한 거기까지였다. 손상된 AC로 인해 발이 묶인 상황에서 고객 겸 경쟁 세력의 핵심인력과 외유를 즐기는 강아지를 회수하고자, 핸들러 월터의 수송 헬기가 행차하였기 때문이다. 러스티는 웃는 낯으로 레이븐을 배웅하며 수집 가능한 모든 정보와 단서를 머릿속에 욱여 넣었다. 표적의 반응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는 잠깐의 시간을 들여 스틸 헤이즈의 시스템 설정을 정상화했다. 부스터에 문제가 생긴 로더 4와 달리 스틸 헤이즈는 자력 귀환은 물론 추가적인 전투도 가능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은 척을 해야 했던 것뿐이지. 

같잖은 연극의 성과가 있었노라 러스티는 자평했다. 각하의 평가는 좀 다르겠지만 이러나저러나 그쪽에서 쓴소리를 듣는 건 매한가지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몇 가지 행동방침을 준비한 다음에야 무의미한 미소를 거둔 러스티와 스틸 헤이즈가 느긋하게 날아오른다. 집이 아닌 곳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결국 그날은 잠을 설쳤지. 빼곡하게 집하된 강화인간들이 일제히 꿈틀거리는 광경이 자꾸만 상상되는 바람에.’

 

머리 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MT와 AC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그 일이 떠올라버렸다. 

거칠지만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그저 경청하기만 해도 충분하던 밤은 까마득한 과거가 되었지만…… 개, 레이븐, 전우가 친히 선사하는 끔찍한 심상과 내내 평온하던 눈동자는 과할 정도로 싱싱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쩌면 독자적인 생명을 얻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건 괴상하다고도 못하겠어.”

 

도달한 결론을 느긋하게 읊조린 러스티는 조종간을 쥔 손아귀에 거듭 힘을 주었다. 

네 일말의 동요조차 끌어내지 못할 시시한 이야깃거리라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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