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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 에어

AC🎲 by 혼전

621과 에어. 에어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지만 내용상 3챕터 스포일러 약간. 

- 줄거리: 일이 없는 독립 용병과 그 오퍼레이터가 휴식을 취한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요, 레이븐.

 

에어의 평가에 ‘레이븐’이 잠에 빠지는 듯 여유롭게 눈꺼풀을 내리눌렀다가 다소 부자연스러운 빠르기로 들어 올렸다. 언어가 되지 못한 동조나 반론을 대체하는 몸짓은 아니다. 개러지 외벽의 캔틸레버 구조에 철제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엉덩이를 붙인 레이븐, 과 그의 비공식 오퍼레이터가 창공의 불그스름한 물결을 응시하기 시작한 후로 레이븐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눈꺼풀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일의 독립 용병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에 관한 에어의 궁금증이 해결되는 순간이다.

 

“오늘은 일이 없다, 621.”

 

핸들러 월터의 전언을 레이븐은 평소의 무감한 얼굴로 수신했으나 (추측하건대) 그는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침묵 끝에 그의 머리통을 아주 약간, 동시에 명백히 일부러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핸들러가 행성봉쇄기구의 감시를 벗어난 은신처가 아닌 레이븐의 눈앞에 자리했다면 그 미미한 반발의 제스처를 알아차렸을 테다. 즉, 핸들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설령 알아차렸던들 없던 일감을 던져주기라도 했을까? 이러한 가정에 에어는 회의적이다.

 

“오늘은 일이 없어.”

 

레이븐의 선언은 월터의 통신을 함께 확인한 에어에게 재차 내용을 주지시키는 비효율적인 친절보다는…… 그 메시지의 진의를 해독하고자 애쓰는 나름의 노력처럼 보였다. 그리고 에어는 레이븐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았으므로 협조하기로 했다.

 

―오늘은 일이 없군요, 레이븐. 그렇다면 무엇을 할 건가요?

“……시뮬레이션이라든가.”

―좋은 생각이에요, 레이븐.

 

에어는 기꺼이 올마인드의 전투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621.”

 

핸들러의 반응은 정반대로 뻗어나갔다. 물론…… 최초의 접속으로부터 약 11시간을 내리 시뮬레이션에 몰두하는 행위는 ‘일이 없’는 상태와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간 인간의 생태를 세세하게 관찰하며 높은 이해도를 갖춘 루비코니언 에어는 핸들러가 개입한 지금이 당초의 의견을 수정하기 적절한 시점임을 (조용히) 인정했다.

 

“일이 없다는 말을 휴식과 연결 짓기가 어렵나? 여러모로 훈련이 필요하군, 너는.”

 

희미한 질타와 피로감이 뒤섞인 핸들러의 음성은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다. 레이븐은 눈알을 굴려 통신 단말의 화면을 제외한 아무 곳이나 응시하는데, 임무와 무관한 정보를 취급할 때마다 일관적으로 보이는 태도였다. 핸들러도 레이븐의 이 조용한 방종을 알고 있을까?

 

“다음 지시 전까지는 AC에 일절 관여하지 말고 쉬어라. 명령이다.”

 

이어서 낮은 한숨을 끝으로 핸들러는 로그아웃했다. AC라는 핵심 요소를 제거하면 레이븐은 그야말로 무장해제당하는 셈이다. 진정한 의미의 비번이 된 그는 이제 정말로 곤혹스러운 것 같았다.

 

“쉬어야 해.”

―쉬어야 하는군요, 레이븐.

“…….”

―다시 말해,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편안히 두어야 하는군요. 어떻게 쉴 건가요?

“의자에 앉겠어.”

―좋은 생각이에요, 레이븐.

 

그래서 그들은 의자에 앉아 (에어의 경우 의자에 앉힐 육신이 결여된 상태였으나 의자에 앉는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보이는 풍경은 머나먼 반짝임. 에너지. 동포. 혹은 그에 덜 미치는, 구심점 없는 모호한 의지들. 변화무쌍한 붉은 대류를 제삼자처럼 관찰하는 행위는 외로움이라는 정서에 너무나도 오래 지배당해 왔다.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고자, 에어는 이야기했다. 이 비좁으면서도 광활한 행성의 유서 깊은 적막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주장, 자신의 추측을 자꾸만 인간의 언어로 옮겼다.

레이븐, 알고 있었나요?

레이븐, 이런 생각을 해봤나요?

레이븐, 저는.

당신은.

우리는…….

 

레이븐은 에어의 말을 듣는다. 계속해서 듣는다. 어느덧 해가 저물며 하늘이 불타는 듯 강렬하게 일렁일 무렵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린 에어는 몹시 겸연쩍어졌다.

 

―당신도 뭔가 말해줘요, 레이븐. 무엇이라도 좋아요.

 

정적이 얼마간 이어지지만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통상 모드의 레이븐에게 어떠한 능동성을 요구할 경우 대개의 반응이 이런 식이었다. 4세대 강화인간의 주요 단점인 희박한 감정의 연장선이라던가.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동작하는 방식에 집중하면…… 행위를 예비하는 미미하고도 진실한 전조를 포착 가능하다. 정작 그의 동포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할지라도 에어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오래 기다려 왔다. 자신에게 응답하는 첫 음소의, 투명하고 황홀한 불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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