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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대기

레이먼

토성의 고리 by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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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핀도르에 배정된 것은 사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타고난 성격 자체가 무심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또래에 비해 겁으로 우는 일이 적었고, 남들이 기피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그런 덤덤함은 곧 무모함이 될 수 있었으므로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다른 기숙사에 들어간 나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좀 웃긴 일이었다.

래번클로, 잔머리 같은 생활 지혜는 딱히 없었고 공부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뛰어난 창의력이나 눈에 띄는 개성을 가진 사람이라기엔 난 무색무취에 가까운 사람인 편이다.

후플푸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소위 후플푸프 학생 대부분이 갖춘 성품과 거리가 멀었다. 여긴 더 고민할 것도 없는 곳이다. 나에겐 과분한 기숙사일 게 뻔하다.

슬리데린, 앞서 나열한 것들을 잘 조합해 보면 이곳 또한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덤덤한 무색무취의 인간, 그런 성정에겐 그닥 야망이랄 게 없었다. 유달리 머리를 굴리는 일도 없었고. 까놓고 말하면 그냥 몸 쓰는 일이 편했다.

종합해 보면, 의외로 나는 그리핀도르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무언가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점이 신기하다면 신기했지만.

분류 모자에 앉았을 때 어땠더라. 눈썹 꿈틀대며 돌이켜 보아도 선명한 기억은 없다. 5년 전에 있었던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기엔 나는 그다지 세심한 사람이 못 된다. 내게 남은 기억은 분류 모자가 형인 매튜와 비슷하다며 그리핀도르가 제일 잘 어울리겠다고 했던 것과 이게 그 분류 모자, 말하는 모자가 내 머리 위에 있어 따위의 어렴풋한 감상이다. 그리고 아마 넌 분류 모자가 뭔지도 모르지? 하고 으스대던 형에게 나도 안다고 반격할 수 있겠다고 조금 신났던 마음 정도.

그리핀도르 학생으로 사는 것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이른 아침부터 노래 흥얼거리며 시끄럽게 구는 애들과는 영 결이 다르긴 했다만, 성향이 맞는 친구가 있었고, 가지고 태어난 성정이 이 기숙사와 영 딴판인 것은 아니라. 가끔 무모한 장난을 벌이곤 하는 친구들을 구경하는 일이 재밌고, 친구를 따라 통금 이후 시간에 나갔다가 들킬 뻔해서 도망친 게 재밌던 정도의 생활이었다.

학교는 그냥 다녀야 하니까 다니는 게 컸다. 진짜 재미를 붙인 건 퀴디치를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이라면 다 좋았다. 머글인 아버지가 자주 즐겼다던 운동을 같이 하고, 머글들의 경기를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그래서 퀴디치도 재밌었다. 하늘을 가르는 것부터가 꽤 마음에 들었다. 활동적인 게 좋았으므로 기왕 할 거라면 몰이꾼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원래도 좋은 체격을 더 키웠다. 드물게 열정을 보인 일이었으므로 가족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형은 놀리기 바빴고, 부모님은 기쁘게 응원해 주셨고, 그렇게 그리핀도르 퀴디치 팀의 몰이꾼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4학년의 일이다.

그 무렵, 경기에서 제법 활약하면서 나를 아는 사람이 늘었다. 그건 꽤 피곤한 일이라 달갑지 않았다. 종종 타 기숙사 선수가 날 견제하는 일도 있었다. 그건 재밌었다.

좀 인상적인 사건이 생긴 것은 퀴디치 선수가 되고 몇 달 지난 후였다. 내 팬이라는 여자애가 나타났다. 곱슬거리는 노란 단발머리에, 노란 눈, 노란 후플푸프 교복. 와, 노랗다. 처음 본 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름이 안나라고 했다. 안나는 붙임성이 좋아 어렵지 않게 가까워졌다. 나는 기억에 없지만, 계단에서 넘어질 뻔한 자기를 내가 잡아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후 나를 찾지 못하다가 퀴디치 경기에서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고 했다. 그 애는 신나서 열심히 떠들었지만, 사실 난 큰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구나 같은 대답만 하면서 들었다. 재미있긴 했다.

결국 나는 몇 달 뒤 안나와 교제하게 되었다. 샛노랗기만 하던 애가 새빨간 얼굴로 덜덜 떨며 뱉는 마음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재밌는 건 사실이었지만, 난 그 애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그랬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 그 애는 그래도 좋다고 했다. 그 입에서 사귀자는 말을 다섯 번쯤 들었을 때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게 아닌데 사귀어도 되나. 그런 걱정이 들긴 했다.

의미 없는 걱정은 아니었는지 나와 안나는 얼마 가지 못했다. 나는 나름대로 남자친구의 역할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안나가 바라는 것에 미치지는 못했다. 나의 노력이 일반 연인들만큼의 다정과 애정을 닮진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나의 마음은 그게 전부였기에 그 애가 원하는 만큼 채워줄 수 없었다. 그 애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끝났다. 그 애는 끝에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해 줬다. 나는 그저 알겠다고 답했다.

학교가 좋아지기 시작한 건 그것보다 더 지난 후부터다.

이미 알고 있는 애였다. 꽤 유명하기도 했다. 퀴디치를 하는 나보다 그 애를 아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럴 만했다.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으니까.

레이나 그레이스. 이미 그 애의 오빠부터가 후플푸프의 퀴디치 캡틴이었다. 성격 좋고, 실력 좋고, 생김새도 보기 좋아서 적지 않은 인기를 끄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동생은 자연스럽게 그 스포트라이트를 함께 받는 법이다. 어디 그뿐일까, 같이 다니는 친구들도 심상치 않았다. 똑 부러지기로 정평 난 그리핀도르 반장 아리스티아 캐롯이나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그리핀도르 퀴디치 파수꾼 제인 로즈와 함께 다녔다. 정작 그 애는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한참 읽는 것 말고는 큰 특징도 없었는데, 어쩌다 비슷한 구석을 찾기 힘든 친구들과 다니며 시선을 자주 끌곤 했다.

그러나 그 애를 아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주변인 때문만이라곤 할 수 없다. 그리핀도르라기엔 지나치게 차분하고, 언어가 부드러운 것이 가장 큰 이유일 수 있다. 거친 사자들 사이에서 그 애는 좀, 한 떨기 꽃 같다는 평을 받곤 했다. 모든 그리핀도르가 정신 사나운 건 아니었다만-나만 해도 그러니까-, 그 애는 여느 그리핀도르와는 사뭇 다른 게 있었다.

저학년일 때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어느 것이든 그랬다. 그냥 적당히 성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재미나 퀴디치 경기를 구경하는 재미가 가장 컸던 시절. 타 기숙사 학생은커녕, 우리 기숙사 사람들도 다 몰랐다. 그나마 같은 학년 사람들은 좀 알았으나 대화를 자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한 번씩 형한테 붙잡히면 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 불편한 선배들의 관심을 받아야 했으므로, 아주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형의 친구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친하지 않은 누군가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매사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타인을 가만히 관찰하는 일은 다소 놀라운 일이 맞았다.

그리핀도르가 퀴디치 연습을 할 때면, 제인 로즈를 보러 온 학생들로 그 주변이 꽉 차곤 했다. 사실 그것은 자주 있는 일이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관중 사이에 그 애도 있었다. 레이나 그레이스.

사람들 소리가 나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도 나와 눈이 마주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그 애는 멋쩍은 얼굴을 금세 지우고 슬그머니 웃었다. 그 입매가 천천히 호선을 띄우고 눈이 접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휙 돌린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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