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 센티넬해방전선 中

센티넬버스 준쟁

옴니버스식 구성입니다. 각각의 회차는 독립성을 가지며 AB는 다음 회차에서 리버스가 될 수도, 포지션이 바뀔 수도, 다른 인물과 엮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 상관없는 CD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 약 4만 7천 자 분량

* *  약간 징그럽거나 잔인한 장면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괜찮은 것 같아 전체공개로 설정했는데, 이견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성인용 컨텐츠로 변경하겠습니다.

21.

"……"

진재유는 성준수를 이해하려 눈을 깜빡인다. 

성준수 소령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다는 얄팍한 믿음으로.

"섹터 4의 일부? 아니면 전부? ...아,"

'나는 완전복제 센티넬이거든.'

억지로 용접해 붙인 듯 이상한 문장을 천천히 되뇌어본다. 

섹터 4 출신의 완전복제 센티넬.

이토록 충실하게 모순적인 말이 또 있을까?

"센티넬이 어떻게 섹터 4에 있었지…?"

"재유 씨도 섹터 4 출신인데 가이드시잖아요." 

"저는 범죄자였다 그러던데요." 

"저도 전과자였겠죠. 사상범 될 만큼 통밥 굴리진 못하니까 뭐 잡범 아니었겠습니까."

성준수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저 말고 섹터 4 출신이라는 사람은 첨 보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아아…"

센티넬이 무슨 수로 잡범이 되겠는가…

그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섹터 4 출신은 극히 드물지만 그것이 그들이 희귀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들은 외려 비천하기에 소수여야 했다. 그들 말고도 섹터 4 출신이 있다면, 자신이 섹터 4 출신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민간인일 것이고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지나쳤을 것이다. 고로 성준수가 그에게 보인 친밀감은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갖게 되는 유대감이다. 소령에게 일종의 특별취급을 받으며 거북해하던 내심이 편안해진다. 공통점을 가진 동료에 대한 친근감을 주제넘게 착각한 제가 머쓱하고 창피하기도 하다.

"그럼 이제 말 놔도 되겠네."

"…...?"

"동향인이다 아이가."

"섞어 쓸게요. 일단은."

민망함에 너스레를 떨면,

"...근데 이거를 아는 사람이 많아요?"

"이것도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성준수는 조금 더 착각하라 관대하게 내어준다. 

"원래 아무한테도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

성준수 센티넬은 그의 출신 성분을 단언한다. 그는 군 고위관계자이므로 인큐베이터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을 것이고 확실한 물증도 찾았을 것이다. 지금에야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진재유의 출신 성분도 처음에는 꽤 비싸게 주고 산 특급 비밀이었다. 연합에서는 그걸 치가 떨리도록 알뜰하게 써먹었는데, 그는 그가 모르는 경로 - 그래봐야 가이드와 계약된 어느 센티넬이겠지 - 를 통해 상당히 값을 치뤘나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지금 성준수가 쉽게 단언하는 출신성분이 진재유에게는 오랫동안 고약한 소문에 불과했었다.

믿을 까닭이 없었다. 정부는 낙인효과를 방지하겠다는 이유로, 섹터 4에서 태어난 당사자들에게조차 그들의 출신을 비밀로 부쳤다. 게다가 섹터 4는 민간인 유전자보관소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가이드였고 출처모를 비방에 일일이 대응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우범인물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허술하게 새나갈 리도 없거니와 부러 섹터 4에서 가이드를 뽑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가 섹터 4 출신이었다면 가이드도 아니었을거라고, 여태 그랬듯 이 역시 낭설이라고 추측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진재유는 진재유의 출신성분을 가장 늦게 알았다.

인정하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가 인간 아닌 것에도 배반당할 수 있다는 것에 다소 충격을 받았을 뿐.

진실은 종종 인간의 합리적인 믿음을 배반한다.

그래서 진재유는 성준수의 비밀을 제가 알아도 되는지 확신이 없다.

"...오늘 들은 거는 잊겠습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일 같습니다."

"편한대로 하세요."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를 과거가 새삼 미치도록 원망스럽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거추장스럽긴 했다. 사실로 검증된 과거는 확실한 방식으로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모르긴 몰라도 성준수의 과거 또한 득 될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약점이 되겠지.

"저도 그러니까 야한테는 말해도 되겠다 안심하셨을 거는 아는데요……그래도 막 말씀하고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저한테도요. 저한테도 말씀 안하시는 게 훨씬 안전했을 겁니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이걸로 트집잡을라면 한도 끝도 없거든요. 애초에 저한테, 아니 이거는 진짜 아무한테도 말을 안했어야,"

"실례하겠습니다."

"......!"

22.

그는 숨을 멈췄다. 희고 곧은 손이 불쑥 다가와 이마를 쓸어올렸다. 

"이마에 자국 남으셨네요."

"오래 하고 있다보면,"

"반지자국 같다."

곧은 손이 헤어밴드의 봉제선을 따라 짓눌린 요철을 쓰다듬는다 혹은 어루만진다. 

"완전복제 센티넬은 뇌를 표백하는 작업을 해요. 깨끗해질 때까지 여러 번에 걸쳐 기억을 제거합니다. 완벽하게 표백되지 않은 복사체는 폐기하고요. 이걸, 뭐라 설명해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희고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방이 있다면, 그게 제 머리와 가장 비슷할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멸균실이나 관이나 독방도 제 머릿속보다는 뭐가 많았거든요…… 아무튼 기괴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보통은 이렇게까지 뇌가 깨끗하진 않잖아요."

성준수는 그를 함부로 내어놓는다. 그것은 무람없이 이마를 문지르는 손길과 닮아 있다. 길게 하나로 팬 자국을 거푸 왕복하는 손가락 하나를, 진재유는 왠지 저지하지 못한다.

"여기 선 그은 것처럼 빨갛게 됐는데 안 아픕니까."

"별로..."

"하긴."

처음 만나는 완전복제 센티넬은 노인같고 조상같고 원시인같고 조난당한 외계인같으며, 인외처럼도 인간처럼도 보였고...

조금쯤은 AJ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여러 번 폐기됐고 여러 번 세탁되었습니다. 내게도 자국을 남길만한 어떤 사건이 있었겠죠. 죄도 있었고 기쁨도 슬픔도 있었을 겁니다."

"......"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없죠."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는 표정엔 아주 많은 감정이 침전되어 있었다.

그에겐 익숙하고 오래된 슬픔 같은 것이 비쳤는데, 그것이 완전복제 센티넬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얼굴에 고인 슬픔 '같은 것,' 그로서는 그렇게밖에 뭉뚱그리지 못하지만 거대한 무언가 앞에서 그는 무력해진다. 

진재유는 처음으로 그가 위로하지 못할 미지의 비애와 맞닥뜨린다. 

"그래서 저는 제가, 반지자국이 희게 남은 손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반지자국은 단지 내가 반지를 꼈었다는 것 말고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분명히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죠.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걸 슬픔이라고 말해도 될까?

슬픔의 부재에 대한 슬픔, 아니면 부재 자체에 대한 슬픔. 성준수에게서 비치는 건 그런 애수였고 진재유는 성준수를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희고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방을 그리고 성준수를 넣어보면 그는 마치 오도카니 홀로인 것처럼 보이고. 아무리 애써도 진재유는 성준수가 될 수 없어서, 쓰레기장이라 불리는 황금마차의 공용가이드에게서 부득불 공통점을 찾는 소령이 되어보려 할 때마다 그는 외로워진다. 약점으로든 결함으로든 잇닿고 싶은 마음은 슬픔보다는 외로움같고 동시에 외로움은 슬픔과 연접해 있다. 

"…제가 오늘 말이 많네요."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겠죠.

"변명하고 싶어서."

공용가이드의 이마에서 반지자국을 찾고 섹터 4 출신의 공용가이드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며 허술하게 스스로를 노출하는 사람에게는 외로움이 원한처럼 따라다닌다. 이마를 문지르면, 이게 반지자국같다는 말을 알겠다. 아니 몰라도 알겠다. 요철을 꾹꾹 짓누를수록 그는 낯선 우수에 젖어든다. 요철을 넘나들며 빨간 손자국이 번진다. 진재유는 제 이마를 자꾸만 문지른다. 자기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하염없이.

23.

그는 여러 번 세탁됐고 여러 번 폐기됐다. 신체에 남은 데이터를 영구적으로 삭제하는 최종 단계가 매번 말썽이었다고 했다. 하, 비싼 새끼. 너 때문에 날린 카데바가 몇 구인지 알아? 수없는 폐기의 이력. 그것은 그의 반지자국 같은 거였다.

아마 성준수에게는 죽어도 지우기 싫은 기억이 있어서, 그의 의식은 뎅겅뎅겅 잘려나가며 살균되는 기억의 잔해를 고집스레 발굴했을 것이다. 그의 뇌는 출토된 기억의 파편이나마 질기게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불완전 표백체로 분류되어 폐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을 것이다.

성준수가 무엇을 그토록 기억하고 싶어했는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보통 복제작업의 몇 배가 넘는 시간과 돈을 날리고 간신히 모든 데이터가 제거된 그가 눈을 뜬 이 곳에서 그는 그럭저럭 잘 적응했고 지금껏 잘 지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머리가 너무 말끔해서… 제가 골이 너무 비어서요, 뭐라도 채워넣으려고 이것저것 많이 읽고 보고 경험했습니다. 옛날 책도 열심히 읽었고요." 

그는 이제 누구에게도 해 본 적 없는 얘기를 할 것이다.

"AJ 발생 직전, 20세기나 21세기 역사책 같은 걸 제일 많이 봤는데…"

어쩌면 진재유에게도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얘기겠지.

"제가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사이코패스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이코패스가 뭔데요?"

"연쇄살인범."

24.

"예?"

"아니면 뭐 사이코패스가 하청주는대로 사람 죽이는 용병같은 거라거나."

"......"

뭐 그가 딱히 반사회적 성향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센티넬이라면 다들 처지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센티넬이 다수종이 된 지금도 위에서 시키는대로 병정놀이나 하는데 저마다 개인의 소질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던 옛 별세계에 떨어져봤자, 유일한 재능이 뭘 죽이고 없애는 것뿐이라면, 게다가 인간의 규격을 훨씬 상회하는 회복력과 당시 기준으로 초능력으로 분류될 이능까지 갖춘 이들에게 AJ라는 천적마저 주어지지 않았다면 기껏해야 살인범이 도달가능한 유일한 진로일거다. 그때도 죽이라는 놈 죽이고 없애라는 놈 없애며 살인 도급이나 맡고 있었겠지. 그 시대 인간의 천적은 인간뿐이었던 것 같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노… 니는 사람들을 구하는 사람이잖아."

"…나는 그 말을 참 좋아해, 지금도."

희한하게도 그는 여전히 이 말에 반박할 수 없다. 그래, 그는 사람들을 구하는 사람이 맞다.

"하지만 난 산 것을 죽이는 사람이야."

또한 산 것을 죽이는 사람도 맞다. 사람을 해치는 존재를 도살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므로.

어쩌면 사람을 구한다는 건 무언가를 죽인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살아있는 것을 계속 살아가게 하기 위해 다른 살아있는 것을 죽인다는 말은 말장난같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생물을 죽인다는 말은 더없이 당연하니까.

"......AJ? 니가 말하는 산 것이 AJ가?"

생물은 정말이지 종류가 많고 AJ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AJ도 감염인도 동물도 식물도...... 여하튼 아주 많은 것들을 죽일 수 있다. 명령만 내려지면. 

차마 그가 죽였던 모든 것들을 AJ라고만 특정할 수 없어서, 그는 그가 죽인 모든 것들을 '산 것'이라고 할 밖에는,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AJ가 제일 많지."

"...음......"

감히 센티넬에겐 털어놓을 수 없는 속내고 조직에는 절대로 밝혀선 안 될 생각이며 민간인들을 실망시킬 본심은 엉뚱하게 가이드를 만나 줄줄 새어나온다. 센티넬이 사람들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가이드는 센티넬을 살리는 사람이라 처지는 매일반인데도. 

"내가 맞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희생은...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 않나?"

"맞아. 모든 게 다 더 많은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지."

AJ를 제외하면, 그는 자의로 다른 생물을 죽인 적이 없다. 어떤 희생에도 명분이 있었고 주어진 모든 죽음은 합당했다. 그는 일면 떳떳했으며 무엇에도 거리낄 것 없었지만 이따금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필터 끝까지 씹으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모든 죽음은 합당하다. 

이 말에 담긴 답답함을 알까.

모든 합당한 죽음을 집행하는 성준수는 생각했다.

25. 

성준수는 기억력이 좋았다. 그에게 '더 많은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가 아니었던 모든 죽음을 빠짐없이 기억했다. 덕분에 진재유는 알이 슬기 시작하는 유아들의 시체와 인간의 사후강직이 시작되는 징후와 아직 피가 빨간 감염체와 약품에 녹아흐르는 잎사귀를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나만 그런 걸 수도 있는데, 센티넬들이 그런 감각이 좀 무뎌. 지들은 잘 안 죽고, 죽다가도 살아나고 그러니까 인지가 잘 안 된다고 해야하나?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봐라, 얘는 숨도 안 쉬고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이딩도 안 먹히고,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얘는 죽었다, 그래도 잘 안 믿겨.  난 시취를 맡지 않으면 납득이 안 됐거든. 그때쯤 되면 시신이 형태가 변하는데... 그렇게 되어야 포기가 돼.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누가 죽는 게…... 살갗에 다닥다닥 알집이 붙고 고약한 냄새가 나야… 아 얘가 죽었구나 받아들일 수 있었거든."

그가 납득할 수 없었던 죽음들은 모조리 그에게 상흔으로 남았다. 유능한 군인인 것과 별개로, 그는 지극히 예민한 성정의 소유자였고 흔쾌히 복종하지 않는 까탈스런 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끈질긴 근성의 센티넬이기도 했다. 녹록치 않았을 지난날이며 현재가 쉬이 짐작되었다. 도무지 혼자서는 처치가 버거웠을, 언제고 한 번은 쏟아지고야 말았을 토로였다. 

시신에서 꿈틀대는 구더기를 발견한 다음에야 동료를 단념하는 마음을, 

진재유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보니깐 내가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더라고. 전에 한 번 구서울에 발령난 적 있었는데... 혹시 육지고래라고 알아?"

"나는 처음 듣는데."

"몸은 엄청 크고 되게 짧은 날개가 달린 동물인데, 그게 날개가 아니라 지느러미래. 원래 바다에서 살던 종인데 AJ 출몰하면서 쫓겨났는지 하여튼..."

"맞나."

"응 맞아. 그래서 배로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는데, 되게 느리고... 보고 있으면 되게 귀엽거든."

성준수는 육지고래를 이야기하며 처음으로 살풋 웃었다. 그 웃음이 지나치게 순진해 가슴이 선득했다. 

"…왠진 모르겠는데 구서울에 육지고래가 엄청 많았어."

박병찬 센티넬 사망으로 인한 방어의 공백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았다. 감염체는 수도 없이 증가했고 설상가상 신종 변이까지 발견되었다. 풍족하게 먹이가 공급되는 구서울로 타 지역의 AJ 12가 대거 유입되었다. 통제구역으로 지정하고 폐쇄해야 할 만큼 개체수가 늘어났지만, 어쨌건 그곳은 한때 대한민국의 옛 수도였으므로 정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구서울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AJ에게 함락되어서는 안 될 상징적 장소를 위한 비공식적 작전을 발효했다.

작전명 '서울특별시 02'의 개시는 육지고래의 사냥과 함께 시작되었다. 성체가 된 육지고래는 AJ 새끼 여럿을 배불리 먹일만큼 크고 기름졌다. 육지고래가 죄다 사체가 되고도 작전은 계속되었다. 육지고래가 모두 죽고, 구서울의 동물이 모두 산화하고, 구서울의 식물들은 모두 녹아 사라졌다. 군 조직은 AJ의 먹이를 없애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한 최소한의 희생이라고 했다. 

성준수는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한동안 그가 정리한 육지고래 떼 곁에 누워있었다. 

육지고래를 바다로 보내주고 싶었지만 수중 AJ의 먹이가 될까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육지고래는 덩치가 커서 쉽게 부패하지 않더라. 아무리 기다려도 냄새가 안 났어. 대신 몸이 천천히 부풀고… 배가 빵빵해질 때쯤 나왔어. 사람이 아니라서 위령제 같은 걸 지낼 순 없었지만… 

...고래를 애도한다는 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가능하다고… 우리는 응당 고래를 애도해야 한다고 말할거야. 그래서 나는 고래를 애도했지… 그리고 이런 세상에 고래를 죽이며 사는 사람들을 생각했지… 나 같은 사람들, 또… 인류가 존속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이런 학살을 센티넬에게만 떠맡기고 이어지는 삶에 대해서… 

그때쯤 성준수가 하는 말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독백이었고 그가 죽인 구서울의 생명에 대한 추모였다. 부드럽게 아래로 침잠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진재유는 헤엄도 못 치고 날지도 못 하는 육지고래를 상상해 본다. 육지를 헤엄치는 부질없는 지느러미도 상상해본다. 분명 헤엄이었을, 배로 온몸을 미는 미련한 움직임도 상상해본다. 본 적도 없는 육지고래의 살점이 천천히 흩어져가는 과정을 생각하면, 그가 죽인 고래의 곁에 누워 그 과정을 지켜보았을 성준수를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26.

그는 그가 센티넬인 세계를 가정해본다. 센티넬이 아니라 AJ를 상대하며 사람을 살리고, 그러려다 어떤 것들을 죽이기도 하는 일을 직업삼아 죽어가기도 살아가기도 하는 또다른 아수라를. 이 상상이 현실보다 끔찍한지 현실보다 나은지 그는 이제 확신할 수 없다. 그곳에서 그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 그가 죽인 모든 것들을 떠올릴 때에 그도, 마치 자신이 죄 지으려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 선인처럼 지독한 눈빛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내 결론은 이거야. 이런 세상은 존속될 필요가 없다."

성준수가 센티넬인 이곳에서 성준수는 단호히 결단한다. 그는 이 세상에 내려진 사형선고를 들으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그의 바람을 한 번도 충족시킨 적 없이도 세상은 멋대로 이어졌지만, 설마 센티넬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이런 방식으로 이어지는 삶은 계속되지 않는 편이 낫다."

물론 익숙히 들은 말이다. 자주 내뱉기도 했다. 씨발 좆같은 세상. 다 망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그런 불평쯤은 한다. 다만 성준수의 불평은 지나치게 섹터 4적이라고 해야 할까... 테러리스트, 반동분자, 종교 광신자, 종말론자들의 신념과 부분적으로 닮아 있었다.

"……"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준수는 세상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세상을 멈추고 싶어한다고.

센티넬, 그것도 완전복제 센티넬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틀림없이 위험한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성준수를 이해한다.

이걸 이해라고 해도 될까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에게도 있는 원초적인 울화가 쉽사리 성준수의 편을 들게 만들었다. 씨발 좆같은 세상. 다 망했으면 좋겠다. 다...

"...나도 그럴 때 있다."

"진짜? 신기하네."

긴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재유는 다 들었고, 이것이 아무에게도 내보인 적 없는 비밀처럼 취급되길 바라지 않았다. 누군가 내용을 문제삼을지언정 한 번쯤은 털어놓고 반응을 얻은 이야기로 기억되길 바랐다. 최소한 성준수에게는, 아니 진재유에게도.

"여튼 생각은 그래. 그런데 내 생각과 내 임무는 별개지."

"허…"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세상이 계속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랑, 그 연속에 직접 개입해 훼방을 놓는 건 다르잖아. 내 생각이 이렇다고 직무 유기를 할 순 없지. 나는 센티넬이고,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와… 니 진짜…"

성준수의 오늘은 이렇게 아로새겨진다. 

센티넬은 현재의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첨병인데, 센티넬 성준수는 이런 삶이라면 중단하는 게 낫다고 믿는다. 이런 씨발 좆같은 세상. 축약은 간단해도 근거는 두터웠다. 그가 행한 센티넬의 업무 혹은 수많은 죽음으로 쌓아올린 회의였다.

"…니 사상범이었을 것 같은데?"

"에이 뭔,"

그가 결심한다면, 세상의 일부쯤은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 못해도 이런 세상의 지속에 확실한 제동은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의 존속에 꽤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그에게 부당해보이는 명령을 이행하고 보복성 인사에 응하고 능력을 쓰고 AJ와 맞서고 다른 센티넬들과 전투에 임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다르게 둔다. 행위에 생각이 묶이지 않는다. 진재유로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할, 모순을 꿋꿋이 견디는 힘이 성준수에겐 있었다.

"니 앞으로 이런 얘기 많이 들을걸."

이런 바람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 그가 본 성준수의 일부가 영원히 불변하기를 그는 바란다.

"'니는 사상이 썩어 빠짓네.'"

"그 정도야? 와 상처다, 하하."

"주면 받는거지 뭐. 상처받으면서 가야지."

"뭐 그것도 맞네."

그것은 미친놈들의 광기나 신앙으로 치부되는 신념을 강탈했으나 테러리스트, 반동분자, 종교 광신자, 종말론자는 아닌, 자기를 연쇄살인마에 비유하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구하는 자신의 직무를 부정하지는 않는, 한 센티넬의 선언이었다.

그날부터 진재유는 성준수가 내내 꼿꼿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27.

자치센티넬 분대는 벌집을 쑤신 양 어수선했다. 분대장의 강등이 불러일으킨 파란이 쉬이 잠잠해지지 않는 탓이었다. 새로운 분대장이 되고 싶은 이들과 현지 사정 모르는 서울놈이 일으킨 파행적인 인사에 한껏 삐딱한 이들이 순응과 불응 사이에 아무렇게나 얼려있었다.

예상 못 했던 바는 아니나 불가피한 조치였고 불복을 다스리는 것엔 딱히 왕도가 없다.

"내 지휘에 불만이 있다면 서울에 새 지휘관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하도록."

전투는 앞으로도 예정되어 있고 그때마다 가이드가 필요할 것이며 사령부 직속이 아닌 이상, 작은 조직은 한숨 한 번으로 지휘체계가 흐트러질 수 있다. 불손한 태도를 용인한다면 후임이 온다해도 자치센티넬과 파견된 센티넬 사이의 간극이 좁혀질 날은 요원할 것이다.

"아닙니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하지만 새 지휘관이 여기 도착하는 그 날, 인수인계가 완료되는 그 순간까지, 나는 제군들의 지휘관일 것이다."

목청을 돋우는 말투만으로도 확연하다. 일조시간이 짧고 겨울이 긴 서울에서 온 센티넬들은 대체로 희멀건했고 강원도 억양에 기반한 서울말을 썼다. 십중팔구 서울에서 이까지 와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촌놈들이 불만까지 많다며 속으로 혀를 찰 게 뻔했다. 

"내가 제군들의 상관인 한, 예하의 불복은 용서치 않는다. 이상."

"일척!"

전국 공통의 '충성' 대신 부대의 경례구호를 외치는 것 역시 이딴 촌놈들과는 섞이기 싫다는 간접적 의사표현이리라. 쯧, 소령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찬다.

28.

마음의 준비를 하라기에 마음의 준비를 한다. 꼴랑 화상으로 보는 얼굴에 뭔 맘의 준비씩이나 필요한지는 알고싶지 않지만, 잔뼈굵은 군인인 성준수는 이미 불길한 징조를 읽어낸다.

"씨발 마음의 준비는 내가 아니라 서 중윌 시켜야지 왜 나한테…"

내내 반려되던 면회신청이 수리되었다. 사형 날짜가 확정된 걸까. 형이 집행되기 전에 베푸는 마지막 자비일까. 뽑아낼 걸 다 뽑아냈기에 미련이 없는걸까, 아니면 늦게라도 여론 눈치를 보는 체 하는 걸까.

너를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까?

- 하나의 나라 하나의 육신.

"…일척."

준위의 볼은 쑥 패어있었고 눈은 이상할만치 번쩍거렸다. 당최 그가 알던 사람같지가 않았다. 흰 조명이 내리꽂는 면회실에서도 독 푼 우물처럼 괴괴하게 젖어 빛나는 눈동자만 화면에 생생했다. 그는 입술이 들붙어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쩍, 입술을 찢으며 나온 첫 마디는 듣기 싫게 쉬어 있었다.

"…...서 원사."

- 원사 졸업한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원사야 또라이야.

"니도 나한테 소대장따리라며 씨발놈아."

적어도 그 목소리엔 광기도 귀기도 없었다.

성준수는 하마터면 안심할 뻔 했다.

"준수야, 나 진짜 사람 안 죽였거든?"

"……"

"세상이 날 갖고 노는 것 같다."

지구상에서 그의 결백을 믿는건 오직 그뿐이었으나 성준수는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다. 그의 믿음을 포기하라 간곡하게 부탁할 수도 없다. 이 믿음마저 포기했을 때 친구가 자살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믿음, 사실과는 다른 믿음이 이미 삶의 이유로 뿌리내려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준위는 지금도 그의 결백이 밝혀질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

너는 분명히 작전을 했어.

그게 네가 무죄하다는 뜻은 아니야…

하고싶은 말도 해야할 말도, 정녕 아무말도 할 수가 없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틀어 담배를 물었다.

29.

준위는 사뭇 멀쩡해 보였다. 지금 어디에 배속되었는지 묻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세상이 그를 갖고 노는 건지 준위가 그를 갖고 노는 건지 헷갈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위는 천하에 요령없는 성준수를 비웃느라 바빴다.

- 얼마나 미운털이 박혔으면 가거도까지 쫓겨나냐?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해 보지.

"새꺄 빌어서 될 거였으면 내 손에 지금 지문도 없어."

- 여기 애들은? 원격지시로는 말 안 들을텐데.

"개판이야 씨발… 뭐라더라? 뭐 피칠갑하면서 싸우는 새끼들도 있었다니까? 아니 솔직히, 그렇게 싸울 일이 있냐 부대원들끼리? 이해가 안 가요 이해가. 하여간 다들 빠져가지고…"

- 아이고 영감님아, 가거도에서 백날 피 토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귀대하면 그 때 잡아야지.

성준수는 정부가 좀 더 늑장부려주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욕 먹는 건 군이고 정부이지 그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단 얘기다. 지는 영감탱이 아닌 줄 아나… 그는 한숨처럼 웃었다.

30.

씨발놈들아 이거 노인학대야.

"ㅆ…"

분명 그런 얘길 한 것 같은데 아랑곳않고 시끄럽다. 도대체가 군 기강이… 꼰대같은 소리를 뇌까리며 시간을 확인한다. 01시 48분… 간신히 잠든 눈꺼풀은 마냥 무겁고 그는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한다.

"…...이 시간에 나를 깨우는 거면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겠지…? 뭔데 또…"

- ...부대원이 죽었다고요! 비상사태입니다 소령님!

"지금...? ...이 시간에? 너네 작전 나갔어?! 야간이었어? 일정에도 없는데? 씨발 이거 누구 지시야."

-... 전에 싸웠다던 놈들 있잖습니까? 그 놈들이 오늘 또 맞붙었었거든요 따로 떼 놨는데 근데…

"……"

-……다툼 끝에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

"사인은."

-…다발성 골절과 압궤 손상으로 신부전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죽었지? 

그 정도 부상으로? 

가이딩을 못 받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유사시에 대비해 야직하는 가이드가 한둘이 아닌데. 백 번 양보해 싸울 수는 있다 해도, 전시도 아니고 수도 총사에서 가이딩을 못 받아 사망했다고…? 그럼 누가 가이딩을 못 받게 방해했거나 아니면......

"……하사."

-…일척.

"…...책임감 갖고 말해. 우발적인 사고같아?"

-……

"과실치사로 보여 사고로 보여, 대답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막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소령님,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고의 같아요… 진짜 죽이려고 맘 먹고 죽인 것 같습니다 이거 어떡합니까…?

한 세계가 귀퉁이부터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일정 변경 안내

종전의 월례 회의 대신 병사들의 연이은 폭력사태에 따른 안보 전략 회의를 개최하오니 해당 부대의 관계자들은 전원 필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시  익일 09:00 - 00:00

장소 수도중앙사령본부 특수사단관 내 소회의실

참가대상 전 센티넬 부대 위관급 및 영관급 실무자 16명 

때맞춰 이 상황을 폭력사태로 규정한 지시사항이 전달되었다. 정황상 살인도 조사해봐야 할 건을 사고사조차도 아니고 고작 폭력사태... 그런 것 치고는 반응속도가 너무 빠른데...? 번쩍번쩍 야단스런 빛을 밀어 없앤다. 뻣뻣하게 굳어진 뒷목을 제압하듯 짓누르며 서둘러 웃옷에 팔을 꿴다.

"지금 출발하니까 기다려. 그때까지 상황파악 제대로 해 두고."

31.

센티넬이 산 것을 죽이고도 영웅이 되는 까닭은, 그것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믿기 때문이다. 

작금의 인류에겐 인간이 아닌 것의 목숨을 인간의 목숨으로 끝없이 치환하는 것이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나날이 감소하는 인구 수나 해이해진 군 기강은 문제조차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치환의 순환으로 굴러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이 치환의 중개자인 센티넬이 센티넬을 죽인 것이다. 단 하나 치환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목숨인데, 인간이 인간을 죽인 것이다.

"...지금 죽이고 싶어 죽였다 이 얘긴가?"

이것은 전대미문의 사태이자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이었다.

센티넬이 센티넬을 죽이다니...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일이 실제가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벌어질 수 있었던 거다. 그동안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센티넬은 AJ를 죽이듯 감염체를 없애듯 그 밖의 산 것들을 정리하듯 센티넬도 죽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센티넬이 나타난 이래, 그들 사이에 형성된 제 1원칙을 위반한 자가 출현했고 속내야 어떻건 서로를 전우라 칭하며 서로에게 무조건적으로 너그럽던 센티넬들끼리의 신뢰는 박살이 났다. 센티넬은 그들의 영원한 아군을 잃었다.

"…적이어서 죽였다고…"

"그럼 자기 주적도 모르는 새끼가 지금까지 센티넬 놀음 한 거라고?"

센티넬은 영웅이고,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으며, 보통의 인간은 감히 대적할 마음조차 먹지 못할 압도적인 강자이자 폭군이다. 이 말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옳다. 동시에 센티넬이라면 누구든 안다. 센티넬의 임무는 육체적으로 피로할 뿐만 아니라 꽤나 정신적인 부하가 걸리는 일이라는 것을.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리를 현장마다 확인받지 않는다면, 늘 생사의 경계선을 배회하는 게 그들의 일이 아니라면, 그들 중 몇몇은 평범했을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에게 24시간 독이 있는 바퀴벌레를 죽이는 일만 하도록 강제해 보라. 그가 죽이는 것이 인류에게 해악만 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생김새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벌레라 하더라도, 죽여 마땅한 해충을 죽이는 것일지라도, 그 일을 끝없이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자괴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평범함이란 그런 것이다. 금방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

불행인지 다행인지 센티넬이 죽여야 할 것에 AJ만 있지는 않았다.

전장을 구르며 평범함은 닳는다. 보이는 건 원수같은 AJ요 들리는 건 센티넬 동료들의 단말마라, 작전에 휘말려 덩달아 희생당하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은 금세 전우의 시신에나 함께 묻을 부장품으로 전락한다. 날이면 날마다 죽음의 고비를 타넘는 센티넬들은 망각과 잔인성을 무기처럼 장착한 후에야 센티넬다운 센티넬로 진화한다. 이 단계에 도달한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처지인 센티넬의 생사고락 뿐이다. 센티넬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온전히 센티넬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다들 그렇게 믿었고 전우를 맹신한 자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준수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게 정말 공통된 진술이라고?"

성준수는 '연이은' 폭력사태의 전모, 즉 비슷한 시기 센티넬을 죽인 센티넬이 그의 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막 확인한 참이다.

32.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었으되 사건 자체는 센티넬 개인의 일회성 범행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들은 자백도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 순간엔 피해자가 적이었다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령님."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다르지. 그는 얼른 일어서 목례한다.

"전진하라 전멸하라. 전승부대 센티넬 사단 장영윤 소령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성 소령." 

"...전승부대로 가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사건이 벌어진 게 전승부대라, 의무대를 확충하면서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입대 초반부터 두각을 드러내 군의장교로 발탁된 장 소령은 복수의 장병들에게 나타나는 징후를 케이스로 묶고 분류하는 작업에 특히 능했다. 타지에 유행병이 돌거나 가이딩이 여의치않아 병사들이 골골댈 때, 성준수도 그로부터 도움을 받곤 했었다.

따라서 장 소령의 발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를 경악하게 한, 센티넬이 전우를 죽인 사건은 이미 여러 건이고 별도 인력을 투입할 만큼 수치가 쌓였으며 자백은 다들 비슷했으나 그 동기는 - 센티넬 기초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아무도 -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는 것을.

그렇다면 서로를 적으로 여기는 병사들을 한 부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 종전의 병법을 완전히 버리고 효율이 높은 센티넬 위주의 게릴라 부대로 재편해야 한다. 복무중인 센티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피해사례가 쌓여갈수록 병사들간의 불신도 깊어질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 두 번째다. 전술을 바꾸려면 고위 인사의 재가가 필요하다. 적어도 대령 급은 되어야겠지.

"위에서 재발 방지를 위해 고려중인 정책이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제가 실능자들을 담당하게 되어 잘은 모르지만, 구체적인 대책은 회의에서 수립할 예정인 걸로 압니다."

실능자들이요….

"전승부대의 관련 내규에 대해서는 대령님께 문의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뭐... 회의 참석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성 소령을 만나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 말씀이십니까?"

이런 종류의 참사를 예방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전우들을 적으로 간주해 살의를 가진 자가 있다한들 실제로 뭔가 저지르기 전까지는 색출할 방법이 없었다. 요소요소에 가이드를 더 배치시키고 전략상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대비책일지도 모른다. 어떤 대령이든 대면해야 할 판국이니 뜻밖의 횡재라고나 할까, 회의 전에 미리 의사를 타진해 볼 만한 적기였다. 단지 전승부대의 대령이 썩 달가운 인사는 아니라.

"글쎄 저를 부르실 이유가 있나...?"

"만나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성 소령에게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

대령이 왜 부르는지 알고 있나보군. 그리고 그게 나쁜 제안은 아닐 거라고 한다, 라...

장영윤 소령과는 병과가 다르니 승진을 다투는 관계는 아니다. 장 소령의 복무기간이 길어 맞존대를 하는 사이지만 그걸로 껄끄럽게 굴거나 하대하는 일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 역시 동의한다.

그래도 윗대가리를 만나는 건 기빨리는 일이다. 

알아봐야 할 것도 있고. 

"소령님이 담당하는 그 실능자라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 사람들 얼굴 한 번 볼 수 있게 해 주시면,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장 소령은 대답 대신 길을 열어준다. 대단히 예의차린 재촉이었다. 기대치 못한 호위까지 받으며 앞서가다보면, 성준수는 차차 궁금해지는 것이다. 대관절 그 제안이라는 게 무언지.

33.

"하나의 나라 하나의 육신, 일신일척 부대 성준숩니다."

"어어, 전승." 

"일척. 찾으셨습니까."

"우리 성준수 소령은 나 군복 벗는 날까지 나랑 데면데면할 거야? 형님- 해봐, 형석 형님." 

조형석 대령은 군에서 센티넬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에 위치한 인물로서, 성공을 꿈꾸는 많은 센티넬들의 살아있는 이정표였다. 탁월한 능력뿐만 아니라 사교적인 성격과 만만치 않은 정치력까지 겸비해 첫 센티넬 준장으로 점쳐지고 있기도 했다. 

성준수로 말할 것 같으면, 조형석은 가장 결이 안 맞는 유형의 상사였다. 일단 조형석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승진 적체가 발생하는데다 대령의 인맥으로 벌이는 물밑싸움에까지 용병질해주는 수하들에게 치이며 진급이 더 고달파진 데다, 그 사달이 도무지 그의 탓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얄미운 무죄함 때문이었다. 그의 방식을 금과옥조처럼 따르고 충성경쟁을 벌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전이 고픈 센티넬들의 자발적인 의지였다. 부하들의 인사고과 따위와 무관한 양 그저 서글서글 웃는 얼굴을 보면, 콱 쥐어박고 싶을 때도 있었다. 

"족보 꼬일 것 같아 사양하겠습니다."

"얌마, 니네 기수들 중에서 니가 제일 안 귀여워 알아?"

"그보다 저한테 제안하실 게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제안은 아니고,"

요컨대 어떤 상황에서도 조형석의 영달만은 보장될 것 같은 여유로운 작태가 좀 눈꼴시다고 할까. 

"나는 곧 징계를 받게 될 거야."

"......?"

"아마 회의 끝나고 곧바로 징계위가 열리겠지? 거기서 가벼운 문책이나 감봉, 기껏해야 정직 처분을 받을거고."

"대령님,"

"소령, 나는 파면이나 해임처분을 받길 원하네."

이건 또 무슨 개소릴까?

"그래도 날 꼴 뵈기 싫어하는 놈들이 있으니,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는 쪽도 분명 있을 거거든?"

"......"

"그놈들한테 힘 좀 실어 줘. 파면이나 해임으로 확실히 몰아주면 더 좋고."

조형석이라면 기백 년은 족히 들어앉아 대령 달고 준장 달고 소장 달며 출세가도 달릴 줄 알았는데,

"성 소령이 나 옷 벗는 거 도와달란 얘기야. "

설마 먼저 은퇴를 원할 줄은 몰랐다. 

"소령으로서도 나쁠 거 없지. 형님이 나가줘야 성 소령이 성 중령 될 확률이 올라가는데."

"저 중령 만들려고 하시는 일은 아니잖습니까."

"겸사겸사 형님 좋고 아우 좋은 일 하는 거라고 하자 우리."

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센티넬의 일생이란 위험하고 밀도높으며 금방 끝나버리는 것이지만 현재로선 그나마 최선이었다. 단언컨대 가이드의 삶이나 민간인의 삶보단 센티넬의 삶이 나았다. 더군다나 조형석은 최상위 효율의 센티넬인데다 확실한 계급장의 수호까지 받고 있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이보다 더 괜찮은 삶이란 상상 자체가 허무맹랑한 허구였다.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스스로 제대를, 그것도 불명예 제대를 원할 까닭이 없었다. 이유가 뭐지? 대체 무엇 때문에-

"징계위면 표결로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입장부터 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서 중위 되기 싫어서."

"뭐?"

34. 

눈가에 화르륵 불이 붙는다. 불수의근처럼 불뚝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편다. 조형석이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한다. 

"서 중위 되기 싫다고."

"되고 싶어도 못 되실 겁니다."

하 이 씨발...

"이런,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어쩌라고요."

진짜 계급장 다 떼고 한 번 들이받을까?

"워오... 이러다 사람 치겠어, 성준수 소령."

"생각 중입니다." 

"소령이 그래서야 쓰나. 팰 때 패더라도 일단 좀 듣지. 듣고 결정해."

35. 

안보전략회의는 예상만큼 시시하게 끝났다. 병사들끼리의 충돌에 벌점을 부과하는 방안을 신설했고 가이드를 동반하여 새로이 인원편성을 했고 이수해야 할 교육과정을 더 늘렸다. 성준수는 이런 방책이 효과를 거두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것 따윈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뚫어지게 조형석을 응시할 뿐.

센티넬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전 그 애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보고 싶었습니다." 

센티넬의 발현에 유전적 요소가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은 국가의 영광이자 한 가정의 비극이었다.

조형석 대령은 직권남용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그의 동생이라고 알려진 조재석의 유전자 보관소에 몰래 침입하여 차기 복제가 확정된 센티넬의 유전자를 조금씩 밀반출했다. 밀반출의 목적은 센티넬의 유전자와 민간인의 유전자를 결합시켜 센티넬 조재석을 민간인 조재석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운반 과정에서 조재석의 유전자는 상온에 수차례 노출됐고 조형석은 개조는커녕 조재석의 유전자를 완전히 못 쓰게 만들고 말았다.

"동생이라니까, 동생이라기에 빨리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복제 예정자의 유전자보관소에 들어갈 땐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조형석의 예측과 달리 이 사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초반부터 강등과 정직이 언급되었다. 아무래도 뛰어난 센티넬인 조재석을 영영 잃어버린 것이 위기의식을 추동한 것 같았다. 성준수는 파면을 주장하는 편에 섰는데, 생각만큼 소수의견도 아니었고 동의도 제법 얻었다. 

"제 동생이라면 훌륭한 센티넬일 게 분명합니다. 그런 동생과 효율이나 가이드로 경쟁하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제 동생이라면 보호만 받고 편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럴 권리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준수는 조형석의 슬프면서도 선량한 표정과 결곡한 말투에서도 집요한 일관성을 느낀다.

"제가 한평생 국가에 충성하며 얻은 열매를, 제 동생이 아니면 누가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센티넬은 전장에 나가야 하니까... 동생을 보호하려면 민간인인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그만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전우님들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럼 이건 어때? 서 중위가 서 중위로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지. 서기경이 아니라.' 

조형석은 그렇게 성준수를 꼬여냈다. 

'사형수가 아니라 센티넬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말이야.'

'제가 무슨 권리로 기경이가 어떻게 죽을지를 결정합니까!'

'성 소령도 알고 있잖아.'

'알기는 뭘 알아요? 그리고 대령님이 뭔데 이 문제를 대령님이 결정하려고 합니까? 대령이 그런 거 하는 자립니까?'

'이건 내가 원하는 것도 소령이 원하는 것도 아냐. 서 중위가 원하는 거지...'

그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었다. 

서 중위가 정말 그걸 원할 것 같아서.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거짓말처럼 들리진 않았다. 조형석의 자백은 진실할 것이다. 다만 그가 받은 제안과 똑같은 논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센티넬의 삶이 연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누군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지만, 그의 동생이라는 센티넬이 무용하게 희생당하는 건 보고싶지 않아서. 그게 그의 방식의 보호라면 보호겠지.

거래에 응하지 않았어도, 아무것도 몰랐어도 그는 조재석을 날려버린 조형석을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앎 자체가 거래의 진입로였고 돌이킬 순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에게도 동생이 있었다면 저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으니까. 

"...군은 앞으로 조재석 센티넬을 기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전력 손실인 바, 저는 조형석 센티넬을 파면하여 일벌백계 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알기 때문에 이해할 수밖에 없다.  

36.

센티넬 지원센터 부근은 한산했다. 어쩐지 더는 하소연을 않더라, 가이드를 찾아 소송을 걸겠다는 두엇쯤은 만날 줄 알았는데. 외진 센터를 지나 더 후미진 곳으로 향하던 장영윤이 묻지 않는 척 묻는다.

"실능자들에게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센티넬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으니까, 혹시 피해자가 실능한 건가 싶었습니다." 

"실능자가 뭔지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 사람들이 센티넬 연합에 왔었습니다."

장영윤은 흘끗 뒤돌아보곤 걸음을 재촉한다. 그럼에도 답변을 기다리는 기색이 선명해, 그는 내친 김에 다 말하고 반응을 보기로 한다. 

"와서는 가이딩을 잘못 받아 능력을 손상당한 것 같다고, 가이드에게 소송을 걸겠다고 했습니다. 며칠동안 센터 주변에 상주하면서 소송을 지원하라며 생떼를 썼습니다. 그래서 만나게 해 달라고 했던 겁니다." 

"......하나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 거기 다시 찾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보존액 냄새가 훅 끼쳤다. 그는 장영윤이 장담한대로 되리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또 후각적으로 깨닫는다. 

"건들지 않도록 조심해서... 이쪽으로." 

아니 누구라도 그렇게 자신했을 것이다. 

연구소 안은 야전침대에 담긴 자들로 즐비했고 대개 초로의 노인이었다. 노성을 내지르는 일부를 빼고는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전장에 나갔다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늙고 쇠약한 모습이었다. 그가 불과 서너 걸음만에 멈추어섰다. 변색된 피부를, 적보라색이 피부 표면까지 다글다글 몰려온 등과 배와 허벅지를 보아버린 탓이다. 

"소령님,"

그럴 리가 없지.

살아 있잖아.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이거 혹시 욕창입니까?"

"아뇨, 소령님이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

"시반입니다."

산 사람 몸에 사반 같은 게 있었다. 시신의 아랫쪽에 생기는 반점 같은 것이. 착각일거라 생각했다. 잘못 본 것이거나 그는 모르는 피부병에라도 걸린 것이겠거니. 장영윤은 나지막히, 그러나 쐐기를 박듯 말했다.

"설마 능력이 박리된 센티넬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하지만 저 사람들은 살아있지 않습니까."

"성 소령이 대령님께 들은 그대롭니다." 

무어라 소리치는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정정했고 기운차 보였다. 원래 나이를 몰랐다면 연세에 비해 젊어 보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식표에 달린 계급은 하나같이 소령보다 아래였다. 훈련에서 본 듯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소령님!"

성긴 백발에 턱수염도 희끗희끗한 노인이 자기를 병장으로 소개하며 경례를 했다. 노인은 거북스러울만치 공손했으나, 이는 병장이라면 응당 취해야 할 자세였다. 성준수는 느긋하게 인사를 받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비지땀을 흘리며 그에게 기합을 받던 병장은 못 보던 새 공경해야 할 노인처럼 나이들고 여위어 있었다. 

"충성." 

"이것 좀 보십시오! 이것 좀!"

병장은 파리한 손을 파들거렸다. 열 손가락엔 지문 대신 시반이 번지고 있었다. 병장은 능력을 쓰기 위해 손뿐 아니라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다시없이 억울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제 능력이 이 정도라는 게 말이 됩니까? 가이딩 한 번 잘못 받은 죄로 효율이 완전히 끝장나 버렸습니다! 제가! 제가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병장. 스트레스는 효율에 좋지 않아. 진정 좀 하지. 자, 천천히. 천-천히..."

장영윤이 연신 씩씩대는 병장을 눕혔다. 쇳소리 섞인 숨소리가 났다. 병장은 누운 채로도 계속해서 다짐이며 저주를 뱉어냈다. 병장의 말은 흡사 주문이 되어갔다.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몸을 이 꼴로 만들어놓은 가이드 말입니다! 가이드 명단만 있으면 찾아낼 수 있으니까! 찾아내서! 벌 받게 만들겁니다! 내가! 나처럼! 나처럼 죽고 싶게 만들 겁니다! 다 죽일... 죽여!!!"

분노를 연료로 스스로를 살라먹는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버릇처럼 주머니를 뒤졌으나 허리 부러진 담배 한 개비가 없었다. 정복 특유의 깔깔한 촉감은 입안을 마르게 하고 그는 담뱃대를 굴리듯 입술을 자근거린다.

"...병장이 능력을 잃은 것은 가이드 때문이 아닙니다."

"소령님까지 저를 농락하십니까?! 성준수 소령님이 그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성 소령."

"가이딩을 받고 나서 이렇게 된 겁니다! 이건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십시오! 무슨 지령을 받아서 이러시는 겁니까?!"

"성 소령, 그 이야기는..."

병장을 살뜰히 살피던 장영윤은 난처해 보인다. 성준수는 외면한다. 명예롭게 죽을 권리는 특혜와도 같아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음을 안다. 그렇다고 하여 신체 말단까지 시반을 입고서 죽어가는 병장의 착각을 바로잡는 것에까지 대단한 조건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아니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잘못 알아서 잘못 미워하고 잘못 증오하는 것이 공동체의 정서가 되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칼에 찔렸습니다. 그러면 해가 범인입니까?"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러 왔다.

"병장은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누가 병장을 가이딩했는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먼 가이드를 잡아 족친다고 능력이 돌아오겠는가? 그는 이미 능력을 상실했고 그건 죄에 대한 벌도 원인에 따른 결과도 아니며 그저... 한 사건일 따름이다. 인력으로 더는 어찌할 수 없는. 

병장은 악을 쓴다.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증오를 쏟아부을 대상을 잃기를 원치 않는다. 성준수는 몇 번인가 같은 말을 한다. 관자놀이가 펄떡이던 얼굴이 결국 노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늘어진다. 

36-1.

장영윤은 혼곤하게 열린 눈동자를 닫고, 맥박을 확인하고, 손발을 단속하여 모포 안으로 넣는다. 

"...굳이 이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뭘 말입니까?"

"대령님이 말씀하셨듯이, 센티넬은 인지기능이 제일 먼저 망가집니다. 성 소령이 아무리 알아듣게 설명해도 이해를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효율의 측면에서 볼 때, 아까같은 입씨름은 완전히 헛수고란 말입니다."

누가 효율같은 개소리를 센티넬의 대가리에 박아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세상에는 효율이 0이라도 해야만 할 일이 있고 해야 할 말이 있단다. 

그런 이야기는 찔려서 할 수 없었다. 그는 서 중위 앞에서 입 없는 사람처럼 침묵했으니까. 저들의 말이 맞아. 너는 민간인을 죽였어.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서 중위는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믿고 있고, 여전히 뉘우치지 않으니까. 한 사람의 절망도 고쳐주지 못하면서, 한 다발의 증오와 한 다발의 절망에는 부득불 반박하는 꼴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는 이번에도 입 없는 사람처럼 침묵하려 한다. 

"성 소령은 실능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어요."

"......"

"아직 자기에게 생긴 일을 못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성 소령이 실능자 입장이라면,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능력을 잃었고 그게 불행한 사고일 뿐이라면,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성 소령이 겪는 고통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될까요? 어떻게든 이유를 찾고 싶을 겁니다. 물론 결론은 망상이고, 사실도 아니죠. 저런 반응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성준수는 아직도, 센티넬을 이해하는 것은 센티넬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장 소령은 군의관이라 그렇겠지요."

그를 이해할 센티넬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센티넬은 세상에 없습니다. 만일 제가 갑자기 능력을 잃었는데  그게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징벌이라고 하면요, 저는 떠오르는 게 아주 많을 겁니다..."

조형석은 사직 절차를 밟을 것이다. 강기경은 곧 죽을 것이다. 어쩌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를 센티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 센티넬도 떠나갈 것이다. 그는 그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어쩐지 그가 떠나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있다. 

"실능에 뚜렷한 이유가 없다면, 반대로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제가 까만 군화를 신은 것도 실능의 원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로, 실능자들은 오로지 가이드만 원인으로 지목했었습니다. 그건 절대 우연한 선택이 아닙니다. 내키는 이유를 고른 거예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치사스럽죠. 바로잡을 수 있다면 좋겠죠. 근데 현실적으론 어렵다는 말입니다. 일단 남은 시간이 별로 없고, 시반 보셨잖아요. 인지기능도 더 나빠지기만 할 겁니다. 좀 전에 성 소령이 한 일은 그냥 환자에게 스트레스를 준 것 뿐이에요."  

"글쎄요. 저 사람들은 첫 실능자들이고 앞으로의 메뉴얼은 지금을 참고해 만들어질 겁니다. 소령님도 모든 데이터를 갖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진행속도가 유달리 느린 사람이 있다면요? 계속 센터로 찾아올 수도 있고 약간은 능력을 쓸 수도 있어서 소송을 건다면 말입니다, 아니면 저렇게 공언하듯이 실제로 가이드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들이야말로 그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대체 왜 이러냐고. 실능 유무와 상관없이, 센티넬은 센티넬까지 포함한 전 인류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듣고, 또 많은 것을 알았음에도 그는 전장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군인처럼 고집스럽다. 마치 이 세상의 마지막에도 그의 곁엔 가이드가 있다는 듯이. 착취당할 수 있는 가이드가 있고 보호할 수 있는 센티넬이 있다는 듯이 혹은 착취할 수 있는 센티넬이 있다는 듯이. 죽어도 혼자는 아니라는 듯이 혹은, 이 세계가 영원할 것처럼. 

"이 사람들이 마지막 실능자는 아니겠지요. 실능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고요. 그렇다면 저는 알아들을 때까지 말할 겁니다. 누구 하나는 알아듣겠죠."

"......"

"모두가 명예로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죽어가며 원망할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건 센티넬마다 주어져야 할 가이딩도 아니고 애먼 사람을 저주할 권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장영윤은 대답없이 일어나 회진을 돌았다. 안이하고 평화롭게 잠든 이들의 호흡을 감압하고 시반의 확장을 점검하고 뼈대에 단단히 감기지 않은 살가죽과 피부를 지탱하기엔 물러진 관절 따위를 만지고 두드린다. 손을 닦으면서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한다. 

"성 소령은... 오래오래 센티넬이면 좋겠군요."

"자기 대령은 안전하게 빼돌려놓고 너무 비겁한 발언 아닙니까?"

"비겁하지만 그래도."

어리석은 소망이라고 생각했다. 

성준수라고 달리 어리석지 않을 도리는 없었지만.

37.

그의 첫 면직신청서는 제출하기가 무섭게 거부되었다. 조형석이 차차 신변을 정리하고 있을 즈음의 일이었다. 

38.

우이도로 돌아가는 일정은 이리저리 번복되었다. 군용기로 섬까지 이동하려던 계획은 목포 인근에 착륙해 함선으로 갈아타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AJ 11은 비행체를 공격대상으로 여겨서, 성체가 되지 않은 개체일수록 그악스럽게 항공기며 전투기를 쪼아댔기 때문이다. 우이도엔 어미가 생육중인 AJ 11이 여럿인데다 육로 대신 뱃길로 이동하는 일은 언제나 해저화산이나 풍랑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에 그는 서울에서 발이 묶여 하루 반나절을 더 지체했다. 

비상. 비상. 수도중앙사령본부 서관에서 원인미상의 AJ 61 침입이 발생했습니다. 초기진압에 실패하여 무리가 확산중이므로 비센티넬 및 노약자 여러분들은 신속히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얼씨구."

성준수가 실소한다. 하다하다 본부가 털려? 늦게라도 출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도 글러먹었다. 에라이.

일이 정리된 다음부터가 본격적인 문제였다. 상황이 종료되면 본진을 습격당한 고위 관료들의 히스테리를 받아내는 게 제일 먼저다. 하필 월례회의며 징계위의 최종 결산을 위해 해당 부서 직원들이 아직 잔류하고 있는 상황이라, 대피소에 모인 비센티넬들을 해산하는데 또 한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들을 안심시키고 달래는 것 또한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하...... 

애초에 AJ 61이면 오래 끌 필요도 없이 조기수습 가능한 종이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공격하면서도 번식하기 때문에 초기 대응에 실패하면 개체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처치가 어려워진다. 군기건 뭐건 빠지기는 엄청 빠진 모양이다. 진짜 어지간히 좆밥이어야 총사를 냉큼 내주지, 미치지 않고서야.

"뭔... 과자로 만든 집이야 뭐야? 본부가 가오없이 다 털려서 되겠어?"

비상. 

비상. 

다시 한 번 알립니다. 비센티넬 여러분들은 서관 지층에 설치된 비상구를 통해 신속히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대피집결지로의 집합을 위해 임시 수용소 및 제 7 연구소를 일시적으로 개방합니다. 해당 시설의 수용자 및 계류자들 또한 대피집결지로 이동하여 지시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주력군에 합류할지 말지를 잠깐 고민한다. 혹시라도 이 소란을 틈타 동료를 죽이려는 부대원들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어서. 감시차건 뭐건 보는 눈이 있는 게 낫지 않나? 그러다보면 어느새 손길이 급해져, 그는 야전상의의 지퍼를 채우며 뛰다시피 걸어나온다. 

AJ 61의 번식액은 점도가 높고 되직했다. 걸을 때마다 발이 쩍쩍 달라붙었다. 밀도가 큰 인간의 혈흔 위로 AJ의 피와 점액이 기름으로 만든 무지개처럼 둥둥 떠 있었다. AJ 61은 한데 떼지어 움직여서 거대한 물기둥이나 파도가 일렁이는 듯 보였지만, 무차별 확산되는 국면만은 막은 것 같았다. 대피소도 안전히 닫혀 있었다. 

총사에서 AJ를 내몰아봤자 AJ는 왔던 그대로 저 방풍림을 타고 후퇴할 것이다. 실능자들을 격리중인 연구소 일대의 초목과 동물들을 실컷 쏠고 더 멀리로 진출할 것이다. 유사 이래로 AJ를 소탕한다는 말은 한 번도 허언이 아닌 적이 없었고 센티넬은 그저 더 많은 AJ 사체 만들기에 진력할 뿐이다. 성준수 또한.

성준수는 매복조와 함께 방풍림에서 대기하다 남은 AJ를 처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조성된 방풍림 일부를 헐어 잠복지를 만드는 것은 수도를 거점으로 둔 일신일척 부대의 주특기이기도 했다. 

그는 가는 길에 그와 꼭 같은 생각을 했던 그의 부대원을 만났다.

39.

그의 열 손가락은 압력을 버텨내다 못해 죄 터져 있었다. 격전을 치룬 듯, 높이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에마저 점점이 피가 맺혀 있었다. 전신이 자잘한 구멍으로 가득했다. 온통 얼룩덜룩한 피웅덩이 한가운데 그가 누워 있었다.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준수야."

성준수는 그가 더는 말하지 못할까봐 겁이 났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AJ 맞아...?"

성준수는 이게 그가 이 세상에서 흘리는 마지막 눈물일까봐 겁이 났다. 

"응."

"다행이다..."

"어."

"진짜 다행이다..."

성준수는 그가 겁내고 있다는 걸 들켜버릴까봐 겁이 났다. 

"잘했다…"

"......"

"잘했다 기경아…"

AJ의 피는 알록달록해서 좋아. 식별이 쉽다.

이번에는 정말 유충을 죽였구나. 너는 센티넬로 죽겠구나...

이게 그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몰라서, 성준수는 그의 위로 엎어져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의 어깨와 머리가 서서히 식고 있어서 계속 쓰다듬었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계속계속계속계속. 

그는 누운 채로 눈물만 흘려낸다. 눈가를 찌푸릴 힘도 없는 것 같았다. 한 가닥 눈물이 천천히, 피와 땀에 절은 머리칼을 타고 사라진다. 센티넬들은 AJ 61을 죽이고 있을 것이다. 행정직원과 가이드들은 대피소에서 안전할 것이다. 모두가 정당하게 부재했다. 평화롭고 참혹했다.

불현듯 그가 팔을 움찔거린다.

"하…ㄴㅏ….ㅇ…시…ㅈ…장…..."

"일척."

돌아올 경례구호를, 그는 정말 오래 기다려 주었다. 서기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 원사야..."

성준수는 센티넬을 끌어안은 채 흙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숨막히는 먼지 냄새가 났다. 숨쉴 때마다 흙먼지가 걸렸다. 기침으로 토해낼 수 없는 먼지가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 마치 삶 같았다. 

"대답해야지, 서 원사..."

사람의 감각 중 청각이 가장 늦게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성준수는 시신을 옆에 두고 울지 않는다.

조형석과 장영윤이 그를 끌어낼 때까지, 

그는 그의 벗을 안고 있었다.  

40.

두 번째 면직신청이 퇴짜를 맞았다.

"성 소령 자리가 공석 되면 진급 고픈 놈들 다 눈 뒤집어질 걸."

"......"

"급하게 실적 따겠다고 혼자 AJ 잡으러 가는 놈도 분명히 생길 텐데,"

 

군복에 별을 단 자가 물었다.

서 중위 여럿 만들 셈이야?

41.

그는 세상을 구하는 슈터가 되고 싶었다.

사람들을 삶으로 끌고가는 한 척의 예인선이 되고 싶었다. 

그 바람들은 이제 비밀이 될 것이다. 

42.

빛바랜 목초지로 1인용 비행체가 한참을 미끄러진다. 활주로를 흉내내는 반듯한 직선을 마구잡이로 어기며 점등하던 기체가 덜컥 열리면 엄연히도 아직 소령인 성준수가 빠져나온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소금기처럼 엉겨붙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담뱃대의 허리를 똑, 똑 부러뜨린다. 어쨌거나 그에겐 통솔할 병사들이 있고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소령님."

그래 그는...

"오랜마입니다."

부름을 받은 성준수 소령이 고개를 들자 공용가이드 하나가 웃고 있었다.

아주 미미한 웃음이었지만, 하마터면 알아채지 못할 뻔도 하였지만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성준수는 생전 처음보는 희귀한 보물을 보듯, 혹은 오래전 잃어버린 줄 알았던 진귀한 성물을 찾은 듯 눈을 깜빡였다.

"아… 네가 있었구나…"

"네?"

네가 있었구나, 네가 있었어. 성준수는 잊었던 암호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함께 멈칫거리던 손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성준수의 손은 꼭 서성거리는 것 같았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시선은 진재유의 어디를 향한다고 꼬집어 말하지 못할 만큼 진재유를 정처없이 쏘다녔다. 전보다 수척해진 몸은 전보다 날렵하고 선명한 궤적으로 진재유를 향해 기울어진다. 

볕 아래 무자비하게 익어가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재유 씨."

"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성준수가 싱그럽고 애처롭게 웃었다.

43.

돌아온 성준수는 퍽 솔선수범했다. 실은 자학에 가까웠다. 그는 남몰래 스스로를 혹사했다. AJ 13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없는 AJ 13이라도 만들어내야 할 것 같았다. 하루빨리 파견된 목적을 다하고 싶었다. 때마침 성체가 된 AJ 일부가 흑산도 인근으로 독립할 기미가 보이자, 그는 틈나는대로 해변 우측의 사빈을 뒤지기 시작했다.  훈련이며 잡무에 수색까지 더해지면서 피로는 밀랍처럼 쌓였고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깊은 밤 숙소로 돌아갈 때면, 바닥에 그의 파편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걸어가며 분해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AJ 13 같은 건 없다고 보낼까? 

그럼 수도로 돌아가게 될 텐데. 

함께 입도한 부대원들은 귀성을 간절하게 바랄 거다. 

그는 탈각되며 점점 더 작아져간다. 한때 그의 일부였던 분해된 파편이 공기중을 부유한다. 그는 떨어져나가는 그를 목도하고 있다. 쉬고 싶다는 생각은 이제 들지 않는다. 방문객이 왔음을 알리는 빛이 푸르게 점등한다. 그는 해체되기를 멈추고 돌아본다.

"물어보니까 아무한테도 점검 안 받으셨다고 하던데요."

"...요즘 바쁘기도 했고 괜찮은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바쁘기야 가이드 분들도 엄청 바빠 보였고." 

몰래 스스로를 혹사할 수 없다는 것은, 그를 방치하고 싶은 마음을 번번히 들켜버리는 것은 꽤 애석한 일이다.

"실례 좀 합시다."

어쩌면, 그러니까 그는 죽어도 실능자가 될 수는 없는데도,

"...지금 당장 가이딩 받으셔야겠는데요. 간당간당한데 지금."

눈치 빠르고 효율 좋은 가이드를 둔 센티넬처럼 당연하게 바라게 되는 일이 더 애석한 것도 같았다.  

"오늘도 손?"

"......"

"오늘은 쫌 걸릴 거예요."

그는 얼마쯤 망설였다. 

이윽고 성준수의 입술이 전과는 다르게 달싹인다. 

"아뇨."

"그러면요?"

"점... 접촉."

44.

돌아와 줄곧, 성준수는 인형처럼 예쁘장하고 위태하다.

성준수는 얼굴을 자주 바꿨다. 서슬 푸른 낯으로 부하들을 다그치다가도 일과가 끝나면 수심에 잠긴 시선을 던지곤 했다. 시선은 허공에 닿기도 했고 바다에 닿기도 했으며 움직이는 인영들에 닿기도 했다.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한 이들은 바짝 엎드렸다. 지은 죄가 있는 이들은 알아서 기었다. 언제까지 엎드려 있어야 할지 의견은 분분했으나, 그들도 수도의 대사에 대해 아는 바 전무하긴 마찬가지였으므로 소령의 눈치를 보는 나날은 차일피일 길어졌다.   

소령은 일주일 가까이 섬을 비웠다. 지휘관으로서는 이례적인 공백이었다. 서울에서 굉장히 심각하고 중대한, 하지만 조무래기들은 굳이 알 필요 없는 어떤 사태가 발발하여 급히 불러들였을 거라 했다. 소령은 AJ가 공격할 경우 반격은 꿈도 꾸지 말고 지체없이 섬을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가거도쯤에 대피해 기다리고 있으면 데리러 가겠다고. 당시 어르신 얼굴이 말도 못하게 험상궂었던 데다, 출발 직전에 으름장을 놓고 떠났으므로 조용히 지내려 노력했단다. 재밌는 이야기였다. 

소령이 부재한 사이 센티넬들은 섬의 모든 인원을 다그쳐 걸핏하면 맹골군도로 피난을 떠났고, 남는 시간마다 위계의 전복을 시도하는 자치센티넬들과 난전을 치뤘다. 해 뜨기가 무섭게 패싸움질을 해대니 성한 놈이 하나도 없었다. 피와 살이 터지는 난투극을 벌인 후에는 유흥처럼 가이드들에게 빌붙었다. 상처를 치료해달라며 만취한 주정뱅이마냥 가이드의 하초를 열어젖혔다. 하나같이 엄살이 심한 족속들이었다.  

굉장히 심각하고 중대한, 하지만 조무래기들은 굳이 알 필요 없는 어떤 사태에 대해 진재유는 모른다. 그가 오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 눈에는 성준수가 환멸을 느끼거나, 실의에 빠졌거나, 회의가 생긴 것처럼 보였고 그는 자주 궁금했었다 목적어에 대해서. 또 한 번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대지에 꽂아넣은 한 자루 칼처럼 굳건하던 성준수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수척해진 것인지, 그의 연병장엔 육지고래 말고 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일주일 새 성준수에게 뭔가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을 리도 없지만, 

진재유는 성준수의 일부가 여전히 변함없는 그대로 같아서 이상스레 안심한다. 

예컨대 이런 것. 

"그러면요?"

센티넬들끼리 주먹다짐을 했다는 걸 알게 되자 성 소령은 화를 내었다. 그런 날마다 가이딩을 졸랐다는 걸 알고는 더 화를 내었다. 화를 내는 소령의 얼굴이 하도 섬뜩해서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고 했다. 

"점... 접촉."

대단한 선언이라도 한 양 입술이 짧게 떨렸다. 그는 픽 웃었다. 

그게 뭐 별거라고.

진재유는 파리한 양 볼을 쥐고 입술을 겹쳤다. 성준수가 키스를 받는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44-1.

"...담배맛 날 줄 알았는데."

"담배냄새 좋아해?"

"아니 그냥, 물고 있는 거 많이 봤어가..."

"그래도 진짜 피면 안 돼지. 센티넬이 몸 관리 안 하면 효율 금방 떨어져."

성준수가 주머니를 뒤집어 보인다. 분질러진 담배 몇 개비가 말린 담배옆을 알알이 떨구며 삐져나왔다. 얇은 종이로 말린 각연은 한 번도 불붙지 않은 듯 순결하게 희다. 

그는 성준수로 하여 확언할 수 있다.

모순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아가 애살이 있네."

"애살이 뭐야?"

"니 같은 거."

성준수는 성준수가 센티넬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돌아와서는 자주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성준수가 그의 일에 낙심하거나 질리거나 싫증났을 거라고 짐작했다. 

겁이 났었나?

성준수의 일부가 영원히 불변하기를 바란다는 건 그가 영원히 센티넬답길 바란다는 뜻이었나? 

성준수가 내내 꼿꼿하기를 바란다는 건 여간한 실의에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는 뜻이었나?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센티넬들을 진재유는 은연중에 경멸해왔다. 가이드는 부품처럼 소진하면서 자기 몸은 끔찍히 챙기는 센티넬을 볼 때면 염오가 치밀었다. 

그런데도 효율을 논하는 오연한 얼굴이, 라이터와 짝지어지지 않은 담뱃대가 참을 수 없이 기껍다. 

"......열심히인 거."

그는 생면부지의 감정과 낯설게 만난다. 가이딩은 피해다니지만 담뱃불은 켜지 않는 센티넬, 접촉가이딩을 요구하기 전에 조금은 머뭇대는 이 센티넬이 어떤 식으로든 고스란하기를. 만일 성준수가 내내 꼿꼿할 수 없다면, 그의 구부러짐이 길지 않도록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바람은 돛처럼 부푼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애살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아나."

"......?"

손을 내밀면, 성준수가 내민 손을 마주잡으며 무구한 얼굴로 올려다본다.

"한 번 더 해주께. 손 잡고 하면 더 빨리 괜찮아질 끼다."

이윽고 복종처럼 순순하게 입술이 열린다. 

  

45.

자고 일어나면 실능자들이 열댓 명씩 생긴다고 했다. 실능자들의 노화는 가공할 속도로 빨라졌다. 그들에게 일어난 재앙에 한 번 뻗대볼 틈도 없이 연구소로 이송되다 의식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상황은 표변했다. 연합은 연구소가 센터와 가까이 이웃해 있는 죄로 엉뚱하게 병구완까지 도와야 하는 실정이었다. 내켜하는 이들이 없었다. 

- 다른 일도 많은데 이거 하느라고 시간이 다 가요 진짜.

- 아니 혹시 모르니까 찜찜해서... 

실능은 예방할 수도 전염할 수도 없는, 센티넬 개인에게 닥치는 천재지변 같은 거라고 장영윤은 수차례 강조했지만, 모를 일이라고 센티넬들은 생각했다. 다들 몰라서 뭉개는 거지 모종의 원인이 있을거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손 놓고 있을 리가 없다고 단정했다. 

"...찜찜해 할 시간있으면 실능 오기 전에 AJ나 하나 더 낚아."

- 아 당연히 잘 하고 있죠! 저번 주만 해도 제가 유충을 얼마나 정리했는지 아십니까?"

"...어 그래."

무언가 그의 입을 막았다. 기총소사로 난자된 것 같은 시신이었다. 수혈을 해도 혈액이 다 빠져나갈 게 분명한 수많은 상흔, 그 작고 둥근 구멍들, 물린 자국으로 가득하던 서기경의 몸.

"......"

잘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네가 죽인 게 AJ는 맞지?

물을 수도 없었다. 

46.

수도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는 또다른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병들을 모른 체하긴 어려웠다. 그들은 작은 대한민국을 더 잘게 쪼개 꼭 서울을 향해서만 향수병을 앓았다. 보아도 보아도 AJ 13은 없었고 그는 병력의 일부라도 철수시키려 했다.

"AJ 13이 소흑산에 있긴 합니까?"

- 자네 지금 나 취조하나?

"그렇습니다."

나름의 각오는 언제나 나름일 뿐이어서, 다지는 족족 짓밟힌다. 짓밟힐 땐 보통 호탕한 웃음소리가 동반한다. 하하하하하하하. 한때는 별을 달면 다 저렇게 웃게 되는 걸까 생각했었다. 

"자네는 참 여전해."

"직접 와 보셔도 결론은 같을 겁니다. AJ 13은 없습니다."

"없다고..."

"네. 철군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그것 참 안타깝군, 안타까워..."

흐음...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다지 고뇌하는 기색이 없는, 어디까지나 가벼운 한숨이었다. 내려진 명령 또한 산책을 제안하듯 가벼웠다. 

"좀 더 찾아봐."

"잘 못 들었습니다?"

"찾는 척은 해야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허어... 다시 한숨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깊었다. 이어진 말은 명령도 권고도 설득도 아니었다. 변명마저 아니었다. 다만 항명을 불허하는 강압이었다. 

"AJ 13은 있어야만 하네."

그는 광대히 비참했다.

46-1.

반쯤 의도적으로 움직였지만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것이기도 했다. 멀리서 감상하면 장관인 창랑이나 햇빛의 토사물처럼 검게 얼룩진 사막 그림자를 보려면 가이드의 막사를 지나야 했다. 집단생활을 하는 곳이 으레 그렇듯 오늘도 시끄러웠다. 그는 느리게 걸었다. 늘 꼭 한 마디쯤을 엿들었다. 지는 빽 있다고 나대는거지. 악의로 날카롭게 벼려진 음성을 들으면, 여기를 빨리 지나가주는 게 매너라는 걸 알면서도 발끝을 끌며 더 늑장을 부리게 된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게 사람만 아니면 무엇이든 좋아서, 아무도 없을 장소를 찾아가는 중이면서도. 

"혹시 가이딩 받으러 왔다 그냥 가시는 거예요?"

아마도 이럴 걸 기대하고. 

"싸우는 거 아니었는데 들어와 보기나 하시지..."

성준수보다 앞서 얼룩진 그림자와 진재유의 그림자 일부가 검게 겹쳐져 있다. 머리와 머리. 그림자와 그림자. 그들은 마주 서 있지만 그는 두 그림자가 겹쳐진 머리 부근만 물끄러미 응시한다. 

들어갈 수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 

그는 어디로든 달아나고 싶었을 뿐 정해진 곳은 없었다. 숨이 막히도록 비참했고 위로같은 게 필요했지만 가이딩이 필요하진 않았다.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해 볼까? 금방 들키겠지.

그 생각을 하다 그는 열없이 웃는다.

"왜 웃노?"

"아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싶어도 네가 너무 가이딩을 잘하니까."

"수작을 안 부리면 되지."

"그렇지만 다른 방법은 생각이 안 나."

"아니 이걸 이렇게 대놓고 얘기한다고?"

진재유도 너털웃음을 짓는다. 확인사살같은 웃음이었다. 지난 정기점검일 이후, 어쩐지 진재유에게 요주의 인물로 분류된 듯한 느낌이 선명했다. 그래서 이렇게 웃겠지. 너그러운 이들은 약한 이들에게 너그럽다. 

"임마 이거 사상이 이래 꼬롬해가 되겠나..."

"......사과해야되나?"

"아뇨? 소령님은 다정하시니까."

"알아요. 다들 센티넬이 씹새끼만 아니면 다정하다고 하죠."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요주의 인물이라는 분류도 다정하다는 흔한 말도 오롯이 그의 것은 아니다. 그는 허기를 느끼지만 왜인지는 모른다. 입술만 연신 붙였다 떼며 그는 점차 자신이 없어진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쳐다볼 밖에.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꽁꽁 묶여 있는 것 같다고 동정을 구할까. 

우리 함께 AJ 31을 발명해 보자 애원할까.

아니면...

하고싶은 말은 많아도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하여 그는 수작이나 속행하기로 결심한다. 

이상하게 그런 말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혹시 아직 수작 부리는 중이가?"

"...응."

"왜? 아니 뭔 꿍꿍이로 수작 부릴라 하는지나 좀 알자."

46-2.

잊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기억해야 할 것이 모두 있었다. 

꿍꿍이란 아마 이런 걸 말하는 것일 테다. 

그는 진재유를 탐내고 있지만, 그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딱히 달라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만일 진재유가 원한다면 달라진 척을 할 것이다. 척하기 전에 진재유의 허락을 받을 것이다. 

"...목적이 있어서 당신을 원한다면, 내가 나쁩니까?"

"......음......"

성준수도 정말은 진재유의 존재가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거라 믿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시선을 돌리고 싶은 것 뿐이었다. 진재유같은, 내가 겪는 불의에 함께 화내주는 사람을 바랐던가? 아니오. 그냥 이것도 저것도 끔찍해서 끔찍하지 않은 것도 하나쯤 갖고싶었다. 괜찮은 사람 같길래. 옆에 두고 보다보면 어쩌면 세상이 덜 끔찍해 보일 수도 있다는 망상이 자꾸 들어서. 

망상이 사실로 승격하는 순간은 짧다.

"......목적을 잃어도 나를 원한다면, 그건 사랑이겠죠."

성준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오직 진재유만이 찡그린 얼굴 속에 담긴 것이 애상임을 알았다. 진재유가 한 걸음 다가왔다. 다가와 손을 뻗었다. 손은 일정한 사이를 두고 팔과 어깨를 오르내리다 어깨에 안착했다. 손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게 허물어질 권리를 주마.

적어도 내 앞에선 원하는 만큼 허물어져도 좋다.

47.

양측의 갈등은 순조롭게 악화되었다. 급거 돌아온 소령이 휘하를 쥐 잡듯 잡아 간신히 봉합되어 있었지만, 서로를 보는 눈빛은 곱지 못했고 호시탐탐 건수를 노렸다. 소령의 등 뒤에서 몰래 살벌하던 그들은 바야흐로 대인 훈련을 기다리게 되었다. 막싸움을 훈련으로 위장할 기회를.

훈련 난이도는 계단식으로 높아졌고 구령은 순서대로 신체의 극한까지 단련하도록 병사들을 재우친다. 훈련의 목적이라 함은 두말할 필요없이 전투력의 함양이며 구체적으로는 1인분 센티넬의 몫을 해내도록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소령은 뒷짐을 진 채 가끔씩 동작에 번호를 붙였다. 다섯, 아니 다시. 다섯. 

"으억!"

후에 한 병사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발끝에 아주 기분 드러운 진동이 울렸었다고. 

48.

일반적으로 센티넬이 일으키는 진동의 의도는 방어이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수호이다. 

못 느끼는 게 이상할 강도의 공진을 밟고서 성준수는 센티넬의 목덜미를 들어올린다. 

"...죽고싶어?"

이 진동의 의도는 살의이다. 진동의 끝이 센티넬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살기 위해 진폭이 다하는 곳으로 도망해야 하기 때문에.

"죽여줄까?"

센티넬을 제물처럼 공중에 매달고, 성준수는 그의 눈을 이쪽저쪽 살핀다. 절망적으로 희망을 찾는다. 잠깐 빡쳐서 실수한 거겠지. 실수라기엔 너무 심각하지만 그래도 홧김인 거겠지... 반항하듯 다물린 입과 눈동자에서 하다못해 미필적 고의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훈련은 서둘러 중단되었지만 아직 여진이 남아있었다. 소령은 발에 힘을 더 실으며 숙영지를 밟는다. 떨리며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는 일이 아득했다. 

"야."

입을 여는 방법은 아주 쉽다. 

관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돌아간다.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 말 씹을 때마다 아구창 한 번." 

"......"

소령의 손목을 타고 피 섞인 침이 흘렀다.

"지금부터 시작한다."

"......예."

"지금 훈련 중인 거 알고 있지."

"예."

"사람한테 능력 쓰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예."

"죽일려고 그랬지?"

"예."

"왜지?"

"적을,"

"......"

이 답만은 아니기를 소령은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아니 센티넬이 아주 조금이라도 주저했다면 소령의 절망이 이토록 깊진 않았을 것이다.

"......적으로 보였다고?"

"적입니다."

"같은 군복을 입고 있는데 적이라고?"

"예."

같은 군복을 입은 동료가 속속 적으로 탈바꿈하는 착란을, 그는 조금도 멈출 수 없다.  

"그러면 적진에 잡힌 포로 취급을 해 줘야 되겠군. 혹시 여기 영창이 있나?"

"폐교를... 그런 용도로 썼었습니다."

"가둬놔." 

센티넬을 좀먹는 환각을 떼어낼 수 없어 환각을 겪는 센티넬이나 분리한다. 

48-1.

센티넬에게 폐교는 장난감 집처럼 보일 것이다. 적어도 성준수에겐 그렇게 보였다. 사위가 그럭저럭 조용해지면, 정말 장난감처럼 교실을 부수고 나와 그가 죽이고 싶어했던 그 센티넬을 마침내 죽일 수도 있겠지. 아마 그럴 거다.

그 생각은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누웠다가도 집 지키는 개처럼 달려가 폐교를 더 정교하게 부쉈다. 폐교가 참으로 영창같도록, 능력을 쓸 수 없게 공간을 좁히고 달아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다른 교실들이 도미노처럼 나란하게 무너지고 하나만 남았을 때도 안심하지 못했다. 사람한테 능력을 쓰면 안 되는데, 사람을 던져넣은 빈 방엔 이토록 능력을 낭비해도 되다니 다행한 노릇이다. 

사람을 죽일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사람은... 죽어야겠지... 말장난 같은 세상에 쌕쌕 가파른 숨을 뱉으며 돌아오면, 그가 떠는 야단법석에 잠이 아주 깨어버린 부관이 문을 열고 잔소리를 한다. 좀 주무십쇼. 이거 민폡니다 수면권 침해라고요... 그치지 않고 책상 표면에 부싯돌 갈리는 소리가 더해지자 무어라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떴다.    

부싯돌이 득득 갈리며 책상 표면을 긁는다. 그는 공기만 연거푸 빨아들이면서도 담배를 내려놓지 못한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거라는 예감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규모 부대는 한 명의 결원만 생겨도 부담이 크다. 가둬놓은 놈 업무까지 도맡느라 다른 병사들은 두 배 세 배의 몫을 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격리 말고 다른 방법은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진짜네."

담뱃대가 입에서 쑥 뽑히자 그는 움찔 놀랐다. 

"온동네 AJ는 지 혼자 다 잡은 꼬라지라 하드만."

"진짜 그렇게 말해?"

"쫌 자라, 자고 일나면 끝나있을끼다."

"아닐걸."

작고 투박한 손이 눈두덩을 마구 짓눌렀다. 

"아 쫌."

그는 스르르 복종한다. 그의 쪼개진 파편이 더께처럼 쌓여 있고 호전되고 싶지 않지만, 외려 더 조각조각 흩어지고만 싶지만 새벽에 길을 나섰을 하사와 잠에서 깨어 이리로 왔을, 졸린 얼굴의 진재유를 생각한다. 피로도 조금은 감각한다. 자고 일어났는데 또 누가 죽어있으면 어쩌지... 여기서도 누군가 실능을 하면 어쩌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있기를 그도 바라지만, 터무니없는 꿈이었다. 

"잘자리."

그래도 그걸 내색할 필요는 없다. 그는 대답대신 순순히 눈을 감는다.

48-2.

흰 빛이 잦아들어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 겹쳐진 손 틈새에서 은사처럼 얇은 빛이 저물고 있었다. 가이딩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몸살이라도 났는지 잠에서 갓 깬 몸이 유달리 뜨겁게 느껴졌다. 아니면 진재유의 손이 유달리 뜨거운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겠지.

빛이 완전히 꺼졌다. 그 희미한 빛도 빛이라고 새로이 암순응 중인 시야는 검기만 하다. 어둠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딱 그만큼 꺼끌하다. 

"깼나."

"응."

"아직 약간 남았거든. 마저 해도 되나?"

"응."

새까만 그림자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눈을 뜨고 있으려고 했지만 절로 감겼다.

"......"

처음에는 분명 가이딩이었다.

가이딩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그는 물살에 쓸려가다 간신히 구명정을 붙든 아이처럼 진재유의 옷깃을 꽉 잡고 숨을 헐떡였다. 

48-3.

그는 아무래도 서투름이 쪽팔리지 않을 만큼 철들지는 못 했다. 

"...진재유 가이딩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키스도 잘 하네."

"맞나."

"응 맞아. 나 좀 질투난다."

"니 기분좋게 해줄라고 경험 좀 쌓았다."

"아 뭐래..."

원하는 걸 인내할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미련이 가득한 눈길이며 손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부주의하게 드러낸다. 성준수는 명확한 것이 좋다. 마치 전투훈련처럼. 계단식으로 전진하며. 키스가 있다면 그 다음, 그 다음엔 또 그 다음. 키스의 다음은 처음부터 전제되어 있었다. 키스의 다음과 또 그 다음이 모두 같은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항상 흔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선뜻 포기되지가 않아서 그는 이미 구깃한 소매자락이나 하릴없이 쥐는 것이다. 진재유가 그의 손을 떼어놓을 때까지.

"뭔데. 원하는 게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말을 해라."

"재유 나랑 잘래?"

"그래."

"...그래? 그래? 너 진심이야?"

"어."

"아니 진짜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왜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그는 간신히 참는다. 진재유의 두피 속에 손가락을 밀어넣고 싶었지만 원하는 만큼 막무가내일 수는 없었다. 네게도 그 꿍꿍이라는 게 있는 것인지, 의도를 궁금해하는 이 마음이 그다지 본새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재유가 그냥 그에게 손을 내밀 거라고는 생각되어지지가 않는다. 

물론 꿍꿍이와 원인과 이유와 목적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성준수가 그랬고 모든 것들이 그랬듯이. 그러므로 이것이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이길 바라는 마음은 과욕일 것이다. 이것이 크고 끈끈하고 질긴 연쇄의 첫 사슬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노욕일 것이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진재유의 양 손목을 번갈아 쥐어본다. 힘껏 옭아매 빨간 선을 남기고 싶었다. 이마에 있는 반지자국처럼.

그게 우물쭈물하는 쑥맥처럼 보였을까?

"니도 어지가이 귀엽네."

"......"

"내가 니 불쌍해서 자 줄까봐? 니가 뭐가 불쌍해서."

사실 불쌍해서 자줘도 좋을 것 같았는데. 그는 충분히 불쌍했다.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한 명쯤은 그만 연민해줘도 좋을 것 같았다. 오직 그만을. 

"그래도 상관없어."

네가 딱히 동정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를 불쌍하게 여겨줘. 네게 가여운 사람이 많다면 그 중 나를 가장 애틋하게 대해줘.  

"아니라니까? 이게 이거 저거 다 할라고 아주."

"그럼 좋고."

새로운 전지훈련캠프처럼 진재유의 몸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그는 가뿐히 실족한다. 기다렸다는 듯 진재유에게 엎질러진다. 불현듯 피곤했다. 오래 표류한 것처럼. 

"......손목을 묶어보고 싶어."

그는 안착하고 싶다. 

진재유에게?

진재유에게.

아니 그보다,

"그래도 돼?"

난파하고 싶다. 진재유에게. 

이러다 생이 끝날거라면.

그는 그 밤 진재유에게 공들여 묻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발목을 깨물어 생긴 잇자국이었다. 복숭아뼈를 깨물며 포만감을 느꼈다. 거기에 난 잇자국은 반지자국처럼 흡족하게 둥글었다. 손목을 묶은 자국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재유가 스스럽게 먼저 손목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딱 하나 불만스러운 것은 귀끝은 피부가 얇아 잇자국이 잘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재유의 살은 더웠고 탐험할 곳이 많아 좋았다. 손끝부터 새끼발가락 끝까지 따뜻해 선정적이었다. 그를 만지며 진재유는 외로움을 위로하는 방법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암만해도 그 밤은 외로움을 위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49.

단일대오는 분명 허상이지만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아름답다. 

그것은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별일일 수도 있는 숱한 것들에 사소하게 걸려넘어지면서 더더욱 미화된다. 계약은 천라지망처럼 펼쳐져 사람들을 옥죈다. 하나만으로도 불완전한 사람이 둘이 되면 곱절로 불완전해진다. 그들은 함께 퍼덕이고 서로를 찌르다 공멸한다.  

하지만 가이드들은 그물을 갈망한다. 

그래서 좀 더 튼튼하게 그들을 옥죄어줄 그물, 절대 끊기지 않을 그물을 요구했다. 옆 그물코에 함께 걸릴 센티넬이 있기를 욕망했다. 센티넬들은, 심심할 때 바랐고 자주 건성이었고 심심찮게 지겨워했다. 집단적인 짝사랑과 집단적인 거드름이 대충 예외를 만들며 굴러갔다. 강철처럼 아름답던 가이드도 그물에 휘말리면 쉬이 녹슬었다. 부식된 동료들이 더 강력한 그물코를 만드는 것에 골몰하는 것을 보면, 그걸 보노라면, 그 일만이 우리의 유일한 과업인 것 같았다. 

정답은 하나뿐이었다. 처음부터 걸리지 않는 수밖에. 

홀로일 것. 그것은 방법론이자 윤리적 규범이었다. 하나의 뜻 아래 확립된 간결하고 명확한 원칙. 환호하긴 쉬웠으나 본능과 욕구와 감정을 가진 가이드에게는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였고 단일대오는 바다에 내리는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계약을 거부하는 한 줌의 단일대오에 진재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여일하게 말해왔다.

'나한테 센티넬이 있으면 내 운동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는다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진력하는 자의 일은 아니었다. 하물며 세상을 바꾸려 발버둥치는 가이드의 일은 결단코 아니었다. 애인을 둔 가이드의 어떤 대의도 기어이 사랑으로 소급된다. 그것이 축소인지 비약인지 혹은 과장인지 진재유는 모른다. 

그가 센티넬을 사랑하게 된다면야 일말의 변명은 되겠지. 본능에 새겨진 당연한 일이니까. 

"뭔 일 있었나?"

제가 감긴 그물을 수선하는 자보다는 끊어내는 자이길 바랐고 사랑을 보답받길 기다리는 연인보단 노동자가 되길 원했다. 지금도 그렇다.

"필요없어요."

"어...!"

그러나 괴로운 얼굴의 성준수를 보면 떠올리는 것이다. 

"가이딩 안 해줘도 되니까, 그냥 사귑시다. 그냥 나랑 만납시다."

가이드는 불가항력으로 센티넬을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떠나지 못한다...

그 오래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성준수는 몸을 한껏 작게 만들어 진재유의 어깨뼈 속으로 망명해버리고 싶은 것처럼 돌격한다. 그는 핏발선 눈으로 다가와 진재유의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고, 꼭 한 방향으로만 탈선하는 짐승처럼 난데없이 들이닥쳐 그를 와락 껴안기도 했다. 

"제발..."

성준수의 얼굴엔 지도가 새겨져 있다. 오욕과 배신의 길이 노정되어 있다.

사랑은 과연 훌륭한 것이었다. 그가 성준수를 염려하듯 인간이 주변을 돌본다면 이 세상은 훨씬 나아질 거라 자신할 정도로 뻔뻔하게 자비롭고 때론 낭만적이기까지했다.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를 붙잡고 산화하던 동료들의 마음을 그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이해의 대가로 그의 모든 말은 사랑스럽게 윤색될 것이다. 그의 호의는 '지는 뺵 있다고 나대는' 자가 베푸는 시혜로 둔갑할 것이고 센티넬 한 명과 붙어다니는 모습은 계약을 하고싶어 안달난 추태일 것이며 공용가이드도 포함하는 특별법 개정안을 주장하는 것은 계약의 경계선에나마 진입하려는 치졸한 술수로 읽힐 것이다. 일부는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대다수는 실망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렇지, 너도 별 수 없네. 결국 다 똑같아 그럴 줄 알았어. 

그 말이 부당한 비난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것은 배신이 맞다. 진재유는 진재유를 배신했다. 진재유의 뜻, 진재유의 규범, 진재유의 윤리와 진재유의 희망에. 

그러나 그는 번번이 성준수에게 머물렀다. 센티넬이 구원자를 보듯 그를 볼 때, 도움을 청하듯 손을 내밀며 그를 구할 때 외면하는 방법을 결국 배우지 못했다. 아니 그런 기능은 그에게서 완전히 제거된 기능인 것만 같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이번에 성준수는 조금도 머뭇대지 않았는데. 

내가 나를 배반하는 게 꼭, 너를 구할 유일한 수단처럼 보이는데.  

그는 허무한 얼굴로 웃었다. 참...

"...이거는 내 가이딩이 그닥 메리트가 없다는 건지 내 자체에 메리트가 넘친다는 건지?"

"아니, 아, 아, 네 가이딩은 당연히 저기하지 그게 아니라..."

...너의 모든 망설임과 머뭇거림과 주저함을 사랑한다. 머뭇대지 않는 순간에도.

너는 센티넬이라기보다는 꼭 인간다운 인간 같다. 다시 봤을 때도 사람들이 인간적이라는 말을 칭찬으로 쓸 때 흔히 기대하는 것들을 넣고 곱게 빚은 영웅같다고 생각했었다. 모르지, 언젠가 착각으로 드러날지도 모를 맹신 속에 그는 풍덩 빠진다. 그물이 없기만을 바라면서. 

허우적대며 할 수 있는 건 고작 눈속임같은 책략이라도 써서 스스로를 완전히 저버리진 않는 것. 비록 지금 내가 원할지라도, 나를 최후까지 철저하게 배신하지는 않는 것. 

그는 준비한다. 

변명을, 아주 긴 변명을...

50.

"우리나라가 식민지인 적도 있었다 하대. 식민지 배상금 받기도 전에 거 방사능에 땅덩이가 다 녹아뿌갖고... 나라가 없어져가지고 이제는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지마는..."

진재유는 식민치하의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던 한 시인 얘기를 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 했다. 그 편이 더 쉽다고 했다. 혼자 흠결없고 정의롭기란 의외로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도 했다. 그가 경험한 바로는 정의는 거액의 빚과 같아서, 추구하는 자 뿐만 아니라 주변에까지 연대채무를 물린다고 했다. 옳고자 하는 노력이 민폐가 되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그걸 견딜 수가 없어서, 평생 혼자이고자 했다고 했다. 무엇을 시도했든 혼자 짊어지면 견딜만하다고.  

외롭게 살면 의롭게 사는 게 그래도 쉽거든. 

누구랑 같이 의로운 게 정말 힘들거든. 

누굴 사랑하면서도 의롭기가 정말 어렵거든...

성준수는 진재유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한꺼번에 빼앗는 존재로서 실재한다. 

"...인자 인생 하드모드 단계 진입하는 거지."

"......미안해."

네 삶을 더 어렵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네가 다정해서 그랬어.

니가 다정해서 그냥 모르고 싶었어...

그는 진재유의 대의나 정의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안다. 그걸 따르다 보면 가이드가 한 센티넬을 취하는 일이 진재유의 신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임을 자연히 깨닫게 되었을 텐데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뭍에 내던져져 아가미만 들썩이는 물고기처럼 진재유에게 기대 허덕였을 따름이다. 그동안 진재유는 그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환전해 다정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환율이 고약해 그에게 다정하기 위해 아주 많은 외로움과 의로움을 손해보며 팔아치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와 그가 진재유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빼앗아왔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안 될까?"

내가 불쌍하지 않아도 나와 자줬듯이 내가 너를 빼앗아도 너는 나를 받아주면 안 될까.

내게만 적용되는 예외를 만들어주면 안 될까.

제발.

51.

진재유는 제도의 특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계약은 안 된다."

"...어."

"그래도 그것만 빼고 전부 다 할게."

"......"

"전부 다 해줄게."

의로움과 외로움을 앗기고도 진재유는 늠름한 얼굴에다 믿음직한 목소리로 자신했다. 

전부 다 해줄 것처럼, 전부 다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실감이 날 때까지.

성준수.

인류의 멸망을 언도받은 첫 완전복제 센티넬.

멸망을 몇 발자국인가 앞두고 연인을 얻는다.

34-1.

조형석은 센티넬의 발현에 유전적 요소가 깊이 관여한다는 비극적인 사실에 대해 말했다.

'나도 확실히는 이해못했는데, 여튼 아는대로 말할게.'

검고 번들번들한 종이를 내밀었었다. 종이는 군데군데 울어있었고 받아들자 손에 잉크분진이 묻었었다. 

'그게 우리라고 하더라고. 인간은 AJ보단 종이랑 비슷하긴 하겠지, 유기체니까.'

그 깡그리 검기만 한 종이가 센티넬이라고 했다. 사본을 계속 복제해 해상도가 떨어지고 데이터가 깨져 더 이상 읽을 수도 없는 자료를 억지로 종이에 출력해낸 것과 다름없는 존재라고 했다. 

센티넬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고 인류의 영속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센티넬이 공급되어야 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유전적 돌연변이였기 때문에, 방사능 누출 직후의 짧은 시기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맥이 끊겼다. 전세계가 공조했지만 센티넬 양식은 실패했다. 센티넬이 태어나기만을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복제는 센티넬을 만들어낼 유일한 방법이었다. 

세포는 창조와 복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세포가 분열할 수 있는 횟수의 한계가 복제 횟수의 한계를 결정했다. 게다가 복제는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때마침 생포한 AJ X - 이것이 어떤 종인지는 지금도 극비다. - 에서 텔로미어를 연장하는 물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인류는 그때 멸망했을 것이다. 

신기술은 경제성과 범용성이 높았다. 세포의 말단에 아종 텔로미어를 부착해 길이를 더하는 방식이었다. 그때부터 복제 센티넬이 대량으로 출현하게 되었으며, 그를 위해 해당 종의 AJ가 집중적으로 포획되었다. 인위적으로 텔로미어를 이어붙이는 만큼 인류의 수명도 계속 연장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AJ의 개체수를 조절하지 못했고 복제원료를 대량으로 추출하겠다고 AJ X의 포식자인 상위 AJ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구서울을 비롯한 기타지역에 실시된 광범위한 정리작업의 예기치 못한 부작용으로 X를 포함한 AJ 서너 종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했다. 더 이상 인공적으로 텔로미어를 늘릴 수 없었다. 복제된 텔로미어는 빠르게 마모되었고 노화된 염색체와 죽어버린 체세포를 수명이 다해 해진 텔로미어로 친친 감은 센티넬의 첫 세대가 출현했다. 다행히도 반복적인 훈련과 쉴새없는 전투에 인이 박인데다 수많은 사본 중 적응과 진화를 완료한 질좋은 세포들로만 조립한 센티넬들의 육체기능은 그리 약화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효율이나 신체이상을 보고하는 케이스가 정원의 사분의 일을 밑돌았기 때문에 수뇌부는 기대를 품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상이 발견되기 전까지. 

센티넬은 인지기능이 가장 먼저 손상된다. 그들의 목적에 충실한, 적을 인식하는 체계가 교란된다. 그들은 민간인을 AJ로 착각하거나, 동료를 적으로 착각하거나, 언젠가는 동료를 AJ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AJ를 공격하는 날도 있겠지만 그보다 자주 민간인과 동료들을 죽이려 할 것이다. 혼란은 점점 더 잦아지고 피아를 식별할 수 없게 되다가 종국에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적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 가설은 서기경에게서 검증되었다.)

절망적인 것은 이것이 비단 센티넬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에 이르러 복제는 인간종 보존의 유효하고 보편적인 방법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복제이력이 적게는 수십 배에서 많게는 수천 배까지 축적된 센티넬들이 훨씬 더 빨리 죽을 뿐, 민간인에게도 노화는 닥쳐올 것이다. 

고로 인간은 모두 죽을 것이다. 민간인들은 AJ나 센티넬에게 죽을 것이다. 센티넬은 센티넬이나 AJ에게 죽을 것이다. 운좋게 살아남은 이들도 텔로미어의 증발과 함께 고사할 것이다. 저절로 죽거나 모두를 죽고죽이며 오래전 예언된 종말이 마침내 도래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실능자들을 정밀 검사한 후 그 시기를 최대 13개월 후로 예측하였다.)

조형석은 이 사실을, 동생의 유전자보관소에 몰래 침입했다 엿들었다고 했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민간인이나 동료들을 살해하고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죽고싶지 않네. "

"......"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선취해야겠지. 각국 정부는 입 꾹 다물고 있다 최후의 날이 오기 직전 다른 행성으로 뜨기로 약속이 되었다니까 말야."

34-2.

그가 이해한 바로는 이렇다.

인류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센티넬들에게 죽음을 일임했다. 인류의 안존을 해치는 그 무엇이든 죽여달라 내맡겼다. 센티넬들은 셀 수 없는 죽음을 위탁받았고 수행하다가 어느 날 위탁받은 적 없는 죽음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죽이면 되고 무엇은 죽이면 안 되는지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혼란한 죄로 센티넬들은 이 세상에서 해촉될 것이고 스스로 무너지며 해촉될 이유를 낱낱이 증명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붕괴를 수치스럽게 전시하며 죽어 마땅할 죄인으로 분할 예정이다. 

센티넬은 삭아 끊어지듯 고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인류의 안전을 되는대로 해치며 죽을 것이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죽이고 파훼해가며.

"설득이 됐나?"

요는 모든 일을 정리하고 예쁘게 죽을 자리를 찾아가겠다는 거군. 

성준수는 피식 웃었다.

꼴깞 떨고있네.

나한테 꼼수나 쓰지 말든지, 지는 하나도 안 존엄하게 온갖 피를 다 묻혀놓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 지랄. 

34-3.

아직 실감나지 않아서일까, 끝이 예고되자 마음이 차분하게 식는다. 

이런 세상은 빨리 망하는 게 맞긴 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지저분하게 망하는 게 좆같긴 하지만... 

"자네도 찬찬히 생각해 봐. 남은 1년동안 뭘 하면 좋을지."

"......예."

남은 1년.

그 순간, 그의 마지막 욕망이 희미하게 부서지며 태동했다. 

수천 번 수만 번 기억을 박피하고도 마음의 뼈대에 눌어붙어 있던 열망 같은 것이.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삶에도 반지자국 같은 걸 남겨보고 싶다. 

그건 그의 오래되고 은밀한 소망이었다.

34-4.

선고받은 끝은 현실이 되자 그를 갈갈이 찢으며 육박해왔다. 끝은 그저 말이기를 그치고 지금 당장이라도 실현될 듯한 재앙이 되었다. 모든 것이 숨가쁘게 악화되기만 했다. 평소보다 쉽게 지쳐버리는 병사들에게서, 사소한 걸 이해하지 못하고 일의 순서를 뒤섞는 연합원들에게서, 치열해질 겨를도 없이 어느날 문득 능력을 잃어 실능자가 되어버린 전우들에게서 임박한 최후가 보였다. 

무기력하게 세계의 종언을 목도하는 일은 형언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온갖 유형으로 서서히 부스러져가는 센티넬들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더 힘들었다. 아무도 구할 수 없었다. 견디고 싶지 않았는데 견디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살고 싶지 않은데 죽어서는 안 되었다. 누군가 자꾸만 물었다. 서 중위 여럿 만들 셈이야?

그럴 때면 애걸하고 싶었다. 다 털어놓고 사정하고 싶었다. 재유, 우리는 잘 살면 내년까지 산대. 이렇든 저렇든 다들 죽는대. 그때까지 네 1년을 갖고 싶어. 주면 안 돼? 아니 반 년이라도, 아니 3개월이라도 좋으니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제 1년을 요청해도 다 받을 수 없었다. 짧아지는 시간이 아까워 속이 타들어가도, 매번 치기어린 고집에 가로막혔다.

곧 죽을 놈 소원들어준다고 선행하는 것 같잖아.

그건 싫어. 

어차피 죽을 거니까 자포자기로 나를 줍는 것도 싫어.

그게 무엇이든 종말을 윽박질러 얻어내고 싶지 않았다. 진재유를 다그치고 싶지 않았다. 

진재유의 손을 묶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원하는 바를 알았다. 

그는 진재유에게 허락받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그의 온 존재를 진재유에게 허가받아 진재유를 온전히 차지하고 싶었다. 허락을 받으면 거칠어져도 되었고 떳떳하게 욕심내도 되었다. 마음껏 쥐어도 되었다. 그 밤은 그걸 알려주었다.

그의 바람은 바란다고 이루어지지 않고, 진재유가 허락을 해주어야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의 것이라기보다는 진재유의 것이었던 것 같다. 그가 바라고 진재유가 이루어주는 것이 마치 자연법칙처럼 엄정하고 범접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52.

성준수는 허황할 만큼 순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재유는 그것을 무엇에 비유해야할지 몰랐다. 그러므로 그 눈은 마치 성준수처럼 아름다웠다고 하자. 

"...고마워."

한참이 지난 후 마침내 성준수는 성준수의 눈으로 성준수다운 고백을 한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네게 최선을 다할게."

진재유가 살면서 처음 듣는, 열렬하고도 비장한 고백이었다.

* * * 진재유가 닮고 싶었던 시인은 김영랑입니다. 영랑 생가에 있는 소개글에서는 김영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랑은 조국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사고 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 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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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유연한 병아리

    영원의 알레고리 문장을 보니까 반가웠다가 안타까웠다 하네요 재스가니유전자인제야못쓴단다ㅠ 시리즈 지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인류가 망해가던데 이렇게까지 될줄은 몰랐어요 센티넬과 다른 사람들의 안전한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AJ13이 있어야한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면서 있으면 좀 뭐가 좀 달라질까 싶기도 하구요 혹시 재유 대만판 한자가 있을 재,벼리 유라는 것을 알고계셨나요 억지같은 이유지만... 재유라면 가이드와 가이드로 손잡은 새로운 그물을 만들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쪼록 저기 저 사랑하는 이들은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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