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교에 눈이 내리면, 진재유 上

2023.12.23. 준쟁 교류회에서 나눈 글입니다 ^▽^

뒷부분 (총 26화) 은 언젠가 오프라인 행사에서…

01

돌담이 무한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푸른 기와는 윤이 나는 것도 있고 모서리가 닳은 것도 있었다. 재유는 그것에 정신이 팔렸다. 곁눈질로 해진 기와의 수를 세면서 걸었다. 그의 앞에서 남색 조끼를 입은 시위가 길을 안내했다. 시위는 얌전하게 걷지 않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재유가, 그런 재유의 걸음걸이가 불안한 것인지 뒤를 힐끔거렸다. 품계로 따지면 재유는 시위보다 한참 아래일 것이다. 위엄과 영예를 생각하더라도 그러했으나 시위가 재유를 다그치지 않는 것은 명분 탓이었다.

황제가 재유를 불러들였다. 재유는 다만 잡직에 지나지 않는 군인이었다. 군졸에서 겨우 벗어나 휘하에 쉰 명 남짓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 나이에 기총旗摠 정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변방에서 검을 갈고 화포를 나르던 그를 황제가 독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렇게 했다. 재유가 그의 막역한 형제를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봄이 시작될 무렵 양군왕揚郡王이 한교忓橋의 국경에서 납치되었다. 황제는 대노했다. 양군왕은 한교가 국경을 바라보는 위태로운 분쟁 지역임을 알면서도 유랑시인 행세를 하며 그곳에 머물렀다. 야만스러운 산적 무리가 멋대로 군왕에게 손을 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접경국의 왕실도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실제로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물론 황제의 면이 상한 이상 진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한 달 뒤, 황제는 한교로 군사를 보냈다. 당장 군왕을 내놓지 않으면 그가 감금된 요새를 무력으로 허물고 제국의 위상을 드러낼 것이라고 선포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전쟁 선언이었다. 양군왕이 물가의 어린애처럼 하루아침에 납치당한 것만으로도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제국과 황실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더군다나 양군왕은 군사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황제의 군대가 가볍게 승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군가는 전쟁을 반기기까지 했다.

재유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한교에서 오래 머문 지방군이었다. 한교에서는 곧 이른 여름이 시작될 것이었다. 수도에서 남진해오는 중앙군이 한교의 더위와 습기에 대비되어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겨울만 힘든 줄 아는 그들이 상처의 곪음과 짓무름, 군화 속에서 들끓는 구더기를 이겨내고 무사히 요새를 박살 낼 수 있을까. 여름에 시체의 산이 내뿜는 썩은 내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재유는 승전의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전장에서의 기억에 푹 빠져 있는 재유에게, 이번에는 녹색 포를 입은 태감이 찾아왔다. 재유는 회상을 그만두었다. 코끝을 여름의 시취가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도 태감.”

앞서 재유를 인도하던 시위가 공손하게 물었다.

“적 대인, 오래 찾아다녔습니다. 태후께서 찾으시니 지금 바로 수경궁으로 가시지요.”

“수경궁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재유는 새로 등장한 얼굴에 관심을 두지 않고 계속 기와의 흠을 샜다. 가끔 궁녀와 태감이 오가기는 했으나 궁궐 중앙으로 향해 갈수록 주변은 심각하게 조용하고 숙연했다. 그 엄숙함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궁궐의 사람들이 기질적으로 그러한 것인지 적 대인이라고 불린 시위와 도 태감이라는 자의 대화는 낮고 불분명한 소리로 오갔다. 태감은 자신이 적 대인을 대신하여 재유를 황제에게 안내하겠다고 했다. 적 대인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렇다면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재유는 새 인솔자가 가자고 손짓을 할 때까지 멀뚱히 있었다. 그때 길의 모퉁이 뒤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궁녀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다리가 긴 여자였다.

“진 기총, 가시지요.”

궁녀는 태감이 몸을 돌리자 모습을 감췄다. 도 태감은 마치 궁녀의 뒤를 쫓듯 같은 방향으로 재유를 이끌어 갔다.

 

예상하였듯 한교에는 여름이 재빠르게 찾아왔다. 수도에서 한교까지 길이 험해 군량을 운송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배를 곯는 날이 많아지자 군졸들은 짐승을 사냥해 먹기 시작했다. 그중 죽은 사슴을 먹은 병사들로부터 돌림병이 시작되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매일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었다. 적의 포화 속에서 용맹하게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라 구토를 거듭하다가 얼굴이 녹색으로 질리고 손톱과 발톱이 다 빠지며 죽는다는 것은 비참했다. 그곳에서 재유는 묵묵히 땅을 팠다.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겠다 호언장담을 하고 내려온 것치고 양군왕을 잡아간 요새를 쉽게 무너트릴 수 없었다. 요새 앞으로 양군왕이 말을 달리던 큰 강이 흐르고 있었고, 수도에서 온 장군들은 이곳 지리에 무지했다. 매섭게 선전포고를 한 것에 반해 적을 우습게 보고 충분한 병력을 파견하지 않은 것 역시 문제가 되었다. 명장은 대부분 북해에 끌려가 있었다. 해적이 유난히 들끓는 해였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정면충돌을 거치며 군졸의 수가 깎여 나갔다. 재유도 아는 사람을 더러 잃었다. 중앙군은 황제의 위엄에 걸맞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한교의 방어사防禦使가 제안한 기습 작전을 전부 반려했다. 오랜 대치가 이어졌다. 가을이 오고 더위가 꺾이면 상황이 호전될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란에 수확의 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한교의 백성들이 더욱 굶주리게 되었을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름보다 무서운 겨울이 오고 있었다.

재유는 이 지난한 전쟁에서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진 기총. 돌이 미끄럽습니다.”

태감은 재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에 물기가 있고 이끼가 껴서 미끄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별것 아니었다. 재유는 고개를 가로젓고 혼자 힘으로 돌과 돌 사이를 건너며 그를 따라갔다.

황제에게 가는 길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평전으로 가는 길이라기에는 험준하고 으슥했다. 곳곳에 연못이 있고 나무가 빽빽한 길이었다. 구중궁궐의 지리와 사정을 잘 모르는 그였으나 폭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마음 놓고 뒤따르기가 어려워졌다. 그것은 어색한 걸음으로 표현됐다.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황제가 나를 이런 곳에서 만나고자 하였을까. 그럴 까닭이 없다. 나를 죽이려는 건가. 이유는 차치하고 그를 비밀스럽게 죽이고 싶은 것이라면 일부러 내궁으로 불러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태감에게 원한을 샀던가. 도 태감이라는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것인데. 모퉁이처럼 생긴 폭포의 암벽을 돌며, 재유는 지금이라도 그에게 영문을 물을 것을 고민했다.

폭포 아래로 키가 아주 큰 여자가 서 있었다.

머리에 웅장한 관을 올리고 색색의 수를 놓은 옷을 입고 있어 금방 여자의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것은 후궁의 위엄이고 화사함이었다.

재유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는 태감을 따라 납작 엎드렸다. 코에 이끼가 닿아 미끌미끌했고 시원한 냄새가 났다.

아득한 윗전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여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니 재유는 인사를 서두를 수 없었다. 지방의 군병이 비빈을 알아볼 리 없었다. 단지 재유가 황궁 정사와 저자의 소문에 무관심해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교는 여기서 멀었다. 재유가 진창을 구르는 동안 갓 입궁한 후궁인지, 그보다 훨씬 일찍 내명부를 장악한 노련한 후궁인지 알 게 무엇인가. 재유로서는 여자가 자신을 아무도 오가지 않는 폭포 아래에서 만나고 싶어 한 이유만이 알고 싶었다.

여자의 옆에 서 있던 궁녀가 목을 가다듬었다. 이마를 살짝 들자 숨바꼭질을 하듯 사라지던 그 궁녀의 보라색 신발이 엿보였다.

“명귀비 마마께 인사를 올리세요, 기총.”

남부 억양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재유는 다시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정체를 듣고 나니 그가 왜 자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인지 더욱 알 수 없어졌다.

“마마를 뵙습니다.”

한교에서 명귀비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

“예는 됐다. 일어나라.”

허락이 떨어지자 재유는 자라처럼 느리게 일어났다. 목을 길게 빼고 폭포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 태감은 돌계단 위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궁녀는 재유를 주의 깊게 내려다봤다. 귀비는 심드렁해 보였다.

“본궁은 장황한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에는 높고 낮음이 없었다. 살벌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냉랭함이 미색을 가리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이 대면을 따분하게 여기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장황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부터 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이야기할 테니 너는 입은 다물고 고개는 조아려 묵묵히 수긍하라는 것이었다. 재유도 이것만큼은 모르지 않았다.

황제의 후궁이 군병을 사사롭게 만나는 것이 망극한 짓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귀비라고 진재유와의 만남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에게 내려야만 하는 명령이 있을 것이다. 생면부지의 인간이었으나 윗사람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재유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재유는 본론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무서운 눈매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웃으면 어떤 얼굴이 될 것인지 어렴풋이 궁금해졌다.

“폐하께서 네놈을 황후의 딸과 혼인시키려 하신다.”

“예, 예?”

재유가 덜떨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궁녀가 입가를 가리고 헛기침을 삼켰다. 재유는 그것을 아니꼬워할 정신이 없었다. 황후의 딸이라고 함은 가리킬 것이 하나다.

“공주마마께 저를 와….”

그것은 부마가 된다는 뜻이었다. 신분이 수직 상승한다는 뜻으로, 황제의 인척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재유는 군졸 쉰 명을 거느리는 기총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한교에서의 전투로 그에게 남은 부하는 스물 남짓이었다.

재유에게 가장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혼처는 한교의 젊은 과부댁이었다. 혹은 전공으로 품계가 올라 하급 관료의 딸과 결혼할 형편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주는 아니었다. 황제의 하나뿐인 적녀 신서信誓공주는 아니었던 것이다. 애초 공주란 가진 것 없는 군병과 혼인하기 위해 태어나고 길러지는 존재일 수 없었다. 공주와 정략혼을 맺고 싶어하는 나라가 동서남북으로 수두룩할 것이다.

“마마, 어째 그래 농담을 하신다고……. 저는 그냥 졸병입니다. 이런 놈에게 공주를 시집 보내는 법이 어데 있다고요.”

“네가 네 분수를 아는구나.”

“어찌 모릅니까. 마마를 뵌 것만 해도 정신이 얼얼해가…….”

“시끄럽다. 공주는 너에게 과분해.”

“예…….”

“그러니 거절해라.”

“예?”

재유가 다시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공주와의 혼인을 원하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신부도 반갑지 않고, 혼인의 결과로 복잡한 황실 정사와 중앙의 정치 지도에 연루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를 거절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다. 결혼을 언급한 것이 황제이건, 황후이건, 공주 본인이건 재유가 거절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리라. 극진하게 예의를 차려 그들의 제안을 사양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수리될지는 오직 그들의 의중에 달려 있을 것이다.

애당초 무슨 말로 사양해야 한단 말인가? 신분으로나 재산으로나 명성으로나 재유가 부마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를 선택했다. 부족함을 들먹이면 겸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할까? 재유는 오랫동안 한교에 있었다. 시골 군영에서 구르며 추접스러운 꼴들을 보면 보았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없을 듯이 느껴졌다. 더군다나 정말로 정인이 있었더라면 양군왕을 구하기 위해 한교에서 그렇게 몸을 내던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짓말은 어렵지 않으나 그 상대가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구석이 있다면 황제는 한교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재유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찾아내 죽일 것이다. 황제를 기만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유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거절하라고 명령할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다못해 왜 그래야 하는지 만이라도 알려줘야지. 해답이 보이지 않자 재유는 명귀비를 향해 불만을 품었다.

“거절하지 않으면 네놈은 죽을 것이다.”

그 이유를 귀비는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02

죽고 싶어 사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도 있을 테지만, 재유는 살고 싶었다. 한교에서 재유는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남았다. 짊어진 시체를 방패 삼아서 화살 비를 뚫고 간 적이 있고, 죽은 동료의 갑옷을 훔쳐 입기도 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고기를 먹었고 민가를 위협하는 부하들을 묵인하는 날도 더러 있었다. 이 모든 것에 환멸이 나 재유는 한교를, 전장을 떠나고 싶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도 태감의 안내를 받아 금평전으로 향하며, 재유는 귀비가 남긴 경고를 생각했다. 그것은 공주와 혼인하기로 선택하면 자신이 재유를 죽이겠다는 위협처럼 들린 반면 공주와의 혼인이 그에게 해로울 것이라는 예고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귀비는 어째서 이 혼인을 막으려고 하는 것일까. 흔히들 이야기하기로 귀비쯤 되는 자리에 오르면 황후와 대척점에 서게 된다고 하던가. 황후의 딸이 자신과 같은 일개 군인을 남편으로 맞이한다면 귀비로서는 좋을 일이 아닌가. 공주를 외국의 왕과 혼인시켜 아예 타지로 보내버리고 싶은 것인가. 신서공주가 귀비의 눈엣가시라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하지만 재유는 황제의 가정사에 대해 애초에 아는 것이 없다시피 했으니 그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다 한들 그것을 재유가 가늠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다만 돌담 사이를 걸으며 다짐하는 것이다.

부마가 되기를 사양해야겠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 죽을 것이라면 애꿎은 공주를 과부로 만들 필요는 없다. 마음을 정하자 침착해졌다. 황제에게 가는 길은 폭포로 접어들 때만큼 마음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다른 것을 권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가에 관해서는 한교에도 종종 이야기가 돌았다. 그가 전쟁을 불사하고 국경과 해역의 갈등을 군사력으로 해결하려 할 때가 많아 사람들은 황제를 호랑이 장군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매섭고 난폭한 인간. 용의 얼굴과 장수의 몸을 한 중년의 남자. 그가 군량을 늦게 보내줄 때면 한교에서는 그를 씹고 뜯는 풍속극이 유행하기도 하였으나 금평전에 들어섰을 때 재유는 생각했다. 황제를 똑바로 흉내 낸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재유가 금평전 앞에 도착했을 때 어전 태감은 반갑지만 단정한 태도로 걸어 나와 그를 맞이했다. 태감의 얼굴에는 곤란함이 서려 있었다. 귀비와의 뜻밖의 만남을 치르고 온 후였기에, 황제가 지정한 시간보다 때가 지체되어 있었다. 재유는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말하기보다는 침묵하기를 택했다. 시위 대신 재유를 안내해온 도 태감의 얼굴을 보고 어전 태감은 혀를 찼다. 그리고는 재유에게 변명할 말을 알려주었다. 새로 온 김 태감이라는 자가 길을 헤매 늦었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태감은 시골에서 막 올라온 잡졸 재유에게 황제를 대하며 지켜야 할 예법도 가르쳐주었다.

거짓말은 어렵지 않으나 역시 그 상대가 어려웠다. 전전으로 들어서자마자 재유는 황제에게 태감이 가르쳐준 인사도 올리지 않고 넙죽 엎드렸다. 금석으로 마감한 전전 바닥에 그의 이목구비가 비쳤다.

황제가 그의 정수리에 대고 말했다.

“김 태감이 자네를 안내했다더군. 그가 길을 헤맨 건가?”

그 목소리는 꽤 다정했다. 하마터면 재유는 마음을 편하게 풀고, 중간에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바뀐 것부터 명귀비를 만난 것과 어전 태감이 일러준 이야기를 속속들이 털어놓을 뻔했다. 재유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태감이 말한 것을 고스란히 읊었다. 준비되어 있던 각본인 것이다.

“김 태감은 내궁에서 일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는 청행원靑杏園에 있었지. 그자가 길눈이 어두워 자네를 오래 걸음 하게 하였다.”

재유를 안내한 것은 김 태감이 아니었다. 김 태감이라는 자는 마주친 적도 없다. 이 사실을, 어쩌면 귀비를 만나고 오느라 늦었다는 사실까지도 황제는 훤히 알 것이었으나 잘못이 있는 사람 중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다만 죄 없는 김 태감을 끌고 가 중곤을 치라고 명령할 뿐이었다. 재유는 그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김 태감을 변호하지도 않고,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지도 않았다. 재유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을 뿐이고 김 태감은 곤장을 맞으러 끌려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거짓말은 쉬울지 모르나 상대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주와의 혼인을 거절하며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황제는 재유의 거절로부터 끔찍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 태감이 그 선례였다.

명귀비와 다르게 그는 일찍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리와 골반이 저리기 시작했다.

“진 별장別將 같은 영웅에게 소홀하였으니, 고작 장형으로 죗값을 치를 수 있음이 김 태감의 복이다.”

재유가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황제를 보았다. 그는 후덕한 인상이었다. 흰옷을 입고 있었고, 파란색과 금색으로 자수를 놓아 난폭하고 매섭기보다는 고상해 보였다. 한교의 풍자극은 모두 거짓이었다. 황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외, 외람되지만 폐하, 별장이라니요. 저는 종8품 기총입니다. 어림도 없는 거를 어째…….”

“김 태감에 대해 말할 때는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것은 정정해야겠다는 것이냐?”

“…….”

등줄기가 서늘하다. 각본에 따르면 도 태감에게도, 적 시위에게도, 재유에게도 죄가 없고 잘못한 것은 오직 길눈이 어두운 김 태감 하나였다. 그러한 각본이 누구를 위해 안배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재유가 소극적으로나마 동참하였음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그즈음 재유는 자신이 귀비를 만났던 것을 황제가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다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기민하게 파고든 황제가 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줄 때까지 침묵은 계속됐다.

“그리고, 짐이 자네를 금군별장禁軍別將에 봉하였는데 어찌 어림도 없는 것이 되겠느냐?”

이번에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뛰기를 멈춘 그것을 그대로 토해낼 것 같기도 했다. 땀이 미친 듯이 흘러 금석 바닥에 댄 손바닥과 손가락이 미끄러워졌다. 재유는 그에게 진의를 되묻거나 파격적인 승진을 사양하거나,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부유하는 듯한 비현실감에 몸을 맡겼다.

그가 재유의 공을 치하하고자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재유가 구한 양군왕이 황제에게 워낙 중요한, 아픈 손가락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양군왕이 구조되어 제국의 국경 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황제가 대단히 기뻐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재유에게 내리려고 하는 상도 보통 크기가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한교에 있던 재유에게 적당한 승진과 재물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도의 궁궐로 직접 불러들인 것만 해도 황제의 심중을 어림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별장은 재유가 지금 있는 곳보다 열 단계도 더 높은 자리였고 금군은 다른 말로 황제 친위대였으니 거리에서 빌어먹던 가난한 자가 하루아침에 만석꾼 백만장자가 된 셈이었다.

파격적인 승진에 혼몽해 하는 사이 재유는 황제가 말하는 혼사 계획에 토를 달 시기를 놓쳤다.

“내가 너를 종2품 금군별장에 봉하고 명귀비의 조카딸 성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할 것이다.”

황제는 다른 것을 권했다. 재유는 공주의 부마가 되기를 거절할 새도 없이 폭포 아래에서 만난 차가운 여자의 조카사위가 될 운명에 처했다.


 

03

황제는 재유와 시간을 오래 보내지 않았다. 앞으로 촌수는 멀겠으나 자신의 인척이 되는 것이니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이르는 게 다였다. 그러다가 그는 재유가 전전에서 물러나기 직전 재유를 불러 세워 어떻게 양군왕을 구했는지 물었다.

 

양군왕을 납치한 접경국의 요새는 때로 난공불락처럼 느껴졌다. 요새 앞에는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강을 제국 사람들은 여강邚江이라고 불렀다. 황제가 전쟁을 선포했을 때 요새의 군인들은 여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육로로 내려온 제국군은 강을 건너기 위해 새 다리를 지어야 했고 기껏 세운 다리를 왕국군이 불 태우고 다시 짓는 짓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강줄기가 분화되어 배가 없어도 건널 수 있고 수심도 얕은 천이 여러 갈래 나 있었다. 국지전은 대개 그곳에서 벌어졌다. 시내는 곧 빨갛게 물들었다. 더 아래의 하류 마을에서 그 물을 길어 마셨다가 사람이 줄줄이 죽어 나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두가 그곳에서 검을 주고받고 있을 때 재유가 여강의 깊은 곳에 뛰어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요새를 부수는 것도, 적군을 많이 죽이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쟁을 끝내려면 양군왕이 필요했다. 그의 귀환만이 재유를 전장에서 해방할 수 있었다. 재유는 헤엄쳐 강을 건넜다. 가벼운 칼 한 자루만 챙겨갔다. 가을 즈음의 여강은 남해의 따뜻한 해류가 흘러들어와 미지근했다. 밤이 되어 물살이 잠잠했다. 강의 반대편에 다다른 재유는 수면 아래에서 요새로 통하는 수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익숙한 길이었다. 재유의 고향에도 강과 성이 있었고, 그런 곳에는 으레 비슷한 길이 나 있기 마련이다. 높은 자리의 장군들이라고 하여 이 은밀한 통로의 존재에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을 텐데 어째서 일찍이 강으로 뛰어들라는 명령을 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재유는 생각 끝에 그들이 황제의 위엄에 목숨을 거느라 비겁한 작전은 취사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병사들을 모조리 수장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만큼 졸병의 목숨을 신경 쓴다면 말이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재유는 헤엄을 잘 쳤다. 수로를 타고 헤엄치는 동안 물에 빠져 죽을 일은 없었다. 요새 안으로 흘러 들어간 재유는 마침내 수로의 끝에 다다랐다. 그곳은 거대한 저수조였다. 숨이 모자라 폐가 오그라들고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수면 위로 간신히 올라가자 한 소녀가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고 재유를 내려다봤다.

아주 어리고 팔다리가 마른 아이였다. 재유는 아이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수조에서 튀어나온 시점에 이미 늦은 것 같았지만, 아이가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경비를 불러오는 일은 간절히 피하고 싶었다. 재유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온몸이 젖고 머리카락이 얼굴에 수초처럼 달라붙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다행히 소녀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재유는 저수조 위의 다리로 올라갔다. 저수조의 규모를 보니 요새 내부가 어느 정도의 시설을 갖추고 있을지 감이 왔다. 그 안에서 양군왕을 찾아 은밀하게 빼돌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지 또한 생각하게 되었다. 재유는 군복의 물기를 짜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소녀가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다가 그의 옷을 당겼다. 소녀는 재유를 모닥불 앞으로 데려갔다.

작은 집이 있었다. 저수조 관리인의 숙소로 보였다. 안에는 간단한 살림살이가 있었고, 소녀와 함께 모닥불 앞에 앉아 옷을 말리고 있으려니 오래 지나지 않아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수염이 길고 허리는 구부정하여 산신령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차림새가 궁상맞아 안타까운 데가 있었고 팔다리는 소녀만큼 앙상했다.

재유는 긴장했다. 소녀는 상황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지 않아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라지만, 저 노인이라면 당장 경비를 불러 재유를 잡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재유를 훑어보았고 벌어온 잡곡으로 죽을 끓여주었다. 뜨끈하게 김이 오르는 죽을 한 사발 먹고 나니 이상한 용기가 샘솟았다. 재유가 노인에게 말했다.

“실은, 도움이 쫌 필요합니다.”

노인은 수염에 죽을 묻히고 재유를 보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노인은 말을 할 줄 몰랐다.

“여 납치된 우리네 왕야를 찾아야 되어가……. 방법이 없을까요.”

이번에 노인은 소녀에게 희끄무레한 눈을 돌렸다. 소녀는 사발에 코를 박고 남은 죽을 핥아 먹고 있었다.

 

다음날 집을 나선 소녀는 양군왕의 손을 잡고 저수조로 돌아왔다. 납치되는 과정에서 필경 전투가 있었겠으나 시간이 흘러 그 흔적은 희미해졌고, 요새에서 괜찮은 대접을 받은 것인지 왕족 치고 조금 말랐다는 것 말고는 상한 데 없이 멀쩡해 보였다.

양군왕은 소녀가 자신을 의외의 장소로 데려온 것이 아슬아슬한 놀이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듯 평화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국 군복을 입은 재유를 보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절 아십니까?”

“모르지. 내가 아는 건 네 옷이지.”

대단한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양군왕이 호쾌하게 웃었다. 재유는 웃고 싶지 않았으나 그를 무시할 수 없어 떨리는 입꼬리만 올렸다.

“제국군이 드디어 침습 작전을 벌인 건가?”

아쉬워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 모를 목소리였다. 군왕은 생김새가 날렵했다. 날릴 양揚을 쓰는 왕호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강가를 유람하면서 입고 있었을 왕족의 비단옷은 더는 입지 않았지만, 지금 입은 수수한 무명옷도 잘 어울렸다. 재유가 그에게 가진 좋은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군왕의 신분으로 위험 지역을 떠돌다가 칠칠하지 못하게 납치되어 이 사달을 낸 전쟁의 원인. 신분 고하를 따질 이유가 없는 지금 그의 얼굴을 딱 한 대만 주먹으로 갈겨보고 싶었으나 재유는 참았다.

“비슷한데 아이기도 하고……. 아무튼 모시러 왔습니다, 왕야.”

“그래, 이제 갈 때가 됐나.”

그는 확실히 아쉬워하고 있었다. 소녀의 손을 잡고 걸어온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유는 그 방향에서 갑자기 경비가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고, 다행히 재유가 양군왕을 데리고 수로로 향할 때까지 둘을 잡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양군왕은 떠나기 전 소녀를 안아 들고 몇 마디 말을 속삭였다. 아이는 좋아했다.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모습을 보며 재유는 왕족에게 지긋지긋한 심정을 품었다. 형편도 좋지. 밖에서는 양군왕 하나로 인해 수천 명의 병사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소녀에게 다정한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정하고 사납기만 한 군왕이었다면 여기까지 목숨을 걸고 구하러 온 것이 후회되었을 것이다.

재유와 양군왕은 수로를 타고 여강으로 빠져나갔다. 재유에게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인 만큼 어려울 여지가 없는 일이었고 양군왕 역시 수영을 할 줄 아는 성인 남성인지라 강까지 나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군왕이 뜻밖에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며 수면에 떠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 뒤늦은 고백을 했을 때 재유는 심경이 아득해졌다.

여강에서 습격을 당하며 낙마를 하였는데 그때 다친 다리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유는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수로에 뛰어들기 전에 이것을 알았다고 해도 재유와 양군왕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재유는 자신보다 훨씬 큰 군왕을 등에 업고 개헤엄으로 강을 건넜다. 강변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두 사람 다 녹초가 되어 뭍으로 기어오르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머지않아 제국군의 보초병들이 둘을 발견하고 군영으로 데려가 주었다.

먼저 수도로 떠나며 양군왕은 재유에게 큰 빚을 졌다고 했다. 그는 말을 달려 떠났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가마로 환승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재유 하나였다.

양군왕을 찾아냈으니 여강에서의 전쟁은 더 이상 무의미했다. 황제는 일방적인 승리를 선언하고 퇴군을 명령했다. 재유는 원래 한교의 지방군 소속이었으므로 그곳에 남았다. 그리고 두 달 정도가 지나 한교에 완연한 겨울이 찾아왔을 때 황제가 그를 불렀다. 재유는 올 것이 왔다는 마음으로 한교를 떠났다.

 

양군왕은 탈출 경로를 묻는 황제에게, 요새의 간수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제국군의 군영 안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래서 자신은 제국군이 드디어 요새로 부수고 들어온 것인 줄 알았으나 듣자하니 혈혈단신으로 자신을 구출한 용자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황제는 양군왕이 묘사한 모습을 토대로 한교에서 군사를 수소문했고, 그렇게 궁궐로 불려가게 된 재유에게는 양군왕이 떠넘긴, 모든 해명의 책임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재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수로와 저수조의 존재, 요새의 규모, 그 안을 편하게 돌아다니던 군왕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재유가 입을 다문 것은 그를 신고하거나 죽이지 않고 양군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소녀와 노인에 대한 최소한의 신의였다. 이러한 신의의 행사를 자신에게 떠넘기다니. 양군왕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궁궐을 나서며, 오늘 받은 터무니없는 특진도 어처구니없는 혼인 명령도 사실은 상이 아니라 황제의 앞에서 입을 다물어 받게 된 벌이 아닐까 생각했다. 궁에서 붙여준 병사가 재유를 새집으로 데려다주었다. 금군별장을 위해 새로이 단장한 가옥이라고 했다. 남색 기와와 흰 조개 가루를 바른 외벽이 아름다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한교에 있는 살림살이 중 가져올 만한 것도 없었지만 애당초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장군부에는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었다. 집안에서 재유가 가장 꾀죄죄하고 볼품없었다. 명귀비는 재유에게 자기 자신의 분수를 생각하라고 했다. 그것은 이만한 호사까지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까?

“그럼 진 장군,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생활을 거들 하인들은 내일 새벽에 도착할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오늘 밤은 참아주십시오.”

병사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억울하게 곤형에 처해진 김 태감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재유가 입을 열기 전에 병사는 떠나갔다. 재유는 드넓은 가옥에 혼자 남겨졌다. 내일은 재유와 명귀비의 조카딸 성씨에게 서로 혼인하라는 성지가 내려올 것이라고 했다.


 

04

좋은 점도 있었다. 재유는 살면서 이 정도의 대접을 받아본 적 없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세숫물과 따뜻한 목욕물이 준비되었고 세 끼 식사는 고슬고슬하니 먹음직했다. 옷을 다리고 개켜주는 사람과 고르고 입혀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청소와 경비, 정원 손질은 물론이고 재유가 아직 수도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궁에서 수시로 태감을 보내오는 바람에 심심할 새가 없었다.

재유는 잡일거리 정도나 시킬 만한 어린애 두 명을 포함해 스무 명의 하인을 얻었다. 재유 혼자 사는 집을 가다듬고 그의 생활을 보필하기 위한 사람의 수라고 하기에는 많았으나 귀비의 조카 성씨와 혼인하면 그가 데려오는 하인은 배로 많을 것이라고 했다. 귀비의 친정은 대단한 부호였다. 지금 황제의 조모가 성씨 집안 출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형제 중 유일한 남자였던 큰 오라비를 일찍 여의고 귀비가 집안의 흥망성쇠를 결정할 하나뿐인 열쇠가 되면서, 가세는 내명부에서 귀비가 어느 위치에 앉느냐에 따라 가파르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한 형편이기에 귀비가 해를 거듭할수록 표독스러워진다는 것이 재유가 궁을 드나들며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귀비의 친정인 성씨 댁은 입궁하고 출궁할 때 겉으로 한 번씩 보는 것이 전부였다. 재유가 받은 가옥에서 외궁으로 가는 길 중간에 놓여 있었는데, 요즈음 내명부에서의 명귀비의 기세를 반영하듯 처마 끝에 금장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신부의 복을 기원하는 수도의 문화라고 했다. 외벽은 회색 조가 조금 섞여 재유의 집보다 차가운 흰빛이었다. 그래서 재유는 저 안에 사는 사람들이 집의 외벽을, 그리고 명귀비를 닮아 차갑고 무시무시한 성품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 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은 딱 한 번 보았다. 황제를 알현하고 이틀인가 사흘이 지나서였다. 그 전날 성지가 내려왔다. 냉골 같은 집에서 나온 그 사람은 귀비를 닮아 키가 아주 컸다.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지만, 절벽 같은 뒤통수와 빳빳한 어깨만 보아도 귀비를 얼마나 빼닮는지 알 수 있었다.

명귀비에게는 먼저 간 오라비와 불도에 귀의한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요절한 형제는 귀비에게 두 조카를 남겼다. 그중 하나가 재유와 결혼할 신부였으니 뒷모습만 보인 그 남자는 신부의 오빠이자 귀비의 첫째 조카가 될 것이다.

똑바로 보면 어떤 얼굴일까? 명귀비를 얼마나 닮았을까? 귀비를 닮았다면 그 역시 깊고 고압적인 눈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귀비가 웃으면 어떻게 보일지 무심코 궁금해한 것처럼 재유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가 어떤 모양새로 웃을 것인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궁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재유는 쿵쿵 소리에 습관적으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뒤치다꺼리를 해준 적 없는 삶을 오래 살아서 몸에 익은 바였다. 자리를 뜬 재유는 문간에 서서 하인이 대문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금방 문을 닫지 않고 거기 서서 말을 나누는 게, 누가 장난삼아 문을 두드리고 떠난 것은 아니고 때아닌 손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반갑거나 꼭 맞아야 할 손님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손님을 맞을 시간이 아니어서 노련한 하인이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거나. 잠이 다 깬 마당이었고 불청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재유는 신발을 신고 대문으로 내려갔다.

문밖에 선 남자는 키가 커서 하인의 머리 꼭대기 위로 얼굴이 동동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을 받아 얼굴이 허옜고, 눈 아래로는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화가 난 듯 미간이 모여 있는 것을 빼면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재유는 직감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명귀비의 첫째 조카이자 자신이 맞이할 신부의 오라비인 성씨 집안 장손이었다. 사람들은 관직에 있지 않은 그를 성 공자라고 불렀다.

그가 하인의 머리통 너머로 재유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재유는 무언가 잘못되었고, 잘못되었음을 그가 알리기 위해 왔으며, 앞으로 더욱 잘못된 방향으로 뒤틀려 갈 것을 직감했다. 병사의 육감이었다.

그리고 성 공자가 자신을 찾아온 것은 재유가 그 뒤틀린 운명에 연루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포 아래에서 명귀비를 만난 순간부터 불길함의 기운은 재유의 뒤를 끈적하게 따라다녔다. 재유는 준수를 안으로 들였다. 기왕지사 자신이 연루된 것이라면 성 공자를 피한다고 하여 될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다는 직감은, 성 공자가 밤늦게 경우 없이 자신을 찾아온 것에서 다시 한번 그 신뢰성이 입증되었다.

“공자님과 담소나 나눌라니까… 마루에 술상 함 봐주세요.”

하인을 대하는 재유의 태도는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어설펐다. 성 공자라고 불리는 남자는 자신을 막아섰던 하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금방 잊어버리는 성미 같았다. 고개를 홱 돌리고 재유를 따라갔다. 대청은 오가는 사람이 적어 잘 닦아놓은 바닥이 반짝반짝하고 윤이 났다. 재유는 어색하게 앉았다.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성씨 가의 준수입니다. 성 공자라고 부르면 됩니다. 원래대로라면 내 동생과의 혼인 후 그쪽의 형님이 될 사람입니다.”

그는 술상이 나오기도 전에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쪽이 혼사를 물러주길 바랍니다.”

간절하고 냉랭한 눈으로 그가 말했다.

 

재유는 생각해보았다. 성 공자가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이유는 많았다. 재유는 가진 것 없는 군졸이었다. 직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루아침에 치솟았다고 하여 그의 평범한 배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고, 시작부터 황제의 총애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지금은 번듯해 보일지언정 그 총애가 식으면 언제 다시 잡직의 자리에 처박힐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재유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했다. 따뜻한 목욕물, 고슬고슬한 쌀밥, 시중드는 손길 같은 것들. 재유 본인마저 이렇게 느끼는데 하나뿐인 여동생을 이런 작자에게 시집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자신이 성 공자였다 해도 마뜩잖게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 공자가 혼인을 명령한 사람에게 달려갈 수는 없다. 성 공자는 관직에 있지 않으니 황제를 대면하기는커녕 입궁할 기회조차 잡기 어려울 것이다. 황제를 만난다 하여 이미 내린 성지를 거두어달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가 당신이 고르신 신랑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것도 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재유는 그의 입장이 십분 이해되었다.

하지만 재유라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바람직한 배경의 성 공자도 하지 못 할 짓을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꼴이었다. 이쪽에서 혼사를 물러달라니. 황명을 거절하라고? 재유에게 있어 귀비의 조카딸 성씨와의 결혼은 명령이기 이전에 황제가 내린 특혜였다. 어떤 명분을 들어서도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 것을 성 공자가 저리 쉽게 들먹일 수는 없는 법이다. 머리가 아파 온다.

“대체…….”

성 공자는 자신의 요청이 거절당할 것은 예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단호한 얼굴을 했다. 여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까. 내가 얼마나 성에 차지 않는 신랑감이면 내 앞에서 저런 얼굴을 하는가. 절로 한숨이 났다.

“그게 내를 보자마자 할 소리라고요?”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 공자처럼 반듯하게 차려입은 귀공자를 눈앞에 두니,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되새기고 있자니 지적하고 싶어졌다. 피로감을 그에게 짜증으로 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유가 석연찮게 반응하자 그도 입매를 굳혔다.

“무를 일 없습니다.”

“아니, 일단 얘기를 좀 더….”

“무를 일 없다니까. 그쪽 마마님도 내 보고 공주마마랑 결혼을 말라는 둥, 죽을 거라는 둥……. 내 결혼에 왜들 그래 관심이 많은데요?”

재유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 공자는 재유가 알려주려고 하지 않은 무언가, 혹은 재유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깨달은 듯 검은 눈동자를 사납게 빛냈다. 그가 물었다.

“황후의 딸과 혼담이 있었나 봐?”

은근슬쩍 하대를 하는 것은 그의 고귀한 태생 탓이었을까. 재유가 자신의 배경으로 인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겨버린 탓이 더 컸을까. 황후의 딸과의 혼담이 곧 공주와의 혼담이었다. 명귀비도 성 공자도 공주를 황후의 딸이라고 일컫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명귀비는 공주가 재유에게 과분하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는 것이 자신의 조카딸이라는 건 다시 생각해보아도 이해하지 못할 짓이었다.

혼담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니 재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재유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단서였다. 명귀비의 조카이니 재유가 귀비를 만난 것은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술상이 나왔다. 성 공자는 그것에 손도 대지 않고 일어났다. 재유는 거기 앉아 성 공자가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이고 뭐고, 니가 먼저 내한테 말 깐 기다.”

그러자 성 공자가 재유를 돌아보았다. 비로소 다시 보게 된 그는 승리를 향해 달리는 경주마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한밤중의 대담에서 누구도 지지 않았으나 그는 혼자 이긴 듯했다. 이유를 재유는 알 수 없었다.

“형님 소리도 둘이 결혼을 해야 하든 말든 하는 거지.”

성 공자가 돌아서서 떠나갔다. 간절하였으나 초라하게 보이지 않던 그의 모습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05

재유는 종종 성 공자를 만났다. 세간에서는 영웅이 된 장군과 귀비 댁 고명 아가씨의 혼사가 화제였고, 둘은 그 결혼의 혼주였다. 준비할 것이 가득했다. 재유는 금군의 일을 인계받아 따라가는 것에만도 급급하였으니 결혼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일이 성 공자의 몫이 되었고, 그는 독단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에 재주가 있었으나, 그러다가도 의논할 것이 있으면 재유의 집으로 찾아왔다. 혹은 처음부터 날을 잡아 함께 나가기도 했다.

혼인을 물러달라고 청했던 사람이라기에 성 공자는 놀라우리만치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유한 매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재유는 그것을 지조라고 표현하고 싶었다.

그날 두 사람은 마사에 나갔다.

예물로 말을 해온다는 것은 특이하지만 재유가 거절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재유는 본래 기마 부대였고 말을 잘 탔다. 놀이로 말을 타는 것도 좋아했다. 별장으로 승진하였으니 품위에 걸맞은 말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재유와 결혼할 성씨도 동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말을 타는 법은 아직 모르지만, 그런 것은 차차 배워나가면 된다고 성 공자가 말했다.

“내가 가르치면 되제. 내 한교에서 말 태워준 아가 한둘이 아이다.”

그렇게 말하자 성 공자가 피식 웃었다.

“됐고 말이나 골라. 비루먹은 놈 말고 튼튼하고 잘 달리는 녀석으로.”

그즈음 재유는 성 공자에게 말을 편히 했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자기가 먼저 그런가 봐, 아닌가 봐,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성 공자, 재유가 부르기로 준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재유가 처음 준수라고 불렀을 때 짧은 시선을 던진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부르고 있자니 친구라도 된 듯했다. 혼사를 물러달라고 청하던 준수는 이제 그 혼사 준비에 열심이었다. 적개심을 가질 법한 사연이 사라지자 재유는 정말 그가 친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재유는 고심하고 또 고심하여 준마 세 마리를 골랐다. 갈색 털이 반지르르한 두 마리는 각각 온순하고 차분한 녀석과 야성미가 남아 있는 녀석이었다. 마지막 하나의 선택지로 발랄하고 애교 많은 성격의 흑마를 고르고 재유는 돈 낼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 중에서 둘을 산다면 누구라도 만족할 것이다. 재유는 자부할 수 있었다. 마사는 수준이 높았고 재유는 말을 보는 안목에 자신이 있었다.

“임마는 아가씨가 바로 타기 좋고, 임마는 길들이기 쪼매 힘들기는 하겠다. 글도 마 별일 있겠나. 까만색 점마는…….”

신나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준수는 그것을 다 들어주었다.

“눈이 아주 높으시네요. 이 몸도 도움을 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낯선 얼굴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재유에게야 수도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새로운 만남이겠으나 준수는 그렇지 않은 듯,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재유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처음 재유를 찾아왔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굳은 입매. 비뚤어진 눈썹.

머리를 틀어 올린 남자는 준수 못지않게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기로 그는 위치도 입장도 복잡한 사람이었다. 조정에서 판서判書를 지내고 있는 황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삼남이 금지옥엽으로 자라 상당한 망나니였고, 그를 따르는 시종 또한 주인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종이라는 이씨가 지금 두 사람의 눈앞에 있었다. 그가 훤칠하게 웃었다.

“제 주인께서 내년 사냥대회를 위해 새 말을 들이고 싶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저는 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어서요.”

이씨는 재유가 고른 세 마리를 다 사갈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준수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하는 낌새였으므로 재유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야 그렇네요. 그럼 저희가 고르고 남는 아라도 데려가시죠.”

이씨가 다시 활짝 웃었다. 준수는 마사의 관리인에게 시승에 관해 묻고 있었다.

“이것들 타봐도 되는 건가?”

관리인은 흔쾌히 그러라 했다. 세 사람의 옷차림을 훑어보던 노골적인 눈빛으로 보아 준수와 이씨가 누구인지 알거나, 알 만하여 허락하였을 것이다. 그는 아예 훈련장 전체를 돌아보고 와도 좋다고까지 했다. 준수와 이씨가 거들어 그러라 했고, 재유는 이를 거절할 위인이 아니었다.

재유는 말을 좋아했다. 수도에 와서는 말을 탈 기회가 없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안장에 올라타자 첫 번째 말이 푸르릉 콧소리를 내고 걸었다. 마사의 훈련장을 돌다가 그것은 돌연 달리기 시작했다.

가뿐한 발 구름이다. 말은 순식간에 속도를 냈다. 바람이 얼굴로 쏟아졌다. 바람에 말똥 냄새와 볏짚 냄새, 수도의 낯선 향취, 한교에서는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새로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다채로운 바람을 맞으며 재유는 세 마리의 말을 모두 한 번씩 달려 보았다.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수도에 온 이래 거의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시승한 검은 말에서 내리며 재유는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야는 애 밴 것 같다.”

확신은 아니라지만, 말의 걸음걸이나 달릴 때 등허리 위로 느껴지는 진동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준수가 관리인을 불렀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관리인이 말을 검진하는 시간을 지나 그것의 임신이 확실시되자 준수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셋 중 둘로 좁혀졌다. 새끼를 밴 말을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애초 두 마리를 살 작정이었으니 처음 보았던 갈색 말 두 마리가 적격이었다.

문제는 이를 지켜보는 이씨였다. 재유가 고른 세 마리 말 중에서 남은 하나를 사겠다고 하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임신한 흑마를 데려가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관리인은 진땀을 흘리며 말의 가격을 높여 불렀다. 새끼를 밴 말을 팔고 싶은 장사꾼도 없으려니와 판다 한들 한 마리 값에 넘기고 싶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본래 값에 2할을 더 얹는 것 이상으로는 줄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황 판서의 아들을 모시고 있으니 이씨가 돈이 모자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저것은 마사의 관리인을 곤란에 빠트리고 싶은 치졸한 심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얼굴 가죽은 생글생글 웃고 있으니 주인 못지않은 망나니라는 게 사실이었다. 재유는 딱하게 관리인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그는 형편없는 값에 새끼 밴 흑마를 황 판서 댁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내가 두 배로 치르고 사지.”

준수는 재유가 관리인의 편을 들까, 상황이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릴까 고민하던 중 이씨와 관리인 사이에 끼어들었다.

“성 공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은 제가 사기로 하였는데요.”

“돈 없다며?”

준수가 시건방지게 받아쳤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씨가 돈이 없다고 한 것은 아니었고, 관리인이 말하는 값을 다 치를 수는 없다고 유세를 부리던 것이었으나 그의 말투로 옮기니 그리 일축되었다. 이씨가 눈빛을 달리했다.

“공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제 주인과 황 대감을 모욕하시는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두 마리만 필요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이 몸이 주인을 모시는 것을 방해하시려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마사에 쳐와서 그런가, 말 한번 많네…. 애초에 이 녀석도 내 일행이 고른 거잖아. 두 마리를 사든 세 마리를 사든 빌어먹을 알 게 뭐야? 됐으니까 말 데려와.”

준수는 은전 주머니를 관리인에게 던지다시피 했다. 관리인으로서는 그것이 동아줄에 가까웠으리라. 주머니를 받은 관리인은 얼마가 들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서둘러 마구간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씨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섬뜩한 눈동자 때문에 재유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언젠가부터 준수가 걱정되었다.

“제 주인께서는 이 일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

수도의 물정과 조정이 돌아가는 꼴을 알지 못하는 재유에게 그것은 공허하고 황당한 대사에 불과한 듯 느껴졌으나 준수는 코웃음을 치지도 대꾸를 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관리인이 말 세 마리를 가져오기를 기다리다가 잔금을 받고 몸종들과 함께 말을 끌어 성씨 댁으로 돌아갔다.

 

재유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상황을, 혹은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날도 재유는 성씨 댁을 지나 궁으로 들어갔다. 금군서禁軍署는 황제의 금평전과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금군별장 진재유를 불러들였다. 재유가 금평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조회 의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파란 옷을 입은, 나이가 지긋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관리들 사이로 재유가 나아갔다. 황제가 단상 위에 앉아 있었고 그 앞으로 머리가 센 노인이 엎드려 있었다. 재유는 몇 걸음 뒤에 섰다. 엉거주춤하게 무릎을 꿇자 황제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별장, 황 판서의 말을 들어보고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다오.”

노인은 세 아들을 두었다는 황 판서였다. 그때까지 재유는 그와 그의 아들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재유가 아는 것이라면 마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준수가 나지막하게 욕을 지껄였으며 그럴 만큼 준수와 황씨 삼남의 사이가 좋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였다. 개 같은 거, 확 족쳐버릴 수도 없고. 제 애비를 닮아서 하는 일마다 지랄이야. 준수는 도련님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것을 듣고 재유는 놀라기보다 어지간히도 황 판서의 아들을 싫어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난날 소인의 삼남 영주가 말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 아들의 아버지인 황 판서가 입을 열었다. 늙은이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제왕을 향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들의 억울함 때문인지, 그중 하나를 연기하는 것인지 재유는 구분할 수 없었다.

“봄에 있을 사냥대회를 위해서였지요. 폐하께서 매년 봄이면 대회를 여시잖습니까. 영주는 폐하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하여 이름난 마사에 시종을 보내 말을 구해오라 시켰습니다. 그곳은 황실에 납품을 해왔을 만큼 말의 품질이 우수하다고 하니 아이의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헌데 그곳에서…….”

“한데 그곳에서 그대와 함께 있는 명귀비의 조카를 만났다고 하더구나. 이것이 사실인가, 진 별장?”

황제가 황 판서의 말을 자르며 물어왔다.

조금씩 그림이 맞춰졌다. 재유는 준수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준수는 이씨를 건방지게 대했다. 적당한 말을 구하지 못하고 모욕까지 당한 이씨는 황 판서의 저택으로 돌아가 자신의 주인에게 미주알고주알 사정을 털어놓았을 것이고 삼남은 이것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것이다. 과연 보석과도 같은 막내아들이라 하나, 마사에서의 다툼을 고자질하였기로서니 그것을 황제의 앞에서 성토하며 재유까지 끌어들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다행이자 불행인 점은 준수가 평상시 입궁할 명분이 없어 그날의 조례에 출두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책임이 재유의 어깨에 있었다.

“진위를 알고자 함이니 진 별장은 기탄없이 고하라.”

그리고 황제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친절한 목소리와 말투로 사람의 긴장을 녹이는 재주가 있었다. 재유는 볼의 안쪽 살을 씹으며 튀어나오려고 하는 많은 말을 참았다.

“폐하, 명귀비의 그늘이 아니라면 성씨가 어찌 그리 방자하게 행동하며 황실과 소인의 집안을 욕보이겠습니까. 귀비를 엄히 벌하여 기강을 바로 세우시고 성씨에게 교훈을 내리소서.”

그제야 재유는 완전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마사에서의 충돌이 어떤 식으로 부풀려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 공자를 거론하는 이유는 결국 그의 친족인 귀비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느린 깨달음 후 재유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재유에게는 마치 말을 고를 때처럼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황 판서의 편을 드는 것이다. 준수가 마사에서 이씨에게 정중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황 판서는 준수가 아닌 명귀비를 벌하라고 하였으니 그의 편을 든다고 한들 준수가 직접 피해를 보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황 판서라는 자에게 잘 보여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아니, 사실 재유에게는 황 판서와 같은 뒷배의 존재가 절실했다. 중앙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이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유는 그러한 꿈을 꾸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선택지는 이 자리에서 준수의 편을 들어 명귀비와 미래의 처가를 돕고 황 판서와 척을 지는 것이다. 재유는 이유와 근거를 오래 고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성이 그에게 경종을 울렸다. 지금 준수의 편을 들면 언젠가 후회할 것이다.

“마사에서는… 황 공자의 시종이라카는 자가 먼저 불손했습니다.”

황 판서는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긴 턱 너머로 그가 보내오는 서슬퍼런 시선이 재유의 정수리에 닿았다. 시종 이씨가 노려보던 것과는 달랐다. 재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씨 앞에서의 마사 관리인처럼 진땀이 흘렀다.

“명귀비 마마를 헐뜯고, 관리인한테 시비를 걸어가……. 성 공자가 중재를 한 긴데, 얘기가 와전된 거 같습니다.”

언젠가 후회할 것이다. 말을 마쳤을 때 재유의 입안은 바싹 말라 있었다. 황제는 그 이상의 하문 없이 재유를 돌려보냈고,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명귀비와 성 공자를 위로하기 위해 하사품을 내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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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세한 바닷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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