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

2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 발렌타인데이 AU 짧은 글

학교 근처의 편의점에 한 달 전부터 한참 발렌타인 데이니 뭐니 홍보물이 붙어있더니 기어이 2월 14일이 되자 교복 입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양손에 든 쇼핑백 한가득 초콜릿을 들고 등교하는 학생부터 별로 관심 없다는 듯 휴대폰을 보며 교문을 통과하는 학생까지 다양하게 등굣길을 채운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페달에서 발을 떼어낸 미원은 자전거 핸들을 틀어 비교적 인적 드문 곳에 자전거를 주차한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일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라 자전거에 잠금쇠를 거는 데에 약간의 버벅거림이 있었다. 괜히 타고 왔나? 짧다면 짧을 그 사이에 씔 먼지 걱정에 유난스럽게 미리 챙겨 온 커버까지 꺼내 덮어야 자리를 뜬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등교해 일찍 도착한 탓인지, 아니면 지루한 일상에 특별한 이벤트를 즐길 수 있는 날이라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학교 전체의 분위기가 들떠있었다.

원래 같으면 크게 의미 있는 날이 아니었을 테니 휴대폰이나 보던 그 학생처럼 그냥 넘어갔을 날이었다.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사는 학생들을 지켜보지도 않았을 거고, 손을 잡고 걷는 학생들을 멍하니 지켜볼 일도 없을 거고, 빨리 도착한다고 가방 속에 든 상자를 바로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순서라도 빼앗길까 급한 마음에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지도 않았을 거다.

‘초콜릿 안 망가졌겠지. 천천히 밟았는데….’

자전거에서 내리고 나자 그제야 가방 속에 있는 작은 상자가 괜히 신경 쓰였다. 이런 걸 들고 등교해 본 적이 있었어야지.


“ 이 피스타치오 어디서 구한 거야? ”

“ 아빠 아는 분이 선물해 주신 거야.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 ”

“ 됐어. ”

여전히 주변에서 눈꼴 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애틋한 사이를 유지 중인 부모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며칠 전부터 초콜릿을 만들 재료들을 공수하기에 바빴던 모습을 떠올린다. 시판은 쳐다보지도 않고 초콜릿부터 직접 만들겠다며 열심히 팔을 걷고 쇼콜라티에에 빙의한 아버지가 유난스럽게만 보여 초콜릿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말을 하기에는 미원도 재료의 품질에 따라 맛이 섬세하게 달라진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미원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버지 곁을 서성이며 부지런히 주변을 청소하는 것 뿐이었다.

그런 미원을 수상한 눈초리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야 평소라면 남으면 내 거.하고 가벼운 한 마디를 던지고 떠났을 미원이 주변을 서성이며 이건 어디서 난 재료인지, 이건 어디에 쓰는 재료인지 꼬치꼬치 캐묻는 부분에서부터.

“아들. 좋아하는 애라도 있어?”

미원의 아버지, 설운이 고개를 초콜릿에 고정한 채 물었다. 아들이 주변에서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며 -본인의 부인이 치켜세운 영향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항상 채우고 다니던 왼손 약지 반지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지도 좀 되었다. 다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보이진 않아 가만히 지켜보려 했더니 이런 쪽이었던 걸까.

미원은 대답을 망설인다. 그야 아버지 성격에 본인을 놀려먹을 사람은 아니란 걸 알지만, 다른 의미로 호들갑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미원의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지만 때론 지나치게 이상적인 부모라, 이런 이벤트가 생기면 여러모로 본인을 지나치게 신경쓸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앞선 몇 번의 어린 연애를 해보면서도 단 한 번도 좋아하는 애가 있다던가, 만나는 친구가 있다던가 얘기를 꺼낸 적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걔도 나 좋아해.”

19년 키운 아들의 처음 듣는 대답에 설운의 손에 들려있던 스패츌러가 균형을 잃고 손에서 멀어진다. 미원이 반사신경으로 잡아내지 않았다면 바닥에서 호를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을 것이다.

“아빠도 아는 애야. 종종 집에도 데려왔어.”

“…진짜? 누구.”

야구부 매니저라던 그 여자애? 아니면 저번에 같이 놀러간다고 하던 친구들 중 하나인가? 제 아들이지만 지나치게 발이 넓어 짐작가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아들이 콕 집어 마음에 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궁금한 마음이 우선이었다.

“표이수.”


그래. 부드럽고 따스한 햇살도 서늘하게 만들어버리는 옆 반의 한 남자애. 너는 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시종일관 남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굴면서도 나에게는 꼭 예외의 자리를 둔다.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고, 네가 내게 그러하듯 너에게만 태도를 달리한다.

입 밖으로 단 한 번도 내뱉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인지하고 있는 암묵적인 룰.


사실 원래 초콜릿 같은 거 챙기지 않으려고 했다.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그 녀석이 단 걸 그렇게 좋아할 것처럼 생기지도 않았으니까. 입가심 용도로 몇 개 집어먹기야 하겠지만, 가볍게 시판용을 던져주기엔 본인 못지않게 입맛이 더럽게 까다로우시다. 이런 퉁명스러운 마음에 변화를 불러온 건… 그래, 발렌타인 전 날. 쉴 새 없이 늘어가는 미원의 채팅창 목록에서 찾아낼 수 있다.

알고 보면 크게 모나진 않은 성격, 얼굴을 트면 꽤 살가워지는 태도에 다들 미원을 쉽게 대했다. 스크롤을 내려가며 하나하나 메세지를 확인한다. 장난스럽게 보낸 기프티콘, 단체방에 돌려지는 선물, 야구부 후배의 존경심 -혹은 혼난 것에 대한 반성- 을 담은 선물. 또 종종 용기를 꾹꾹 눌러 담았을지도 모르는 긴장이 느껴지는 메세지까지. 하지만 미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어떤 메세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표이수가 보낸 메세지냐고?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나았을 거다.

미원과 표이수가 절친한 관계라는 것 정도는 교내에 파다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둘이 누구인가? 전체적으로 시니컬한 분위기, 어디 가서 남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들었지 제 속내를 누구에게도 쉬이 내뱉지 않는 두 사람 덕에…


[ 안녕! ] 오후 8:54
[ 나 알지? 이수네 반ㅋㅋ ] 오후 8:54
[ 처음부터 이런 질문해서 진짜 미안한데.. ] 오후 8:56
[ 혹시 이수 여자친구 있어?ㅜㅜ ] 오후 9:01

이딴 문자까지 받는 지경에 온 것이겠지.

얘 뭐지? 미원은 처음 느껴보는 불안을 느낀다. 공교롭게도 미원은 눈치가 빨랐다. XX. 이거 고백하려고 주변에 물어보는 거잖아. 솔직히 표이수가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받아도 받아줄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 성격에 귀찮아하면 몰라. 그래, 이건 표이수를 빼앗길까봐 드는 불안감은 아니었다. 그럼 뭐지? 얹짢아진 얼굴로 답을 고민한다.

고민하는 사이에 별별 의문이 다 떠오르기 시작한다. 얜 표이수를 모르나? 표이수를 좋아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 텐데. 한때 대기업 막내 아들이라는 유명세와 화려한 외모 때문에 고백 행렬이 끊이지 않자, 진심이 깃든 편지들을 싹 다 무참히 버려버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는 걸. 그런데도 이딴 질문을 나한테 한다고? 좋아하면 주변 좀 살펴. 누가봐도 내가 옆에-


[ 걔 좋아하는 애 있어. ] 오후 9:13

그래, 잘 끊어냈다. 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는 멘트였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야구 영상이나 볼까 하고 유튜브를 틀면, 채팅방 알림을 꺼놓았는데도 또 처음 대화하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며 팝업이 뜬다. … … 그렇게 미원은 발렌타인 전 날 밤 열 통가량의 고백 도움 요청 메세지를 보고 열이 뻗쳐 제대로 잠도 못 잤다는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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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3


  • 고민하는 햄스터

    최고의발렌타인데이

  • 고민하는 햄스터

    너무맛잇어요

  • 고민하는 햄스터

    최고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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